All Chapters of 8년의 짝사랑을 폐기 처분합니다: Chapter 31 - Chapter 40

100 Chapters

제31화

‘이혼... 이혼하자!’구태윤이 쥐고 있던 얼음을 세게 움켜쥐었다. 오래 쥐고 있던 탓에 얼음이 녹아 손가락 사이로 물이 흘러내렸다.그는 그윽한 눈빛으로 정루아를 바라봤다.“우리 지금까지 괜찮았잖아. 이런 일 한두 번도 아니었고.”“이제 더는 참아줄 수가 없어. 그러고 싶지 않아!”정루아가 물러서지 않고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난 충분히 알아듣게 말했을 텐데? 이젠 당신이 필요 없어졌어.”구태윤의 눈꼬리가 붉어지고 호흡이 거칠어졌다.“무려 8년이야. 이렇게 쉽게 끝내겠다고?”“하...”정루아가 헛웃음을 흘렸다.“나한테는 그 8년이... 웃음거리나 다름없어.”정루아가 한 걸음 다가섰다.“왜 그런지 알아?”구태윤의 가슴이 먹먹하게 조여 왔다. 다만 미간은 더욱 깊게 구겨졌다. 익숙해야 할 그녀의 얼굴이 낯설게만 느껴졌다.“우리가 함께한 8년이... 하준이 울음 한 번, 정시연이 다급하게 걸어온 전화 한 통이면 밀려나는 거였더라.”정루아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의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지려는 듯했다.“당신도 알잖아. 난 절대 용납 못 해.”정루아의 손바닥 안에서 녹고 있던 얼음이 부서졌다.구태윤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다 네 착각이야. 우리 사이에 불청객 같은 존재는 없었어.”그는 그대로 돌아서 정씨 가문 저택을 나섰다.끝까지 이혼에는 동의하지 않았다.정루아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대체 어떻게 해야 알아들을까. 계속 이대로 사는 건 서로를 괴롭게만 할 뿐인데.’하늘이 조금씩 어두워졌다.정루아는 네모난 창틀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봤다. 별빛이 하나둘 떠오르는 동안 뱃속은 텅 비어갔다.문이 다시 열리고 임혜숙이 들어왔다. 눈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루아야, 배고프지?”정루아는 눈을 깜빡이다가 천천히 임혜숙에게 눈길을 돌렸다.“이번에도 잘못했다고 인정해야 밥 주실 건가요?”임혜숙이 그녀의 팔을 '탁' 치며 말했다.“왜 이렇게 고집이 세니? 왜 가만히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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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장유성이 급히 고개를 저으며 ‘퉤퉤퉤’ 하고 입을 털었다.“이제 구씨 가문에는 너 하나뿐이야. 게다가 네 목숨도 루아 씨가 겨우 살려낸 거잖아.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루아 씨가 가만있겠어?”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자가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구태윤은 코웃음을 쳤다. 반쯤 접힌 눈매가 어둠 속에서 유난히 선명했다. 시선을 떼기 어려운 얼굴이었다.“정루아가 나를 걱정해? 그럴 리 없지. 나를 이해하려 한 적도 없을걸? 이혼까지 하자고 하더라.”장유성은 할 말을 잃었다.한편, 구태윤은 여전히 잔을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하고 있었다.“하준이 그냥 본가로 보내는 건 어때? 구씨 가문 본가에 두고, 시연 씨한테 너무 자주 드나들지 말라고 부탁하는 건 어때?”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태윤이 인상을 찌푸렸다.“하준이는 아빠를 잃었어. 엄마까지 떼어 놓으라고? 너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해!”장유성이 얼굴을 찌푸렸다.“아니, 너랑 루아 씨를 생각해서 꺼낸 얘기지.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 거야? 설마 진짜로 루아 씨랑 이혼할 거야?”구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잔에 남은 술을 한 번에 털어 넣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외투를 움켜쥔 채 말없이 룸을 나섰다....정루아는 추위를 느꼈다.희미하게 잠에서 깼을 때도 여전히 정씨 가문 저택 안이었다. 깊어져 가는 늦가을 밤공기가 더 차게 스며들었다. 코끝이 시큰해졌고 두통까지 밀려왔다.그때, 정루아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움찔하며 급히 고개를 돌렸다.맞은편 바닥에 구태윤이 앉아 있었다. 언제 들어온 건지 알 수 없었다.구태윤은 한쪽 무릎을 세우고 기대앉아, 그 위에 팔을 얹은 채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아, 깜짝이야! 놀랐잖아!”정루아는 그를 흘겨보고는 몸을 일으켜 무릎을 끌어안았다.다음 순간, 가만히 있던 구태윤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바로 옆에 앉더니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았다.“구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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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정루아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몸부림치듯 그를 밀어냈다.“꺼져. 당장 꺼지라고!”‘취한 와중에도 하준이를 챙기고 정시연은 만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이... 감히 사랑을 입에 올려? 자격은 있고?’정루아의 반응은 거칠었다.있는 힘껏 밀치자, 구태윤이 뒤로 휘청이다가 등이 벽에 세게 스쳤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다시 벌어지며 화끈하게 타들어 갔다.“윽!”구태윤이 낮게 신음하며 바닥으로 쓰러졌다.정루아는 거칠게 숨을 들이쉬며 그를 내려다봤다.“당신은 진짜 최악이야!”구태윤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그녀를 올려다봤다.“루아야, 등... 아파...”“아프든 말든!”정루아는 이를 악물며 발끝으로 그를 세게 찼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온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문 쪽으로 걸어가 보니 문이 열려 있었다. 그녀는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나섰다.살을 베어내듯 차가운 공기였지만, 정루아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구태윤을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아파트로 돌아온 그녀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마쳤다.욕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휴대전화가 울렸고 화면에는 정석주의 이름이 떠 있었다.정루아는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은 뒤 전원을 꺼 버리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눈을 감았다.‘지금은 쉬어야 해. 그리고 다시 구태윤을 찾아가 이혼 이야기를 꺼낼 거야.’구태윤이 또다시 이혼 의사가 없다고 하면 박정란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구태윤의 부모님도 곧 돌아올 터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에는 끝을 낼 작정이었다.정루아는 깊게 잠들었다가 배가 고파 깨어났다.배달 음식을 주문해 두고 휴대전화를 켜자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한꺼번에 밀려왔다.그녀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숨을 고른 뒤,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그때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정루아는 손이 미끄러지며 실수로 통화 버튼을 눌러버렸다.“이 망할 것아! 이제야 전화 받아? 태윤이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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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

“정루아라고 부르네? 다정한 척 루아라더니? 보는 사람 없어서 연기 그만둔 거야?”정루아의 말끝에 날이 서 있었다. 노골적인 조롱이었다.정시연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연기한 적 없어. 네가 날 오해한 거야.”“오해?”정루아가 한 걸음씩 다가왔다. 또렷한 눈빛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한 번이라도 억울하게 몰아붙인 적 있었어?”정시연은 본능적으로 물러섰다. 눈빛에 경계와 계산이 스쳤다.‘목격자도 없는데, 이 자리에서 다치기라도 하면... 나만 손해야.’정시연은 잠깐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고개를 들며 말을 이었다.“혹시 태윤 씨가 나 보러 오는 게 그렇게 거슬려? 나도 곤란하다니까. 태윤 씨가 하준이를 많이 아끼는 거 알잖아. 하준이 보겠다고 오는 걸 내가 막을 수 있겠어?”“미친년!”옆에서 듣고 있던 이연희가 결국 참지 못하고 삿대질했다.“상간녀 주제에 착한 척까지 해? 너 같은 뻔뻔한 인간은 처음 본다. 오늘 잘 걸렸어. 매운맛 좀 보여줄게!”이연희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지만, 정루아가 재빨리 나서서 말렸다.“가만있어. 괜히 건드렸다가 태윤 씨가 너한테 뭐라 하면 곤란해질 수 있어.”이연희가 분을 못 이기고 씩씩거렸다.“그냥 보내?”정루아가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쟤 뜻대로만 안 해주면 돼.”그리고 담담하게 말을 이으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나 구태윤이랑 이혼할 거야. 셋이 함께 잘 살아. 그게 제일 깔끔하잖아. 가.”정시연은 입술을 가볍게 다물었다. 그리고 속내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정루아를 보며 말했다.“난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야. 왜 믿어 주지 않는 거니?”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정루아는 더는 대꾸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문이 닫히고 복도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잠시 서 있던 정시연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녹음 중지 버튼을 누른 뒤 눈을 굴리며 망설임 없이 손을 들어 올려 자기 뺨을 마구 후려쳤다.‘찰싹’ 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정시연은 붉게 부어오르는 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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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더빙 회사.정루아는 시연을 마친 뒤 안내를 받아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옆에 앉은 이연희가 괜히 더 부산을 떨었다.“야, 긴장하지 마. 무조건 붙어. 목소리도, 표현력도 진짜 안정적이었어. 밖에서 듣는데 울 뻔했다니까. 무조건 될 거야.”정루아가 이연희의 손을 꼭 잡아줬다.“그만해. 너 때문에 더 긴장되잖아. 그냥 차분히 결과 기다리자.”잠시 후, 프로젝트 책임자와 더빙 감독이 함께 들어왔다.더빙 감독이 먼저 말을 꺼냈다.“정루아 씨 맞으시죠?”정루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네, 맞습니다.”감독이 손짓했다.“앉으세요.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정루아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감독이 시연 자료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시연 잘 들었습니다. 디테일이 살아 있어서 좋았습니다. 다만... 비슷한 장르의 작업을 오래 쉬신 것 같더군요. 호흡과 발성에 보완이 필요해 보이더군요.”정루아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네. 사실 한동안 현장을 떠나 있었습니다.”프로젝트 책임자와 감독이 잠시 눈 마주쳤다.그리고 감독이 다시 말했다.“우선 돌아가서 기다려 주십시오. 큰 변수가 없다면 루아 씨와 계약을 진행하려 합니다. 음색이 여주인공 설정과 잘 맞습니다. 조금만 호흡을 맞추면 충분히 감을 되찾으실 겁니다.”정루아의 눈빛이 단번에 밝아졌다.“감사합니다, 감독님.”회사 밖으로 나오자, 이연희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봐라, 내가 뭐랬어. 다시 도전하기만 하면 넌 무조건 된다니까.”정루아가 웃으며 이연희의 어깨를 툭 쳤다.“고마워, 오늘은 내가 밥 살게.”“오, 진짜? 좋아.”몇 걸음 걷다 말고 이연희가 고개를 갸웃했다.“근데 너 돈은 있어?”정루아가 흠칫 멈춰 섰다.“...”지갑 안에 든 카드들은 이미 사용 정지된 상태였다.정루아의 굳은 표정을 본 이연희가 한숨을 내쉬었다.“여자도 결국 경제력을 가져야 해. 돈을 쥐고 있어야 선택권도 갖게 되는 거라고. 루아야, 이제 커리어부터 제대로 만들어보자. 통장에 네 이름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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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정루아는 천천히 손가락을 말아 주먹을 쥐었고 목소리가 갈라졌다.“누가 정시연으로 지정했는지... 알 수 있어?”이연희가 이를 악물었다.“그게 제일 열받는 부분이야. 내가 물어봤는데, 구 씨래. 네 그 쓰레기 같은 남편 아니겠어?”이연희는 분을 참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걔는 그 쓰레기 앞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도 모자라서, 왜 네 역할까지 넘보는 거냐고. 네가 하는 건 다 따라 하고, 네 자리면 무조건 차지하고 보려는 속셈이라니까. 네가 뭐 하든 먼저 가로챌 기세잖아. 네가 개똥을 먹어도 무슨 맛인지 먼저 맛보겠다고 달려들걸?”정루아가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그건 좀... 내가 왜 개똥을 먹어.”이연희가 손을 휘저었다.“비유잖아, 비유! 나 진짜 너무 열받아서 그래. 그날 네가 안 말렸으면 얼굴 들고 다닐 수 없을 만큼 두들겨 팼을 거야.”정루아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천천히 소파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이렇게까지 대놓고 내 심기를 건드릴 거면... 도대체 왜 이혼은 안 해주는 걸까.”이연희도 인상을 찌푸렸다.“그러게. 그렇게 걔 편을 들 거면 그냥 이혼하지. 정시연에게 명분 같은 건 줄 생각이 없는 건가?”말은 거칠었지만 방 안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새로 시작하려던 참이었다.그런데 곧 손에 잡힐 듯했던 배역이 사라졌다. 그것도 구태윤이 직접 그 자리에 정시연을 꽂아준 탓이었다.‘구태윤,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정루아가 벌떡 일어섰다.“나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이연희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어디 가려고?”“병원.”정루아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직접 물어봐야겠어.”눈가가 붉어졌지만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이연희가 재빨리 가방을 집었다.“나도 같이 가. 내가 대신 따귀라도 갈겨 줄게.”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이연희가 화면을 확인하고 받았다.“여보세요, 엄마. 무슨 일이에요?”통화를 이어가던 이연희의 표정이 달라졌다.“알겠어요. 지금 바로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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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정루아의 눈이 더 붉어졌다.“이거 놔!”구태윤이 이미 몸을 일으킨 상태였다.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 정루아를 노려보고 있었다.“그만 좀 해. 네가 진정하면 놓아줄 거야.”“하...”정루아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녀의 눈은 더 붉게 충혈돼 있었다.그녀는 힘을 줘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구태윤, 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 내가 어떻게 너 같은 인간을 사랑했지?”구태윤의 얼굴도 굳어 있었다.정루아는 들어오자마자 설명도 없이 몰아붙였고 그의 눈앞에서 정시연을 때리려 들었다. 그러더니 이제는 사랑을 후회한다는 말까지 내뱉고 있었다.그 말들이 그의 신경을 긁었다.“할 말 있으면 나한테 해. 왜 자꾸 애먼 사람한테 손부터 올려.”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정루아는 망설임 없이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쳤다.‘찰싹!’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병실 안에 울렸다.“태윤 씨!”정시연이 놀라 외치며 다가왔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 눈으로 정루아를 바라봤다.“루아야, 왜 태윤 씨를 때려? 태윤 씨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래?”정루아는 두 사람을 번갈아 쏘아보며 말했다.“너희 둘, 정말 역겨워.”그녀는 걸음 물러선 뒤, 숨을 고르듯 말을 이었다.“구태윤, 나 이혼 소송할 거야. 너 같은 사람이랑 부부로 묶여 있다는 게 진짜 끔찍해.”그녀는 거칠게 눈가를 훔쳤다. 그리고 등을 돌렸다.“정루아!”구태윤이 침대에서 내려왔다.그녀를 붙잡으려 몸을 앞으로 내밀었지만,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몸이 버텨 주지 못했다.발이 휘청이며 중심을 잃었고 정시연은 급히 그를 부축했다.“태윤 씨, 따라가지 마세요. 지금은 회복이 우선이에요. 제가 따라가서 루아한테 설명해 볼게요. 분명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구태윤은 머리를 짚었다. 시야가 순간적으로 흔들렸다.천천히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숨을 고른 뒤, 낮게 말했다.“형수님, 괜찮습니다. 가지 마세요.”정시연이 다급하게 말했다.“루아가 이혼 소송까지 하겠다고 하잖아요. 이대로 두면 어떡해요?”구태윤의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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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오래된 기억이었다.정루아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그 장면을 떠올렸다.대학 1학년 때, 정루아는 구태윤에게 다가가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편지 한 통을 썼다.그리고 구태윤의 기숙사 정보를 수소문한 뒤, 기숙사 건물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그때 허도준이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웃으며 다가왔다.“누구 찾냐?”정루아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쭈뼛대지 않고 바로 구태윤의 이름을 말했다.“태윤이? 내 룸메이트인데, 무슨 일로 태윤이를 찾는 거지?”뜻밖에도 구태윤의 룸메이트를 만난 정루아는 안색이 확 밝아졌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편지를 허도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전해 줄래?”허도준은 편지를 내려다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연애편지야?”“아니야...”속내를 들킨 정루아는 얼굴이 발그레해졌다.“아무튼 부탁해. 고마워!”말을 마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지난 기억을 되살린 정루아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너였구나. 진짜 오랜만이다. 뭐 하고 지냈어?”허도준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학부 졸업하기 직전에 가족들 권유 때문에 해외로 나가게 되었어. 할 일 끝내고 이제 돌아온 거지.”그러다 그는 정루아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창백한 낯빛과 충혈된 눈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왜 혼자 길에 서 있었어?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어디 아픈 거 아니야?”정루아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아무 일도 아니야.”허도준이 고개를 기울였다.“어디 가는 길이야? 데려다줄게. 이렇게 차도까지 나와 있으면 위험해.”정루아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괜찮아, 택시 타고 갈게. 걱정해 줘서 고마워...”정루아의 상태는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얼굴빛은 창백했고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다.허도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이 상태로 혼자 보내긴 좀 그래. 내가 데려다줄게. 나 태윤이 친구잖아. 너랑 태윤이 결혼까지 했으니 우리도 친한 친구 사이 아니야? 어서 타.”정루아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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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병실 안에는 소독약 냄새가 옅게 퍼져 있었다.허도준은 문을 밀고 들어가 침대에 엎드려 있는 구태윤을 보더니 다가가 어깨를 툭 쳤다.“야, 무슨 상황이야?”구태윤이 고개를 돌렸다. 뜻밖의 반가운 얼굴에 눈이 조금 커졌다.“너 귀국했었어?”허도준은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에 앉았다.“돌아오자마자 충격적인 일을 겪는구나. 정루아가 넋 빠진 얼굴로 차도에 서 있더라. 하마터면 내 차에 치일 뻔했어.”그 말에 구태윤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뭐라고? 그래서 쳤어?”“아니.”허도준은 그가 순간적으로 긴장한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봐. 이렇게 호들갑을 떨 거면서... 네가 형수님을 사랑하게 됐을 리가 없잖아. 정루아가 오해한 거겠지.”그 말을 듣는 순간, 구태윤의 창백한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이내 목울대가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루아가... 뭐라고 했어?”허도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차 안에서 나눈 대화를 간단히 전했다.구태윤은 눈을 감았다가 떴고 미간에 피로가 짙게 드리워졌다.“진짜로 이혼하겠다는 분위기더라. 제대로 좀 달래 봐. 너 때문에 저렇게 무기력한 거잖아.”구태윤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동성에서 루아의 의뢰를 받아줄 변호사는 없을 거야.”허도준이 눈살을 찌푸렸다.“뭐 하자는 거야? 정루아가 계속 고집부리면... 넌 더 세게 나가겠다는 거야? 여자 마음은 좀 달래 가면서 풀어줘야 하는 거야. 네가 안 굽히면 더 엇나갈지도 몰라.”허도준은 점점 진지해졌다.구태윤은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눌렀다.“나 지금 환자야. 훈계는 나중에 해.”허도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래, 쉬어. 일단 몸부터 챙겨.”병실을 나선 그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복도를 걸어 나오며 휴대전화를 꺼내 번호를 눌렀다.“정루아랑 구태윤 사이에 무슨 일 있었는지 알아봐.”통화를 끊은 뒤, 잠시 화면을 내려다봤다. 이내 창백한 얼굴로 차에 앉아 있던 정루아의 모습이 떠올랐다.허도준은 휴대전화를 꼭 쥐고 발걸음을 옮겼다....정루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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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정루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아주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직접 찾아가서 물어볼게요.”김선숙은 다급하게 말했다.“그래, 루아야. 우리가 잘못한 게 있으면 직접 말해 달라고 해 줘. 우리는 어떻게든 사죄드릴 거야. 제발 이렇게까지는 하지 말라고 말 좀 해줘...”통화를 끊은 정루아는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병실 문을 열었지만 그 안에는 구태윤이 없었다.정루아는 안으로 들어오는 간병인을 향해 차갑게 물었다.“구태윤 환자 어디 갔어요?”간병인은 그녀의 기세에 움찔하며 한 발 물러섰다.“저, 저는 잘 모릅니다...”정루아는 깊게 숨을 들이켜며 감정을 억누른 채 병실을 나섰다.몇 개 병실을 지나 박정란의 병실 앞에 섰을 때였다. 문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본 순간, 구태윤의 모습이 보였다.정시연과 구하준도 함께였다. 세 사람은 병상 곁에 둘러앉아 있었고 박정란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번져 있었다. 화목하고 평온한 풍경이었다.정루아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그녀는 통증을 느끼며 간신히 정신을 붙들었다. 동시에 이 장면은 그녀의 마음을 더 확고하게 만들었고 구태윤이 얼마나 별로인지를 절실하게 깨달았다.정루아는 문을 밀어 열었다.“구태윤, 잠깐 나와!”병실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지금 누구 앞이라고 그따위로 버르장머리 없이 굴어!”박정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너처럼 철없는 며느리가 어디 있냐! 내가 병원에서 지낸 지가 며칠째인데, 얼굴을 한 번을 안 비췄지? 태윤이가 쓰러졌을 때도 옆에서 제대로 간호한 적 없다며?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야! 제 정신이야?”정루아는 두 팔을 가슴 앞에 얹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맞아요. 저 미쳤어요. 그래서요? 어쩌시려고요.”“이... 이게 어디서 말대꾸를!”박정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그때 구태윤이 다가와 정루아의 어깨를 붙잡았다.“너 어떻게 할머니한테 그런 식으로 말해?”정루아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가 천천히 시선을 그의 얼굴로 옮겼다.“더 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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