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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화 : 드디어 밝혀진 태준의 속마음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태준의 아파트.도어락이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열리고, 태준이 루다를 안으로 안내했다.현관에 들어선 루다는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었다. 먼지 한 톨 없이 각 잡힌 슬리퍼, 무채색으로 통일된 모던한 가구들, 흐트러짐 없는 쿠션까지. 마치 인테리어 잡지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한 완벽한 모델하우스 그 자체였다."와…… 팀장님. 집이 진짜 엄청 깔끔하네요. 로봇 청소기가 24시간 돌아가도 이것보단 안 깨끗할 것 같은데.""생활 공간의 무질서는 곧 사고의 무질서로 이어지기 마련이니까요. 편하게 구경하십시오. 손만 씻고 음식 세팅해서 오겠습니다."태준이 코트를 벗어 잘 다려진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루다는 소파에 조심스레 엉덩이를 걸치고 주방 쪽을 힐끔거렸다. 넓은 아일랜드 식탁에 서서 포장해 온 피자와 스테이크를 오븐에 데우고 능숙하게 그릇에 옮겨 담는 그의 떡 벌어진 등판을 보며, 루다는 새삼스럽게 심장이 두근거렸다.'내가 지금 팀장님 아파트에 함께 있다니... 이게 꿈은 아니겠지?'"이리 와서 앉으십시오."태준의 부름에 식탁으로 다가간 루다는 입을 떡 벌렸다. 분명 먹다 남은 음식을 싸 온 것인데, 식탁 위에는 완벽한 플레이팅을 거친 고급스러운 디너가 차려져 있었다.태준이 스테이크 옆에 놓인 와인잔에 맑고 연한 황금빛 액체를 따라주었다."어? 화이트 와인이네요?""가벼운 모스카토 계열입니다. 루다 PM에게는 묵직한 레드 와인보다는 가볍고 달콤한 화이트 와인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데이터가 기억나서 준비했습니다."루다는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숨기지 못하고 와인잔을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오붓한 저녁 식사를 즐겼다. 회사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태준은 루다가 잔을 비울 때마다 조용히 와인을 채워주거나 스테이크를 먹기 좋게 썰어 그녀의 앞접시에 놓아주었다. 그의 시선은 시종일관 루다를 향해 따뜻하게 머물러 있었다.기분 좋게 와인을 비운 후, 루다는 화장실을 찾기 위해 복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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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화 : 전화벨은 원래 이 타이밍에 울리는 겁니다.

태준의 숨결이 루다의 입술에 닿으려던 찰나였다.따르르릉-!! 따르르르릉-!!정적을 뚫고 거실 테이블 위에서 태준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비명을 질렀다. 두 사람의 몸이 마치 전기 충격을 받은 듯 동시에 굳었다. 루다는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소파 끝으로 물러났고, 태준은 허공을 움켜쥐었던 손을 내리며 아주 천천히, 그리고 살벌하게 휴대폰을 바라보았다.화면에 뜬 이름 [서은호 수석]."……무시하십시오. 시스템 장애일 뿐입니다."태준이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다시 루다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서 수석의 집념은 멈출 줄 몰랐다.따르르릉-!! 끊기자마자 다시 시작되는 벨소리에 루다가 사색이 되어 손사래를 쳤다."아, 아니에요, 팀장님! 서 수석님 성격에 이 시간에 계속 전화하시는 거면 진짜 큰일 난 걸지도 몰라요! 빨리 받으세요!"태준은 34년 인생에서 가장 비효율적이고 흉폭한 분노를 느끼며 휴대폰을 낚아챘다."서은호 수석. 지금 시각이 오후 10시 42분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습니까.""아유, 팀장님! 주무시려던 참이셨습니까?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지난번에 팀장님이 맛있다고 지나가듯 말씀하셨던 그 화덕 피자집 있잖아요. 상호명이 정확히 뭐였죠? 제 와이프가 당장 내일 가자고 난리라서 인터넷을 찾다 찾다 도저히 못 찾겠어서 결국 염치 불구하고 여쭙습니다! 혹시 메뉴판 사진이라도 찍어두신 거 없으십니까!?"순간, 태준의 미간이 좁아지다 못해 실금이 갈 정도로 구겨졌다. 루다는 소파 구석에서 그의 표정을 살피며 입을 틀어막았다."서 수석. 고작 밀가루 반죽 파는 식당 이름 때문에 내 치명적인 사적 가용 시간을 침해한 겁니까? 지금 이 통화가 내 연산 회로에 얼마나 막대한 오류를 일으켰는지 아십니까?""예? 연산 뭐요? 아, 팀장님 목소리가 왜 이렇게 갈라지셨어... 혹시 감기 오십니까? 아, 루다 씨는 아까 야근 끝나고 잘 보냈죠?""……서 수석. 내일 오전 9시까지 금주 프로모션 데이터 재검토해서 보고하십시오. 1분이라도 늦으면 이번 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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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화 : 완벽한(?) 데이트를 위한 통합 마스터 자료

금요일 저녁, 어스름한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서울 도심.조수석 문이 열리고 루다가 차에 올라타자, 운전석에 앉아 있던 강태준의 시선이 느릿하게 그녀를 향했다.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그의 짙은 눈동자는, 마치 오랜 시간 공들여 쳐둔 덫에 마침내 사냥감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을 확인한 맹수의 그것처럼 위험하고도 깊었다."안전벨트 매십시오. 곧장 출발하겠습니다.""네, 팀장님! 아, 근데 인터넷도 안 터지는 깊은 산속이라고 하셨잖아요. 진짜 산속에서 뭐 하려고요? 곰 나오면 어떡해요?"루다가 안전벨트를 딸깍 채우며 농담을 던지자, 태준이 핸들을 잡은 채 무심하게 뒷좌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꽤 묵직해 보이는 검은색 서류철 하나를 루다의 무릎 위로 툭, 올려놓았다."이게 뭐예요?""오늘부터 1박 2일간 진행될 글램핑의 '통합 마스터 자료'입니다.""……네?"루다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서류철을 펼쳤다. 첫 페이지부터 아주 기가 막힌 광경이 펼쳐졌다. 컬러로 예쁘게 출력된 엑셀 시트에는 시간대별 수도권 외곽 교통량 예측 그래프가 그려져 있었고, 그다음 장에는 '고기 굽기 전 단백질과 지방의 최적 연소 비율'이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빽빽하게 계산되어 있었다.심지어 마지막 장에는 [기온 강하 및 야생동물(곰, 멧돼지 등) 출현 대비 비상 행동 매뉴얼 및 방한 용품 리스트]까지 완벽하게 문서화되어 있었다.루다는 서류철을 든 채 입을 떡 벌렸다."팀장님…… 설마 이거, 데이트 기획안을 엑셀로 짜고 출력해서 오신 거예요?""통제 불가능한 산속 환경에서 이루다 대리의 안전과 만족도를 100% 보장하기 위한 최소한의 데이터입니다. 기상청 데이터를 크로스 체크했고, 식재료의 선도는 1시간 단위로 아이스박스 온도를 측정해 유지할 계획입니다."태준이 정면을 응시하며 아주 비장하게 대답했다.루다는 헛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데이트 코스를 엑셀로 짜고, 심지어 그걸 컬러로 예쁘게 출력해서 오는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로맨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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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화 : 입술을 훔치다.

폭우가 쏟아지는 금요일 늦은 밤, 첩첩산중의 글램핑 텐트 안.수건으로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털어내고 있는 태준의 얼굴에는, 자신의 완벽한 '엑셀 마스터 파일'이 대자연의 변수 앞에 무참히 박살 났다는 깊은 절망(?)이 서려 있었다.왁스로 빗어 넘겼던 완벽한 포마드 헤어는 이마를 덮으며 자연스럽게 흐트러져 있었고, 비에 젖은 셔츠는 그의 단단한 어깨와 가슴 근육의 굴곡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루다는 텐트 한구석에 쭈그려 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그 야성적이고 섹시한 모습에 남몰래 침을 꿀꺽 삼켰다."팀장님, 그렇게 세상 잃은 표정 하지 마세요. 이런 깊은 산속 국지성 호우를 무슨 수로 예측해요.""아닙니다. 연간 300건 이상의 화물 선적 스케줄을 오차 없이 관리할 때처럼, 1%의 날씨 변수까지 통합 마스터 파일에 크로스 체크했어야 했는데…… 나의 오만입니다.""풋-!"자신의 기획안이 무너졌다는 사실에 처절하게 자책하는 태준을 보며, 루다는 결국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아하하! 팀장님 진짜 웃겨요. 데이트하면서 선적 스케줄 관리 운운하는 남자는 전 세계에 팀장님밖에 없을 거예요."루다는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비상식량으로 챙겨 왔던 컵라면 두 개를 꺼내 들었다."완벽한 바베큐는 물 건너갔지만, 비 오는 날 텐트 안에서 먹는 컵라면이 얼마나 기가 막히게 맛있는지 아세요? 데이터에 없는 완벽한 행복을 제가 알려드릴게요."다행히 텐트 안에 비치된 커피포트는 정상 작동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라면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비좁은 텐트 바닥에 마주 앉았다.두꺼운 방수 캔버스 천을 요란하게 때리는 빗소리만이 세상을 채우고 있었다. 빗소리가 천연 백색 소음이 되어 외부의 모든 것을 차단해 주자, 텐트 안은 오직 두 사람만의 우주가 된 듯 아늑하고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변모했다.태준은 젓가락을 든 채 라면은 먹지 않고, 라면 국물을 호호 불어 먹는 루다의 붉은 입술만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안 드세요? 면 다 불겠어요.""……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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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화 : 또 서은호!?

그렇게 한참을 입을 틀어막고 어깨를 들썩이던 민호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간신히 숨을 골랐다."책, 책임님……. 방금 그 대사, 대체 어떤 곳에서 검색해 오신 겁니까?""출처는 영업 기밀입니다. 제 데이터 수집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시는 겁니까?""아니요! 완전 신뢰도 200%입니다. 아니, 진짜 미치겠네……."민호는 양손으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싸 쥐었다. 빈틈없는 완벽주의자인 상사가, 고작 자신을 꼬셔보겠다고(?) 저런 말도 안 되는 대사를 진지하게 외워왔다는 사실이 귀여워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민호가 테이블 위로 상체를 훅 숙이며 유진의 코앞까지 다가왔다."책임님이 저한테 무기징역 선고하셨잖아요. 그럼 이제 저는 책임님 옆에 평생 수감되어야 하는 거네요?""……논리적 비약이 심하군요. 징역형의 집행은 국가 기관의 권한…….""국가 기관 말고, 책임님 전용 감옥이요."민호가 특유의 서글서글한 대형견 같은 눈웃음을 지으며 유진의 커피잔 옆으로 자신의 손을 슬며시 겹쳐왔다. 유진의 차가운 손등 위로 민호의 뜨거운 체온이 훅 끼쳐왔다."저 안 도망갈 테니까, 간수님이 꽉 잡고 계세요."징- 지이잉-! 이번엔 유진의 손목에 채워진 스마트 워치가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차유진 - 현재 심박수 : 162 BPM. 안정을 취하십시오.]유진은 화들짝 놀라며 손목을 테이블 아래로 숨겼다. 방금 전까지 플러팅 시뮬레이션을 완벽하게 가동했다고 자부했던 그녀의 차가운 이성 회로가, 연하남의 능구렁이 같은 역습 한 번에 처참하게 녹아내리고 있었다."기, 기계 결함입니다. 이 스마트 워치의 심박수 센서가 주변 전파의 간섭을 받아서…….""에이, 기계는 거짓말 안 한다면서요. 간수님?"민호의 넉살 좋은 웃음소리가 카페를 채웠다. 텍스트로 배운 어설픈 플러팅이 쏘아 올린 나비효과는, 두 사람의 주말을 걷잡을 수 없이 달달한 핑크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그렇게 모두의 심장 박동이 비정상적으로 요동쳤던 폭풍 같은 주말이 지나가고.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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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화 : 아니, 또 서은호!?

탕비실에서의 아찔했던 소동이 지나간 오후.마케팅 1팀 사무실은 겉보기엔 평화로웠지만, 파티션 곳곳에서는 각기 다른 이유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아아아악! 2024년도 3분기 예산 결산, 이거 숫자가 왜 안 맞아! 쥐꼬리만한 예산을 이렇게 버라이어티하게 쓰는게 말이 되냐고!"서은호 수석이 모니터를 부여잡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태준이 내린 '마케팅 본부 3년 치 예산 계획 비교 분석'이라는 어마어마한 업무 폭탄을 정통으로 맞은 그는, 이미 반쯤 실성한 사람처럼 엑셀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그 처참한 광경을 파티션 너머로 지켜보던 루다는 노트북 자판 위에 이마를 박고 깊은 죄책감에 시달렸다.'아아, 수석님, 죄송해요. 저랑 팀장님의 그 불건전한(?) 사내 연애 행각을 방해했다는 죄목으로 선배님이 십자가를 지고 계시네요…….'그때였다. 의자 바퀴가 마찰하는 스르륵 소리와 함께, 루다의 옆자리로 최지원 대리가 소리 없이 다가왔다. 지원의 두 눈은 먹잇감을 포착한 매처럼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었다."야, 이루다.""어, 어? 왜?""너 아까 탕비실에서 강 팀장님이랑 같이 있었지?"루다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원은 루다의 흔들리는 동공을 놓치지 않고 바짝 추궁했다."아까 서 수석님이 탕비실 다녀오시더니, 갑자기 예산 폭탄 맞았다고 난리 치시잖아. 팀장님이 피자집 영수증 한 장에 저렇게까지 빡치실 리가 없는데. 너네 둘이 안에서 뭐 했어?""무, 무슨 소리야! 아까 서 수석님 들어오셨을 때 나 냉장고 정리하고 있었어!"루다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필사적으로 변명을 쥐어짜 냈다."그리고 팀장님이랑은 그…… 커, 커피 머신! 그래, 커피 머신 효율 증가 매뉴얼에 대해 아주 심도 깊은 데이터 토론을 나누고 있었을 뿐이야!""커피 머신 효율? 푸하하하, 너 귀 끝 빨개진 거 다 보이거든?"지원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지만, 때마침 울린 거래처의 전화 덕분에 루다는 간신히 취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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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화 : 수사반장, 최지원 대리

"아휴, 죽겠네. 지원 씨, 아까 그 함수 말인데요……."회의실 테이블 위로 두꺼운 서류철이 툭 놓이는 소리와 함께 은호와 지원의 발이 바로 옆에서 움직였다.테이블 아래. 루다는 쪼그려 앉은 태준의 품에 쏙 안겨 있었다. 태준은 한 손으로 루다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막아 소리가 새어나가는 것을 방지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프라푸치노가 쏟아질까 봐 조심스레 들고 있는 루다의 뺨 위로, 태준의 규칙적이고도 거친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쿵쾅, 쿵쾅, 쿵쾅.'미쳤어, 미쳤어, 미쳤어……!'루다는 숨소리조차 새어 나갈까 봐 태준의 셔츠 깃을 생명줄처럼 꽉 틀어쥐고 눈을 질끈 감았다."근데 강 팀장님, 아까부터 안 보이시네. 루다는 또 어디로 간 거지?"테이블 위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언제 들킬지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감과, 어둠 속에서 완벽하게 밀착된 서로의 체온이 주는 짜릿함이 교차하며 텐션은 폭발 직전까지 치달았다."아, 맞다! 지원 씨, 아까 본부장님이 지시하신 수정 기안도 같이 확인해야 해요. 빨리 가죠!"은호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수석님, 근데 이 회의실 묘하게... 히터도 안 틀었는데 훈훈하지 않아요?""예산안 때문에 땀을 한 바가지 흘려서 그래요! 얼른 갑시다!"은호와 지원의 구두 발소리가 점차 멀어지고, '철컥' 하며 묵직한 회의실 문이 닫혔다.완벽한 정적이 찾아왔지만, 테이블 밑의 두 사람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강태준이 루다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가신 것 같아요, 팀장님."루다가 귓가에 닿아 있는 태준의 가슴팍을 톡톡 밀어내며 작게 속삭였다. 그제야 태준이 굳게 닫혔던 입술을 떼고 몸을 살짝 뒤로 물렀다. 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빠져나온 두 사람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태준의 완벽했던 수트 바지는 테이블 다리에 쓸려 먼지가 묻어 있었고, 루다는 잔뜩 웅크린 탓에 다리가 저려왔다."아이고, 내 다리……. 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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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화 : 지 켜 본 다. 이루다

파티션 너머에서 루다의 다급한 메시지를 확인한 태준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팼다.'각자 퇴근.'태준의 중앙제어장치가 그 불경한 단어를 무려 여섯 번이나 스캔하고 분석했다. 하지만 도출되는 처리 결과는 매번 동일했다.'거절.'그는 안경을 한 번 치켜올리며, 키보드가 부서져라 빠르게 답장을 쳐 내려갔다.[강태준 팀장: '각자 퇴근' 건은 이미 반려했습니다. 재검토는 없습니다.][강태준 팀장: 최지원 대리의 예상 행동 반경은 제가 별도로 통제하겠습니다.]숫자 '1'이 사라지자마자, 태준은 지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서늘한 시선이 자연스럽게 미팅룸 A 쪽을 한 번 훑더니, 곧장 머리를 쥐어뜯으며 엑셀과 혈투를 벌이고 있는 서은호의 등짝으로 향했다.태준이 천천히, 그러나 위압적인 걸음으로 이동했다.오후 5시 40분.퇴근을 20분 앞두고 마케팅 1팀 사무실은 '칼퇴'를 위한 묘한 흥분감으로 술렁이고 있었다. 팀원들이 슬그머니 저장 파일을 닫고 가방을 챙기는 시늉을 하던 바로 그때였다.태준이 서은호 수석의 책상 앞에 우뚝 멈춰 섰다."서 수석님.""네엡! 예산안 분석, 오늘 밤 안으로 반드시 마무리하겠습니다!"태준의 그림자에 놀란 서은호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태준은 처절한 몰골의 서 수석을 한 박자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오늘 저녁, 최지원 대리 데리고 재무팀 김 차장과 저녁 미팅 다녀오십시오. 이번 공동 프로젝트 예산안 건은 서 수석이 직접 대응하는게 효율적이겠더군요.""예? 오늘 저녁이요? 지금……요?"은호의 눈이 탁구공만 해졌다. 퇴근 20분 전에 떨어지는 갑작스러운 저녁 미팅 지시. 직장인에게 이보다 끔찍한 처형은 없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태준의 한 마디가 판도를 완전히 뒤집었다."재무팀 김 차장과는 방금 제가 사전 조율 해뒀습니다. 7시에 을지로 쪽 식사 자리입니다. 식사 메뉴는 한우 투뿔입니다. 미팅 후 비용은…… 이 법인 카드로 처리하면 됩니다."태준의 길쭉한 손가락 사이에서 영롱한 '법인 카드'가 빛을 발
last updateآخر تحديث : 2026-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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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화 : 최지원 대비 모의고사

루다는 애써 입꼬리를 꾹 내리눌렀지만, 결국 삐져나오는 부드러운 미소를 막지 못했다.'아, 진짜. 이 사람한테는 못 당하겠다니까.'루다가 창문에 이마를 기댄 채 몰래 웃음을 삼키고 있을 때였다.투둑, 타닥.차창 위로 물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약속이라도 한 듯 거센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퇴근길 정체에 갑작스러운 기상 악화까지 겹치자, 올림픽대로에 진입한 태준의 세단은 붉은 테일램프가 끝없이 이어진 도로 위에 완벽하게 갇혀버렸다."……예측하지 못한 기상 이변으로 트래픽 지표가 최악이군요. 도착 시간이 무기한 지연될 것 같습니다."태준이 와이퍼 속도를 조절하며 낮게 말했다. 건조한 말투였지만, 핸들을 쥔 그의 긴 손가락이 미세하게 가죽 커버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괜찮아요. 비 오는 날 차 막히는 건 팀장님 통제 밖의 변수잖아요."루다가 어색하게 웃어 보이던 그때였다.꼬르륵-.빗소리를 뚫고 좁은 차 안에 울려 퍼진 아주 작지만 명확한 마찰음. 루다의 배가 아니라, 운전석 쪽에서 난 소리였다.루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완벽주의자 얼음 마왕, 강태준 팀장의 몸에서 난 소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울림이었다."……방금 들은 건, 차량의 소음입니다. 엔진 점검을 받을 때가 된 것 같군요."태준이 안경을 쓱 치켜올리며 정면을 뚫어지게 응시한 채 말했다. 안경 너머의 눈빛은 한없이 진지했지만, 그의 귀끝은 이미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엔진이 엄청 배고파 보이는데요, 팀장님?""제어 시스템에 일시적인 에너지 고갈 현상이 발생한 것뿐입니다."그 철두철미한 남자가 예상치 못한 생리현상에 뚝딱거리는 모습이, 루다는 참을 수 없이 귀여웠다. 루다가 네비게이션 화면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이 앞에서 빠지면 드라이브스루 햄버거집 있어요. 엔진 오일 대신 햄버거 세트 어때요? 저도 배고프거든요."결국 마케팅 1팀의 폭군 강태준 팀장은 방향 지시등을 켜고 조용히 차를 돌렸다.15분 뒤.태준의 세단은 한강이
last updateآخر تحديث : 2026-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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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화 :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다

내일 점심의 살벌한 취조보다, 당장 눈앞에 있는 이 맹수 같은 팀장님의 '모의고사'를 빠져나가는 것이 루다에게는 훨씬 더 시급하고도 위험한 과제였다."티, 팀장님! 숨 막혀요! 좀 떨어져서 이야기해요!"루다가 양손으로 태준의 단단한 가슴팍을 밀어내며 소리쳤다. 하지만 태준은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안경 너머로 시선을 날카롭게 빛냈다."방어율 0%입니다, 이루다 PM. 대답하십시오. 가상의 인물이라도, 그게 누굽니까."결국 루다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아, 그냥 소개팅남요! 주말에 엄마가 억지로 내보낸 선자리에서 만난 사람이라고 할게요! 그럼 우리 팀이냐는 의심도 완벽하게 피할 수 있잖아요!"그럴싸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준의 미간에 깊은 계곡이 파였다."기각합니다." "네? 왜요? 완전 완벽한 핑계잖아요!""가상의 인물이라도 제 앞에서 다른 남자와의 만남을 상정하는 건, 제 감정 제어 시스템에 매우 치명적인 오류를 일으킵니다. 아주 불쾌한 워딩이군요."질투. 이건 명백하고도 노골적인 강 로봇의 질투였다. 루다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쳤지만,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엔 역부족이었다."아, 진짜 깐깐하시네! 그럼 도대체 뭐라고 방어해요!""거짓말의 기본은 진실을 10% 섞는 겁니다. 그래야 심박수와 동공 지진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죠."태준이 마침내 뒤로 물러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내일 최지원 대리의 유도심문 패턴은 명확할 겁니다. 변화구 없이 팩트로 곧장 찌르겠죠. '너 어제 미팅룸 테이블 밑에, 강 팀장이랑 둘이 숨어있었지?' 라고요."태준의 정확한 예측에 루다는 소름이 돋아 양팔을 문질렀다."맞아요. 지원이라면 진짜 대놓고 그렇게 물어볼 애예요. 그럼 뭐라고 해요?""향수의 출처와, 당신이 숨어있던 이유를 완벽하게 분리하십시오. 향수 냄새는 '나 들어가기 직전까지 팀장님이 거기서 본부장님 보고 자료를 검토하고 나갔기 때문'이라고 하고, 당신이 굳이 불 꺼진 테이블 밑에 숨어있었던 이유는……."태준이 잠시 뜸
last updateآخر تحديث : 2026-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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