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의 모든 챕터: 챕터 931 - 챕터 940

1195 챕터

제931화

단비의 말대로 과연 빼어난 절경이었다."목소리 좀 낮춰. 촌티 나잖아."서유가 작은 목소리로 단비를 타박했다.단비는 조금 무안한지 입을 가리며 대꾸했다."난 원래 촌뜨기가 맞잖아."오씨 어멈은 강유영 혼자 가는 것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며 기어코 두 시녀를 모두 곁에 딸려 보냈다. 자신은 뜰 안에서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한 발짝도 나가지 않을 테니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강유영을 설득했다.강유영은 어멈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결국 단비까지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이곳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저 얼굴이나 비추고는 이 기회를 틈타 저잣거리에 들러 물건을 살 참이었다."들어가자."강유영이 발걸음을 떼자, 기다리던 궁녀가 다가와 길을 안내했다.굽이진 냇가에서는 세가 자제들이 모여 투호를 즐기고 있었다. 길게 이어진 회랑 사이사이로는 귀녀들이 모여 꽃을 쥐고 담소를 나누었다. 그 밖에도 약초 이름 맞추기 놀이를 하거나 시를 주고받는 등, 드넓은 행궁 안은 조금도 쓸쓸할 틈 없이 북적였다.강유영은 걸음을 옮기는 내내 아는 얼굴이 보이지 않자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황후께서 납시면 사람들 틈에 섞여 예를 갖춘 뒤, 곧바로 행궁을 빠져나갈 작정이었다.비록 강유영은 아는 이를 보지 못했으나, 그녀를 알아본 사람은 이미 존재했다."저 계집이 바로 강유영이야."회랑 기둥 뒤에서 반쯤 고개를 내민 왕연령이 강유영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곁에 선 여인에게 속삭였다.강유영을 바라보는 왕연령의 두 눈에는 뼛속 깊은 원한이 서려 있었다.애초에 그 말은 분명 강유영을 위해 준비해 둔 것이었다. 그런데 강유영이 무슨 수를 썼는지 그 말을 자신에게 바꿔치기하는 바람에, 낙마하여 다리 한쪽이 부러지고 말았다.그 탓에 왕연령은 지금도 걸음걸이가 성치 않아 걸을 때마다 다리를 절뚝거려야 했다.그 일 때문에 왕연령은 지금까지도 혼처를 정하지 못했다.명색이 태부의 영애인데 신분이 낮은 가문의 자제는 눈에 차지 않았다. 그렇다고 명문거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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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2화

"유영 언니, 도 대인."조사예는 얼굴에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채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도경진은 무의식중에 옆으로 한걸음 물러서며, 강유영의 앞을 가로막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조사예를 바라보았다."도 대인, 이게 무슨 뜻입니까?"조사예는 심장을 칼로 에이는 듯한 고통을 느꼈으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유영 언니는 제 친언니나 다름없는데, 제가 언니를 해치기라도 한단 말입니까?"조사예는 치밀어 오르는 질투와 분노를 꾹 억눌렀다.조연화가 이미 약조를 했으니, 머지않아 혼인을 윤허하는 교지가 내려올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무조건 참아야 했다. 지금 도경진에게 미움을 사서는 안 되었다."오, 도 대인이 여기 있었군."서준이 한 손을 등 뒤로 뒷짐 진 채 거들먹거리며 다가오더니, 강유영의 곁에 섰다."서왕 전하를 뵙습니다."조사예는 황급히 예를 갖추었다."서왕 전하."도경진 역시 인사를 올렸다.강유영도 따라 예를 갖추고는 입을 다물었다. 서준의 시선이 도경진과 조사예 사이를 번갈아 향하더니, 돌연 실소를 터뜨렸다."경하하네, 도 대인."도경진은 뜬금없는 인사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들어 서준을 쳐다보았다."전하, 송구하오나 제게 무슨 경사라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도경진의 마음속에 옅은 불안감이 피어올랐다.서준의 말속에 말이 있었다. 대체 무슨 뜻일까?반면 조사예는 그 말을 듣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서왕 전하께서 도경진에게 축하를 건넨다고?혹시 폐하께서 그녀와 도경진의 혼인을 윤허하셨다는 소식을 서왕 전하께서 미리 들으신 것은 아닐까?강유영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서준을 바라보았다.대체 도경진에게 무엇을 축하한다는 걸까?서준은 도경진을 보며 픽 웃음을 흘렸다."아무것도 아닐세."지금 당장 수수께끼를 풀어버리면 너무 재미가 없었다.그는 도경진이 진상을 알게 되었을 때 일그러질 표정을 구경하고 싶었다. 십중팔구 벌레를 삼킨 듯한 얼굴일 터였다.도경진은 마음속 의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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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3화

"세자, 경하드립니다…….""그 오랜 세월 세자 곁이 비어 있더니 드디어 사람이 생겼군요. 정실부인은 언제쯤 맞이하실 겁니까……."강유영이 천천히 몸을 돌리자, 대문을 지나 들어오는 조원철의 모습이 보였다. 소지란은 그의 곁에서 예법에 맞게 한걸음 뒤처져 걷고 있었다.조원철은 훤칠한 키에 어깨가 벌어지고 다리가 길었다. 걸음걸이는 묵직했고, 깊은 연못과 험준한 산봉우리처럼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흘렀다.소지란은 가냘프나 병약해 보이지 않았고, 걸음걸이가 사뿐하면서도 단정했다. 키는 조원철보다 머리 하나만큼 작았다.한 사람은 훤칠하고 한 사람은 아담했으며, 한 사람은 강인하고 한 사람은 부드러웠다. 푸릇푸릇한 화초들 사이를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모습은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봄바람에 가볍게 흩날리는 옷자락마저 다정하게 얽히는 듯했다.강유영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묵직한 망치로 명치를 얻어맞은 것처럼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뒷걸음질을 쳤다. 무릎 뒤편이 돌의자에 부딪히자 다리에 훅 힘이 풀리며 그대로 서준의 곁에 주저앉고 말았다."조심해야지."서준이 깜짝 놀라 황급히 손을 뻗어 강유영을 부축했다."괜찮은 것이냐?""제게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강유영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속이 험하게 뒤틀려 당장이라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지만, 토해낼 수도 없어 괴롭기 그지없었다."얼굴이 새하얗네. 어디가 불편한 것이냐?"서준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아침을 잘못 먹었는지 속이 좀 불편합니다."강유영은 배를 감싸 쥐었다. 반쯤은 진심이었다. 속이 메스꺼운 것은 맞았으나, 결코 음식을 잘못 먹어서가 아니었다."어의를 불러오거라……."서준이 고개를 들고 남풍을 부르려 했다."안 됩니다."강유영이 서준의 옷소매를 다급히 붙잡았다."흔히 있는 일입니다.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질 겁니다."조원철 쪽을 보지 않으면 금방 가라앉을 터였다."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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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4화

"경들은 예를 거두시오."건정제는 오늘 기분이 무척 좋은지, 미소를 머금은 채 손을 들어 올렸다.곁에 선 황후 역시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단아하고 품위 있는 자태는 과연 천하의 국모다웠다."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황후 마마."모든 이들이 인사를 올린 뒤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건정제는 앞으로 두어 걸음 나서며 좌중을 한 번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오늘 행궁으로 봄나들이를 나오니 하늘이 맑고 공기가 청명하여, 경치도 사람도 참으로 조화롭소. 경들과 가솔들은 예법에 얽매이지 말고 마음껏 즐기게. 그래야 이 아름다운 절경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아니겠소."건정제는 그리 말하며 다시 손을 들어 사람들이 편히 머물도록 이끌었다."예, 폐하."사람들은 건정제의 자애로운 모습에 크게 기뻐하며 한목소리로 대답했다."자, 다들 편히 놀다 오시라."건정제는 황후의 손을 이끌더니, 조원철을 비롯한 측근 대신들을 향해 말했다."자네들은 짐을 따라오너라. 궁에서 새로 빚은 다과를 맛보자고."황제와 중신들이 곁에 있는 정자로 들어가 자리를 잡자,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져 각자 구경에 나섰다.서너 명의 귀부인들은 한데 모여 앉아 바둑을 두며 담소를 나누었다. 서준은 종실 자제들과 어울려 축국(蹴鞠: 고대 공놀이의 일종)을 하며 연신 환호성을 이끌어냈다. 내관들은 신선한 과일과 다과를 나르며 분주히 오갔고, 행궁 안은 어느새 활기가 넘쳤다.강유영은 홀로 나무 아래 서서 웃음꽃이 만발한 연회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그 소란스러움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그녀는 마치 얇은 막 너머에 서 있는 것처럼 주변의 모든 소음이 자신과는 동떨어진 일처럼 느껴졌다.강유영은 조원철 쪽도, 소지란 쪽도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또다시 속이 뒤집힐까 두려웠다. 그저 까만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살피며, 지금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도 괜찮을지 가늠하고 있었다."강 소저, 어울려 놀지 않으십니까?"어느새 다가온 소지란이 강유영의 곁에 서 있었다.강유영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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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5화

예전의 강유영이라면 감히 나서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당연히 달랐다.그동안 숱한 방도를 배웠으니, 막상 맞붙게 된다면 왕연령 무리는 거뜬히 상대할 수 있었다.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긴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오늘이 지나면 저들과는 더 이상 얽힐 일도 없을 터였다."저 여인은 경교대영의 정삼품 조도사 전백겸의 여식, 전보희입니다. 강 소저의 신분에는 미치지 못하니 구태여 참아주실 필요는 없습니다."소지란은 왕연령과 함께 바닥에 쪼그려 앉아 연을 매만지는 여인을 가리키며 알려주었다.강유영은 그들을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따지고 보면 강유영은 진국공부의 아씨였고, 전보희의 부친은 정삼품 대신이니 확실히 진국공에 비할 바가 못 되었으며, 조원철에게는 더더욱 미치지 못했다.하지만 강유영은 그저 양녀일 뿐, 뒤를 든든하게 받쳐줄 이가 없었다. 반면 전보희는 가문의 적녀이니, 무슨 일이 생기면 부모가 당장 나서서 감싸줄 것이다.전보희는 왕연령의 절친한 벗인 듯했다. 그러니 두 사람이 한마음으로 그녀를 적대하는 것이리라.지금도 두 사람은 나란히 쪼그려 앉아 바닥에 놓인 나비 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연의 날개에는 금가루가 뿌려져 있어, 햇빛을 받아 눈이 부시게 반짝거렸다."소 부인께서는 어찌하여 놀지 않으십니까?"강유영은 고개를 돌려 소지란을 쳐다보았다.먼저 입을 열지 않으면 소지란이 또 다른 것을 캐물을 것만 같아, 차라리 먼저 묻는 편이 나았다."강 소저께서는 제가 왜 자꾸 말을 거는지 아십니까?"소지란은 먼 곳을 응시했다. 눈가에는 묘한 빛이 어렸다.강유영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소저와 제가 몹시 닮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소지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강 소저께서도 저들과 어울리지 못하시는 듯한데,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 곁에 있을 때 저는 그저 말단 관리의 여식일 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역참에서 사람들을 맞고 보내느라 바쁘셨고, 아무도 저 같은 어린 계집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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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6화

강유영은 무의식중에 몇 걸음 뒷걸음질 쳤다.등 뒤는 바로 나무라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강유영이 보기에 저 두 사람 역시 더 이상 뒤로 오진 못할 듯했다.전보희는 강유영의 코앞까지 뒷걸음질 치더니, 고개를 돌려 힐쩍 쳐다보고는 쥐고 있던 연줄을 거칠게 잡아당겼다.나비 연이 강한 힘을 받아 공중으로 솟구쳤고, 그 바람에 전보희의 손에서 빠져나간 얼레가 강유영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거리는 너무도 가까웠고, 얼레의 가장자리는 단단한 나무라 모서리가 날카로웠다.순식간에 그 흉험한 나무 모서리가 강유영의 얼굴을 내리긋기 직전이었다.강유영은 흠칫 놀라 두 눈을 크게 뜨며 몸을 피하려 했다."조심하십시오!"곁에 있던 소지란이 돌연 손을 뻗어 강유영의 뺨을 감싸 막아주었다.이내 짧은 비명이 들려왔다."소 부인, 괜찮으십니까!"강유영은 화들짝 놀라 황급히 상태를 살폈다.소지란의 손등은 얼레에 깊게 베여 뻘건 피가 흐르고 있었다.강유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소지란이 손을 뻗어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방금 찢긴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얼굴이었을 것이다.세상에 이리 공교로운 우연은 없었다. 전보희는 분명 고의였다!강유영은 서둘러 수건을 꺼내 소지란의 손을 지혈하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서유에게 외쳤다."빨리 어의를 불러와!""안 됩니다. 소란을 피우지 마십시오."소지란이 그녀를 만류했다."작은 상처일 뿐입니다. 약을 바르고 천으로 감아두면 금방 낫습니다."강유영은 멍하니 소지란을 바라보았다.남의 이목을 끄는 것을 꺼리는 소지란의 성정은 과연 강유영과 꼭 닮아 있었다."어머나, 죄송합니다. 연이 너무 빨리 오르는 바람에 얼레를 놓쳤네요."전보희가 다가와 말했다. 얼굴에는 오만한 기색이 역력했고 뉘우치는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실수였습니다. 소 부인, 괜찮으십니까?""그게 정녕 실수입니까?"강유영은 서늘한 눈빛으로 전보희를 쏘아보았다."소 부인께서 막아주지 않으셨다면, 찢긴 것은 제 얼굴이었을 겁니다."강유영은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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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7화

말을 마친 강유영은 소지란을 힐끗 보았다.소지란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막상 강유영이 상처를 건드리자 고통에 찬 숨을 들이켰다.새하얀 손등 위로 길고 깊게 파인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강유영은 차마 눈뜨고 보기 안쓰러워, 약가루를 조심스레 뿌리며 정성껏 천을 감아주었다."소 부인, 고맙습니다."강유영은 시선을 깐 채 손끝에 집중하며 다시금 감사를 표했다.상처를 볼수록 자꾸만 등골이 서늘해졌다.소지란이 손을 뻗어주지 않았다면 오늘 얼굴이 엉망으로 찢겼을 것이다. 어쩌면 경화 공주처럼 평생 지우지 못할 흉터가 남았을지도 모른다."괜찮습니다. 가벼운 상처일 뿐인걸요."소지란은 강유영을 마주 보며 생긋 웃었다.강유영도 입술을 깨물다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본래 강유영은 자신과 소지란이 평생 얽힐 일이 없을 거라 여겼다. 소지란을 미워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친분을 쌓을 일도 없을 터였다.하지만 지금 보니 그 생각이 틀렸다.어느새 두 사람은 스스럼없는 벗이 되어가고 있었다.저만치 떨어진 곳에서는 왕연령과 전보희가 여전히 무릎을 굽힌 채 예를 갖추고 있었다. 서준이 일어서라는 명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남풍, 세가의 귀녀들이 나를 뵈면 본디 무슨 예를 갖춰야 하느냐?"서준은 뒷짐을 진 채 여기저기 딴청을 피우며 눈앞의 두 사람을 본 체 만 체했다.작정하고 곤욕을 치르게 할 심산이었다.감히 제 유영이를 해치려 들다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찌 따끔한 맛을 보여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전하, 마땅히 엎드려 절을 올려야 합니다."남풍이 지체 없이 대답했다.평소 황자를 뵐 때는 가볍게 무릎을 굽히는 것으로 족하고, 웬만해선 그 예를 깐깐하게 따지지 않았다. 하지만 작정하고 법도를 따지자면 종실 자제가 아닌 이상 황자 앞에서는 엎드려 절을 올리는 것이 맞았다."서왕 전하를 뵙습니다."눈치 빠른 왕연령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전보희는 좌우를 두리번거리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서준을 향해 무릎을 굽히려 했다."너는 꿇을 것 없다. 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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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8화

전보희는 마른침을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전하, 제가 드린 말씀은 모두 사실입니다. 저는 저 강 소저와 전에 일면식도 없는 사이로, 오늘 처음 뵈었을 뿐입니다.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어찌 고의로 해치려 했겠습니까?"그렇다. 강유영과는 오늘이 첫 만남인데 무슨 이유로 해치려 들겠는가.전보희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제법 그럴듯한 변명이라 여기며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서준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전보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전보희는 그 시선에 등골이 오싹해지며 온몸의 솜털이 쭈뼛 곤두섰다.서왕 전하가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될 험악한 인물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리 쳐다보는 것일까?강유영을 털끝 하나 다치게 한 것도 아닌데, 벌을 내리기야 할까 싶었다."천만다행으로 알거라."서준이 돌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가벼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전보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를 올려다볼 뿐, 감히 입을 떼지 못했다."다친 사람이 유영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기라는 뜻이다."서준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전보희를 응시하며, 미지근한 손끝으로 그녀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그렇지 않았다면, 네 얼굴에도 똑같이 선혈이 낭자한 상처가 그어졌을 테니까. 유영이 얼굴에 난 상처와 똑같은 길이, 똑같은 깊이로. 내 말을 믿겠느냐?"말투는 전혀 험악하지 않았고, 오히려 온화하기까지 했다. 얼굴에는 평소와 다름없는 유려한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그 매혹적인 여우 눈매만큼은 서슬 퍼런 안광을 뿜어냈다. 느긋한 태도에도 사람을 짓누르는 살벌한 기세는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전보희는 굶주린 맹수를 마주한 듯한 공포에 사로잡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눈시울이 붉어지며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서왕에게 단단히 찍혀 이토록 살벌한 협박을 당할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왕연령을 위해 섣불리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부친은 태자의 측근이니, 본디 서왕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행여 오늘 일로 부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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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9화

본래 조원철은 전백겸에게 손을 써두어, 그의 여식이 먼저 서준에게 다가가게 한 뒤 기회를 보아 거들 심산이었다.그런데 서준이 알아서 그 여인과 얽혀주었다.참으로 잘된 일이었다."자네 말은……."건정제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동하여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신은 다른 뜻이 없습니다."조원철은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그저 서왕 전하께서 직접 손을 내미시는 것을 보니 저 여인에게는 남다른 마음이 있으신가 하여, 지나가는 말로 여쭈었을 뿐입니다."서준 쪽에서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전각 안에서는 들리지 않으니, 사람들은 내막을 알 턱이 없었다.하지만 서준이 손을 뻗어 그 여인의 뺨을 가볍게 어루만진 것만큼은 정자 안의 수많은 눈이 똑똑히 목격했다."아바마마, 소자 생각에는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태자가 참지 못하고 불쑥 입을 열었다.건정제가 고개를 돌려 태자를 힐끗 쳐다보았다.황후는 다급히 태자에게 눈치를 주며 허튼소리를 하지 말라 만류했다.태자는 아직 금족령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오늘 행궁 봄나들이에 동행할 수 있었던 것도 황후가 황제에게 간곡히 매달려 얻어낸 결과였다.이런 때일수록 태자는 응당 진중하게 처신하며 폐하의 눈도장을 찍어야 했다. 쓸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할 때가 아니었다.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어찌 주워 담을 수 있겠는가."무엇이 온당치 못하다는 것이냐?"건정제가 물었다. 목소리에서는 희비를 읽어낼 수 없었다."전 소저가 아우에게 마음이 없을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만약 그런 마음이 없다면, 두 사람의 일생을 망치는 격이 되지 않겠습니까?"태자는 속도를 늦추어, 이리저리 재가며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태자 역시 조심스러웠다.지금 아바마마는 그를 몹시 탐탁지 않아 하셨다. 행여 또 말실수라도 했다간 더욱 미움을 살 것이 뻔했다.그때, 곁에서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왕이 실소를 터뜨렸다."태자께서 언제부터 성정이 이리 변하셨는가? 일면식도 없는 여인의 사정까지 이리 살뜰하게 살필 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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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0화

"저 두 사람을 보아하니 제법 잘 어울리는군."건정제는 서준과 전보희 사이를 몇 번 번갈아 보더니 이내 손을 크게 휘저으며 즉각 명을 내렸다."고의, 짐의 교지를 전하라. 전백겸의 여식 전보희를 서왕의 후궁으로 들이되, 신분은…… 서비로 삼도록 해라."서비는 측비보다는 한 품계 낮았으나, 황자의 후궁치고는 결코 낮은 품계가 아니었다."예, 폐하."고익이 황급히 명을 받들었다."서왕에게 혼사를 내리시다니 참으로 큰 경사입니다."강왕이 사람 좋게 허허 웃으며 나섰다."폐하, 기왕이면 며칠 전 제가 올린 청도 윤허하시어 도 대인과 진국공부 넷째 아씨의 인연도 이어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겹경사를 치르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조연화가 그에게 부탁한 당일, 강왕은 곧장 입궁하여 건정제를 찾았었다.건정제는 그 자리에서 확답을 주지 않고 그저 생각해보겠다고만 했다. 지금 건정제가 서준에게 혼사를 명하며 기분이 좋은 듯하니, 분위기를 타서 그 일까지 단숨에 매듭지을 심산이었다.이처럼 대수롭지 않은 일로 굳이 조연화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도 없었다. 그저 입 한 번 더 놀리면 그만일 뿐, 흠잡힐 일도 아니었다.게다가 도경진이란 사내도 꽤 쓸 만해 보이니, 어쩌면 훗날 제 사람으로 부릴 수도 있었다."황형은 평소 유흥에만 빠져 만사를 제쳐두시더니, 이번엔 어찌하여 도 대인의 혼사에 이리 각별히 신경을 쓰시는 거요?"건정제가 느릿하게 물었다.그의 시선은 조원철의 얼굴에 가 닿았다.진국공부 조사예라면 조원철의 동생이었으니, 그가 어찌 생각할지 궁금했던 것이다.하지만 애석하게도 조원철은 반듯하고 엄숙한 얼굴로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제가 어찌 그자를 신경 쓰겠습니까?"강왕은 짐짓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다 제 왕비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왕비가 친정에 있을 때 넷째 아씨와 가장 각별했습니다. 그러니 넷째 아씨의 혼사에 마음이 쓰일 수밖에요. 왕비가 제게 폐하의 은전을 간청하기에 이리 나선 것이니, 부디 폐하께서 그 뜻을 이루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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