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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화

모두의 시선이 계단 위에 서 있는 정루아에게로 쏠렸다.“저 여자가 그런 거예요? 구씨 가문 막내 도련님 숙모잖아요?”“세상에, 너무 잔인하네요. 애한테 손을 대다니!”“듣자 하니 구씨 가문 큰며느리랑 둘째 아들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던데... 질투 때문에 미쳐서 아이한테 화풀이한 것 같네요.”“...”낮게 속삭이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정루아에게 손가락질하며 께름칙한 시선을 던졌다.그때 정시연이 달려와 쓰러져 있는 구하준을 한 번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정루아 앞에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루아야, 나한테 불만이 있으면 제발 나한테 풀어. 왜 내 아들한테까지 이러는 거야? 하준이는 이제 겨우 세 살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애잖아!”정시연은 괴로운 얼굴로 오열하다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했다.“태윤 씨랑 승태 씨는 우애 좋은 형제였어. 승태 씨가 세상을 떠나니까 아빠 없는 하준이가 안쓰럽다면서 몇 번 찾아오게 된 거야. 하지만 그때마다 난 곁에 없었어... 네가 도대체 어디에서 그런 헛소문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부 거짓말이야. 난 승태 씨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절대 그 사람을 배신하지 않을 거야!”울부짖듯 억울함을 토해내던 그녀는 급기야 바닥에 머리를 찧기 시작했다.“루아야, 제발 부탁이야. 불만이 있으면 나한테 풀어. 제발 우리 아들만은 건드리지 말아줘. 나랑 승태 씨의 하나밖에 없는 아이야. 내 목숨과도 같은 아이란 말이야. 제발... 제발....”그녀는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했고, 주위 사람들은 그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아, 구씨 가문 둘째 도련님은 조카를 보러 온 거였네요. 숙모라는 사람이 너무 철이 없네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질투를 할 수가 있어요?”“저 아이도 참 불쌍해요.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를 잃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숙모한테까지 억울하게 당하다니.”“어떻게 남편이랑 형님 사이를 의심할 수가 있어요? 미친 거 아니에요?”“...”정루아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에는 경멸과 혐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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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구씨 가문 집사는 정중하게 손님들을 모두 돌려보냈다.그 소식을 들은 박정란은 너무 놀라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휠체어에 실려 나온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우리 가문 귀한 증손자는... 괜찮은 거야?”집사가 곧바로 대답했다.“이미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한 사람이 밑에서 도련님을 받아안은 덕분에 큰 사고는 막을 수 있었습니다.”박정란은 떨리는 손으로 정루아를 손가락질하며 고함을 질렀다.“이 악독한 년 같으니!”그때 구태윤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 역시 이미 소식을 듣고 온 것이었다. 모두가 냉담하기 그지없는 눈으로 정루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곧장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루아가 하준이를 차는 걸 본 사람이 누구죠?”차갑게 얼어붙은 그의 눈동자가 거실을 한 바퀴 훑어보았다. 그 시선만으로도 사람들을 압박감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아까 말했던 도우미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저예요... 아까 계단 아래에 있었는데요... 둘째 사모님께서 도련님을 차신 것 같았어요...”“같았어요?”구태윤의 미간이 불쾌하게 좁혀졌다. 압도적인 기세가 도우미를 짓눌렀다.“확실하지도 않은 걸 함부로 입에 올려요?”잔뜩 겁에 질린 도우미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저, 저는...”그때 박정란이 나섰다.“루아가 아니면 그런 짓을 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 요즘 하는 짓을 좀 봐. 태윤아, 아직도 저런 애를 감싸고 싶어?”구태윤의 준수한 얼굴에는 서늘한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루아는 제가 잘 압니다. 절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정시연이 흐느끼며 끼어들었다.“태윤 씨, 루아는 계속 우리 관계를 오해해 왔잖아요...”그의 날 선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아들이 다쳤는데, 왜 아직 여기 있는 거예요?”정시연의 표정이 순간 굳어버렸다.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구태윤은 하준이를 끔찍이 아끼지 않는가? 왜 이런 상황에서 내 편을 들지 않는 거지?’임혜숙이 그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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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화

“봐라. 본인이 직접 인정했잖아. 지독한 년 같으니. 이런 년은 우리 구씨 가문 며느리 자격 없어. 태윤아, 당장 이혼해!”박정란은 분노와 혐오가 가득한 눈으로 정루아를 노려보며 노발대발했다.정석주의 안색이 순간 변해버렸다. 그는 급히 박정란에게 말했다.“어르신, 부디 노여움을 가라앉히세요. 저희가 너무 오냐오냐 키운 탓입니다. 제가 어떻게든 시연이에게 사과하게 하고, 따끔하게 혼내겠습니다. 태윤이랑 루아 어렵게 결혼했는데 이렇게 쉽게 이혼을 입에 올리면 안 됩니다.”하지만 박정란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똑같이 정씨 가문 딸인데, 한 명은 심성이 온화하고 품위도 있는데, 왜 한 명은 제멋대로인 데다 표독스럽기까지 한 지...”적나라한 꾸지람에 정석주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그러나 상대가 박정란인 이상 감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정루아가 스스로 죄를 인정해버렸기 때문이다.정석주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정루아를 노려보았다.“이 망할 것!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어서 와서 어르신께 사과드리지 못해?”“그만 하세요!”사방에서 고성이 오가는 가운데,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온 구태윤이 낮게 소리치자 거실은 단숨에 고요해졌다.그는 두 손으로 정루아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손가락 마디에 가볍게 힘을 가하며 무표정한 얼굴의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어 그의 괴로움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루아야, 장난치지 마. 네가 하지 않았잖아. 난 널 알아.”그러나 정루아는 그의 손을 밀쳐내며 한 걸음 물러섰다.“내가 한 거 맞다니까. 전에 경고했잖아. 네가 나랑 이혼해주지 않으면 그 모자를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고.”그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감정을 통제하느라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어릴 적부터 그녀는 자신을 억누르며 살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유독 그 앞에서는, 그에게만큼은 한 번, 또 한 번 타협했고 참고 또 참아왔다.그리고 이번에는 이렇게 끔찍한 누명을 뒤집어쓰는 것조차 감수하고 있다. 오직 그와 이혼하기 위해서 말이다.그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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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화

그 말에 깜짝 놀란 정석주가 구태윤을 향해 돌아섰다.“정관수술을 했다고?”정루아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올리고 비웃음을 내뱉었다.“아직 몰랐어요? 남의 아이를 온전히 잘 키우기 위해 스스로 거세를 한 거예요. 제가 어떻게 이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정석주는 떨리는 손으로 구태윤을 손가락질했다.“이런 못된 놈을 봤나! 자네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하준이를 돌보고 싶으면 돌보면 되지, 왜 불임수술까지 해? 자네의 아이는 갖고 싶지도 않나?”박정란 역시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태윤아, 너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할 수가 있니?”너무도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도우미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얼어붙어 있었다.그들의 시선에는 어느새 정루아를 향한 연민이 조금 섞여 있었다.구태윤은 가늘고 긴 눈으로 그녀를 깊게 응시했다. 그의 주변 공기는 점점 더 차갑고 무겁게 가라앉았다.정루아는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본 뒤,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당신이 이혼에 동의해주지 않으면, 난 앞으로 더 극단적인 짓도 할 거야. 구하준을 데려가서 옥상에서 떨어뜨릴 수도 있고, 강에 던져 익사시킬 수도 있겠지.”“이혼해! 반드시 이혼해!”박정란이 단호하게 말했다.“구태윤, 저 여자랑 이혼하지 않으면, 난 더이상 너를 손자로 인정하지 않을 거다!”불임수술이 가져온 충격은, 정루아의 이 말 한마디로 완전히 덮여버렸다.지금 그녀가 보이는 광기는 정말로 무슨 짓이든 저지를 것만 같았다.박정란은 감히 도박을 할 수 없었다.구태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구하준은 구씨 가문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런 아이를 이 악독한 여자의 손에서 죽게 만들 수는 없다.정석주의 눈동자는 극도로 복잡해져 있었다. 그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정루아와 구태윤을 번갈아 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이혼하게. 멀쩡하던 내 딸이 자네랑 결혼한 지 몇 년 만에 이 꼴이 됐네. 불임수술까지 했다니. 도대체 내 딸 인생을 몇 년이나 더 잡아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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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화

구태윤은 차 안에 앉아 장유성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태윤아, 무슨 일이야?”장유성의 목소리 너머로 시끄러운 소음이 섞여 들려왔다.구태윤이 차갑게 물었다.“어디야?”그의 말투에 담긴 심각함을 느낀 장유성은 곧바로 자신의 위치를 말해주었다.구태윤이 말했다.“지금 당장 구씨 본가로 와.”그 말을 끝으로 그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고개를 돌린 순간 안에서 얼굴이 창백해진 채 걸어 나오는 정루아의 모습이 보였다.걸음은 몹시 느렸고, 몸은 가볍게 흔들렸다. 마치 바람 한 줄기만 스쳐도 그대로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구태윤은 핸들을 꽉 움켜쥐었다. 오늘 밤 벌어진 모든 장면들이 머릿속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는 분노에 차올라 주먹으로 핸들을 세차게 내려쳤다.‘미친 거야. 정말로 미쳐버린 거라고.’‘어떻게 이런 누명을 쓰는 것까지 마다하지 않을 수가 있어?’그는 착잡한 시선으로 그녀를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루아 주변에 택시 몇 대 돌아다니게 해.”정루아는 구씨 본가를 벗어나 길가에 나서서 손을 들어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 한 대가 멈춰 섰고, 그녀는 곧바로 올라탔다.구태윤은 그 모든 장면을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잠시 뒤, 장유성이 다급히 도착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차 문을 열고 올라타더니 곧바로 물었다.“무슨 일이야? 뭐가 이렇게 급해?”구태윤의 준수한 얼굴은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얼음처럼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구씨 본가 CCTV 전부 해킹해. 오늘 하루 치 영상 전부 봐야겠어.”“뭐라고?”장유성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자기 집 감시카메라를 해킹하라고?’이게 무슨 전개란 말인가.구태윤이 서늘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내 말 못 알아들었어?”“아니... 그냥 너무 놀라서.”그제야 정신을 차린 장유성은 노트북을 꺼내며 물었다.“태윤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것부터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야?”하지만 구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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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화

장유성은 어안이 벙벙해졌다.“아니, 왜? 안 했는데 왜 인정한 거야?”구태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장유성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녀에게 이득이 되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다.오히려 갖은 수모를 겪고 구씨 가문에서 버림받고, 정씨 가문에서도 질책을 받을 게 뻔했다.그녀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그래서 증거를 찾아야 해. 루아가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구태윤의 목소리가 낮고 거칠게 울렸다.“그래, 반드시 찾아야지.”장유성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같이할게.”“그래.”...병원.박정란이 도착했을 때, 구하준은 이미 응급실에서 나와 있었다.임혜숙이 말했다.“다행히 누군가가 하준이를 받아줘서 크게 다치진 않았어요. 가벼운 뇌진탕이라 며칠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박정란은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파왔다. 그녀는 구하준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내 금쪽같은 손주, 불쌍하기도 하지... 하필 생일날 이런 화를 당하다니.”그녀는 임혜숙을 쳐다보며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루아가 본인이 했다고 인정했어요. 그래서 내가 태윤이한테 이혼하라고 했고, 태윤이도 동의했어요.”임혜숙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그게... 말이 되나요?”“말이 안 될 게 뭐가 있어요?”박정란은 냉소했다.“자기 입으로 인정했는데 거짓일 리가 있겠어요?”임혜숙은 혼란과 불안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녀 기억 속의 딸은 제멋대로일 때는 있어도,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할 아이는 아니었다.그때 정석주가 도착해 얼굴을 굳힌 채 말했다.“내일 태윤이랑 루아 이혼 절차 밟을 거야.”임혜숙이 그를 쳐다보았다.“루아는 그런 짓을 할 아이가 아니에요.”정석주는 구하준의 곁을 지키고 있는 정시연을 한 번 바라본 뒤 말했다.“잠깐 나와.”임혜숙은 창백한 얼굴로 그를 따라나섰다.조용한 비상구 안.정석주가 입을 열었다.“태윤이가 정말 그렇게 시연이를 아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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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화

구태윤이 입술 앞에 검지를 세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자 구하준은 입을 꼭 다물고 눈만 깜빡거렸다. 구태윤은 아이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이듯 물었다.“머리 아직도 아파?”구하준은 고개를 저었다.구태윤은 살짝 눈을 내리깔고 아이를 바라보며 한 번, 또 한 번 아이의 정수리를 어루만졌다.그의 몸 주변에는 여전히 사람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서늘하고 날 선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구하준은 그 기운이 너무나 무서웠다.오늘의 작은 아빠는 유난히 사납고 차가워 보였다.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구하준이 안간힘을 쓰며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자 구태윤이 깜짝 놀라 말했다.“뭐 하려고?”“쉬하고 싶어요.”구하준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구태윤은 말없이 아이를 안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아이에게 작은 아빠의 품은 늘 편안했다. 구하준은 자신의 온몸을 그의 품에 파묻었다.구태윤은 화장실에 도착해 아이를 변기에 앉히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오늘 밤에 있었던 일 기억나?”구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기억해요.”구태윤의 목소리가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작은 아빠한테 말해봐. 어떻게 떨어지게 된 거야?”구하준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좋지 않은 기억을 건드린 듯, 아이의 얼굴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입술이 떨리며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정시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준아? 하준아, 어디 있니?”“엄마! 저 여기 있어요!”구하준이 곧바로 크게 외쳤다.너무 힘을 줘 외친 탓인지 머리가 욱신거려 곧장 눈물이 쏟아졌다.“으... 작은 아빠, 저 머리가 너무 아파요. 흑....”구태윤의 짙은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는 아이를 안아 올려 바지를 입혀 주고는 곧장 밖으로 나왔다.화장실 문 앞에는 정시연이 서 있었다.얼굴은 창백했고,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으며,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태윤 씨, 언제 왔어요?”“방금요.”구태윤은 담담하게 대답하며 아이를 병실 침대에 내려놓았다.“울지 마. 잠시 뒤면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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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화

다음 날.검은 구름이 가득한 흐린 하늘 아래 살을 베는 듯한 차가운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와 몸을 파고들었다.정루아는 서류를 챙겨 법원 앞에 서 있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검은색 롤스로이스 세단이 천천히 다가와 길가에 멈춰 섰다.차 문이 열리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훤칠한 남자가 내려섰다.눈썹과 눈가에는 서리가 내려앉은 듯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검고 깊은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지만, 그 안의 감정은 읽을 수 없었다.정루아는 그를 한 번 바라본 뒤 아무 말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구태윤은 성큼성큼 그녀의 뒤를 따랐다. 곧게 뻗은 그녀의 가느다란 등이 눈에 들어왔다.번호표를 뽑고, 두 사람은 대기석에 나란히 앉았다.날을 잘못 잡았는지 이혼을 하러 온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다.두 사람 사이엔 침묵만 흐르고 있었다.정루아는 목이 바짝바짝 말라 들었다. 마지막 결단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후회 안 하겠어?”그때, 옆에서 남자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정루아의 긴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이혼하지 않으면 더 후회할 거야.”구태윤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이런 방식으로 나를 몰아붙일 때, 내 기분 생각해 본 적 있어?”정루아도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봤다.“그럼 나도 묻자. 미국에서 정시연과 검진받으러 같이 갔을 때 내 기분 생각해봤어? 구하준을 위해 정관수술을 선택했을 땐 내 감정 고려했어?”“난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한 게 아니야.”구태윤의 흥분이 조금 가라앉았다.“나를 위해서였다고 말하는 거야?”정루아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그럼 왜 더 일찍 하지 않았어? 왜 하필 구하준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했는데? 당신은 항상 그 아이와 구씨 가문이 우선이었지. 한 번이라도 날 중요하게 생각해본 적 있어?”그녀는 제법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괴로울 거라 생각했지만, 하룻밤이 지나고 나니 마음이 훨씬 많이 무뎌져 있었다.진작 끝냈어야 했다.그랬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진흙탕 속에서 짓밟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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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화

전화는 시어머니 장옥경에게서 걸려온 것이었다.“루아야, 너희 지금 법원에 있니?”장옥경의 말투에는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정루아는 손에 쥔 펜을 더 세게 움켜쥐며 짧게 대답했다.“네, 어머님.”“안 돼. 이혼하면 안 돼.”장옥경의 목소리가 한층 단호해졌다.“설령 이혼을 한다고 해도 지금은 안 된다.”정루아는 눈을 한 번 깜빡이고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어머님... 저는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아요.”“어쨌든 나는 반대야. 당장 돌아와. 이혼이 얼마나 큰일인데 우리랑 상의도 없이 결정해? 우리가 평생 구씨 집안으로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니?”화가 잔뜩 담긴 말만 남긴 채 그녀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한편, 구태윤 역시 아버지 구성무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지금 당장 돌아와라. 안 오면 다시는 이 아버지 볼 생각하지 마라.”짧고 날 선 말만 남기고 이쪽도 바로 끊어버렸다.구태윤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하려 했다.“사인하고 가!”정루아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구태윤은 고개를 돌려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부모님이 돌아오셨어. 아버지가 지금 당장 안 오면 다리 부러뜨린대.”그는 그녀의 휴대폰을 힐끗 보며 덧붙였다.“우리 엄마한테 전화 왔지? 솔직히 엄마가 너한테 꽤 잘해주지 않았어? 일단 돌아가서 두 분 말씀 들어보자.”정루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이를 악물었지만 끝내 거절은 하지 못했다.시어머니 장옥경은 확실히 그녀에게 늘 다정한 사람이었다.다만 두 분은 해외 봉사 활동 중이라, 1년 중 집에 머무는 날이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이번에도 계획대로라면 훨씬 더 늦게 돌아왔을 것이다.하지만 얼마 전 할머니가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귀국을 결정했었다. 하필이면 그 시기에 두 사람의 이혼 소동이 일어난 것이다.구태윤은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이혼 합의서 내용 마음에 안 들어.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할 것 같아. 우리 둘 다 납득할 수 있을 때 다시 오자.”큰 손바닥이 그녀의 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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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화

박정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너... 너...”하지만 ‘너’만 반복할 뿐, 끝내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아들과 며느리는 늘 자기 주관이 강했다. 구승태가 사고를 당한 뒤, 두 사람은 해외에서 의료봉사를 하겠다고 떠났다. 그녀가 격렬히 반대했음에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매정하게 떠나더니, 이제야 돌아와 이혼을 막겠다고 나선 것이다.박정란은 분노에 눈앞이 아득해져 소파 팔걸이를 붙잡았다.“고얀 것들...”서재 안.구성무는 냉랭한 얼굴로 구태윤을 쳐다보고 있었다.“정관수술은 대체 왜 한 거야?”구태윤은 의자에 몸을 던지듯 앉아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정시연이 아이 낳는 걸 봤는데... 너무 힘들어 보여서요. 루아도 그런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구성무는 분노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그럼 루아한테 물어봤어? 아이를 낳고 싶은지 아닌지!”구태윤은 손을 내려놓고 푹 고개를 숙였다.“전에... 우리 둘만의 삶을 원한다고 했어요.”“그래서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단정한 거야?”구성무는 부득 이를 갈았다.“원하지 않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야! 피임도 할 수 있었잖아. 왜 하필 정관수술이야? 솔직히 말해. 너 정시연한테 마음 있는 거 아니야?”구태윤이 눈을 치켜떴다.“아버지, 그 사람은 형수예요!”구성무는 깊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형수인 거 알면 선을 분명히 그어.”“그럼 하준이는요?”구태윤은 허탈하게 웃었다.“아버지랑 어머니가 떠나신 뒤에야 정시연은 임신 사실을 알게 됐어요. 형의 아이예요. 형의 유일한 핏줄이요. 제가 말씀드렸을 때 뭐라고 하셨어요? 구씨 가문에서 책임진다고 하셨잖아요. 하지만 집안엔 저랑 할머니밖에 없었어요. 그럼 누가 돌봐야 할까요?”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정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하준이를 집으로 데려올 수도 없었어요. 이미 아버지가 없는 아이인데 엄마까지 잃게 할 순 없잖아요.”구성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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