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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1화

“좋아요. 어디 한번 얼마나 대단한지 보죠.”이서연은 그 말만 남기고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연지아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안색도 그리 좋지 않았다. 이서연이 하려는 일은 뻔했다. 결국 자기 뒷조사를 하거나, 연지아 일 쪽에 손을 대려는 것이었다.영은 쪽 일은 연지아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하지만 방송국 쪽은 정말 위태로울 수 있었다. 연지아가 맡은 일을 중단시키는 건, 이서연의 말 한마디면 충분할 것 같았다.역시나.그날 밤.연지아는 방송국 국장에게 전화를 받았다. 앞으로 방송국에서 맡게 될 일들을 잠시 중단해야 할 것 같다고, 대체 누구를 건드린 거냐며 걱정스레 묻는 전화였다.국장도 전화를 받고 난처해하고 있었다. 매주 토요일 연지아가 진행하는 그 경제 프로그램은 시청률이 계속 최고치를 찍고 있었고, 국장 역시 연지아를 아주 아끼고 있었다.하지만 이번에 들어온 전화만큼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연지아는 오히려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일단 잠시 중단해 주세요. 제가 손에 든 일들부터 정리하고 나서 다시 생각할게요.”국장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어요. 그래도 제가 중간에서 좀 조율해 볼게요.”“감사합니다, 국장님.”다음 날, 금요일.아침 일곱 시.연지아는 더 이상 성시하에게서 전화를 받지 못했다.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고 서운했지만, 그렇다고 어제 했던 말을 후회하지는 않았다.이서연이 에블린이 바로 연지아라는 걸 알게 된다면, 연지아와 성시하가 접촉하는 걸 지금보다 훨씬 더 심하게 막아설 게 분명했다.원망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연지아는 마음을 다잡고 준비를 마친 뒤 집을 나섰다.오늘은 아명시로 출발해야 했다.배난화는 일찍부터 연지아 짐을 다 챙겨 놓았다. 아침을 먹는 자리에서 연무현이 물었다. 출장 기간이 얼마나 될 것 같냐고.“상황을 봐야죠. 순조로우면 사나흘, 길어도 5일 정도일 거예요.”연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몇 마디 걱정 어린 말을 덧붙였다.아침을 먹고 난 뒤, 성민우가 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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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화

성유원은 끝까지 차분하게 타일렀다.“할머니는 시하를 속이려는 게 아니야. 할머니는 그냥 시하가 다칠까 봐 걱정하는 거야.”성시하는 또 한 번 훌쩍이며 말했다.“에블린 이모는 나 안 다치게 해.”성유원이 말했다.“할머니 말씀으로는 시하가 매일 그 이모랑 통화한다며. 그런데 할머니는 에블린 이모를 잘 모르잖아. 시하가 낯선 사람을 너무 믿다가, 혹시라도 다치면 어떡하냐고 걱정하시는 거야. 할머니가 시하 얼마나 사랑하는지 시하도 알잖아.”성시하는 작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볼을 부풀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시하 마음속에서는 에블린이 자기를 좋아한다는 확신이 있었고, 절대 자기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성시하는 에블린의 목소리를 듣는 걸 좋아했다. 에블린이 노래해 주는 걸 듣고 있으면, 마치 박아린의 엄마가 노래해 줄 때랑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아빠 말이 무슨 뜻인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에블린이 절대 자기를 해치지 않는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몰랐다. 자기 감정을 말로 옮길 수가 없었다.“아빠가 좀 더 알아보고 나서, 그다음에 시하가 다시 연락하게 하면 안 될까?”성유원이 한참을 달래고 나서야, 성시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전화를 끊고 난 뒤, 성유원은 곧장 사람을 시켜 오늘 안으로 경원시에 돌아갈 수 있게 일정을 바꾸게 했다. 원래는 안연청에게 월요일에 돌아가겠다고 해 둔 상태였다.이서연은 성시하에게 사과했다.성시하는 막무가내인 아이는 아니었다. 할머니가 자기를 얼마나 아끼는지도 알고 있었고, 할머니도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결국 할머니의 사과를 받아들였다.성시하는 세수를 하고 나가 아침을 먹었다.그래도 에블린과와 연락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마음 아프고 속상했다.연지아는 회사에 도착했다. 그리고 곧장 강현수의 사무실로 갔다. 두 사람은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눴다.대화가 끝난 뒤 강현수가 말했다.“문제 생기면 바로 전화해.”연지아는 웃으며 말했다.“저는 일이 다 끝났을 때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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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화

강진연은 미리 연지아에게 전화를 해 둔 상태였다.이틀 전부터 강진연은 아연을 데리고 다른 도시에 놀러 가 있었다. 거기에는 아주 영험하다고 소문난 절이 하나 있었는데, 강진연은 연지아를 위해 일부러 사업 부적까지 받아 왔다.연지아가 아명시로 출장을 가서 프로젝트를 따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마침 KTX 시간도 맞는다고 하면서 기어이 역에서 만나 부적을 건네주겠다고 했다.그래서 연지아는 도착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10분 뒤.강진연에게서 KTX에서 내렸다는 메시지가 왔다.그리고 몇 분이 더 지나 연지아가 고개를 들어 보자 하필이면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성유원이었다.성유원은 흰색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탄탄하게 다져진 팔 근육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한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였고, 손목에는 값비싼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검은색 바지는 길고 곧게 뻗은 다리선을 더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선글라스를 쓴 얼굴에서는 아래쪽 윤곽만 드러나 있었는데, 그마저도 지나치게 잘생겼다. 차갑고 고고한 분위기까지 더해져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느낌이 강했다.성유원은 묵직하고도 힘 있는 걸음으로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연지아는 참지 못하고 속으로 눈을 굴린 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없는 사람 취급해 버린 셈이었다.그런데도 연지아는 느낄 수 있었다. 성유원의 시선이 분명 자기에게 머물러 있다는 걸.마침 그때 강진연이 짐을 밀고 나왔다. 아연은 캐리어 위에 앉아 있었다.연지아는 곧바로 걸음을 재촉해 앞으로 나갔다.아연은 연지아를 보자 반갑게 불렀다.“이모!”원래는 멈춤 없이 앞으로 걸어가던 성유원도 아연이 그렇게 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무심결에 걸음을 늦췄다.연지아는 아연을 품에 안고 한참 만에 보는 아이 볼에 입을 맞췄다.“아연아, 이모 보고 싶었어?”“보고 싶었어요. 엄마가 맨날 이모는 엄청 바쁘다고 했어요.”“이모가 일 끝내면 그때 아연이랑 제대로 놀아 줄게, 알겠지?”“네.”“...”강진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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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화

연지아는 설지한에게 오성원에게 전화하라고 하며 말했다.“전해요. 20분 뒤까지 안 나타나면 당장 사직서 쓰라고요.”설지한은 곧바로 응한 뒤 오성원에게 전화를 걸었다.20분 후.오성원과 황영지, 허성언이 차례로 사무실에 들어왔다.오성원은 올해 서른아홉이었다. 몸은 마르고 안경을 써서 겉으로 보기에는 깔끔하고 점잖아 보였지만, 지나치게 길게 찢어진 눈매에서는 단번에 약삭빠른 기질이 읽혔다.오성원은 연지아를 보자마자 서둘러 사과했다.“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 제가 황 팀장과 함께 보강 쪽 사람을 만나느라 미리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조금 있다가 회담 세부 내용은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연지아는 웃음을 띠었지만 그 웃음은 눈에 닿지 않았다.“그래요? 그럼 제가 오해한 거네요. 이따가 보고는 꼭 자세히 들어봐야겠어요.”오성원은 급히 맞장구쳤다.“물론입니다. 물론이죠.”“그럼 앉으세요.”오성원이 자리에 앉았다. 그는 눈을 내리까는 순간, 눈 밑에 감춰 두었던 음험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회의가 시작됐다.거의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진 논의는 겉으로 보기에는 무난하게 흘러갔다. 그동안 연지아는 오성원이 내놓는 여러 의견에 잇달아 찬사를 보냈고, 그가 하는 말마다 동의했다. 마치 그를 아주 신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회의가 끝난 뒤, 사람들은 하나둘 회의실을 빠져나갔다.오성원은 회의실 문을 나서자마자 비웃듯 말했다.“여자가 무슨 큰일을 하겠어요.”황영지가 말했다.“그래도 너무 방심하시면 안 돼요. 에블린은 진짜 실력이 있긴 해요. 예전에 미국 쪽에서 터졌던 업무 위기도 에블린이 직접 다 수습했다잖아요.”오성원은 코웃음을 쳤다.“그때 강 대표도 계속 미국에 있었잖아요. 그게 진짜 에블린이 해결한 건지, 강 대표가 해결한 건지 누가 알아요. 강 대표가 원래 여자한테 관심도 없던 사람인데, 내가 보기에는 저 여자한테 홀린 거예요.”말투에는 여전히 깔보는 기색이 짙었다.에블린이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한들, 투자 대표 자리는 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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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5화

설민성이 대답했다.“전화는 했습니다. 오성원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그럼 됐어요. 잘 지켜보고 있다가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전화해요.”“네.”그 뒤 설지한이 차를 몰아 연지아를 호텔까지 데려다줬다.호텔로 돌아가는 길.연지아의 휴대폰이 진동했다.연지아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 발신자 이름을 본 순간 잠시 멈칫했다.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 남자 번호는 여전히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연지아는 몇 초쯤 망설이다가 수락 버튼을 눌러 귀에 댔다. 그러자 전화기 너머로 성시하의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금방이라도 다시 울 것 같은 서러운 목소리였다.“에블린 이모...”목소리만 들어도 조금 전까지 울고 있었다는 게 분명했다.연지아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이 바짝 굳었다.“시하야, 울었어?”오늘은 토요일이었다.성시하는 여덟 시가 되면 연지아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막상 방송을 틀어 보니 진행자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연지아가 나오지 않자 성시하는 금세 토라져 울고 보챘다.성유원은 성시하가 겨우 진정한 뒤에야 휴대폰을 건네주며 전화하게 했다.성시하가 물었다.“오늘은 왜 TV에 에블린 이모 안 나왔어요?”연지아는 성시하가 매주 토요일이면 자기 방송을 챙겨 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말 모녀는 모녀인 걸까. 연지아는 성시하가 자기에게 품고 있는 감정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그게 고맙고도 마음 아팠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그 마음을 받아 주지 못하는 자신이 미안했다.연지아는 조용히 숨을 내쉰 뒤,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모가 오늘은 다른 일 때문에 바빴어. 그래서 다른 분이 대신 진행한 거야.”“아...”성시하는 작게 대답했다. 그러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어제 시하가 이모한테 전화 못 했는데, 에블린 이모는 시하 보고 싶었어요?”연지아는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당연히 보고 싶었지.”연지아의 대답을 듣자 성시하의 서운한 얼굴도 한결 환해졌다.두 사람은 그렇게 계속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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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6화

창밖에는 부슬부슬 가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방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그제야 성유원은 몸을 일으켜 방을 나갔다.화요일이 됐다.성유원은 오전 회의를 마친 뒤 사무실로 돌아왔다. 주민우는 업무 보고를 하고 있었고, 중요한 서류들도 성유원의 결재와 서명을 기다리고 있었다.성유원은 막 주민우에게 일을 지시한 뒤 물었다.“양 대표 쪽 진행 상황은 어때?”주민우가 답했다.“지금 바로 전화해서 확인해 보겠습니다.”주민우는 곧바로 양동석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금방 연결됐고, 저쪽에서 양동석 목소리가 들려왔다.“주 비서님.”주민우는 현재 진행 상황을 물었다.성유원은 워낙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투자부 쪽 핵심 프로젝트만큼은 직접 챙기고 있었다.보강 프로젝트만 해도 성유원은 벌써 두 번이나 진행 상황을 물었다.그만큼 양동석은 압박을 느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크게 올라온 감정은 흥분이었다. 성 대표가 이 프로젝트를 이렇게까지 신경 쓴다는 건, 이 계약만 따내면 자기에게도 분명 큰 공이 된다는 뜻이니까.양동석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보고를 이어 갔다.주민우는 스피커폰을 켜 둔 상태였다.그래서 성유원도 그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전부 들을 수 있었다.“저희 쪽은 이미 영은 협상 카드와 패를 완전히 파악했습니다. 오늘 오후 협상도 분명 순조롭게 끝날 겁니다.”자본력으로 맞붙는 회사들 사이에서 상대 회사 핵심 인력을 회유해 기밀을 빼내는 일쯤은 드문 일도 아니었다.“그리고 들어 보니 영은에 새로 온 투자부 대표 에블린이 강현수랑 관계가 심상치 않다더군요. 여자한테 관심도 없던 강현수가 설마 여자 하나한테 저렇게 휘둘릴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 중요한 프로젝트를 그 여자한테 맡기다니요. 제 눈에는 강 대표도 결국 미색에 눈이 먼 거죠. 저런 여자가 계속 영은 투자부를 맡고 있으면 언젠가는 분명 사고 납니다.”“...”양동석은 확신에 차 있었다. 말투 곳곳에는 연지아를 깔보는 기색이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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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7화

양동석이 말했다.“당연히 믿을 만하죠. 에블린이 대표 자리에 올라간 걸 오성원이 순순히 받아들일 리 있겠어요? 이번 기회에 에블린을 망신 주고 싶은 거죠. 강현수가 그렇게까지 밀어준 사람인데, 이번 프로젝트가 틀어지면 걔가 무슨 낯으로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겠어요.”“그런데 지금 성 대표가 갑자기 중단시키라고 한 걸 보면, 분명 어딘가 문제가 생긴 겁니다.”그렇게 말하던 양동석은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했다.“아니면 에블린이 이미 오성원 정체를 알고 있었던 거예요. 일부러 속아 주는 척하면서 오성원을 역이용한 거죠.”양동석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설마...”“빨리 오성원한테 연락해 보세요.”“알겠습니다.”연지아는 사무실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이번에 아명시에 온 목적은 단순히 보강 계약만 따내는 게 아니었다. 더 중요한 건 이쪽 업무 전반을 다시 점검하는 일이었다. 허성언이 넘긴 최근 2년 치 데이터 자료를 연지아는 한 장씩 넘겨 보고 있었다.페이지를 넘길수록 연지아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 갔다. 그런데도 연지아는 끝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사무실 안은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했다.허성언은 연지아의 앞에 서서 잔뜩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그때였다.사무실 문이 두드려졌다.“들어오세요.”오성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들어서자마자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허성언은 오성원을 보며 공손하게 불렀다.“오 부대표님.”오성원은 연지아를 바라봤다. 보강 프로젝트가 아직 계약까지 간 것도 아닌데, 연지아는 조금도 조급해하지 않는 듯했다. 다른 업무를 볼 여유까지 있어 보였다.연지아는 눈을 들어 오성원을 무심히 한번 훑었다.“오 부대표님, 무슨 일 있으세요?”오성원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에블린 씨, 지금은 무엇보다 보강이랑 빨리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우선입니다. 안 그러면 운성 쪽에 선수를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연지아는 오성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약속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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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8화

보강 쪽 회담을 중단시킨 사람은 성유원임이 분명했다. 성유원은 분명 연지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눈치챘을 것이다. 그 남자 성격을 생각하면, 아명시에 오는 것도 분명 좋은 일 때문은 아닐 터였다.성시하는 한참이 지나도록 연지아의 대답이 없자, 아까의 들뜬 기색은 사라지고 조심스럽게 한 번 더 불렀다.“에블린 이모.”연지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됐다.딸을 볼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참을 수 있었다. 어차피 두 사람은 이제 경쟁 상대였고, 앞으로도 계속 날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그 시작일 뿐이었다.“시하가 오면 당연히 이모 만나도 돼.”연지아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성시하는 금세 기뻐졌다.“와, 좋다. 그럼 아빠랑 아명시에 도착하면 제가 다시 에블린 이모한테 연락할게요.”“응, 좋아.”전화를 끊고 난 뒤, 연지아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휴대폰을 내려놓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뒤 호텔 헬스장으로 가서 운동을 했다.다음 날.오전 열 시, 연지아는 보강 사람들과 계약식을 진행할 예정이었다.아홉 시.연지아는 정각에 맞춰 호텔을 나와 보강으로 향했다.설지한이 차를 몰았다.연지아는 뒷좌석에 앉아 자료를 보고 있었고, 업무 전화를 받고 있었다.막 통화를 끝낸 순간이었다.차체가 갑자기 크게 흔들렸다.연지아는 설지한을 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설지한은 얼굴을 굳힌 채 핸들을 꽉 쥐고 말했다.“엑셀하고 브레이크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차는 그대로 고속도로 쪽으로 올라가려 하고 있었다. 속도는 줄지 않았고 브레이크도 먹히지 않았다. 하필 지금은 출근 시간대라 도로 위 차량도 많았다.“에블린 대표님, 꽉 잡으세요!”설지한이 다급하게 외쳤다.연지아는 곧바로 천장 손잡이를 힘껏 잡았다.설지한은 핸들을 급하게 꺾었지만, 차는 말을 듣지 않았다. 차는 몇 대를 잇달아 들이받고 말았다.순식간에 도로는 아수라장이 됐다. 경적 소리가 길거리를 뒤덮었고, 보행자들도 허둥지둥 몸을 피했다.연지아 얼굴은 한순간에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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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9화

“들어오세요.”강현수가 말했다.황영지가 문을 열고 병실 안으로 들어와 공손하게 인사했다.“강 대표님, 에블린 대표님.”겉으로 보기에는 황영지가 오성원이 키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황영지는 강현수가 오성원의 곁에 심어 둔 사람이었다.강현수는 진작부터 오성원을 의심하고 있었다. 다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오성원이 뒤에서 회사 이익을 해치는 짓을 해도 모르는 척 넘어가고 있었다.오성원은 늘 자기가 빈틈없이 처리하고 있다고 믿었다.이번에 오성원의 움직임과 운성 쪽 사람을 만난 일도 모두 황영지가 연지아에게 따로 보고한 내용이었다.강현수가 물었다.“오성원 쪽은 지금 어때?”황영지가 말했다.“원래는 오늘 밤 양동석 씨랑 식사 자리가 있었는데, 운성 쪽 성 대표가 오늘 아명시에 온다고 해서 저녁 약속은 취소됐다고 들었습니다.”그때였다.휴대폰이 진동했다.연지아의 휴대폰이었다.가방은 소파 위에 올려져 있었다.강현수는 앞으로 가서 연지아의 휴대폰을 꺼냈다. 발신자를 확인한 뒤 연지아에게 건넸다.연지아는 화면을 내려다봤다. 성시하가 전화 시계로 걸어온 전화였다.연지아는 숨을 한번 고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강현수는 황영지와 함께 병실 밖으로 나갔다. 연지아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뜻이었다.전화기 너머로 성시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에블린 이모.”“시하야, 왜 그래?”연지아는 최대한 평소처럼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에 밴 기운 없음까지는 감출 수 없었다.“아빠가 에블린 이모 다쳤다고 했어요. 이모 지금 병원에 있어요?”연지아는 잠시 멈칫했다.하지만 자기가 다쳤다는 사실을 운성 쪽 사람들이 아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이모 괜찮아. 시하가 걱정 안 해도 돼.”“저 아빠랑 이미 아명시에 왔어요. 에블린 이모 보러 가고 싶어요.”딸이 걱정하는 목소리를 듣자, 연지아는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연지아는 병실 안 표지판을 한번 보고는 성시하에게 주소를 알려 줬다.전화를 끊고 나서 잠시 뒤 강현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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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화

성시하는 봉투를 들고 침대 위에 두 손을 올린 채 말했다.“에블린 이모, 이거 제가 이모 드리려고 만든 작은 케이크예요.”연지아는 놀란 듯 물었다.“나 주려고 만든 거야?”성시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나게 말했다.“네. 이모, 얼른 드셔 보세요.”연지아는 순간 말로 다 못 할 감정이 밀려왔다. 지난 5년 동안 하루도 딸 곁에 있어 주지 못했는데, 성시하는 이렇게까지 자신을 따르고 있었다. 감동스러우면서도, 그보다 더 크게 밀려오는 건 미안함이었다.연지아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울컥함을 억누르며 손을 뻗어 봉투를 받아 들었다. 안에 든 상자 속 케이크를 꺼내 보니, 울퉁불퉁한 모양이 영락없이 아이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었다.연지아는 뚜껑을 열고 숟가락으로 한입 떠먹었다. 달지만 과하지 않았고, 맛도 제법 괜찮았다.“맛있어. 시하 솜씨가 정말 좋네.”연지아의 칭찬을 들은 성시하는 볼에 달콤한 보조개를 띠며 환하게 웃었다.연지아는 한 숟갈 떠서 성시하에게도 먹여 줬다. 성시하는 앞으로 고개를 내밀어 한입 받아먹었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공기마저 달콤해진 것 같았다.그 순간만큼은 병실 안에 남자가 한 사람 더 서 있다는 사실조차 잊힐 정도였다.남자는 그 따뜻하고 평화로운 장면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운 눈빛 속에 무슨 생각이 담겨 있는지는 도무지 읽히지 않았다.그때였다.성유원의 휴대폰이 진동했다.연지아의 표정이 잠깐 굳었고, 남자를 올려다봤다.성유원은 전화를 받으러 병실 밖으로 나갔다.연지아는 성유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감정을 가다듬었다.‘설마 더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연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놓이지 않았다.성유원이 전화를 마치고 돌아오자, 성시하를 보며 말했다.“시하야, 이제 가야 해.”성시하는 곧바로 싫다고 했다.“싫어. 이모 아픈데 혼자 있잖아. 나 여기서 에블린 이모랑 같이 있을래.”연지아가 달랬다.“시하야, 이모 괜찮아. 아빠랑 같이 가. 이모 다 나으면 그때 시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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