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번 생은 가족부터 다시 선택할 거야: Chapter 451 - Chapter 460

544 Chapters

제451화

“화친왕 전하께서는 모르시나 본데, 장사를 논하기에 앞서 먼저 정부터 통해야 하는 법이랍니다.”소설아는 그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끼워 깍지를 낀 뒤, 가볍게 힘을 주어 쥐었다.그러자 추영우의 눈가에 서린 냉기가 한층 짙어졌다.“억지 부리기는.”소설아는 빙그레 웃으며 그의 허리춤으로 시선을 내렸다. 시선이 머문 곳은 추영우의 옥대에 매달린 향낭이었다.그 향낭은 소설아가 추영우의 생일을 맞아 직접 만들어 선물한 것이었다.존귀한 신분으로 태어난 구황자인 만큼, 웬만큼 좋은 물건이라면 어려서부터 숱하게 보고 자랐을 터였다. 그러니 값비싼 물건을 선물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든 향낭에 마음을 담아 건네는 편이야말로 그의 마음에 진심을 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하지만 소설아의 자수 솜씨가 영 서툰 탓에, 향낭에 수놓은 원앙 한 쌍은 물놀이를 즐기는 모습이라기보다는 어찌 보면 신이 나서 날뛰는 들오리에 가까워 보였다.“화친왕 전하, 이 향낭을 차고 다니시다가 남들에게 비웃음이라도 사신 건 아니지요?”추영우는 고개를 숙여 허리춤의 향낭을 힐끗 바라보더니, 차갑게 쏘아붙였다.“네 자수 솜씨가 서툰 줄 알면 연습이나 더 하거라.”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향낭을 떼어낼 기색은 전혀 없었다.소설아가 그에게 만들어 준 향낭은 모두 세 개였다. 추영우는 그것들을 매일 번갈아 가며 허리춤에 차고 다녔으며, 혹여 때라도 탈까 노심초사하며 애지중지 다루었다.오늘 허리춤에 찬 것은 ‘물놀이하는 원앙’이었고, 나머지 두 개는 침상 머리맡에 걸어 두었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볼 수 있도록 해둔 것이었다.원래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옥패마저 이제는 차지 않았다.남들의 시선을 끌지만 않았다면, 추영우는 마음 같아서는 세 개의 향낭을 모조리 옥대에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고 싶을 지경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화친왕 전하.”소설아는 입으로는 공손하게 대답하면서도, 손으로는 그의 손을 장난스럽게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오랜 세월 무예를 연마한
Read more

제452화

객실 안의 온도는 갈수록 높아지는 듯했고, 공기마저 끈적하게 달라붙는 것 같았다.“전하, 제 미인계는 합격입니까?”소설아가 물었다.추영우는 여느 때처럼 고집을 부리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그저 그렇구나.”입으로는 그저 그렇다면서도, 잔뜩 예민해진 몸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귓바퀴는 붉게 달아올랐고, 눈동자에는 옅은 안개가 낀 듯 시선마저 점차 흐릿해졌다…두 사람이 대낮에 만나는 일은 드물었다. 평소 캄캄한 밤에 만날 때면 소설아는 희미한 달빛에 의지해서야 겨우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수줍어하는 기색을 고스란히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소설아에게는 주변의 공기마저 달콤하게 느껴졌다.그녀는 그가 지금 얼마나 예민해져 있는지 단박에 알아차렸다.지금의 전하는 마치 잔뜩 움츠러든 꽃잎 같아서, 가볍게 입김만 불어도 잎사귀 하나하나가 파르르 떨릴 것만 같았다.소설아가 고개를 치켜들었다.“그저 그렇다고요? 아무래도 제가 좀 더 노력해야겠군요.”깊고 그윽한 눈동자에 드리운 긴 속눈썹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파르르 떨렸다. 이토록 빤히 사람을 응시하는 모습은 마치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 요물 같았다.추영우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목울대가 위아래로 크게 움직이자, 그 위에 난 깨알 같은 점이 한층 더 도드라져 보였다.소설아가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천천히 아래로 끌어당겼다.그 순간,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소 사장님, 화친왕 전하. 이야기는 다 끝나셨습니까?”서경수의 목소리였다.방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추영우는 목이 메어 입을 열기가 곤란했고, 소설아는 애초에 대답할 마음이 없었다.서 사장님은 어찌 이리도 귀신같은 때를 골라 나타나는지. 일찍 와도 늦게 와도 될 일을, 하필이면 꼭 이럴 때 찾아와 두 사람의 분위기를 모조리 깨뜨리고 있었다.소설아는 난생처음 서 사장님이 이토록 성가시게 느껴졌다.“들어가도 되겠습니까?”대답을 기다리지 못한 서경수가
Read more

제453화

서경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혹여나 감당하기 몹시 까다로운 조건은 아닐까? 만약 황위에 오르는 것을 도와달라는 식의 요구라면, 그로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서경수로서는 알 턱이 없었지만, 사실 추영우는 두 사람이 말하는 ‘장사’가 무엇인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차갑고 도도한 표정으로 시치미를 떼며 얼버무리고 있을 뿐이었다.소설아가 말했다.“서북 지역의 구제를 화친왕 전하께서 단독으로 주도하실 수 있도록, 서 대인께서 방도를 마련해 주셨으면 합니다.”서경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어째서 하나같이 서북 구제에 목을 매는 것입니까?”태자도 가고 싶어 하고, 삼황자도 안달이 나서 가고 싶어 했다.호부에서 내놓은 구제 은전은 쥐꼬리만 한 데다, 현지의 재난 상황은 몹시 심각하다고 들었다. 이토록 뼈 빠지게 고생만 하고 자칫하면 욕까지 먹기 십상인 궂은일에, 대체 어째서 다들 기를 쓰고 달려드는 것일까?서경수가 눈을 크게 굴리며 덧붙였다.“혹 무슨 쏠쏠한 이권이라도 떨어지는 겁니까? 이쯤 되니 저도 구경 삼아 한번 가보고 싶어지는군요.”소설아가 웃으며 받아쳤다.“대인께서 가버리시면 염전은 누가 관리합니까? 밀소금처럼 중차대한 일을 저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추영우는 그제야 두 사람이 이토록 은밀하게 도모해 온 일이 다름 아닌 밀소금 사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밀소금을 다루다 적발되면 사형을 면치 못할 대죄였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것을 조사하고 적발할 주체 역시 바로 자신이었다.‘정 하고 싶다면야, 하게 두지 뭐.’서경수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사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전하, 안심하십시오. 제가 지금 당장 가서 말끔히 처리해드리겠습니다.”천배취를 나선 서경수는 지체 없이 황궁으로 향했다. 그러나 황제를 찾아가는 대신 발길을 돌려 태후가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그는 글씨 한 폭을 써서 태후에게 올려 감상하게 한 뒤, 오후 내
Read more

제454화

채여진은 도무지 추영우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그녀는 분명 추영우 하나만을 바라보고 입궁한 것이었다. 아주 조금만 더, 마지막 문턱 하나만 넘었더라면 자신이 화친왕비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원래 그녀는 황제를 추영우의 대역으로 삼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황제와 추영우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조금도 닮지 않았다. 그녀는 황제에게서 추영우의 흔적을 조금도 찾을 수 없었고, 그에게서 일말의 위안마저 얻을 수 없었다.“화친왕 전하, 저는…”추영우는 눈을 내리깔았다. 더는 들을 말이 없다는 듯 미련 없이 몸을 돌려 가려 했다.채여진이 다급히 손을 뻗어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떨리는 목소리가 뒤따랐다.“화친왕 전하, 저는 전하를 돕고 싶습니다. 설마 황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으신 겁니까?”추영우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채빈 마마,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그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이런 대역무도한 말을 남이 듣기라도 한다면, 멸문지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채여진은 입술을 꾹 깨물더니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갔다. 입궁한 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마침내 화친왕 전하와 단둘이 마주할 기회를 얻은 탓에, 그녀의 가슴은 터질 듯 세차게 뛰고 있었다.“전하, 안심하십시오. 이곳은 진작 사람들을 물려 두어 주변에는 제 사람들뿐입니다.”추영우가 아예 몸을 돌려 그녀를 마주 보았다.“채빈 마마, 그들이 과연 마마의 사람인지, 아니면 양비 마마의 사람인지부터 똑똑히 구분하셔야 할 겁니다.”채여진은 줄곧 양비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양비를 친언니처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이토록 안목도 얕고 판단력도 부족한 자와 어찌 뜻을 함께한단 말인가. 추영우로서는 애초에 생각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었다.채여진의 미간이 일순 찌푸려졌다가, 이내 다시 부드럽게 펴졌다.“전하께서도 줄곧 저를 지켜보고 계셨던 거군요, 그렇지요? 사실 전하의 마음속에도 제가
Read more

제455화

향이는 눈을 내리깔고 속으로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구족을 멸할지도 모를 이런 대역무도한 말에는 단 한마디도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모른 척하고 넘어가면, 채빈 마마는 점점 더 억지를 부리며 날뛸 것이 뻔했다.상전의 입을 다물게 할 요량으로, 향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화친왕 전하께서는 누가 보아도 지고지순한 분이십니다. 전하의 마음이 마마께 있지 아니한데, 마마께서 해와 달을 따다 눈앞에 바치신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마마, 부디 서둘러 단념하시옵소서.”채여진은 추영우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며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자신의 처소로 돌아가는 길에도 그녀는 억울한 듯 작게 중얼거렸다.“내가 소씨 가문의 그 천한 년보다 못한 게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외모면 외모, 기품이면 기품, 내 그년보다 달리는 게 대체 무엇이냐 말이다!”향이는 채여진을 부축하며 걸음을 옮겼다.“마마, 사람의 눈이란 본디 제각각이 아닙니까. 소 아가씨가 아무리 박색이라 한들 전하의 눈에는 고와 보일 것입니다. 남녀 간의 정이란 본디 이 세상에서 가장 까닭을 알 수 없는 노릇이니, 마마께서도 이제 그만 마음을 거두시옵소서…”향이가 채여진을 부축해 자리를 뜨고 난 뒤, 멀지 않은 언덕 틈에서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쑥 모습을 드러냈다.그 그림자의 주인은 다름 아닌 설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 설현정이었다. 바로 태후가 추영우의 배필로 점찍어 둔 인물이었다.설씨 가문은 대대로 명문가 중에서도 으뜸으로 손꼽혔다. 위로 삼 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역대 황후의 자리는 모조리 설씨 가문의 여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다만 지금의 황제는 태후의 친아들이 아니었기에, 황후의 자리를 두고 태후와 황제 사이에는 팽팽한 기 싸움이 벌어졌다. 결국 승리는 황제에게 돌아갔고, 현재의 황후는 설씨 가문 출신이 아니었다.하지만 태후 역시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태후는 기어이 설씨 가문의 여인을 태자빈 자리에 앉혔고, 자연스레 설씨 가문은 태자의 든든한 뒷배가 되었다.
Read more

제456화

위원후부.며칠 뒤, 연화 군주는 과연 위원후부에 초청장을 보내 세 아가씨를 화연에 함께 초대했다.초청장에는 후부의 아가씨들이 곱게 단장하고 참석해야 하며, 민씨 역시 반드시 참석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화연에서 중대한 발표가 있을 예정이라는 이유였다.후부 전체가 기쁨으로 들썩였다.소명주는 하녀를 불러 지시했다.“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아내거라. 연화 군주의 화연 날, 소설아가 대체 무슨 옷을 입을지 말이다!”그녀는 다리의 통증을 참아 가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다 실수로 상처를 건드리는 바람에 “윽!” 하고 숨을 들이켰다.“천벌을 받을 소설아, 다 그 천한 년 때문이야! 화연 날에는 대체 어떡하지? 어머니, 저 정말 너무 아픕니다!”소명주는 이를 악물고 악에 받친 목소리로 내뱉었다.“언젠가 그 소설아 년을 갈기갈기 찢어 죽여 버리고 말겁니다!”곁에서 듣고 있던 민씨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민씨 역시 소명주와 함께 소설아를 저주했을 터였다.소명주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어머니, 왜 그러십니까?”얼마 전 갑자기 벙어리가 되었던 일로 인해 민씨는 깊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정말 부처님께서 벌을 내리신 걸까?’요 며칠 그녀는 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만 감으면 소설아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말이 씨가 되니 입으로 업을 짓지 말라고, 그러지 않으면 또다시 벙어리가 될 것이라던 그 말… 민씨는 그것이 부처님께서 자신에게 내리신 벌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민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명주야, 어미는 요새 자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구나. 차라리 소설아를 놓아주자구나. 그것이 나 자신을 놓아주는 길이기도 할 테지. 네가 연화 군주의 수양딸이 되어 홀로 빛나면 될 일이다. 더 이상 그 애와 얽히지 말자.”소명주가 깜짝 놀라 물었다. “어머니,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민씨는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나무아미타불’을 외웠다.“부처님은 자비로우시니, 지금이라도 개과천선한다면
Read more

제457화

채 부인의 처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약탕에 몸을 담그고 있을 때는 가려움이 잠잠하다가도,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가려움증이 몇 배로 심해졌다. 가려워서 도통 잠을 이룰 수 없었고, 피부가 짓무르도록 박박 긁어 대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매일 약탕에 들어가 있을 때에만 겨우 눈을 붙일 수 있을 정도였다.의원을 몇 명이나 불렀건만 누구 하나 병의 뿌리를 뽑지 못했다.마지막으로 찾아온 의원은 독충의 알이 털 사이사이에 숨어 있을 수도 있으니, 온몸의 털을 모두 밀어 버린 뒤 다시 약탕을 쓰면 나을 가능성이 있다고 조언했다.의원들은 맥을 짚을 때마다 혹여 병이 옮을까 두려워 팔을 한껏 뻗어 거리를 두었다.이 병은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 데 그치지 않고, 지독한 굴욕감까지 안겨 주었다.예로부터 몸과 머리카락은 모두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야 머리카락 하나 함부로 자를 수 없는 법이었다.하지만 꼬박 일주일 내내 고문과도 같은 고통에 시달리자, 채 부인도 더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마침내 온몸의 털을 밀어 버리기로 굳게 마음먹었다.그녀는 의원이 시킨 대로 눈썹 하나 남기지 않고 온몸의 털을 남김없이 밀어 버렸다. 그러고 나서 다시 사흘 동안 약탕에 몸을 푹 담근 뒤에야, 지긋지긋한 가려움증이 완전히 사라졌다.그런데 병이 낫기가 무섭게 위원후부에서 소식이 날아들었다.알고 보니 독충에 물린 것이 아니라, 소설아가 자신에게 독을 썼다는 것이었다!채 부인은 맨들맨들해진 자신의 민머리를 감싸 쥐고 밤낮으로 통곡했다.애당초 채 부인이 소설아를 상대했던 것은 순전히 소명주를 돕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제 채 부인의 두 눈에는 소설아를 향한 뼛속 깊은 증오와 분노만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이 치욕을 반드시 되갚아 주고 말리라!’채 부인은 가슴속의 울분을 꾹꾹 눌러 삼키며 밤을 새워 가발을 맞춰 썼다.‘소설아, 그 천한 년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테다!’*연화 군주의 화연 당일.경성에서 내로라하는 가문들은 모조리 초청장을
Read more

제458화

월 이낭은 뼈저리게 후회했다. 애초에 왜 소설아와 손을 잡았던가.겉으로는 순진무구해 보이지만, 실상은 솜 속에 바늘을 감추고 있는 자였다. 아무도 모르게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는, 무서운 아이였다.소설아가 한 걸음 다가가 월 이낭의 불룩한 배 위에 손을 얹었다.“아, 그리고 말이죠. 이낭께서 매일 드시는 음식은 전부 제 주방에서 나가고 있답니다.”소설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낭께서 굳이 제 음식을 드시지 않으신다 한들, 제게는 이 아이가 세상 빛을 보지 못하게 만들 방법이 수백, 수천 가지나 있어요. 어디 한번 시험해 볼까요?”월 이낭은 두 눈을 부릅뜨며 기겁한 듯 소설아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이낭께서 무사히 아이를 낳고 싶으시다면, 어찌 됐든 저를 거치지 않고서는 어려울 텐데요.”소설아가 고개를 들어 월 이낭과 똑바로 시선을 맞췄다.“이낭, 제 말이 틀렸나요? 정 못 미더우시다면…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을 세자 오라버니와 부인께 털어놓을 수도 있고요. 세자와 부인께서 진실을 아시게 된다면, 과연 이낭의 뱃속 아이가 무사할 수 있을까요?”소설아는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조금의 웃음기도 없었다. 마치 깊은 산골짜기에 홀로 피어난 난초처럼 그윽하고 고아한 모습이었으나, 여린 꽃잎 아래에는 수많은 무쇠 바늘을 촘촘히 감추고 있는 듯했다. 아름답고 매혹적이면서도, 한없이 위험한 모습이었다.월 이낭은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여 가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이런 체질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회임한 뒤 몸에 큰 변화가 생기면서 작은 자극에도 지나치게 예민해졌다. 조금만 긴장해도 누군가 목을 죄는 듯한 답답함이 밀려왔다.소설아는 그런 월 이낭을 바라보다가 돌연 목소리를 한층 부드럽게 낮췄다.“이낭께서 제 말만 잘 들으신다면, 무사히 아이를 낳으실 수 있도록 제가 반드시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무얼 그리 긴장하십니까? 잊으셨어요? 우리는 진작 한배를 탄 사이잖아요. 그러니 긴장 푸세요. 이낭의 아이는
Read more

제459화

이러한 기품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하녀들 역시 소설아에게서 영향을 받아 한결 침착하고 듬직한 모습이었다.“저희들이 생각하기에는, 혹시 큰 아가씨께서 어느 높은 분과 옷차림이 겹치도록 수작을 부리려는 게 아닐까요? 그리하여 그분께 모욕을 당하게 만들려는 것 말입니다.”“아니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큰 아가씨의 옷을 더럽혀 망신을 주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큰 아가씨, 제가 여벌 옷을 몇 벌 더 챙겨두겠습니다.”“태복사가 무얼 하는 관청이지요? 수레와 말을 관리하는 곳이라고요? 거기까지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네요…”소설아는 찻잔을 든 채 느긋하게 차를 음미하며, 하녀와 어멈들이 머리를 맞대고 열띠게 의견을 나누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위원후부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서는 어리석고 오만한 민씨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후부 밖으로 나가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세상에는 훨씬 더 무섭고 대단한 인물들이 널려 있었다.훗날 더 큰일을 도모하려면, 하루라도 빨리 이 아이들을 제 몫을 톡톡히 해내는 든든한 심복으로 키워내야 했다.*약 일각쯤 지났을 무렵, 월 이낭이 단장을 마쳤다.소설아는 하인들에게 후부 처소의 문턱을 뜯어내도록 한 뒤, 마차를 아예 마당 입구까지 들이게 했다. 월 이낭이 마차에 오르기까지 걸음을 거의 옮길 필요조차 없게 한 것이다.소설아가 문턱까지 뜯어냈다는 소식이 민씨의 귀에 들어가자, 민씨 역시 춘경원 입구까지 마차를 들이게 하여 소명주를 태웠다.마차에 오른 소명주가 입을 열었다.“어머니, 소설아 그 천한 년이 혹시 눈치라도 챈 걸까요? 우리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 그년이 보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몰래 마차에 타버렸잖아요.”민씨가 코웃음을 쳤다.“지금 당장이야 숨길 수 있겠지만, 어디 끝까지 숨길 수 있겠느냐. 잠시 후 안 대인의 댁에 도착하면 그년이 무슨 옷을 입었는지 결국 다 알게 될 터인데.”그렇게 위원후부 두 마차는 엎치락뒤치락하며 안 대인의 저택을 향해 달려갔다.마차가 백화
Read more

제460화

검은 말들이 나타나자 주변 사람들은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였다.“사람 살려! 어서 피하세요! 말이 미쳤습니다!”행인들은 말발굽에 짓밟힐까 두려워 허둥지둥 길을 비켰다. 그 뒤로는 태복사의 관리 몇 명이 바짝 뒤쫓아오고 있었다.“어서 말을 골목 안으로 몰아넣고 골목 입구를 틀어막아라!”“대인, 골목 안에 마차가 한 대 있습니다!”“말들이 대로에서 계속 날뛰게 두는 게 낫겠느냐, 아니면 마차 한 대를 희생하는 게 낫겠느냐!”“대인, 당장 말을 골목 안으로 몰아넣겠습니다!”*밖이 소란스러워지자 소명주가 물었다.“어머니, 밖에 무슨 일이 난 겁니까?”민씨는 손에 든 접부채를 활짝 펼쳤다. 그리고 부채 면에 큼지막하게 적힌 ‘방’ 자를 가만히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눈웃음을 지었다.“미쳐 날뛰는 말 열댓 마리가 백화 골목으로 뛰어들었다는구나.”소명지가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기세등등하게 날뛰는 말 무리를 바라보더니, 신이 나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소설아 저년, 이번엔 죽지는 않더라도 반병신은 되겠군요!”소명주는 흠칫 놀랐다.“명지야, 나 좀 일으켜다오. 나도 한번 보자!”소명주는 허벅지의 상처가 아직 채 아물지 않았지만, 극심한 통증을 꾹 참고 몸을 일으켰다.열댓 마리나 되는 검은 말들이 골목을 가득 메운 채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그중 선두에서 달리는 말 한 마리의 뒤에는 커다란 짐수레까지 매달려 있었다. 그 말은 이미 길가의 노점들을 숱하게 들이받아 모조리 엎어버린 터라, 그 기세와 파괴력이 실로 무시무시했다.저 수레가 마차를 정면으로 들이받는다면 마차는 산산조각이 날 게 뻔했다. 사람이 그 앞에 휘말린다면 목숨을 건진다 해도 온몸이 만신창이가 될 터였다.소명주는 고통을 참으며 민씨와 조용히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의 입가에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짐작하건대, 이 일은 필시 안 대인이 손을 쓴 것이리라.미쳐 날뛰는 검은 말들을 보고 있자니 소명주는 허벅지의 상처마저 잊은 듯했다. 그녀는 기를 쓰고 몸을 일으켰다
Read more
PREV
1
...
4445464748
...
55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