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Chapter 1011 - Chapter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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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1화

"어머니께서 유덕전과 왕래가 있었다고?"강유영은 서유의 말을 듣고 퍼뜩 생각이 스쳤다.그렇다면 한씨가 구해온 은자는 유덕전에게서 빌린 것이 틀림없었다."예."서유가 고개를 끄덕였다."풍씨 어멈과 다른 시녀 한 명이 요 며칠 수시로 밖을 드나들었습니다. 시장을 한 바퀴 도는 척하다가 몰래 유덕전에게 가서 국공 부인의 물건과 말을 전했습니다."강유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물었다."유덕전이 굴리는 고리대금은 이자가 괜찮은 편이니?""아니요. 엄청난 이자를 요구하고 있습니다."서유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강유영은 혀를 내둘렀다. 내심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경계심이 바짝 섰다.한씨가 이번에야말로 사생결단을 낼 작정인 듯했다. 고리대금까지 겁 없이 끌어다 쓴 것을 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당포를 빼앗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그녀는 눈앞에 쌓인 두꺼운 장부들을 힐끗 보고는, 장부 한 권을 펼치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전당포는 이미 그녀의 명의로 넘어왔다. 한씨가 아무리 교활한 수작을 부려도 절대 호락호락 당해주지 않을 것이다.진국공부의 공금까지 다 갚았으니 조만간 이쪽으로 쳐들어올 것이다.과연 예상대로였다. 다음 날 아침, 강유영이 전당포 서재에 앉자마자 밖에서 심부름꾼이 찾아왔다."점주님, 국공 부인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점주님을 뵙고 싶다 하십니다."밖에서 고개를 숙인 일꾼의 태도는 몹시 공손했다.새 주인은 씀씀이가 후하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부드러웠다. 이런 좋은 주인을 만났으니 평생 이 전당포에서 일하려면 당연히 잘 보여야 했다.주판을 만지작거리던 강유영은 고개를 들어 서유를 바라보았다."아씨."서유는 허리를 숙이고 목소리를 낮춰 웃으며 말했다."여기까지 오셔서 굳이 사람을 시켜 통보부터 하시다니, 이 점포가 아씨의 것임을 인정한 셈이나 다름없네요.""그렇겠지."강유영도 미소를 짓고는 문밖을 향해 말했다."안으로 모시거라."그녀는 한씨가 그토록 치밀하게 준비해온 속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잠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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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2화

"금수 상회 사람들에게 듣자니, 네가 혼인을 해야 전당포를 물려받을 수 있다더구나. 어미 된 도리로서, 사위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어서 왔다."한씨는 등받이에 기대앉으며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강유영을 바라보았다.마치 강유영이 해명라도 하기를 기다리는 듯했다."어머니요?"강유영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그저 어릴 적부터 부르던 것이 습관이 되었을 뿐입니다. 그간 그 많은 일을 겪고 진작에 서로 바닥까지 보인 마당에, 설마 우리 사이에 진짜 모녀의 정이라도 남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라면 그런 시시한 질문은 꺼내지도 않았을 겁니다."애초에 혼사 문제는 한씨가 참견할 일이 아니었다.이미 서로 죽일 듯이 물어뜯고 원수가 된 마당에, 가증스럽게 어미와 딸의 정을 운운하며 가식을 떨고 있었다.역겹지도 않은 모양이었다."원래는 너를 위해 혼수라도 하나 챙겨주려 했다만, 네가 그리 말하니 나도 더는 신경 쓰지 않으마."한씨는 퍼렇게 질린 얼굴로 애써 분노를 억눌렀다.어찌 되었든 강유영도 진국공부의 사람이었다. 제아무리 수완이 생기고 성장했다 한들, 시집을 가려면 국공 부부인 그들의 뒷배가 필요할 것이라 확신했다.그런데 이토록 빳빳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나중에 진짜 시집을 갈 때 진국공부의 대문을 어떻게 나서는지 똑똑히 두고 볼 참이었다.강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굳이 대꾸할 가치도 못 느꼈거니와, 혼수를 챙겨준다는 말 따위는 믿지도 않았다.혼수라니. 비단 이불 두 채를 던져주거나 낡은 나무 상자 하나를 내어주며 혼수라 우기면 그만일 것이다.한씨가 그녀에게 온전한 물건을 내어줄 리 만무했다.한씨는 주변을 쓱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내가 꽤 오랜 세월 이 전당포를 맡아왔다는 건 너도 잘 알 테지."그녀는 찻잔을 내려놓고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아내며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하실 말씀이 있으면 그냥 하십시오. 서로 빙빙 돌려 말하기 피곤하지 않습니까."강유영은 아예 대놓고 선을 그었다.한씨가 저런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보니 아마 본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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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3화

"맞다." 한씨는 태연한 얼굴로 강유영의 손에 들린 차용증을 힐끗 보며 말했다. "거기 똑똑히 적혀 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증거는요?"강유영은 눈앞의 책상에 차용증을 내려놓고는 자세를 꼿꼿이 세워 한씨를 마주 보았다."이게 바로 증거 아니냐?"한씨는 잠시 멈칫하더니 책상 위의 차용증을 가리켰다.저게 떡하니 있는데 끝까지 발뺌이라도 할 작정인가 싶었다."이런 건 누구나 쓸 수 있지요."강유영은 시선을 내리깔고 차용증을 쓱 훑었다."증인 한명 없는데, 어머니는 고작 이 종이 쪼가리 하나로 십삼만 냥을 날로 먹을 생각이십니까?"사람을 바보로 아는 모양이었다.이 따위가 진짜일 리가 없었다.하지만 한씨가 순순히 인정할 리 만무하니 확실한 증거를 찾아내야 했다."거기 유덕전의 도장이 찍혀 있지 않느냐."한씨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도장이 있으면 진짜입니까? 그럼 제가 지금 당장 하나 써서 제 도장을 찍으면 인정하시겠습니까?"강유영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투는 무척이나 예리했다."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냐?"한씨는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다 꾹 참았다. 노기를 억누른 그녀는 애써 평온한 어조를 꾸며냈다.유덕전과는 이미 입을 맞춰둔 참이었다. 이 십삼만 냥은 강유영이 좋든 싫든 무조건 토해내야 했다.십삼만 냥. 한씨로서는 모든 것을 건 도박이었다.이 은자만 손에 넣으면 유덕전에게 빌린 빚을 갚고, 돈을 쥐여주어 망나니들을 호위로 부릴 수도 있었다.그러면 더 이상 그 빚쟁이들에게 협박당하며 숨죽여 지내지 않아도 되었다.유덕전은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니, 강유영쯤은 가뿐히 밟아줄 수 있을 터였다."그럴 리가요."강유영은 가볍게 웃었다."워낙 큰돈이지 않습니까. 고작 차용증 하나 들고 오셔서는 납득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차라리 돈을 빌려준 사람을 이리로 부르시지요. 삼자대면을 하는 것이 어떠십니까?""유 점주를 이리로 불러서, 네 눈앞에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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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4화

하지만 강유영은 서두르지 않았다.그녀에게는 한씨와 유덕전이 서로 물어뜯게 만들 묘안이 있었다.만약 그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면, 그때 가서 관아에 알려도 늦지 않았다.해 질 녘, 붉은 석양이 진국공부 대문의 현판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강유영은 고단한 몸을 이끌고 마차에서 내려 쪽문을 통해 소은원으로 향했다."유영아."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강유영이 고개를 돌려보니, 첩부인 이씨가 작약꽃 덤불 뒤에 서서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아씨, 괜히 상대해서 좋을 게 없습니다."뒤따르던 서유는 이씨를 발견하고 굳은 표정으로 낮게 속삭였다.이씨는 조사예의 생모였다.모녀는 통통하고 사람 좋은 인상이 판박이처럼 닮아 있었다. 겉보기에는 아주 순박해 보이지만, 실상은 누구보다 음흉하고 속내가 깊었다.아무 목적도 없이 아씨를 찾아올 사람이 아니었다.강유영은 발걸음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그녀 역시 서유의 말에 동의했다. 굳이 이씨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조사예도 영악한 구석이 있지만 결국 나이가 어려 조바심을 숨기지 못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생모 이씨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다.이런 부류와는 말을 섞지 않는 편이 상책이었다.강유영이 가볍게 고개를 젓고 걸음을 떼려는데, 이씨가 잰걸음으로 다가왔다."잠시만, 유영아.""저와 이 부인은 왕래도 없던 사이인데, 무슨 일이십니까?"강유영은 어쩔 수 없이 멈춰 섰으나, 말투에는 냉기가 서려 있었다.굳이 빙빙 돌릴 필요가 없었다. 억지로 친한 척할 사이도 아니니 용건이 있어도 찾지 말라는 확고한 거절의 뜻이었다."내가 귀찮게 했나 보구나."이씨는 멋쩍은 기색을 애써 감추며 손에 든 초대장을 내밀었다."사예의 혼례 날짜가 정해져서 네게도 초대장을 주려고 불렀단다.""고맙습니다."강유영은 초대장을 건네받고 대충 훑어보았다.도경진의 필체는 아니었다.누가 썼는지는 몰라도 붉은 바탕에 검은 먹물로 쓴 영 옹졸해 보이는 어설픈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보통 경성의 혼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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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5화

조사예는 평소 이씨 앞에서 조원철이 강유영만 감싼다며 불평하곤 했다.이씨 역시 조원철이 강유영을 각별하게 대한다고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속내가 깊은 사람답게 이런 의심을 입 밖으로 꺼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강유영이 세자에게 말 한마디만 거들어준다면 이 일은 무조건 성사될 것이다.오랜 세월 아들을 바랐지만 끝내 얻지 못했고, 슬하에 둔 혈육이라고는 조사예 하나뿐이었다.그런 딸이 시집을 간다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따라가 지켜보고 싶었다. 딸이 꽃가마에 오르고 사위와 맞절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봐야 마음이 놓일 듯했다."사람을 정말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오라버니의 성정을 정녕 모르십니까? 한 번 안 된다고 하면 절대 번복하지 않는 분인데, 어찌 제 말을 들어주시겠습니까?"강유영은 싸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정 가고 싶으시다면 아버지께 매달려 보시지요. 아버지야말로 집안의 가장이자 이 부인의 든든한 뒷배 아닙니까. 부인께서 잘 구슬려 보신다면 아버지도 허락하실 겁니다."말을 마친 강유영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이씨가 이런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러 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혹시 이씨가 조원철과의 묘한 기류를 눈치채기라도 한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리 당당하게 확신을 갖고 부탁할까 싶었다.하지만 둘은 철저히 조심해 왔으니 꼬리를 밟힐 일은 없었다.강유영은 골치가 아파지는 것을 느끼며 서둘러 잡념을 떨쳐냈다."유영아, 유영아, 내가 이렇게 부탁하마……."이씨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따라붙었다.강유영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발걸음을 재촉했다."아씨의 말을 못 알아들으신 겁니까?"서유가 홱 돌아서서 험악한 얼굴로 앞을 가로막았다."한 발짝만 더 따라오면 저도 가만있지 않겠습니다!"이씨는 실로 성가신 부류였다."유영아……."이씨는 제자리에 우뚝 선 채 멀어지는 강유영의 뒷모습을 쏘아보았다. 눈 밑으로 짙은 원한이 일렁였다.딸인 조사예가 그러하듯, 이씨 역시 강유영을 뼛속 깊이 혐오하고 있었다.도경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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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6화

강유영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고는 손에 든 쑥떡을 베어 물었다.짙은 초록빛을 띤 쑥떡은 무척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손에 쥐자 말랑말랑한 감촉이 느껴져 절로 군침이 돌았다."우읍……."강유영은 한 입 씹자마자 얼굴을 찌푸린 채 조원철을 쳐다보았다."어째서 고기소가 들어있습니까?""죽순과 고기를 다져 넣은 새로운 맛이다. 입에 맞지 않느냐?"조원철은 시선을 떼지 않고 물었다."맛없습니다."강유영은 입안의 쑥떡을 억지로 삼키고는, 먹다 만 떡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조원철에게 건넸다.떡 자체는 약간 단맛이 도는데 속에는 짭짤한 고기가 씹히니, 영 이상한 맛이 나서 도저히 삼키기 힘들었다."그럼 이걸 먹거라. 팥소가 든 것이다. 대추소도 있고."조원철은 다른 쑥떡을 꺼내 그녀에게 쥐여주었다."역시 단 것이 낫습니다."강유영은 새로 받은 쑥떡을 크게 베어 물었다. 달콤하고 쫀득한 팥소의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두 눈을 가늘게 접었다. 맛있는 생선을 얻어먹은 고양이처럼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조원철은 강유영이 건넨 떡을 한 입 베어 물었다."입에 맞으십니까?"강유영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조원철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입안의 쑥떡을 삼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참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그녀는 조원철이 자신이 먹던 떡을 먹고 있다는 사실은 아예 간과하고 있었다.그저 저 이상한 맛을 어떻게 멀쩡히 넘기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괜찮구나."조원철은 묵묵히 한 입 더 베어 물었다.강유영은 질색하는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하긴, 조원철은 평소에도 편식이 없고 딱히 선호하는 음식도 없었다. 무엇을 먹든 그저 괜찮다고만 하니 마치 미각이 없는 사람 같았다."너도 제법 뒤끝이 길구나."조원철이 뜬금없이 말했다.강유영은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곧바로 이씨를 두고 하는 말임을 알아차렸다."그게 뭐 어때서요?"그녀는 지지 않고 대꾸했다."원수를 은혜로 갚으란 말입니까? 그럼 은혜는 무엇으로 갚으라고요?"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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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7화

강유영은 시선을 내리깔고 천천히 대답했다."무슨 차용증 말이냐? 내가 한번 봐주마."조원철이 말했다."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가짜였으니까요. 종이는 낡았는데 먹물 자국은 아주 선명했거든요."강유영은 까만 눈동자를 굴리며 덧붙였다."하지만 관아에 고발하지는 않았습니다."그녀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어찌할 생각이냐?"조원철의 눈가에도 은은한 웃음기가 서렸다."비밀입니다."강유영은 입술을 꾹 다문 채 그를 바라보았다.한씨와 유덕전이 서로 물어뜯게 만들 작정이었다. 하지만 한씨는 조원철의 친어머니였다. 감히 그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자칫하면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그 차용증에 누구의 이름이 적혀 있었느냐?"조원철은 더 캐묻지 않고 차용증에 관해서만 물었다."유덕전이었습니다. 서유 말로는 고리대금을 굴리는 자라더군요."강유영은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말했다.혹시 조원철이 유덕전에 대해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쓸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조원철은 고개를 끄덕일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저녁 식사를 마친 후, 조원철은 강유영이 목욕을 하러 간 틈을 타서 방을 나섰다."청운."그의 부름을 받은 청운이 재빨리 나타나 허리를 숙였다."예, 세자.""청란을 시켜 유영을 호위하라 전하거라. 다만 함부로 나서서 개입하지는 말도록."조원철이 낮게 지시했다."예, 당장 조치하겠습니다."청운이 명을 받들고 물러났다.조원철의 뜻은 명확했다. 청란 일행을 시켜 강유영을 보호하되, 꼭 나서야 할 상황이 아니면 숨어 있으라는 지시였다. 오직 그녀의 신변에 직접적인 위협이 닥친 순간에만 움직이라는 뜻이었다.*도경진과 조사예가 혼례를 올리는 날은 화창하고 맑았다.강유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서유가 끈질기게 졸라댔다."아씨, 한 번만 구경하러 가시지요."서유는 이씨의 처소 쪽으로 가서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내가 혼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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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8화

강유영이 막 뭐라고 하려는데 남쪽 문에서 인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온 모양이구나.""설마요? 풍악 소리도 안 들리는걸요?"서유는 강유영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 무리를 확인했다.사람들이 점차 가까워지자, 맨 앞에 선 도경진을 알아볼 수 있었다.그는 붉은 혼례복을 입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기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붉은 의복 탓에 창백한 안색이 더욱 도드라졌다. 큰 병을 치르고 아직 회복하지 못한 듯, 입가에는 미소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신부를 맞이하러 온 신랑이 아니라면, 필시 흉사를 겪은 사람이라 오해할 만한 모습이었다.그의 뒤를 따르는 동료들은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영 흥이 나지 않는 기색이었다.하긴, 정작 신랑이 저리 침울하니 그들이 어떻게 신나게 웃을 수 있겠는가."진짜 도 대인입니다. 도 부인은 참으로 검소하기도 하시지, 어찌 풍악을 울릴 악사조차 부르지 않았답니까?"서유는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아마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다."강유영은 담담히 대꾸했다."맞습니다. 문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악사들도 있지요."서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발돋움을 하며 그쪽을 살폈다."이제 신부를 부를 차례입니다."강유영은 대답 없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도경진은 진짜배기 탐화랑 출신이었다. 신부에게 듣기 좋은 시 몇 구절 짓는 것쯤이야 그에게는 식은 죽 먹기일 터였다.그녀는 도경진을 바라보며 내심 어떤 시를 지어낼지 궁금해졌다.하지만 도경진은 굳게 닫힌 처소 문만 뚫어지게 쳐다볼 뿐,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도 대인, 어서 신부를 불러보시게."뒤에 선 동료가 작게 귀띔했다.그래도 도경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대문에 붙은 붉은 혼례 장식만 멍하니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그의 뒤에 선 동료들은 당황하여 서로 눈치만 살폈다."도 대인."참다못한 누군가가 그를 부르며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슬그머니 쥐여주었다."이거라도 보고 적당히 넘어가세."만약을 대비해 그의 동료들이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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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9화

조사예는 결국 속내가 깊고 독한 인물이었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도 그녀는 금세 마음을 추슬렀다."문 열어라."그녀는 또렷한 목소리로 짧게 말했다.방 안의 사람들은 놀란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서녀 신분으로 어엿한 탐화랑에게 시집가게 되었으니, 사람들은 모두 조사예가 큰 복을 타고났다고 입을 모았다.탐화랑이라면 마땅히 글재주가 뛰어날 터. 도경진이 혼례를 축하하는 좋은 시 몇 구절쯤은 거뜬히 읊어줄 거라 다들 믿어 의심치 않았다.그런데 도경진이 입을 꾹 다물고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더 기막힌 것은 조사예가 이런 수모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곧바로 문을 열라 지시했다는 사실이었다.사람들의 황당한 시선 속에서, 조사예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손바닥에 피가 맺히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하지만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통증은 안중에도 없었다.도경진이 시 한 수 읊어주지 않는 이 고요가 신부에게 얼마나 큰 굴욕인지 모르지 않았다.허나 도경진에게 시집가기로 결심한 그 순간부터, 어느 정도의 수모는 각오한 바였다.그의 부인이 될 수만 있다면 이까짓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도경진은 전도가 유망한 사내였다. 장차 크게 출세하여 조정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날이 올 것이다.그때가 되어 당당히 그의 곁에 서면, 누가 감히 과거의 흠을 들먹이며 오늘의 수모를 논하겠는가.애초에 그녀는 남들과는 다른 험난한 길을 택했다. 시 한 구절 받지 못했다고 해서 무너질 이유가 없었다."문을 열어라."딸이 안쓰러워 가슴이 미어지던 이씨도 억지웃음을 지으며 명을 내렸다.두 시녀가 다가와 양쪽으로 문을 활짝 열었다."신랑 들어갑니다."서유는 까치발을 들고 기웃거리다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안으로 들어가니 더는 볼 수가 없네요."강유영은 말없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조사예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괴롭히던 흉악한 자였다. 오늘 그 악행에 대한 업보를 돌려받은 셈이었다.하지만 같은 여인의 처지에서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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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0화

서유는 구경할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서두르지 말아. 남들 보기 우스워 보일라."강유영은 서유의 손을 가볍게 잡으며 다독였다."예."서유는 웃으며 대답했다.두 사람은 나란히 도씨 저택의 대청으로 들어섰다.대청 안에는 붉은 촛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사람들도 모여 있었다. 사실 하객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도경진의 고향이 아닐뿐더러 혼례가 워낙 급하게 치러져, 본가에서 달려온 친척이 드물었다.다행히 평소 인망이 두터워 동료들이 제법 참석해 체면을 세워주었고, 남은 하객은 진국공부 사람들이 전부였다.탁자 위에는 땅콩과 혼례용 사탕이 곱게 쌓여 있었다. 여느 평범한 민가의 혼례와 다를 바 없는 소박한 풍경이었다.강유영은 한쪽에 서 있는 조원철을 단번에 알아보았다.그는 평소처럼 무심한 얼굴로 대청 한가운데 선 조사예를 지켜보고 있었다.구석진 자리에 섰음에도 그는 유독 눈에 띄었다. 시선을 외면하려 해도 좀처럼 거둘 수 없었다.조원철은 강유영의 시선을 알아채고 고개를 돌려 마주 보았다. 까만 눈동자에 찰나의 부드러운 미소가 스쳤다.강유영은 남들이 눈치챌까 두려워 서둘러 시선을 피하며 도경진을 바라보았다.가까이서 보니 도경진의 안색은 저번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나빠 보였다.도경진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 바닥만 뚫어지게 응시할 뿐이었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강유영은 내심 놀랐다. 도경진이 이토록 싸늘한 기운을 풍기는 모습은 처음이었다.평소에는 화가 나더라도 특유의 온화한 기운이 남아 있어 사람을 두렵게 만들지는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미동조차 없이 굳은 얼굴에 한기마저 감돌고 있었다. 평소의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조사예는 머리에 붉은 너울을 덮고 있어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붉은 비단을 쥔 통통한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얼마나 힘을 주고 있는지 고스란히 보였다."길시가 되었습니다. 맞절을 올리시지요."혼례 주관자가 웃으며 분위기를 띄웠다.하객들은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었고 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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