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이는 눈을 내리깔고 속으로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구족을 멸할지도 모를 이런 대역무도한 말에는 단 한마디도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모른 척하고 넘어가면, 채빈 마마는 점점 더 억지를 부리며 날뛸 것이 뻔했다.상전의 입을 다물게 할 요량으로, 향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화친왕 전하께서는 누가 보아도 지고지순한 분이십니다. 전하의 마음이 마마께 있지 아니한데, 마마께서 해와 달을 따다 눈앞에 바치신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마마, 부디 서둘러 단념하시옵소서.”채여진은 추영우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며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자신의 처소로 돌아가는 길에도 그녀는 억울한 듯 작게 중얼거렸다.“내가 소씨 가문의 그 천한 년보다 못한 게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외모면 외모, 기품이면 기품, 내 그년보다 달리는 게 대체 무엇이냐 말이다!”향이는 채여진을 부축하며 걸음을 옮겼다.“마마, 사람의 눈이란 본디 제각각이 아닙니까. 소 아가씨가 아무리 박색이라 한들 전하의 눈에는 고와 보일 것입니다. 남녀 간의 정이란 본디 이 세상에서 가장 까닭을 알 수 없는 노릇이니, 마마께서도 이제 그만 마음을 거두시옵소서…”향이가 채여진을 부축해 자리를 뜨고 난 뒤, 멀지 않은 언덕 틈에서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쑥 모습을 드러냈다.그 그림자의 주인은 다름 아닌 설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 설현정이었다. 바로 태후가 추영우의 배필로 점찍어 둔 인물이었다.설씨 가문은 대대로 명문가 중에서도 으뜸으로 손꼽혔다. 위로 삼 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역대 황후의 자리는 모조리 설씨 가문의 여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다만 지금의 황제는 태후의 친아들이 아니었기에, 황후의 자리를 두고 태후와 황제 사이에는 팽팽한 기 싸움이 벌어졌다. 결국 승리는 황제에게 돌아갔고, 현재의 황후는 설씨 가문 출신이 아니었다.하지만 태후 역시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태후는 기어이 설씨 가문의 여인을 태자빈 자리에 앉혔고, 자연스레 설씨 가문은 태자의 든든한 뒷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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