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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와 아들 (2)

Autor: 이온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03-21 21:40:33

밤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위로 은빛 초승달이 빛나고 있었다. 별들은 소쿠리에 담긴 쌀알처럼 무성하고, 달빛에 반사된 빛무리가 밤하늘 차양처럼 드리워 있었다.

대궐이었다. 야음에 휩싸인 터라 현판이 보이질 않았으나 이곳이 어디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친숙함이 느껴지는 장소였다.

‘근정전(勤政殿).’

경복궁의 정전이자 임금이 다니는 어도(御道)와 신하들이 도열하는 품계석이 놓여있는 곳. 바로 조선의 심장부였다.

그리고 그는 그곳 근정전 계단 앞에 걸터앉아 있었다.

익숙지 않은 몸을 한 채로.

육신과 정신이 따로 노는 기분이었다. 팔도, 다리도 모두 제자리에 붙어 있었으나 남의 것을 보는 것처럼 어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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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붉빛미르   되찾은 목걸이 (1)

    “금화도감의 이영기 포교와 백천우 포교입니다.”이포교가 공손하게 자신들을 소개했다.“압류품 관찰을 하는 날이라 방문하였습니다. 아울러 포장영감께 문안을 올릴까 합니다.”“이포교였군. 그리고 새로 왔다는 포교도 함께인건가?”“그렇습니다. 영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들어오게.”굵은 목소리가 그리 대답했다.이포교가 천우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조심조심 문을 열었다.스윽- 하고 열리는 문소리가 칼 가는 소리처럼 살벌하게 울렸다.어두운 방안의 형세가 눈으로 들어오는 순간, 천우는 뜻밖에도 방안 공기가 무척 뜨겁다는 느낌을 받았다.햇빛이 많이 들지도 않았는데 별일이었다.여름날이라 군불을 뗄 리도 없는데 희한했다.방의 중앙, 커다란 책상이 정 가운데에 놓여있고 상석에 한 사내가 앉아있었다.주름이 깊게 팬 얼굴은 고집이 있어보였고, 꽤 왜소한 상체에 비해 관복 아래로 풍겨오는 무인(武人)의 기상은 몸집 갑절 이상은 되어 보였다.이 사람이 바로 포도대장 정연복이었다.사실상 천우가 만나본 한양 인물 중에 주상전하 다음으로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이었다.“강녕하셨습니까.”책상 앞으로 다가간 이포교가 허리를 수그리며 인사했다.“잘 지냈는가.”정연복도 그런 이포

  • 붉빛미르   포도청으로 가는 길 (2)

    포청 앞은 아무래도 하는 일이 하는 일이라 그런지, 분위기부터 사뭇 달랐다.높은 누각은 지나다니는 이들을 감시하는 듯했고, 두꺼운 벽과 지붕은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는 기분이었다.뭔가 죄를 짓지 않았어도 이 앞에만 서면 식은땀이 날 것만 같았다.그만큼 포청이라는 장소가 가진 무게는 다른 관청과는 대조적이었다.“들어가세.”천우가 머뭇거리고 서 있자, 이포교가 채근했다.천우는 조금은 가라앉은 발길로 포청 본사로 들어서는 돌계단을 올라갔다.크고 넓은 연무장 같은 마당을 중심으로 여러 건물이 4방향으로 에워싸듯 나 있어, 바깥보다도 더 압도적인 풍경이었다.바닥을 덮고 있는 거친 모래, 기름을 발라 반질반질하게 관리되고 있는 형틀 등등에서부터 죄를 짓고 들어온 이상, 곱게 내보내지는 않겠다는 무언의 협박 같은 것이 전해져왔다.언제 추국이 끝났는지 말라붙은 핏자국 같은 것이 새끼줄과 사슬에 찐득하니 묻어 있는 풍경은 살벌하기까지 했다.“누가 장(杖)을 한 10대는 맞았나보군.”마당을 지나치던 이포교가 흘깃 보고 하는 소리였다.때마침 한 무리 포졸들이 마당에 놓여있던 거적때기를 치우고 있어 그 신뢰감은 더했다.“저 정도면 적어도 양반집 쌀이나 피륙 정도 훔친 놈일 걸세. 일개 도둑이 아니지.”“거적때기 흔적만 봐도 그걸 아는가?”“대충 짐작할 정도지.”이포교가 어깨를 으쓱했다.&

  • 붉빛미르   포도청으로 가는 길 (1)

    포청으로 향하는 길은 복잡했다.행인들을 지나 좁게 뻗은 골목을 몇 개 통과하다보니, 제법 널찍한 공터가 나왔고 그곳에서 다시 동쪽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한양의 중심부로 더욱 가까워지는 길이었다.“그 곰보놈 말일세.”한발 앞서 걷던 이포교가 문득 입을 열었다.“아까 내가 유명한 놈이라고 말했던 것 기억하나?”“기억하네.”천우가 대답했다.손에 익은 창포검 대신에 옷 밑에서 달랑거리는 환도가 제법 거슬렸다.“꽤나 골치 썩이는 놈이었나 본데.”“그래. 놈은 이름난 범죄자야.”이포교가 중얼거렸다.“천우 자네는 모르겠지만, 자네가 처음 곰보에게서 당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솔직히 조금 기뻤다네.”“기뻤다고?”“곰보 놈이 나타났다는 것 때문에 말일세. 이 바닥에서 자질구레하게 악명을 떨치면서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놈이었거든.”이포교는 그리 말하면서도 혹시 골목 어귀에서 곰보 비슷한 놈이 나타나지를 않나 살피는 눈치였다.말마따나, 한양의 수사기관을 성가시게 만든 협잡꾼임은 분명해보였다.“그런데 그 곰보가 금화도감하고는 무슨 관련이 있나?”천우가 물었다.“내가 겪은 곰보는 칼 쓰고 협박하는 강도

  • 붉빛미르   불의 조종 (2)

    과연 무엇에 홀렸다는 말인가? 수상하다면 수상하다고 할 수 있는 사건의 연속이었으나, 붉빛미르나 기우사들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정확히 알아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아니, 애초에 불과 물을 다루는 기이한 존재들을 사람의 눈으로 탐구한다는 것이 허황된 일일지도 몰랐다.대화재, 검은 연기, 짐승의 울음소리, 홀린 방화범들. 그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기이한 파편들.일견 관련없어 보이는 이 파편들을 하나로 꿰어낼 만한 연결고리가 필요했다.‘차라리.’천우가 침을 꿀꺽 삼켰다.‘대화재에서 살아남았던 생존자를 찾아 도움을 구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군.’그게 최선일 성싶었다.무엇보다, 2년 전의 대화재를 직접 몸으로 겪었던 장본인의 증언이 필요할 듯했다.‘내가 하릴없이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중에, 2년 전 대화재를 겪었던 사람이라면…….’주상전하? 아니었다.지운 영감? 기우사의 수장이지만 친구 만나듯 뵐 수 있는 분은 아니었다.‘그렇다면 이포교뿐이군.’그러다 불현듯, 또 한사람이 떠올랐다.‘어리.’불쑥 그 이름이 생각났다.어리 또한 그 불지옥을 겪었다고 했으니, 분명 도움이 될 것이었다.물어볼만한 사람이 한집에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 붉빛미르   불의 조종 (1)

    ‘뭔가 급하게 마무리를 지은 느낌인걸.’2년 전에 큰 불이 났고, 갑자기 장대비가 내렸고, 물과 불이 만나자 수상한 검은 안개가 피어올랐고, 안개 속에서 정체불명의 짐승 울음소리가 들렸다.그리고 이 모든 것은 화재로 피폐한 백성들이 집단으로 증언한 망상이라는 것.관청에 정식으로 등록된 문서에서 그리 말하고 있었다.마치 그 이상 호기심을 가지지 말라는 듯 건조하고 딱딱하게 말이다.사건일지를 여러 번 들춰봐도 그것이 끝이었다.더 이상 2년 전의 한양 대화재를 알아낼 수 있는 단서는 보이질 않았다.‘화재로 불탄 가옥이 2천 4백 7십채.’‘사상자는 3백여명.’‘대부분의 사인(死因)은 연기로 인한 질식.’‘복구에 필요한 나무를 캐기 위해 경상도에까지 파발이 당도하다.’애초에 금화도감보다 먼저 발생한 사건인 탓인지 당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정보가 많지 않은 듯했다.피해를 입은 가옥의 숫자, 사상자, 손실된 재산의 규모 등 행정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백사성,기우사,붉빛미르 등등 천우를 괴롭히는 것들은 무엇 하나 모호하게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산술은 있으나, 천우에게 필요한 정보는 없었다.“후우…….”탄식에 가까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사건일지를 살펴보고 난 뒤에 찾아드는 감정이 실로 천우를 맥 빠지게 했다.큰 산 하나가 가

  • 붉빛미르   사건 일지 (2)

    불을 막으려다 죽고 다친 사람도, 불을 지르려는 범인을 막다 변을 당한 사람도 있었다.어느 농사꾼은 화상으로 팔이 떨어져나간 와중에도 겨우 목숨을 부지했으나,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는 내용도 있었다.지아비를 잃은 그 부인이 수절하면서도 매일 밤낮으로 울음 삼키며 홀로 된 아픔을 견디고 있다는 포청발 소식도 접하고 나니 마음이 심히 좋지 않았다.강 건너 어떤 고을에서는 부모가 모두 화재로 사망하여 일곱 살, 다섯 살 된 형제 둘만 남았는데 칡뿌리를 캐먹겠다고 산에 올랐다 형제 모두 호랑이에게 잡혀간 일도 있었다.방화는커녕, 일평생을 화기(火氣)와 거의 담을 쌓고 지내온 천우였다.밥을 짓거나 화전을 새로 일구어야 할 때, 불씨를 살린다고 장작 크게 넣었다가 불길이 번진 경우야 있었지만, 물을 다룰 줄 아는 천우에게는 손바닥 뒤집는 것만큼이나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불똥이 지붕으로 옮아 붙든, 숲속으로 튀어버리든 천우에게는 해가 되질 않았다.그저 평소에 하던 것처럼 어디 양동이에서 물을 끌어오거나, 시냇물을 가져다가 뿌려버리면 그만이었으니까.‘불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구나.’한양에 오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 체감하지 못할 사실이었다.비가 오지 않아 바싹 마른 논밭을 걱정하던 사람들만 익히 보아 와서 그런지, 그 반대편에 선 사람들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못한 터였다.새삼 불을 가벼이 여기던 자신이 반성이 되었다.울컥-갑자기 불이라는 것에 대해 막연한 분노가 솟았다면, 너무나 단순한 생각이었을까. * * *정신없이 사건일지를 살피다 보니, 어느새 서고 절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햇수로는 지금으로부터 2년 전, 그러니까 아버지 백사성이 한양 다녀오겠다며 집을 떠났던 그때, 그 시간이었다.‘드디어 아버님이 떠나셨던 2년 전의 기록이다.’천우는 침을 꿀꺽 삼키며 사건일지에 눈을 고정했다.한양이

  • 붉빛미르   두 번의 헤어짐 (1)

    “과, 과찬이십니다.”천우가 허둥지둥 어리의 말을 받았다.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칭찬이었기에 더욱 몸이 근질거렸다.“아마 한양에서 나고 자라셨다면.”어리의 말이 이어졌다.“포교님 앞에 여염집 아낙들이 줄을 섰을지도 모르겠군요.”“망극한 소리를 하십니다.”“식객으로 계시는 동안 앞으로도 계속 마주칠 텐데, 서로 좋은 소리 하고 지내면 그것대로 또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천우가 조용히 말했다.“전 이곳에서 오래 식객으로 있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며칠 정도만 신세를…….”“포교님이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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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붉빛미르   잔망스런 속삭임 (2)

    "거듭 미안하오."천우가 다시 사과했다."나는 정말로 낭자께서, 대군마마의 정인인 줄 알고…….”“아니오. 아닙니다. 포교님께서는 잘못한 것 하나도 없으십니다.”“그렇습니까?”“물론입니다.”“다행입니다. 저는 혹여 낭자께서 불쾌해하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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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붉빛미르   잔망스런 속삭임 (1)

    “네?”오히려 놀란 것은 천우였다.어리의 당돌한 물음에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다.“듣지 않으셨습니까?”어리가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생글거리는데, 하얀 목덜미와 가는 손목이 어둠 속에서도 하늘하게 빛났다.“대감께서 제게 잘 해주시느냐 궁금해 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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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붉빛미르   꽃과 도발 (2)

    두 사람 사이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흠흠.”가만히 있기 뭐했던 천우가 재차 헛기침을 했다.“낭자께서도 잠이 오지 않으신 모양입니다.”“조금 그러하였습니다.”어리가 조금 샐쭉해진 목소리로 답했다.그리고는 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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