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악마 상사의 부캐는 매너온도 99도: Chapter 81 - Chapter 90

90 Chapters

제81화 : 태준의 고민상담

일요일 정오, 강남의 탁 트인 테라스 카페.화려한 실크 셔츠를 입은 연애 고수 인동이 여유롭게 에그 베네딕트를 썰고 있었다.그 맞은편에 앉은 강태준은, 각도기라도 댄 듯 반듯하게 냅킨을 깔고 그 위에 태블릿 PC를 올려둔 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나, 이루다 PM 아니, 구 이루다 대리, 루다 씨와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했다."태준의 건조한 통보에, 인동의 포크에 찍혀 있던 수란이 접시 위로 툭 떨어지며 노른자가 터져버렸다."콜록! 뭐? 네가 연애를 한다고? 그때 그 대리님이랑?"사레가 들린 인동이 황급히 물을 들이켜는 사이, 태준은 태블릿 화면을 인동 쪽으로 스윽 밀었다."그래서 전문가인 너에게 컨설팅을 좀 의뢰하고 싶군."화면에는 가로축은 '시간', 세로축은 '감정의 동기화 지수'로 설정된 복잡한 꺾은선 그래프가 띄워져 있었다."첫 번째 안건은 '1일'의 기준점 모호성에 관한 거다.""……너 지금 연애 상담하러 와서 프레젠테이션 하냐?"인동이 어이없다는 듯 이마를 짚었지만, 태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화면의 특정 좌표를 포인터로 가리켰다."이게 복잡하다. 우리가 프라이빗 카페에서 비밀 유지 협약을 맺은 14시 30분을 기점으로 해야 할지.""아니면 방탈출 카페에서 암호 해독으로 암묵적 동기화가 이루어진 16시 15분으로 봐야 할지.""그것도 아니면, 루프탑에서 손병호 게임 중 그녀의 새끼손가락이 접혔던 21시 04분의 찰나를 데이터의 시작점(1일)으로 잡아야 할지 통계적으로 모호하군.""사실 훨씬 이전일 수도 있어... 많은 일들이 있었거든... 훗."태준이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인동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태블릿 화면을 탁 덮어버렸다."야, 이 강 로봇아! 연애는 수식 뚝딱 넣으면 답이 떨어지는 함수가 아니야!""그냥 네가 그윽한 눈빛으로 '우리 오늘부터 1일 할래요?' 하고 달콤하게 말한 날이 1일인 거라고!""알겠다. 로맨틱한 선언과 합의 절차의 부재가 문제였군."태준이 속으로 새로운 데이터를 입력하는 듯 진
Read more

제82화 : 루다가 원하는 조건

태준이 복잡한 얼굴로 창밖만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자, 인동이 다 식어버린 커피를 마저 들이켜며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내 말은, 당장 내일 출근해서 다짜고짜 폭탄선언을 하라는 게 아니야.""그럼 어떤 변수를 먼저 입력해야 하지?""네가 그 그룹 오너 일가라는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먼저 우리 루다 씨의 마음속 상자부터 살짝 열어보라는 뜻이지."인동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넸다."사람마다 사랑을 그리는 방식이 다 다르잖아.""어떤 사람은 돈이나 든든한 배경에 기대고 싶어 하고, 어떤 사람은 다정한 성격을 제일로 치기도 하니까.""자연스럽게 대화를 유도해서, 루다 씨가 남자의 '배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심스럽게 떠보란 말이야."태준이 태블릿 PC 화면을 만지작거리며 인동의 말을 조용히 곱씹었다."그녀가 사랑에 빠지는 가장 결정적인 조건들을 먼저 섬세하게 수집해야 한다는 뜻이군.""말을 참 딱딱하게도 하지만, 대충 그런 애틋한 뜻이 맞다.""좋다. 아주 훌륭하고 조심스러운 접근법이다."태준의 단정한 안경 너머로, 이 사랑을 꼭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애절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인동과 헤어지고 홀로 집으로 돌아온 태준은 서재의 책상에 앉아 태블릿 PC 전원을 켰다.그는 조심스럽게 화면을 켜고, 차가운 업무 데이터 따위가 아닌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새로운 감정선들을 하나씩 그려나가기 시작했다.과거 마케팅 1팀을 벌벌 떨게 했던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 상사', 감정 없는 '깡통 로봇' 같은 수식어는 더 이상 지금의 태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화면 중앙에 놓인 가장 크고 무거운 돌덩이는 '오너 일가라는 숨겨진 정체성'이었다.그리고 그 아래로, 루다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수많은 경우의 수들을 차분하게, 그리고 한없이 다정하게 정리해 나갔다.만약 그녀가 자신의 거대한 배경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놀랄까. 배신감에 그 예쁜 눈망울에 눈물이 고이지는 않을까.어떤 수식을 대입해도, 그녀가 아파할지도
Read more

제83화 : 인동과 태준의 계획

탕비실 문이 닫히고 루다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태준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머릿속의 중앙제어장치가 방금 전 입력된 데이터를 필사적으로 재처리하고 있었다.'배경이나 돈 같은 조건은 하나도 안 중요해요.''서로에게 거짓말하지 않고,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는 단단한 믿음이요.''저를 속이거나 기만하는 사람은 절대 용서할 수 없거든요.'도출된 결과는 단 하나로 수렴했다.'……내가 죽었군.'태준은 아직 따뜻한 커피 향이 남아있는 탕비실에서, 세상에서 가장 서늘하고 고독한 표정으로 캡슐 커피 머신을 노려보았다.자신이 재벌 3세라는 사실보다, 그것을 들키는 순간 저 맑은 눈망울에 상처가 번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태준의 심장을 짓눌렀다.점심시간.태준은 팀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가는 사무실을 뒤로하고, 아무도 올라오지 않는 옥상 비상계단으로 조용히 빠져나갔다.5월의 바람이 차갑지도 덥지도 않게 셔츠 깃을 파고들었다.그는 난간에 등을 기대고 스마트폰을 꺼내어, 연락처 목록에서 '인동'을 눌렀다.- "오, 강파고. 웬일이야, 점심에 전화는. 데이트하다 뭔가 또 터뜨렸냐?""현재 내 신뢰도 파산 확률이 99.9%에 육박한다."- "……뭐?""루다 씨가 오늘 아침 탕비실에서 직접 선고했다.""배경이나 조건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자신을 속이거나 기만하는 사람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전화기 너머에서 한동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곧이어, 이어지는 수화기 소리.- "푸하하하!""웃을 상황이 아니다."- "야, 강태준. 넌 진짜 재수가 없다. 그것도 엄청나게!""……알고 있다."- "세상에 여자가 몇이야. 하필 재벌 3세한테 '배경은 아무 상관없는데 거짓말은 죽음이다'라고 대놓고 선포하는 여자를 만났냐고.""인동아. 당장 해결책을 제시해라."- "……해결책."인동이 한 박자 쉬었다가 대답했다.- "너 지금 자진 신고 가능해?""그 변수를 입력하면 즉시 교제 종료되거나, 내가 사망한다는 결과가 도출된다.
Read more

제84화 : 루다의 진심

회사 건물 로비를 빠져나와 골목 안쪽으로 접어들 무렵, 5월의 저녁 공기가 두 사람의 어깨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태준의 오른쪽 귀에서는 인동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 "일단 걸어가면서 손부터 잡아. 걸음 멈추지 말고,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태준의 중앙제어장치가 그 한 단어에 풀가동되기 시작했다.'자연스러운 손 잡기'의 정의값을 찾기 위해 무려 0.3초가 소요됐다. 상대방의 보행 속도에 동기화한 뒤, 손목과 손가락의 접촉 각도를 15도에서 30도 사이로 유지하며, 과도한 압력 없이 부드럽게…… - "야! 너 또 계산하고 있지!? 그냥 덥석 잡으라고!" 태준이 짧게 헛기침을 한 번 뱉어내고는, 루다의 손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단하게 감싸 쥐었다. 루다의 발걸음이 흠칫 흔들렸다. 그러나 태준의 시선은 정면을 향해 빳빳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손이 아니라 시한폭탄을 잡고 가는 사람 같은 자세였다. 얽힌 손가락 사이로 힘이 살짝 들어갔다가 빠지기를 여러 번 반복했지만, 평소라면 그 미세한 악력을 정확히 카운트했을 태준의 두뇌는 이미 연산 능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루다는 아무것도 모른 채, 살짝 붉어진 얼굴로 가로등 불빛만 바라보며 걷고 있었다.잡힌 손의 따스함이 손목을 거쳐 어깨까지 천천히 번지는 느낌이 어색하면서도 싫지가 않았다. '……팀장님, 왜 갑자기 손을 잡았지? 손 잡는 사람이 아닌데. 뭐 잘못 드셨나.' 이어폰에서 인동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 "잡았지? 오케이, 그 손 절대 놓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놓지 마. 알았어?" 태준이 루다의 손을 조금 더 꽉 쥐었다. 루다가 조용히 눈을 내리깔며 그 손을 바라보았다. 뭔가를 말하려다가, 그냥 안 했다. 말로 꺼내는 순간 이 다정한 온도가 깨질 것 같아서. 예약된 레스토랑은 좁은 골목 안쪽, 낡은 붉은 벽돌 건물 1층에 자리하고 있었다.손바닥만 한 간판 하나만 달려 있어서 모르는 사람은 그냥 지나치기 십상인 곳이었다. 나무 문을
Read more

제85화 : 한도 무제한, 신뢰도 한도초과

낭만적인 밤은 계산서가 나오기 전까지였다.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선 두 사람이 카운터로 향했다.루다가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내려 하자, 태준이 한발 앞서 손을 들었다."제가 하겠습니다.""매번 팀장님께서 사주셨는데, 오늘은 제가 사겠습니다!""아닙니다. 데이트 신청은 제가 했으니까요. 다음에 기회를 드리겠습니다."태준의 반대에 루다가 웃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14만 5천 원입니다."직원의 안내에 태준이 지갑을 펼쳤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양초 불빛 아래에서 몽글몽글하게 녹아 있던 그의 중앙제어장치가, 바로 그 순간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평소 회사 직원들과 함께 있을 때 쓰던 평범한 신용카드. 그 옆에 무심코 꽂혀 있던, 지난달 본가에 들렀다 무심코 챙겨 나온 카드 한 장.태준의 손가락이, 하필이면 후자를 집어 들었다.매트한 광택을 머금은, 묵직한 무게감의 새까만 카드. 한도 무제한, 최상위 0.1%만이 발급받을 수 있다는 그 물건이 직원의 손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카드를 받아 든 직원의 손이 잠시 허공에서 멈췄다.그 짧은 머뭇거림이, 영수증을 받으려 다가오던 루다의 시선을 정확히 그 카드로 끌어당겼다."어? 팀장님!"루다의 부름에 태준은 자신이 카드를 잘못 꺼냈음을 알아차렸다.태준의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식은땀 한 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렸다."그 카드……."태준의 중앙제어장치가 비상 경보를 울리며 풀가동되기 시작했다."얼마 전에 인터넷 기사에서 봤는데."루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연회비만 수천만 원이라는, 그 재벌들 전용 카드랑 똑같이 생겼네요?"방금 전까지 '어설프더라도 진짜인 사람이 좋다'는 루다의 말을 가슴 깊이 새긴 그 심장이, 입으로 튀어 나올 듯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조금 전 식사를 마칠 무렵 인동과의 통화는 종료되었고 무선 이어폰은 이미 꺼져 있었다. 위기의 순간 태준을 구해줄 아군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아…… 이건."태준의 반응이 찰나동안 멈추는
Read more

제86화 : 핵폭탄 투하

다시 평범한 회사의 일상이 돌아왔다. 화요일 아침 사무실에서 마주쳤을 때,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깍듯한 '팀장'과 '팀원'으로 돌아가 있었다. 태준은 평소처럼 루다의 기획안 품의를 빨간 펜으로 난도질했고, 루다는 평소처럼 깨지면서도 묵묵히 수정본을 올렸다. 다만 반려 사유 끝에 '단, 3페이지 도입부 방향성은 우수함'이라는 한 줄이 슬쩍 붙어 있었다. 회사에서 그가 표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애정 표현이었다.수요일 오후.이날도 루다의 기획안을 어김없이 반려당했다."타깃 분석에 근거가 부족합니다. 재검토."평소와 다를 바 없는 반려였지만, 루다는 더 이상 예전처럼 어깨가 움츠러들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철저히 남남처럼, 그러나 그 남남 사이를 흐르는 온도만큼은 두 사람만 아는 비밀이었으니까. 다만, 그 미묘한 온도를 자꾸만 곁눈질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야, 이루다." 오후 무렵, 최지원 대리가 슬쩍 의자를 굴려 다가와 속삭였다. "너 요즘 강 팀장님한테 안 까이는 날이 없는데, 표정은 왜 이렇게 좋냐?" "음……까여도 월급은 나오니까?" 루다가 능청을 떨자 지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의심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지만, 결정적 증거 또한 잡히지 않은 루다였다. 바로 그때, 사무실에 청천벽력 같은 공지가 떨어졌다. "내일 저녁, 마케팅 본부 전체 회식 있겠습니다. 6시 30분, 강남 '우대갈비'입니다. 본부장님께서 직접 마련하신 자리이니, 전원 참석입니다." 태준의 건조한 한마디에 사무실이 술렁였다. 마케팅 본부 전체 회식. 1팀, 2팀, 기획팀까지 수십 명이 한자리에 모이는 대규모 자리였다. 게다가 평소 코빼기도 안 비치던 본부장이 직접 마련한 자리라니. "우대갈비?! 본부장님이 웬일이래?" 서은호 수석이 신난 목소리로 최지원 대리에게 물었다. 회식이라면 일단 좋아하고 보는 인간이었다. "이번에 1분기 본부 실적이 굉장히 좋았다고 들었어요. 아마 그거 때문 아닐까요?" "아 진짜? 이야 그럼 내년에 성과급 좀 기대해
Read more

제87화 : 비상상황입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이 우대갈비 한쪽 테이블 위로 내려앉았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차유진 책임이었다.천장을 뚫고 승천하던 영혼을 강제 회수한 그녀가, 침착하게 민호의 양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민호 씨, 술 너무 많이 마셨네요.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책임님 어제도 저랑 전화하셨잖아여…….""민호 씨.""왜 자꾸 안 그런 척하시는 거예요오……."유진의 마지막 방어선이 무너지는 소리가, 루다에게는 또렷이 들렸다.서은호 수석의 동공이 팝핀 댄스를 추기 시작했고, 주변 팀원들의 귀가 일제히 이쪽을 향하는 게 느껴졌다.'안 돼! 여기서 걸리면 다 끝장이야!'순간, 루다는 테이블 아래로 다리를 쭉 뻗어 맞은편에 앉은 태준의 정강이를 퍽! 하고 걷어찼다."흑……!"갑작스러운 타격에 태준의 무테안경이 미세하게 흔들렸다.루다는 눈으로 미친 듯이 모스 부호처럼 깜빡이며 입모양으로 뻐끔거렸다.'빨리! 뭐라도 해봐요!'그 절박한 SOS를 순식간에 해독한 태준이,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그리고 평소 회의실에서 기획안을 반려할 때보다 훨씬 더 서늘하고 심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비상 상황입니다."테이블에 쏠려 있던 시선이 일제히 태준에게 집중되었다."방금 본사 서버 모니터링 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오픈 예정인 팝업스토어 사전 예약 페이지 트래픽에 치명적인 에러가 발생했습니다.""네?! 에러요?!""지금 당장 실무진의 수동 복구가 필요합니다. 이루다 대리, 노트북 챙기십시오."태준의 시선이 유진을 향했다.유진 역시 그 기가 막힌 임기응변을 0.1초 만에 파악하고는 칼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1팀 협업 라인도 즉시 합류하겠습니다. 김민호 사원, 일어나세요.""어어? 저, 저도 갈까요 팀장님?"서은호 수석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일어나려 하자, 태준이 단호하게 손을 들어 제지했다."서 수석님은 여기 남아주십시오.""네? 저는 왜요?""본부장님을 전담 마크하여 이 자리를 끝까지 사수하는 것
Read more

제88화 : 태준의 결심

금요일 오전 9시.마케팅 1팀 사무실에는 어제 폭심지를 함께 경험한 동맹 네 사람의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차유진 책임은 어제와 다름없는 완벽한 칼정장 차림이었다.다만 평소보다 10분 일찍 출근해서, 괜히 책상 위를 세번이나 반복해서 닦고 있었다.그리고 김민호 사원은, 평소의 헐렁한 후드티 같은 복장 대신 위아래로 완벽하게 각을 잡은 짙은 네이비 수트를 빼입고 출근했다.심지어 머리에는 왁스까지 발라 깔끔하게 포마드로 빗어 넘긴 폼이, 멀리서 봐도 '나 오늘 중대 발표 합니다'라고 온몸으로 외치는 듯했다.루다는 그 두 사람의 비장한 뒷모습을 흘긋 바라보며 키보드 위에서 손을 멈췄다.'후, 오늘 드디어...'그때, 키보드 옆 스마트폰에서 사내 메신저 알림이 조용히 떴다.[강태준 팀장: 차유진 책임이 오전 중 공개 선언 예정입니다. 1팀 인원의 적절한 호응 유도와 사후 케어 부탁드립니다.]루다는 답장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심장이 묘하게 두근거렸다.자신의 일도 아닌데, 이상하게 손끝이 떨려왔다.오전 10시.월말 정산으로 바쁜 타자 소리만 울리던 와중, 차유진 책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사무실 한가운데로 나서며 가볍게 헛기침을 하자, 키보드 소리가 일제히 멎었다."잠시만 시간 좀 빌리겠습니다."유진의 목소리에는 어젯밤 카페에서 봤던 떨림이나 망설임이 전혀 없었다.어딘지 모르게 단단한 느낌이 들었다.그녀가 옆자리의 민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민호 씨, 일어나요."수트를 쫙 빼입은 민호가 뻣뻣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긴장한 탓에 바지 재봉선을 꽉 쥔 두 손은 땀에 젖어 있었지만, 시선만큼은 흔들리지 않은 채 유진을 향해 있었다.유진이 깊이 숨을 고르더니, 또렷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저, 차유진은…… 김민호 사원과 사귀고 있습니다."순간, 사무실에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듯한 정적이 흘렀다."만난 지 두 달째고요.""어젯밤 회식 자리에서 본의 아니게 일부 분들께 먼저 알려진 점, 송구하게 생각합니
Read more

제89화 : 이건 첫번째 스텝 - 사는 곳 공개하기

토요일 오전 11시.평소라면 한 주를 정리하며, 다음 주 계획과 실현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오늘 태준은 그러지 못했다.신사동 골목 안쪽, 인동이 잡아둔 한적한 카페.마주 앉은 인동이 평소의 장난기를 싹 지운 채, 두꺼운 노트와 만년필을 꺼내 들고 있었다."자, 강파고. 본격적으로 시나리오 짜자. 마음 단단히 먹어.""…….""내가 너 같은 케이스를 한두 번 본 게 아니야.""한번 무너지면 다 무너져.""그러니까 지금부터는 단계가 핵심이다, 차근차근 해보자고."태준이 안경을 한 번 치켜올렸다.평소엔 자신이 시나리오의 전문가였는데, 오늘만큼은 그야말로 P의 화신인 인동이 모든 판을 지휘하고 있었다."좋다. 어떤 스텝으로 가는 거지?""총 5단계.""너무 적으면 충격을 받고, 너무 많으면 피로해져.""다섯 단계가 딱 황금비율이야."인동이 노트를 펼쳐 굵게 줄을 그었다."1단계."태준이 시선을 노트로 내렸다."먼저 네 사적인 공간을 공개해.""너희 집 말이야. 지금껏 한 번도 데려간 적 없지?""……한번 있기는 한데, 정식으로 초대한 건 아니었어.""그러면 정식으로 초대하고, 네가 평소에 진짜로 어떻게 사는지 보여줘.""첫인상이 한 번 묵직하게 박혀야 다음 단계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너무 빨리 드러내면 그쪽이 진짜를 받아들이기도 전에 기겁할지도 몰라.""…….""2단계. 너의 사적인 차, 시계, 옷.""회사용 위장막 말고 진짜 네 일상의 것들을 서서히 노출해.""평범한 회사원이 누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걸 시각적으로 먼저 익숙해지게 만드는 거지."만년필이 종이 위를 사각거렸다."3단계. 이때부터가 진짜 시작이야.""가족 이야기를 꺼내.""처음부터 '재벌 3세'라고 까지는 절대 마.""'집안이 좀 복잡하다', '아버지가 사업하신다' 정도로 정보를 조각조각 흘려.""4단계.""본가 방문이나 가족과의 식사.""진짜 현실과 직접 마주하게 하는 거다.""……그리고 마지막 5단계."인동
Read more

제90화 : 서서히 드러나는 태준의 진짜 모습

"……와."평소 강태준의 무미건조한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은은한 보라색과 호박색 조명이 천장에서 부드럽게 내려앉고, 한쪽 벽면을 빼곡히 채운 레트로 게임기와 피규어들.그 옆으로는 색깔별로 단정하게 정리된 책장과, 안쪽 깊숙이 놓인 가죽 리클라이너 한 대.먼지 한 톨 없이 정갈하지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었다."……여기, 진짜 팀장님이 좋아하시는 거 다 모아 두신 거구나."루다가 작게 중얼거리며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태준은 그녀의 한 걸음 뒤에서, 평소답지 않은 조용한 미소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이루다 씨.""네?""이 방에 정식으로 누군가를 들인 건, 오늘이 처음입니다."루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정말로요?""사실 친구가 한 명 있긴 한데, 들인 게 아니라 비밀번호를 알고 알아서 침입하는 겁니다. 물론 남자입니다."쩔쩔매는 태준의 모습에 루다가 결국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역시 팀장님답네요."웃음 끝에 두 사람의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그 짧은 정적 안에서, 그동안 두 사람 사이에 쳐져 있던 어떤 견고한 막 하나가 천천히 녹아내리는 게 느껴졌다.루다는 자연스럽게 게임기 진열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벽면 가득 놓인 컬렉션.패미컴, 슈퍼 패미컴, 메가 드라이브, 닌텐도 64.그리고 각각에 어울리는 컨트롤러와 카트리지들이 라벨까지 단정하게 붙여진 채 완벽한 오와 열을 맞추고 있었다.루다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어?"루다가 진열장 가까이 다가가 한쪽 칸을 유심히 응시했다.투명한 케이스 안에는 익숙한 모양의 닌텐도 64 본체와, 그 위에 곱게 놓인 카트리지들이 있었다.너무나 익숙한 보존 상태.본체 모서리의 아주 작은 흠집과, 컨트롤러 선에 희미하게 남은 스티커 끈끈이 자국까지.루다는 잠시 숨을 멈췄다가, 천천히 태준을 돌아보았다."이거…… 제가 팔았던 그거 맞죠?"태준이 안경을 한 번 치켜올렸다."……그렇습니다.""
Read more
PREV
1
...
456789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