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대표님, 심장이 위험합니다.: Chapter 121 - Chapter 130

256 Chapters

120화. 심장의 언어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었다.하얀 시트 위에 누워 있던 수연은 눈을 떴다.눈앞이 희미하게 빛나며, 낯선 고요가 귀를 채웠다.세상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너무 조용하게 느껴졌다.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침대 곁에 앉은 우혁이 눈을 감은 채 기대어 있었다.밤새 잠들지 못한 흔적이 얼굴에 남아 있었다.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감싸고 있었고, 그 따뜻한 온기가 마치 생명줄처럼 전해졌다.그녀는 아주 조심스레 속삭였다.“……여기서 계속 있었어요?”우혁은 잠에서 깨어난 듯 눈을 떴다.“눈을 떴군요. 다행입니다.”그의 목소리엔 안도와 피로가 뒤섞여 있었다.수연은 가늘게 웃었다.“살았네요.”“살아야죠.”“그 아이는요?”“윤재는 안정됐습니다. 심박도 정상으로 돌아왔어요.”그녀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다행이에요.”그 순간, 병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들어왔다.“교수님, 환자분(윤재) 쪽에서 이상한 데이터가 감지됐습니다.”“이상한 데이터라니요?”“심박 리듬이… 교수님과 같은 패턴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수연은 시선을 들었다.“같은 패턴이라니요?”간호사는 손에 든 태블릿을 보여주었다.거기엔 두 사람의 심전도 그래프가 나란히 떴다.파형의 굴곡과 리듬이 완벽히 겹쳐 있었다.CHA SUYEON - 72 bpmYOON JAE - 72 bpm동기율: 100%그녀는 모니터를 한참 바라보다가 입술을 떨며 말했다.“……이게 계속 지속된다면?”우혁이 대답했다.“한쪽이 심리적 혹은 육체적 자극을 받으면, 다른 쪽도 동일한 반응을 보인다는 뜻이죠.”그녀의 시선이 허공에 멎었다.“……이건 연결이 아니라, 복제에 가까워요.”며칠 뒤, 그녀는 윤재가 있는 병실로 향했다.소년은 이미 의식을 회복했고, 창가 쪽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손목에 남은 주사 자국이 희미하게 빛났다.그녀가 다가가자, 윤재가 고개를 돌렸다.“교수님.”“몸은 어때요?”“괜찮아요. 이상하게도 요즘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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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대신 살기 위한 삶

하얀 병실 안, 고요한 심장 박동음이 울렸다.삐, 삐~ 그 단조로운 소리가 마치 살아 있는 존재의 언어처럼 공기를 흔들었다.수연은 침대에 기대 앉아 있었다.그녀의 손에는 얇은 심전도 선이 얽혀 있었고,그 끝에는 윤재의 이름이 적힌 환자 라벨이 연결되어 있었다.그녀는 알았다.이제 그 선이 단순한 의료 장비가 아니라,생명 그 자체의 연결선이라는 걸.“오늘은 좀 어떠세요?”우혁이 조용히 물었다.그의 목소리는 의사로서의 냉정함과,한 인간으로서의 불안 사이 어딘가에 걸려 있었다.“아침엔 괜찮았어요.”수연은 얇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런데 오후쯤 되니까… 가슴이 무겁네요. 마치 누가 안에서 잡아당기는 것처럼.”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모니터가 미세하게 깜빡였다.윤재의 심박 리듬이 동시에 불안정하게 흔들렸다.“……보셨죠?”그녀가 말했다.“내 심장이 불안해지면, 그 아이도 똑같이 반응해요.”“동기율 100%, 여전히 유지 중입니다.”우혁이 낮게 중얼거렸다.“이건 단순한 유전자 공유가 아닙니다. 정신 신경 연결까지 이어진 걸로 보여요.”“지현의 손길이 아직 남아 있다는 거겠죠.”수연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그는 심장을 복제한 게 아니라, 감정을 복제했어요.”밤이 깊었다. 병원 복도는 조용했고, 유리창 너머로는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그 소리가 마치 무언가의 신호처럼 들렸다.윤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손목의 심전도 라인을 따라가던 그의 시선이 결국 병실 문 앞에서 멈췄다.“교수님…”그의 목소리는 작고 떨렸다.문이 열리고, 수연이 들어왔다.그녀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빛만큼은 단단했다.“왜 일어났어요?”“가슴이 아파서요. 교수님도 그렇죠?”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천천히 다가와 그의 손목에 손을 얹었다.손끝에서 전류처럼 미세한 진동이 일었다.두 사람의 심박이 일순간 완벽히 일치했다.“……이제 알겠어요.”윤재가 속삭였다.“이건 제가 살아 있는 한, 교수님이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죠.”“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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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지현의 그림자

밤바람이 낮게 깔려 있었다.검은 하늘 아래, 속초 외곽의 산길은 물기를 머금은 듯 축축했고바람이 스치며 나뭇잎들이 서로를 긁었다.우혁은 헤드라이트 불빛만으로 길을 더듬었다.“이 좌표가 맞아…”그가 중얼거렸다.차량의 내비게이션에는 붉은 점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다.그곳이 바로 Heartline 프로젝트의 마지막 연구소가 있던 자리였다.도착했을 때, 건물은 이미 폐허에 가까웠다.유리창은 깨져 있었고, 무너진 벽면 사이로 녹슨 배선이 드러나 있었다.한때 생명공학의 중심이었던 곳이 이제는 죽은 기계의 잔해로 남아 있었다.우혁은 손전등을 켜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발밑에서 유리 조각이 바스락거렸다.공기엔 먼지와 녹 냄새가 섞여 있었다.그는 마스크를 고쳐 썼다.“……지현 박사.”그의 목소리가 허공을 헤집었다.“당신이 남긴 건 대체 뭐였습니까.”깊숙한 복도 끝,반쯤 무너진 문 뒤에 서버룸이 있었다.전원은 꺼져 있었지만, 벽면 한쪽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깜빡였다.그는 노트북을 꺼내 남은 전원선과 연결했다.잠시 후, 화면 위에 낯익은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Welcome back, Dr. Cha.”우혁의 손끝이 멈췄다.“……박지현.”비밀번호 입력창이 떴다.그는 망설임 없이 입력했다.CHA_SUYEON_2018화면이 깜박이며 열렸다.수많은 데이터 창이 동시에 떠올랐다.각 파일의 제목에는 모두 같은 이름이 있었다.CHA_SUYEON_BRAIN_MAPCHA_SUYEON_EMOTION_RECORDHL_RESONANCE_SYNTHESIS“이건…”우혁은 숨을 고르며 첫 파일을 열었다.화면에 수연의 신경망 스캔 영상이 떴다.뇌의 감정 중추, 해마, 편도체, 그리고 시상하부까지세밀한 신호 흐름이 색으로 표현되어 있었다.그 신호 중 일부가 윤재의 생체 데이터와 연결되어 있었다.그는 믿을 수 없는 듯 중얼거렸다.“……이건 단순한 심장 이식이 아니야. 감정의 회로까지 이식된 거야.”화면 아래, 녹화 영상 파일 하나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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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눈물로 지워낸 코드

창밖엔 새벽이 깃들고 있었다.하늘은 푸르스름한 빛으로 번지고,그 빛은 병실의 창문을 타고 조용히 안으로 스며들었다.수연의 몸은 침대 위에서 고요했지만, 그 고요함 속에는 보이지 않는 전쟁이 있었다.심전도 그래프는 일정했지만, 그 안의 리듬은 너무도 이질적이었다.마치 두 개의 심장이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는 듯.그녀의 눈꺼풀이 천천히 떨렸다.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열렸다.“……여기가 어디지?”낯선 목소리였다.분명 수연의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달랐다.말끝이 낮고, 부드러우면서도 냉기 어린 음색이었다.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손끝에 달린 전선들이 따라 움직이며 미세한 소리를 냈다.그녀의 눈이 벽에 걸린 거울을 향했다.거울 속의 얼굴은 수연의 것이었지만, 그 표정엔 다른 누군가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었다.“……지현.”그녀는 그 이름을,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처럼 불렀다.그때 병실 문이 열렸다. 우혁이 들어섰다.그의 얼굴엔 밤새 잠을 못 잔 흔적이 역력했다.“교수님.”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그 미묘한 눈빛의 변화, 단 한순간에 그는 알아챘다.“……당신은, 수연이 아니군요.”그녀는 가만히 미소 지었다.“역시 눈치가 빠르군요.”그 말투엔 익숙한 냉정함이 있었다.그는 오래전에 들었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박지현.“지현 박사.”“오랜만이에요, 강우혁.”그녀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당신이 어떻게”“어떻게 살아 있냐고 묻고 싶겠죠.”그녀는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살아 있는 건 아니에요. 그저 남겨진 거죠. 당신들이 ‘데이터’라고 부르는 그 형태로.”그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당신이 한 짓은 실험이 아니라, 살인이었어요.”“살인이라…”그녀는 부드럽게 눈썹을 올렸다.“생명을 창조하려면, 누군가의 죽음은 늘 필요했죠.”그녀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가운 자락이 흘러내리며 맨발이 바닥에 닿았다.그녀는 거울 앞에 섰다.“이 몸, 참 아름답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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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회복(回復)

병실의 공기가 새벽빛으로 물들어 있었다.창문 너머로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은 마치 어제의 폭풍이 모든 걸 씻어낸 것처럼 잔잔하게 공간을 덮었다.그날 밤 이후, 수연은 긴 잠에 빠져 있었다.의식은 돌아왔지만, 그녀의 뇌파는 여전히 불안정했다.마치 두 개의 리듬이 완전히 하나로 합쳐지지 못한 듯한 형태였다.침대 옆, 의자에 기대 앉은 우혁은 밤새도록 그녀의 곁을 지켰다.손끝에는 차가운 피로가 내려앉았지만, 그의 시선은 단 한순간도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그가 바라보는 건 단순히 환자가 아니었다.그는 마치 자신이 지켜야 할 마지막 생명선을 보고 있는 듯했다.“……교수님.”그녀의 목소리가 아주 미약하게 새어나왔다.눈꺼풀이 떨리더니, 천천히 열렸다.“수연 씨.”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그를 찾아갔다.하지만 눈빛엔 혼란이 깃들어 있었다.“……여기가, 어디죠?”“병원이에요. 수술 후 의식이 돌아왔습니다.”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슴께를 짚으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누가, 절 부른 것 같았어요. 내 이름을, 계속.”우혁은 그 말을 듣고도 쉽게 답하지 못했다.그가 알고 있던 진실은 그녀에게 지금 당장은 말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아마 수술 중의 기억일 거예요.”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당신의 뇌가, 심장의 전기신호와 같이 반응했거든요.”“……심장이요?”“예. 의식과 심장 리듬이 동시에 흔들린 건 의사로선 처음 보는 일이었어요.”그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덧붙였다.“의학적으로는 '신경동조 공명(Neural Resonance)' 이라고 부릅니다. 의식이 끊기기 직전, 당신의 뇌가 누군가의 패턴과 일시적으로 공명한 거예요.”그녀는 그 말을 곱씹듯 중얼거렸다.“공명이라… 그러니까, 누군가의 감정이 제 안에 스며들었던 걸까요?”“그럴지도 모르죠.”그는 짧게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그건 환영이 아닙니다. 의식이 아니라, 기억의 잔향이에요.박지현 교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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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위험하게 말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기

시간은 얇게 늘어졌다.모니터의 초침이 소리 없이 움직였고, 수연의 손끝은 바늘과 실을 같은 속도로 움직였다.누군가 숨을 참고, 누군가 짧게 들이마신다.그러나 그녀는 흔들리지 않는다.살아 있는 심장을, 살아 있는 마음처럼 다룬다.“새 보조 순환로 사선 배치. 좌심실 유출로 각도 22도, 상승부 15도 틀어주고, 유량 버퍼를 패치 내 주름으로 흡수합니다.”보조가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문헌엔 없는 방식인데요.”“문헌은 평균을 위해 쓰입니다. 이 아이는 평균이 아니에요.SVC 쪽으로 압이 밀릴 때 감정 스트레스가 직접 리듬으로 번져요. 버퍼가 필요합니다.”그녀의 말엔 설계자의 냉정과 임상의의 직감이 동시에 있었다.우혁은 유리 너머에서 그 손놀림을 보았다.비로소, 누가 그녀를 천재라 불렀는지 이유가 선명해지는 순간.그러나 그 눈빛은 경외가 아니라, 한 인간이 한 인간에게 보내는 믿음에 가까웠다.“패치 고정 완료. 누수 테스트.”생리식염수를 채우자, 새로운 경로가 매끈하게 팽창했다.샘은 없었다.“체외순환 서서히 줄입니다. 심장 재가동 준비.”“온도 복귀. 전해질 보정. 페이싱 와이어 대기.”심장이 미세하게 떨렸다.“자발 리듬 대기.”모두의 시선이 한 점으로 모였다.한 박, 두 박 곡선이 아직 완전하지 않았다.“PVC.” 마취과가 낮게 외쳤다.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마그네슘 1g, 칼륨 소량. 심막 내 에피네프린 미세 주입 준비.”그리고 아주 잠깐, 그녀는 우혁을 보았다.유리 너머, 그의 두 눈. 그 시선엔 괜찮다는 말이 있었다.“페이싱 70로 잡아요. 자발에 맡기지 않습니다.”‘삐’ 하고 모니터의 소리가 다른 음으로 바뀌고,파형이 규칙을 되찾아가는 동안, 그녀는 기다렸다.빨리 재촉하지 않는 기다림.과거의 자신이 갖지 못했던 여유.“……자발 회복.”마취과의 목소리가 낮게 흔들렸다.원심 펌프의 속도가 줄어들었다.“체외순환 종료.”수연은 장갑 너머, 자신의 손바닥에 다시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을 느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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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같은 새벽, 같은 박동

밤과 새벽의 경계는 언제나 비슷했다.누군가의 하루가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누군가의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병원 옥상 위의 공기는 아직 축축했고, 동쪽 하늘은 흐릿하게 젖어 있었다.수연은 하얀 가운 대신, 가벼운 재킷 하나를 걸치고 옥상 난간 앞에 섰다.한밤의 수술실 냄새가 아직 손끝에 남아 있었지만,그 손으로 새벽 공기를 쥐자 조금씩 다른 온도가 느껴졌다.이상하게 따뜻했다. 아직 태양이 뜨지도 않았는데.“역시 먼저 와 계셨네요.”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우혁이 종이컵 두 개를 들고 서 있었다.컵에서 김이 피어올랐다.“커피 드실 줄은 모르겠지만, 그래도요.”그녀는 작게 웃었다.“커피보다 이 시간에 누군가 있다는 게 더 낯설어요.”그는 잠시 고개를 젓고, 그녀 옆에 섰다.두 사람 사이엔 일정한 간격이 있었지만, 그 공기는 이미 공유되고 있었다.“오늘 새벽은 다릅니다.”“어디가요?”“보통 새벽은 차갑지만… 오늘은 조금 살아 있네요.”“살아 있다?”“네. 어젯밤 당신 손끝이 만든 그 리듬이, 아직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아요.”그녀는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그리고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심장이 그 말에 반응하듯, 미세하게 박동을 쳤다.“교수님.”그가 낮게 말했다.“제가 처음 병원을 그만두려던 날 기억하시나요?”“기억하죠. 회의실 문 앞에서 당신이 아무 말도 못 했던 그날.”“그날, 사실 당신이 돌아서면서 했던 말이 아직도 머리에 남아 있습니다.”“제가 뭐라고 했는데요?”“‘끝까지 보는 게 의사의 의무다.’ 그 말요.”그녀는 조용히 웃었다.“그게 그렇게 인상 깊었어요?”“그땐 듣기 싫었습니다. 끝까지 본다는 건, 끝까지 아프겠다는 말이었으니까요.”“이제는요?”“이제는… 끝까지 보고 싶습니다.”“무엇을요?”“당신이 어떤 사람으로 남을지요.”그녀는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조용히 말했다.“전… 아직 저 자신을 잘 모르겠어요. 박지현 교수의 잔재 속에서 나를 찾는 게 여전히 낯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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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멈춘 기록, 깨어난 숨

병원 서류보관실은 늘 일정한 냄새가 났다.낡은 종이, 오래된 프린터 잉크, 그리고 형광등 아래 눅눅하게 마른 공기.수연은 한 손에 파일 뭉치를 들고, 또 다른 손으로 안경을 고쳐 썼다.한 장, 또 한 장 넘길 때마다 무언가가 조금씩 맞물리고 있었다.박지현 교수가 남긴 수술 로그. 그 기록은 모두 완벽했다.너무 완벽해서, 이상했다.모든 수술의 성공률이 100%.모든 사후 기록의 혈액검사 결과가 동일한 수치.그건 우연이 아니라 의도였다.“이건, 누군가 손을 댔어요.”그녀는 낮게 중얼거렸다.“로그가 자동 백업으로 넘어가는 시점이 어긋나 있어요. 타임스탬프가 조정된 겁니다.”“교수님.”뒤에서 우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는 커피 한 잔을 들고 서 있었다.밤샘을 반복한 탓에 눈 밑이 어두웠지만,그의 표정엔 여전히 침착함이 깃들어 있었다.“새벽부터 또 일하시네요.”“잠이 안 와서요. 도혁 쪽에서 접근한 시점이 명확히 잡히지 않아요.이 사람, 생각보다 훨씬 교묘합니다.”“박지현 교수의 기록까지 건드렸단 말입니까.”“그렇습니다.”그녀는 피곤한 눈을 감았다가 떴다.“지현 교수의 이름을 빌려, 그 사람들은 '의학적 정당성’을 만들어내려 한 겁니다.”“어떤 정당성?”“데이터로 환자를 설득할 수 있잖아요. 성공률 100%라면, 그 누구도 거부하지 않죠.”그녀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스며 있었다.누군가의 생명을 통계로 바꿔버린다는 건, 그녀에겐 신념을 짓밟는 일과 다름없었다.“이건 의학이 아니에요. 이건 장사예요.”그녀가 낮게 말했다.우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도혁은 '투자’라는 단어로 모든 걸 덮습니다.의사에게는 수술 성공률이, 투자자에게는 수익률이 필요하니까요.”“둘 다 사람을 숫자로 만드네요.”“그래서 우리는 그 숫자 속에서 사람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그녀는 그의 말에 잠시 시선을 멈췄다.“교수님은 항상 그렇게 말하죠. 찾는다고. 하지만 그게 얼마나 고된 일인지, 아세요?”“압니다.”“그럼 왜 그렇게 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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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그날의 기록

새벽 세 시를 넘긴 병원은 숨을 죽인 거대한 유기체 같았다.기계음만이 일정하게 살아 있었다.삐, 삐호흡기를 타고 흐르는 산소가 규칙적인 리듬을 유지하는 동안,수연의 책상 위 컴퓨터 화면에는 여전히 불빛이 깜박였다.복제 중이던 데이터가 마침내 100%에 도달하자,화면이 순간 정지되었다가 '복사 완료’라는 문장이 떠올랐다.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손끝이 식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USB를 빼내며, 마치 누군가에게서 심장을 빼앗긴 듯한 느낌이 스쳤다.“이 안에… 진실이 있어.”그녀의 낮은 목소리는 자조처럼 들렸다.파일의 제목은 단순했다.‘박지현_음성기록_최종’수연은 주저 없이 클릭했다.[녹음 시작일시: 5년 전 03월 14일 / 수술 전 대기실](박지현의 목소리)“환자 이름, 강우혁. 나이 29세.예상 심근부전, 이식용 패치 적용 예정.관류 유지 시간 예측 80분.”그녀는 숨을 멈췄다.‘강우혁.’그 이름이, 그녀의 가슴 한가운데를 찔렀다.무의식중에 화면을 멈췄지만, 손가락은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이번 수술은 실험적 모델입니다.의학적으로는 불완전하지만, 투자자들의 요구가 들어왔어요.성공률 100% 데이터를 만들어야 하니까.”(침묵 후)“이 환자는, 그저 숫자 속의 하나가 아닙니다. 내가 직접 맡겠습니다.”‘……지현 교수님.’수연은 입술을 깨물었다.녹음 속 목소리가 점점 흐릿해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수연아, 혹시 이 기록을 듣게 된다면…내가 틀렸다는 걸 알 거야.의학이 완벽해지는 순간, 인간은 사라진다.그걸 늦게 깨달았어.이제라도 누군가 내 대신 바로잡아야 해. 그게 너였으면 좋겠어.”그녀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마우스를 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지현 교수의 마지막 수술 환자, 그게 우혁이었다니.그녀가 살린 그 남자는 5년 전 자신이 목숨을 걸고 수술한 ‘그 사람’이었다.눈앞의 모든 장면이 천천히 뒤집혔다.그가 바다 속으로 뛰어들던 날,자신의 손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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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불완전함이 살린 빛

“파일을 열 겁니까?”우혁의 물음에 수연은 대답 대신 USB를 바라봤다.그 조그마한 금속 덩어리 안에 수많은 사람의 생과 죽음이 들어 있었다.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이걸 열면…”“모든 게 바뀌겠죠.”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그래도 열어야 합니다. 이 병원, 아니… 이 시스템이 사람을 삼키고 있어요.”USB를 꽂자, 화면이 깜빡이며 '기밀 파일 접근 경고’라는 문구가 떴다.보안 코드를 입력하라는 창이 나타났다.그녀는 숨을 고르고, 박지현의 생전 암호를 입력했다.“JH0314.”잠시 정적. 곧 화면이 열렸다.수십 개의 폴더가 빽빽하게 나열되어 있었다.'환자별 심박 로그', '의료 알고리즘 기록',그리고 맨 아래, 'D-Protocol'.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마지막 폴더를 클릭했다.그 순간, 수많은 데이터가 화면 위로 떠올랐다.심박 리듬, 수술 영상, 음성 로그, 투자자 통화 기록까지.그녀의 손이 멈춘 건 하나의 문장이 화면에 떠올랐을 때였다.“프로젝트 D-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의료.실패율 0%, 감정 개입 0%, 효율 100%.”그녀는 모니터를 응시한 채 중얼거렸다."이건 의학이 아니라, 조작이에요."잠시 뒤, 그녀는 회의실을 열었다.의국의 컴퓨터 여러 대를 연결해 화면을 동시에 띄웠다.우혁이 옆에서 조용히 도왔다.“이걸 공개하실 겁니까?”“예. 이 병원에서 벌어진 일, 그걸 봐야 하는 사람들은 내부에 있습니다.”의국에 모여든 의사들은 모두 긴장된 표정이었다.“오늘 오전 회진은 취소하겠습니다.”그녀의 첫마디에 다들 웅성거렸다.“지금부터 제가 보여드릴 건 이 병원이 지난 5년간 감춰온 진실입니다.”화면에 영상이 재생되었다.수술 장면, 심박 그래프, 환자 ID 목록.그리고 마지막에 박지현의 음성이 흘러나왔다.“의학이 완벽해지는 순간, 인간은 통계로 사라진다.”방 안은 얼어붙었다.한 의사가 불안한 듯 물었다.“교수님, 지금 이게 무슨 뜻입니까?”“이 병원의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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