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의 모든 챕터: 챕터 921 - 챕터 930

1195 챕터

제921화

조사예는 이씨에게 떠밀려 의자에 주저앉은 채, 멍하니 앞만 바라보았다."내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 도 부인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고."이씨는 오물이 묻은 딸의 옷을 벗기며 타일렀다."이쯤에서 그만두자꾸나. 도가네는 형편도 넉넉지 않은 데다 도 부인의 성미도 깐깐하지 않니. 도경진이 탐화랑이라는 것 빼고는 내세울 게 뭣이 있더냐. 차라리 내가 네 아버지께 빌어서라도 더 좋은 혼처를 알아보마……."이씨는 넋이 나간 딸의 모습이 못내 안쓰러워 쉬지 않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처음에 조사예가 도경진과 만나는 것을 허락했던 것도, 그가 탐화랑으로서 앞날이 창창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세상 어느 어미가 딸이 이런 수모를 겪는 것을 두 눈 뜨고 지켜볼 수 있겠는가.혼인도 하기 전부터 이 모양인데, 시집이라도 가면 오죽할까.이런 혼사는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했다."어머니."조사예는 불쑥 이씨의 손을 부여잡고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예전에 물려주시겠다던 대대로 내려온다는 그 옥벽 말이에요, 아직 유효한가요?"조사예는 마치 무언가에 단단히 홀린 사람처럼 이씨를 뚫어지게 응시했다."내게 자식이라곤 너 하나뿐인데, 널 안 주면 누굴 주겠느냐."이씨는 흠칫 놀라 미간을 찌푸렸다."가만있다가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게야?"설마 그 귀한 가보를 도경진 모자에게 갖다 바치며 환심을 사려는 건 아니겠지?"지금 당장 제게 주세요."조사예는 이씨의 손을 꽉 쥔 채 절박한 얼굴로 매달렸다.강유영은 도경진이 그녀를 마음에 둘 리 없다고 무시했고, 서유 같은 일개 시녀조차 얼굴도 몸매도 볼품없다며 도경진에게 시집가려거든 다음 생에나 노려보라며 조롱했다.게다가 도 부인은 또 어떤가!그동안 도 부인의 비위를 맞추려 온갖 재물을 가져다 바쳤다. 주는 대로 다 받아 챙겨놓고, 뒤로는 제 아들의 짝으로 다른 규수를 찾고 있다니?더 이상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강유영이든 다른 규수든, 그 누구에게도 도경진을 빼앗길 수 없었다.자신이 도경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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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2화

강왕부.조연화는 침향목으로 짠 화려한 침상에 앉아 있었다.침상 둘레에는 난새와 봉황이 어우러진 무늬가 빼곡히 조각되어 있었고, 천장에 매달린 휘장 역시 두 겹이었다. 안쪽은 값비싼 연라 비단이었고, 바깥쪽은 금실로 수놓은 금화단이었다.그뿐만 아니라 화장대와 옷장 또한 하나같이 정교하고 사치스러워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침실 구석구석 세심하게 꾸며지지 않은 곳이 없었고, 놓인 물건 하나하나가 최고급이라 그야말로 부귀영화의 극치였다.하지만 조연화는 미간을 찌푸리고 입꼬리를 비죽인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국공부에 있을 때만 해도 어머니가 전당포에서 은자를 빼돌리지 못해, 그녀는 낡은 옷을 입고 철 지난 장신구를 차며 남들에게 알게 모르게 조롱을 당해야 했다.그것이 그녀가 강왕에게 시집가기로 승낙한 이유 중 하나였다.지금은 모든 것을 다 가졌다. 밖에 나가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살 수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기쁘지 않았다.강왕의 모습을 떠올리면 만사가 다 귀찮고 흥이 깨졌다. 화려한 옷도, 귀한 장신구도, 값비싼 장식품도 두 번 다시 쳐다보기 싫었다.여자는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을 위해 단장한다는데, 이리 곱게 치장한들 누구에게 보여주겠는가?늙은 강왕에게?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졌다.채하는 곁에서 조심스레 물건을 정리하며 행여나 소리가 날까 숨을 죽이고 있었다.강왕부에 시집온 이후로 왕비 마마의 성미는 갈수록 괴팍해졌다. 어느 날은 기분이 좋아 한 무더기의 물건을 하사하다가도, 멀쩡하던 기분이 갑자기 뒤틀려 아주 작은 소리 하나에도 꼬투리를 잡고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그 탓에 곁에서 시중을 드는 시녀들은 늘 살얼음판을 걷듯 전전긍긍해야 했다.채운이 침실로 들어서며 발소리를 죽인 채 슬그머니 조연화의 눈치를 살폈다.그러고는 다시 채하를 바라보았다.채하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눈짓을 보냈다. 왕비 마마의 심기가 몹시 불편하니 지금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채운은 감히 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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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3화

조사예는 이 화려한 풍경을 보면서도 전혀 부럽지 않았다.조연화는 강왕이라는 늙은이에게 시집간 대가로 이런 부귀영화를 얻은 것이 아닌가. 생각할수록 역겨운 일이었다.그녀는 조금도 탐나지 않았다.조사예는 저도 모르게 도경진을 떠올렸다. 가슴이 뜨거워졌다.그에게 시집갈 수만 있다면, 거친 밥에 나물만 먹고 살아도 좋았다. 아무리 고생스러운 나날도 그녀에겐 달콤할 터였다.하물며 도경진은 앞날이 창창한 인재가 아닌가.이 혼사만 성사된다면, 머지않아 조연화보다 훨씬 더 번듯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한참 뒤에야, 조연화는 채하의 부축을 받으며 침실에서 걸어 나왔다."연화 언니……."조사예는 습관적으로 그녀에게 다가가며 다정히 불렀다.조연화는 치맛자락을 걷어쥐고 여유롭게 긴 의자에 주저앉을 뿐, 조사예를 본은 체 만 체했다.조사예는 무안해져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섰다."사예 아씨, 우리 마마께서는 이제 왕부에 계시는 어엿한 강왕비 마마이십니다. 그렇게 부르시는 건 예법에 어긋납니다."채하가 턱을 치켜들며 쏘아붙였다.조연화가 왕비가 되니, 시녀인 채하마저 사람을 깔아보는 태도가 한껏 거만해져 있었다.조사예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조연화에게 얌전히 예를 갖추었다."왕비 마마를 뵙습니다."하지만 속으로는 비웃음이 가득했다.늙은이에게 시집간 주제에 뭣이 대수라고 저리 유세를 떠는지 우스울 뿐이었다. 강왕이 어디 내놓기나 할 수 있는 사내이던가. 조연화는 그저 왕비라는 허울로 허세를 부릴 뿐이었다."인사는 됐으니 앉거라."조연화는 긴 의자에 비스듬히 기댔다. 머리카락은 약간 헝클어져 왕비다운 단정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고, 조사예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짜증과 멸시가 묻어났다.그녀는 조사예가 대체 무엇을 원하기에 그 귀한 옥벽까지 내놓았는지 들어볼 참이었다."마마를 뵙지 못한 지 꽤 되어서, 제가……."조사예는 곁에 있는 의자에 앉아 억지웃음을 지으며 비위를 맞추려 입을 열었다."쓸데없는 소리 말고, 부탁할 게 있으면 본론만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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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4화

조사예는 탁자 위에 옥벽을 내려놓고, 조연화를 올려다보며 말했다."그럼 마마께서는 강유영이 도 대인에게 시집가는 것을 그저 두 눈 뜨고 지켜보실 작정이십니까?"그녀는 이곳으로 오는 길에 조연화가 순순히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 짐작했다.옥벽을 가져왔다 한들 일이 그리 쉽게 풀릴 리 없었다. 그래서 오는 내내 조연화를 어떻게 쥐고 흔들지 치밀하게 궁리해 둔 참이었다."그게 무슨 소리야? 그 둘이 언제 또 눈이 맞았다는 거지?"조연화가 미간을 찌푸렸다."그 두 사람, 단 한 번도 관계가 끊어진 적이 없습니다. 도 대인이 다친 일은 마마께서도 이미 들으셨겠지요? 그게 다 강유영을 감싸려다 태자 전하의 사람들에게 두들겨 맞은 겁니다."조사예가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그녀는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속에 원한이 사무쳤다. 강유영이 대체 뭐라고 도경진이 그토록 푹 빠져 있는지 억울할 따름이었다.조연화는 미간을 찌푸린 채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도경진이 다쳤다는 소문을 듣긴 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는데, 그게 강유영 때문인 줄은 이제야 알았다."지금 큰오라버니 곁에는 새 여인이 생겨 강유영을 돌볼 겨를이 없습니다. 진국공 부인께 미움을 사 요월원에서도 쫓겨났으니, 이제 아무도 뒤를 봐주지 않지요."조사예는 머릿속으로 정리해 둔 말을 매끄럽게 꺼내놓았다."그러니 차선책으로 도 대인에게 시집가려 드는 겁니다. 도 대인도 본래 그녀에게 마음이 있으니, 마마께서 이대로 내버려 두신다면 두 사람이 백년해로하게 될 겁니다."그녀는 말을 이어가며 틈틈이 조연화의 안색을 살폈다."그 천한 것이 감히?"조연화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강유영의 그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자 이가 갈릴 만큼 화가 치밀었다.애초에 그녀가 강왕에게 시집가기로 마음먹은 것도 정화 공주에게 복수하려는 목적 외에, 강유영을 철저히 짓밟아주려는 심산도 있었다.도경진은 제법 번듯하고 훌륭한 사내였다. 강유영이 그런 사내에게 시집가서 평온하게 살도록 가만둘 수는 없었다."마마께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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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5화

"마마, 전하께서는 안에서 공무를 논의 중이십니다. 무슨 일이신지 말씀해 주시면 소인이 아뢰겠습니다."두 시종이 황급히 다가와 막아섰다."비켜라, 의논할 정무가 대체 뭐가 있다고!"조연화가 짜증스럽게 호통을 쳤다."마마, 이러시면……."두 시종은 감히 물러서지 못했다."당장 비키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조연화는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눈꼬리를 매섭게 치켜올렸다."마마, 목숨만 살려주십시오!"두 시종은 무릎을 꿇고 애원하면서도 감히 길을 내어주지 않았다.한참 실랑이를 벌이던 중, 서재 문이 열렸다.강왕이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더니 조연화를 보고는 다소 놀란 기색을 보였다."왕비, 무슨 일인가?"그가 비대한 몸을 문밖으로 비집고 나왔다."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조연화는 강왕이 황급히 닫고 나온 서재 문을 힐끗 쳐다보았다. 눈가에 혐오감이 스쳤다.그녀는 강왕이 안에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캐물을 생각이 없었다. 안 봐도 뻔했다. 그가 무슨 번듯한 정사를 돌보겠는가? 여인들을 숨겨두고 질펀하게 술판이나 벌이고 있었을 것이다.그녀는 차라리 강왕이 매일같이 그리 놀며 자신을 찾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야 조용히 지낼 수 있고 그 역겨운 얼굴을 피할 수 있으니 말이다."물러가거라."강왕이 두 시종에게 명하고는 조연화에게 다가갔다."왕비, 무슨 일인지 나가서 이야기하지.""나갈 것 없습니다. 그저 한마디면 됩니다."조연화는 몸을 살짝 비틀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혼인한 지 제법 시일이 지났음에도, 그녀는 대낮에 강왕의 흉측하고 늙은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보면 볼수록 구역질이 나고 혐오스러울 뿐이었다."무슨 일인데 그러시오?"강왕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오늘 넷째 동생이 찾아왔습니다."조연화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눈을 마주치진 않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그의 불룩 튀어나온 배가 눈에 들어와 속이 더욱 메스꺼워졌다."동생이 가져온 물건을 받았으니,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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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6화

"당연하지, 내가 언제 왕비를 속인 적이 있소?"강왕이 실실 웃으며 음흉한 눈빛으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얼굴에는 비굴한 웃음이 가득했다."오늘 밤엔 왕비의 처소로 가리다.""그럼 오늘 오후에 당장 입궁하시어 폐하께 말씀하십시오."조연화는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혐오스러운 강왕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구역질을 억누르며 꾹 참아내는 것뿐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전백겸은 궁을 나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전 대인, 잠시만요."등 뒤에서 돌연 누군가 그를 불러세웠다.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하고는 전백겸은 다소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조원철의 심복인 청운이었다."세자께서 내게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예, 세자께서 대인과 담소를 나누고자 하십니다."청운이 정중히 손을 내밀며 뜻을 전했다."세자께선 어디 계시는가?"전백겸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조원철이 대체 무슨 일로 자신을 찾는지 의문이었다."절 따라오시지요."청운이 말에 올라타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전백겸도 말에 올라타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 감로 다루 앞에 이르러 말에서 내렸다."대인, 안으로 드시지요. 세자께선 안쪽 별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청운이 윗층을 가리켰다.전백겸은 말없이 그를 따라 다루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랐다.청운이 별실의 문을 열며 고했다."세자, 전 대인을 모셔 왔습니다.""들라 하라."조원철이 짧게 대답했다."드시지요."청운이 다시 한번 전백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전백겸이 문지방을 넘어서자, 청운은 밖에서 문을 닫았다."세자를 뵙습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전백겸은 다가가 인사를 올리며 조원철의 안색을 슬쩍 살피고는 밀려오는 불안감을 억눌렀다.조원철이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될 인물이라는 것쯤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크게 두려워할 처지도 아니었다.어찌 됐든 그는 태자의 사람이었다. 현재 경교대영의 조도사로서 군량미 조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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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7화

조원철은 가볍게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상대를 노려보았다."세자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태자 전하의 사람입니다."전백겸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그를 마주 보았다."전부터 늘 묻고 싶었습니다. 태자 전하께서 그토록 손을 내미시는데도 끝내 뜻을 굽히지 않으시는 이유 말입니다.""진국공부는 오직 폐하의 명만 따를 뿐이오."조원철이 담담히 대답했다.전백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그 말씀은 틀렸습니다. 폐하께서도 이제 연세가 있으십니다. 영리한 새는 머물 나무를 가려서 앉는 법이지요. 세자께서도 본인과 진국공부의 앞날을 헤아리셔야 합니다. 태자 전하께서는 중궁전의 소생으로 우리 황실의 정통이시니, 훗날 반드시 대통을 이으실 분입니다. 세자께서 일찌감치 뜻을 함께하신다면, 훗날 태자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셨을 때 끝없는 부귀영화를 손에 쥐게 되지 않겠습니까."그가 기다리는 것도 바로 그날이었다. 훗날 자신은 새 황제를 옹립한 으뜸 공신이 될 터였다. 태자의 성정이 다소 불같다 하나 오랜 세월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고, 뒤에는 황후의 친정이 든든히 버티고 있으니 감히 누구도 이 판세를 뒤집을 수 없었다.조원철이 실소를 터뜨렸다.전백겸은 저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솔직히 말해, 지난 몇 년간 그는 조원철이 웃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왜 웃으시는 겁니까."그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전태성."조원철이 천천히 이름 하나를 내뱉었다.전백겸은 흠칫 몸을 떨며 순식간에 얼굴이 잿빛으로 질렸다. 입을 뻐끔거렸으나 당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의자 등받이에 얹어두었던 팔을 슬그머니 내리고 꼿꼿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마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전태성은 천 리 밖 고향에 있는 그의 친동생이었다. 조원철이 그 이름을 알 리가 없었다."거래를 하나 합시다, 전 대인."조원철이 서늘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전백겸은 간담이 서늘해졌으나, 억지로 평정을 가장하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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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8화

강유영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다 날이 밝아서야 겨우 눈을 붙였다.깨어보니 어느덧 정오가 다 된 시각이었다.오씨 어멈이 끓여온 따뜻한 새우죽 한 그릇을 들고 한 입씩 조용히 떠먹었다. 탁자에 앉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죽 한 그릇을 남김없이 비웠다."아씨, 조금 더 담아 올까요?"오씨 어멈이 물었다."어멈, 배불러요."강유영은 그릇을 내려놓으며 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았다."아씨, 오늘은 바깥이 제법 따뜻합니다. 나가서 볕이라도 좀 쬐시겠습니까?"단비가 곁에서 웃으며 물었다.오씨 어멈과 서유 역시 걱정스레 그녀를 바라보았다.요 며칠 세 사람은 입 밖으로 내색하진 못해도 속으로는 한결같이 애를 태우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초췌해지고 야위어가는 아씨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강유영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소은원은 요월원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마당에는 대나무 한 떨기와 예전에 담장 밑에 가꾸어 둔 화분 몇 개가 전부였다.그래도 담장 너머로 푸르게 새순이 돋아난 가지들이 보이고 이따금 산새 우는 소리도 들려오니, 바야흐로 화창한 봄날이긴 했다."꽃가지를 좀 꺾어와 화병에 꽂아야겠어."강유영은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뭐라도 소일거리를 찾아야 허튼생각에 빠질 틈이 없을 터였다.안 그래도 방안은 죽은 듯 삭막하여 생기라곤 없었다. 정원에서 싱싱한 꽃을 꺾어다 꽂아두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나아질 것 같았다.그러다 해 질 무렵 쪽문을 지키는 어멈이 식사를 하러 자리를 비우면, 시녀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필요한 물건을 사며 이곳을 떠날 채비를 할 생각이었다."제가 바구니를 챙겨 모시겠습니다."서유가 재빨리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단비 너도 따라가거라. 아씨를 모시고 바람이나 쐬고 오렴."오씨 어멈이 거들었다.곁에 사람이 많아 이런저런 말동무라도 해드리면 아씨의 기분이 조금은 나아질까 싶어서였다."됐다. 서유 하나면 충분해. 단비 너는 남아서 어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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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9화

뇌리에는 저도 모르게 요월원에 머물 때 조원철이 나무에 올라가 꽃을 꺾어주던 정경이 떠올랐다. 강유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신 그를 떠올리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지 않았던가.가위를 들어 매화 가지 하나를 자르자, 톡 하는 소리와 함께 가지가 떨어졌다.서유가 서둘러 바구니를 내밀어 받았다.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사방은 고요했고, 이따금 가위질하는 소리만 싹둑싹둑 울려 퍼질 뿐이었다.강유영은 손끝의 움직임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내리깔리며 눈 밑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얼굴 위로 햇살이 부서져 내리자, 투명할 만치 뽀얗고 고운 피부 결 위로 솜털들이 옅은 금빛으로 반짝였다. 그 정갈하고 온화한 자태는 마치 봄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한 떨기 새하얀 산동백 같았다."아씨, 참으로 고우십니다."서유는 순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매일같이 보는 얼굴인데도 어찌 볼 때마다 이리 고운지 신기할 따름이었다.강유영은 눈을 살짝 흘기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입에 발린 소리는 참 잘도 하는구나."그렇게 쳐다보는 칠흑 같은 눈동자가 둥글고 초롱초롱하여, 생기와 사랑스러움이 한껏 묻어났다."아씨는 웃으실 때가 훨씬 더 아름다우십니다."서유는 진심으로 감탄했다.강유영이 막 대꾸하려던 찰나, 한쪽에서 아주 다정하고 차분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혹 강 소저 되십니까?"강유영과 서유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멀지 않은 곳, 막 새순이 돋은 계수나무 아래에 앳된 여인이 서 있었다. 연보랏빛 치마를 단정히 차려입은 모습이 무척이나 단아하고 차분해 보였다.손에는 강유영과 마찬가지로 가위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역시 꽃가지를 꺾으러 온 모양이었다."아씨, 저 사람이 바로 소지란입니다."서유는 재빨리 강유영의 곁으로 한발 다가가 감싸 안듯 막아서며 작게 속삭였다.강유영은 아직 세자가 들인 첩실을 직접 마주한 적이 없었다."소 부인."강유영은 마음이 쓰라려왔다. 시선을 거두고 눈을 내리깔며 무릎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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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0화

"그럼 내일 행궁엔 함께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소지란이 다정하게 권했다."아닙니다. 소 부인은 큰오라버니 곁을 지키셔야 하지 않습니까? 저는 어머니 일행과 함께 갈 것입니다."강유영은 거절하며 덧붙였다."소 부인, 마저 다듬으시지요. 먼저 가보겠습니다."그녀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몸을 돌려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소지란은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약간의 호기심을 느꼈다.참으로 겁이 많은 앳된 아씨였다. 거리를 두면서도 예의 바르게 행동했지만, 한편으로는 무언가를 잔뜩 두려워하는 듯했다.하지만 진국공부 안에서 그녀에게 티끌만 한 호기심조차 보이지 않는 사람은 유일하게 저 아씨뿐인 듯했다.다른 이들은 마주치기만 하면 얼굴을 꿰뚫어보려는 듯, 이리저리 훑어보기 바빴다.그런데 강유영은 달랐다. 빤히 쳐다보지도 않고 오직 꽃가지를 자르는 데만 열중할 뿐, 꼬치꼬치 캐묻는 법이 없었다.*강유영은 잰걸음으로 소은원으로 향했다. 가슴이 미어질 듯 쓰라렸다. 설익은 청매실을 머금은 듯, 떫고 쓴 맛이 온몸 구석구석 번져갔으나 한 가닥의 원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딱 보아도 소지란은 흠잡을 데 없이 참한 여인이었다. 조원철이 저런 여인을 곁에 둔 것은 진정 복 받은 일이었다.소지란을 원망하지도 질투하지도 않았다. 조금도 미운 마음이 없었다. 그저 걷잡을 수 없이 가슴이 저며올 뿐이었다.서유는 소지란이 서 있는 쪽을 뒤돌아보며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억지로 달래어 모시고 나왔고 그나마 안색이 조금 나아졌거늘, 하필 소지란과 마주치다니……. 얼마나 속상하실까!*소은원으로 돌아오자 오씨 어멈과 단비가 마중을 나왔다."아씨, 국공 부인께서 사람을 보내 전갈을 내리셨습니다. 내일 황후 마마를 모시고 행궁으로 봄나들이를 가니 채비를 하라 하십니다."단비가 다가와 아뢰었다.강유영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다."아직 요동치는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머릿속이 어지러웠다.꽃가지를 다듬을 때만 해도 조금은 평온을 되찾았었는데, 소지란과 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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