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동안에도 루다의 웃음은 멎지 않았다.“진짜 억울하셨겠다. 본인 차라는데 아무도 안 믿어줘서.”“루다 씨까지 웃으실 줄은 몰랐습니다.”“저는 요트 때문에 웃은 거예요.”“그 대답도 별로 위로가 되지는 않는군요.”진지하게 서운해하는 얼굴에 루다는 또 웃고 말았다.차는 퇴근길 차량들 사이로 부드럽게 들어섰다. 버스가 바로 옆을 지나가는데도 안쪽은 고요했다. 천장의 작은 별들이 차창에 비쳐 저녁 풍경 위로 겹쳤다.“이 차는 평소에 언제 타요?”“멀리 이동할 때 가끔 탑니다.”“그럼 오늘은 멀리 가요?”“루다 씨 집으로 갑니다.”“겨우 삼십 분 타려고 이걸 가져오신 거예요?”태준이 앞을 보며 대답했다.“그 삼십 분 동안 루다 씨가 타니까요.”루다는 안전벨트를 만지던 손을 멈췄다.별생각 없이 물었는데, 태준의 대답이 루다의 마음을 자꾸 간지럽혔다. “……나 편하게 태워주려고요?”“그랬는데, 자꾸 몸을 굳히고 계셔서. 차를 잘못 골랐나 싶었습니다.”“좋기는 해요. 엄청.”태준의 입가가 풀리자 루다가 슬쩍 덧붙였다.“내릴 때 요금만 안 뜨면요.”“별도로 청구하지 않습니다.”“정말요?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예요.”루다는 웃으며 시트에 등을 기댔다.그저 좋은 차에 자신을 태워주고 싶었던 걸까.그러기에는 그의 집과 블랙카드, 어제의 시계가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루다는 운전하는 옆얼굴을 바라보다 질문을 조금 더 품어두기로 했다.집 근처 마트가 보였을 때, 루다가 몸을 바로 세웠다.“저기서 내려주세요.”“집 앞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장을 좀 보려고요. 오늘 저녁은…… 제가 차려드리고 싶어서.”태준이 잠깐 그녀를 봤다.대답이 늦어지자 루다가 괜히 덧붙였다.“저 밥 할 줄 알아요. 맨날 배달만 시키는 거 아니거든요.”“그걸 걱정한 게 아닙니다.”마트 주차장으로 방향을 틀며 태준이 말했다.“좋아서, 메뉴도 못 물어봤습니다.”루다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먼저 초대해놓고 이제 와 얼굴이 더워졌다
화요일, 퇴근 무렵루다는 모니터 오른쪽 하단의 숫자가 6시를 넘긴 후에도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어제 검색한 7억 2천만 원짜리 시계가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기사를 열어볼수록 태준의 말이 맞다는 증거만 늘었다. 국내 단 한 점. 브랜드를 통한 직접 인도. 구매자 신원 비공개.그런데 진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태준이 더 멀게 느껴졌다.'당장 묻고 싶지만…….'루다는 태준의 자리로 시선을 옮겼다.태준은 오늘도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표정으로 결재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오른쪽 손목은 다시 깨끗했다. 수억 원짜리 시계는 하루 만에 자취를 감춘 뒤였다.'기다려 달라고 했으니까.'루다는 어제와 다른 결론을 내렸다.'그래. 묻지 말고 좀 더 보자.'그때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태준 씨 : 지하 2층에서 기다리겠습니다.]루다의 입꼬리가 자신도 모르게 살짝 올라갔다가, 곧 제자리로 돌아왔다.고개를 들자, 태준이 서류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지하 2층 주차장으로 내려간 루다는 두리번거리며 태준의 차를 찾았다.팀장 지정 주차구역에는 차가 한 대뿐이었다. 그런데 평소의 세단 대신, 유난히 눈에 띄는 차가 서 있었다.깊은 밤색의 차체는 주차장의 형광등 아래서도 물결처럼 빛났다. 엠블럼은 루다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양이었다.차 안에 있던 태준이 내리고, 조수석 문을 열며 루다에게 말했다."타시죠."루다는 시트보다 태준의 얼굴을 먼저 보았다."우리 오늘 뭐 촬영해요?""촬영 일정은 없습니다.""그런데 이 차는 뭐예요? 신차 론칭 이벤트용 콘셉트카?"루다는 묻는 동안 태준의 눈을 지켜봤다.그가 머뭇거리는지, 눈동자가 흔들리지는 않는지.태준은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콘셉트카가 아닙니다.""그럼요?""제가 사적으로 이용하는 차량입니다. 평소에는 따로 보관했습니다.""차를요? 따로 보관했다고요?""시선을 이끄는 차라서 잘 끌고 다니지 않습니다.""그러니까…… 팀장님 차라는 거네요?""정확히는 법인 명의
월요일, 오전 8시 50분.마케팅 1팀 사무실로 들어서는 이루다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반 박자 느렸다.어젯밤부터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장면 때문이었다.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던 압구정의 아파트. 루다가 팔았던 닌텐도 64를 보물처럼 보관하고 있던 남자. 그리고 책장 끝의 오래된 사진 한 장.광활한 정원 한가운데서 꼿꼿하게 카메라를 바라보던 어린 강태준.'아파트야 그렇다 쳐. 직책자 이상한테만 지급했던, 스톡옵션에 영끌까지 하면…… 아니, 그래도 좀 무리인가?'루다는 밤새 몇 번이나 뒤집었던 계산을 다시 해보았다.'그런데 고향집 정원은 뭐였지? 무슨 시골집 마당이 수목원만 해.'그때 정갈한 우디 향이 코끝을 스쳤다.자리에 앉아 있던 태준과 눈이 마주쳤다.목 끝까지 단정하게 채운 흰 셔츠와 각 잡힌 네이비 수트. 무테안경 너머로 루다를 확인한 태준은 다른 팀원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만큼만 입꼬리를 움직였다.루다도 작게 웃어 보였다.겉보기에는 지극히 평온한 월요일 아침이었다.하지만 태준의 머릿속 중앙제어장치는 출근 전부터 하나의 과업만을 처리하고 있었다.'1단계, 사적 공간 공개는 완료됐다.'그는 검토 중인 보고서 위로 오른팔을 올려놓았다. 평소보다 셔츠 소매가 조금 짧게 당겨지며 묵직한 은빛 시계가 모습을 드러냈다.'오늘부터 2단계. 사적 소지품의 자연스러운 노출.'정교한 기계장치가 훤히 보이는 스켈레톤 다이얼. 푸른색으로 가공된 투르비용 케이지가 초침 아래에서 끊임없이 회전하고 있었다.국내에 단 한 점만 정식 배정된 하이엔드 워치였다.그리고 왼쪽 손목에는 평소의 스마트워치가 그대로 채워져 있었다.재벌가의 일상을 보여주는 것과 실시간 심박수 데이터를 포기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태준은 양쪽 손목에 하나씩 차는 것으로 두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했다.적어도 본인은 그렇게 판단했다.'고가의 물건에 차례로 익숙해지면, 최종 정보 공개 시 충격값을 최소화할 수 있다.'태준이 오른손으로 만년필을 집었다. 시계가 잘 보이도록 손목의
"……와."평소 강태준의 무미건조한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은은한 보라색과 호박색 조명이 천장에서 부드럽게 내려앉고, 한쪽 벽면을 빼곡히 채운 레트로 게임기와 피규어들.그 옆으로는 색깔별로 단정하게 정리된 책장과, 안쪽 깊숙이 놓인 가죽 리클라이너 한 대.먼지 한 톨 없이 정갈하지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었다."……여기, 진짜 팀장님이 좋아하시는 거 다 모아 두신 거구나."루다가 작게 중얼거리며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태준은 그녀의 한 걸음 뒤에서, 평소답지 않은 조용한 미소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이루다 씨.""네?""이 방에 정식으로 누군가를 들인 건, 오늘이 처음입니다."루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정말로요?""사실 친구가 한 명 있긴 한데, 들인 게 아니라 비밀번호를 알고 알아서 침입하는 겁니다. 물론 남자입니다."쩔쩔매는 태준의 모습에 루다가 결국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역시 팀장님답네요."웃음 끝에 두 사람의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그 짧은 정적 안에서, 그동안 두 사람 사이에 쳐져 있던 어떤 견고한 막 하나가 천천히 녹아내리는 게 느껴졌다.루다는 자연스럽게 게임기 진열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벽면 가득 놓인 컬렉션.패미컴, 슈퍼 패미컴, 메가 드라이브, 닌텐도 64.그리고 각각에 어울리는 컨트롤러와 카트리지들이 라벨까지 단정하게 붙여진 채 완벽한 오와 열을 맞추고 있었다.루다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어?"루다가 진열장 가까이 다가가 한쪽 칸을 유심히 응시했다.투명한 케이스 안에는 익숙한 모양의 닌텐도 64 본체와, 그 위에 곱게 놓인 카트리지들이 있었다.너무나 익숙한 보존 상태.본체 모서리의 아주 작은 흠집과, 컨트롤러 선에 희미하게 남은 스티커 끈끈이 자국까지.루다는 잠시 숨을 멈췄다가, 천천히 태준을 돌아보았다."이거…… 제가 팔았던 그거 맞죠?"태준이 안경을 한 번 치켜올렸다."……그렇습니다.""
토요일 오전 11시.평소라면 한 주를 정리하며, 다음 주 계획과 실현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오늘 태준은 그러지 못했다.신사동 골목 안쪽, 인동이 잡아둔 한적한 카페.마주 앉은 인동이 평소의 장난기를 싹 지운 채, 두꺼운 노트와 만년필을 꺼내 들고 있었다."자, 강파고. 본격적으로 시나리오 짜자. 마음 단단히 먹어.""…….""내가 너 같은 케이스를 한두 번 본 게 아니야.""한번 무너지면 다 무너져.""그러니까 지금부터는 단계가 핵심이다, 차근차근 해보자고."태준이 안경을 한 번 치켜올렸다.평소엔 자신이 시나리오의 전문가였는데, 오늘만큼은 그야말로 P의 화신인 인동이 모든 판을 지휘하고 있었다."좋다. 어떤 스텝으로 가는 거지?""총 5단계.""너무 적으면 충격을 받고, 너무 많으면 피로해져.""다섯 단계가 딱 황금비율이야."인동이 노트를 펼쳐 굵게 줄을 그었다."1단계."태준이 시선을 노트로 내렸다."먼저 네 사적인 공간을 공개해.""너희 집 말이야. 지금껏 한 번도 데려간 적 없지?""……한번 있기는 한데, 정식으로 초대한 건 아니었어.""그러면 정식으로 초대하고, 네가 평소에 진짜로 어떻게 사는지 보여줘.""첫인상이 한 번 묵직하게 박혀야 다음 단계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너무 빨리 드러내면 그쪽이 진짜를 받아들이기도 전에 기겁할지도 몰라.""…….""2단계. 너의 사적인 차, 시계, 옷.""회사용 위장막 말고 진짜 네 일상의 것들을 서서히 노출해.""평범한 회사원이 누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걸 시각적으로 먼저 익숙해지게 만드는 거지."만년필이 종이 위를 사각거렸다."3단계. 이때부터가 진짜 시작이야.""가족 이야기를 꺼내.""처음부터 '재벌 3세'라고 까지는 절대 마.""'집안이 좀 복잡하다', '아버지가 사업하신다' 정도로 정보를 조각조각 흘려.""4단계.""본가 방문이나 가족과의 식사.""진짜 현실과 직접 마주하게 하는 거다.""……그리고 마지막 5단계."인동
금요일 오전 9시.마케팅 1팀 사무실에는 어제 폭심지를 함께 경험한 동맹 네 사람의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차유진 책임은 어제와 다름없는 완벽한 칼정장 차림이었다.다만 평소보다 10분 일찍 출근해서, 괜히 책상 위를 세번이나 반복해서 닦고 있었다.그리고 김민호 사원은, 평소의 헐렁한 후드티 같은 복장 대신 위아래로 완벽하게 각을 잡은 짙은 네이비 수트를 빼입고 출근했다.심지어 머리에는 왁스까지 발라 깔끔하게 포마드로 빗어 넘긴 폼이, 멀리서 봐도 '나 오늘 중대 발표 합니다'라고 온몸으로 외치는 듯했다.루다는 그 두 사람의 비장한 뒷모습을 흘긋 바라보며 키보드 위에서 손을 멈췄다.'후, 오늘 드디어...'그때, 키보드 옆 스마트폰에서 사내 메신저 알림이 조용히 떴다.[강태준 팀장: 차유진 책임이 오전 중 공개 선언 예정입니다. 1팀 인원의 적절한 호응 유도와 사후 케어 부탁드립니다.]루다는 답장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심장이 묘하게 두근거렸다.자신의 일도 아닌데, 이상하게 손끝이 떨려왔다.오전 10시.월말 정산으로 바쁜 타자 소리만 울리던 와중, 차유진 책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사무실 한가운데로 나서며 가볍게 헛기침을 하자, 키보드 소리가 일제히 멎었다."잠시만 시간 좀 빌리겠습니다."유진의 목소리에는 어젯밤 카페에서 봤던 떨림이나 망설임이 전혀 없었다.어딘지 모르게 단단한 느낌이 들었다.그녀가 옆자리의 민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민호 씨, 일어나요."수트를 쫙 빼입은 민호가 뻣뻣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긴장한 탓에 바지 재봉선을 꽉 쥔 두 손은 땀에 젖어 있었지만, 시선만큼은 흔들리지 않은 채 유진을 향해 있었다.유진이 깊이 숨을 고르더니, 또렷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저, 차유진은…… 김민호 사원과 사귀고 있습니다."순간, 사무실에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듯한 정적이 흘렀다."만난 지 두 달째고요.""어젯밤 회식 자리에서 본의 아니게 일부 분들께 먼저 알려진 점, 송구하게 생각합니
같은 시각, 마케팅 1팀의 상석.강태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완벽하게 각 잡힌 서류철, 먼지 한 톨 없는 키보드, 그리고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서늘한 표정. 누가 봐도 '강로봇'이라는 별명에 걸맞은 완벽한 업무 모드였다. 그는 방금 전 회의실에서 이루다 대리의 기획안을 반려했던 순간을 복기했다. '이루다 대리. 톡톡 튀는 발상 자체는 나쁘지 않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타겟층의 심리를 찌르는 직관적인 기획력만큼은 팀 내에서 가장 뛰어났다.' 하지만 그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논리적으로 뒷받침할
아침 9시.마케팅 1팀 회의실에는 때아닌 시베리아 기단이 머물고 있었다. 히터가 빵빵하게 돌아가고 있음에도 팀원들은 약속이나 한 듯 어깨를 움츠렸다. 그 중심에는 마케팅 1팀의 기온을 영하로 떨어뜨린 주범, 강태준 팀장이 앉아 있었다. "이루다 대리."서늘하고 낮게 깔린 목소리에 루다의 어깨가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네, 팀장님.""이 기획안, 주말 내내 쓴 겁니까, 아니면 주말 예능 보면서 발가락으로 쓴 겁니까?""……주말 내내, 손으로 썼습니다.""그럼 손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 병원부터 가보셔야겠네요. 타
다음 날 아침 8시 50분. 마케팅 1팀 사무실.루다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출근해 자리에 앉았다. '아, 어제 괜히 뒷담화를 해선...'어제 햇살강쥐님에게 '극혐하는 빌런 상사'라며 신명 나게 뒷담화를 날렸던 기억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혹시 햇살강쥐 계정을 강태준도 볼 수 있는 상황이었으면 어쩌지? 엄청난 찜찜함과 불안감이 몰려와, 어제 밤새 뒤척이느라 한숨도 자지 못한 탓이었다.'아니야, 설마...'애써 합리화하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지만, 여전히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본인이든 조카의 심부름이든, 어
"루다공...주님과 게임기 직거래입니다. 혹시... 이 대리가 루다 공...주님...?!"태준은 자신의 망막에 맺힌 피사체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머릿속의 논리 회로가 과부하로 타오르기 직전, 루다가 등 뒤로 숨겼던 종이백을 슬그머니 앞으로 꺼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세상에! 팀장님 조카분이 햇살강쥐님이셨군요! 제가 바로 그 거래 상대방이에요. 루다공주요!"루다는 종이백을 그의 품 쪽으로 쑥 내밀었다. 태준은 루다의 종이백과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한 글자 한 글자 씹어 뱉듯 물었다."……이루다 대리가, 루다공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