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아침 햇살이 암막 커튼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희수의 눈꺼풀 위로 쏟아졌다. 희수는 기분 좋은 노곤함에 몸을 뒤척이다가, 코끝을 스치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향기에 번쩍 눈을 떴다. 이곳은 자신의 자취방이 아니라 재원의 아파트였다. 어젯밤의 그 뜨거웠던 입맞춤과 재원의 품에서 잠들었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자기?”잠결에 내뱉은 희수의 목소리는 몽롱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옆자리를 확인한 순간, 희수의 심장은 다른 의미로 멈춰버렸다. 재원이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는 이미 씻고 나온 듯 보송보송한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의 손에 들린 물건이었다. 그것은 재원의 폰이 아니라, 희수의 핑크색 폰이었다. 더 최악인 것은 화면 속에 띄워진 내용이었다. 재원의 시선은 희수가 어젯밤 잠들기 직전, 반쯤 풀린 정신으로 정성스럽게 업데이트했던 [🐶웬수] 폴더의 마지막 문구에 고정되어 있었다. [웬수가 아니라... 그냥 내 사랑임.]“...자기, 너 지금 뭐 해!”비명이 터져 나왔다. 희수는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재원의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채려 했다. 하지만 재원은 긴 팔을 이용해 가볍게 희수를 따돌리며, 무표정한 얼굴로 화면의 텍스트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재원의 목소리는 평소 본사 회의에서 실적을 발표할 때처럼 지극히 낮고 건조해서, 그 수치심은 배가 되었다.“1번. 융통성 없는 곰탱이. 5번. 사회성 결여된 AI. 12번. 눈치 없는 고집불통. 17번. 셔츠 걷어붙이고 요리하는 건 형법으로 처벌해야 함.”“아아악! 그만해! 죽을래 진짜!”희수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고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재원의 낭독회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제 희수가 가장 숨기고 싶었던 대목에 도달했다.“20번. 곰탱이인 줄 알았는데 사자였음. 심박수 데이터 측정 포기. ...웬수가 아니라, 그냥 내 사랑임.”재원의 목소리가 마지막 문장에서 아주
“내일 아침엔 사과 사진 찍지 마. 그냥 얼굴 보여줘. 가게로 와.”희수의 폭탄선언에 재원은 들고 있던 물컵을 놓칠 뻔했다. 평소라면 ‘오전 8시 방문의 효율성’을 따졌을 그였지만, 지금은 뇌 회로가 완전히 타버린 듯 멍하니 희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재원이 컥컥거리며 사레들린 물을 삼키는 동안, 희수는 세상에서 가장 뻔뻔하고 예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루틴이 망가진 자리에는, 이전보다 훨씬 더 지독하고 달콤한 새로운 추억이 쌓여가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시계는 어느덧 밤 11시를 향하고 있었다. 창밖의 빗줄기는 기세를 꺾지 않은 채 유리창을 거세게 두드리고 있었고, 배를 채운 희수에게는 참기 힘든 노곤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재원의 어깨에 기댔던 그 온기가 다시금 그리워지는 시간이었다. 희수는 빈 그릇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짐짓 쿨한 척 몸을 일으켰다. “...잘 먹었어. 이제 진짜 가야겠다. 내일 아침에 늦지 말고 와, 자기야.”희수가 현관으로 향하려던 그 찰나, 설거지통에 그릇을 넣던 재원의 뒷모습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는 수도꼭지를 잠그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아주 낮고 뻣뻣한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이 비에 어딜 가. 자고 가.”“......어?”희수는 신발장에 손을 뻗으려다 말고 로봇처럼 멈춰 섰다. ISTJ인 그가 내뱉은 말 중 가장 비논리적이고, 동시에 가장 용감한 제안이었다. 희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재원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였지만, 그의 귀 끝은 이미 잘 익은 사과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자기, 나 가지마? 유혹이야?”희수의 짖궂은 질문에 재원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시선은 여전히 허공을 헤매고 있었지만, 입술은 단호하게 달싹였다.“유혹이 아니라... 이 강수량에 도보 이동은 감기 걸러.. 그리고 내일 아침에 같이 출근하는 게 동선상으로도 훨씬 효율적이야.”“출근? 재원 씨 내일 회사 안 가?”재원은 헛구역질 같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주머
차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려왔다. 시선이 맞닿은 채 멈춰버린 찰나의 시간. 희수는 재원의 눈동자 속에서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평소라면 차갑고 이성적인 빛을 띠던 재원의 눈이, 지금은 갈 곳을 잃은 채 일렁이고 있었다. 숨결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재원의 시선이 희수의 눈동자를 지나 입술 근처에 잠시 머물렀다. 희수는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이건 예상에 없던 일인데.’분명 피곤해서 기대고 싶었을 뿐인데, 지금 이 공기는 단순한 ‘피로 해소’의 영역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재원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의 울대뼈가 크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여 희수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 결정적인 순간, 희수의 배에서 아주 우렁차고 정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꼬르륵.”정적이 박살 났다. 재원의 고개가 멈췄고, 희수는 그대로 재원의 어깨에 다시 얼굴을 파묻어버렸다. 수치심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루틴이 무너진 것도 모자라, 이 분위기에 배꼽시계라니. “...배고파?”재원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잔뜩 섞여 있었다. 그는 조금 전의 그 팽팽했던 긴장감을 어디로 보냈는지, 희수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헝클어뜨렸다. “아니, 아니거든? 아까 미용하면서 공기를 많이 마셔서 그래!”“공기를 마시면 배에서 소리가 아니라 트림이 나야 하는 거 아냐? 역시 넌 이과가 아니야.”재원은 차 시트를 다시 세웠다. 희수는 빨개진 얼굴을 가리려 애쓰며 창밖을 보았다. 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고, 희수의 허기는 이제 숨길 수 없는 통증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들어가서 자라니까, 결국 밥까지 먹여야겠네. 우리 집으로 가게.”“뭐? 자기네 집을 왜 가! 내 집 바로 앞인데!”“우리 집에 너 좋아하는 그 브랜드 냉동 곰탕 남은 거 있어. 너희 집엔 먹을 거 하나도 없잖아. 뻔하지.”재원은 희수의 대답도 듣지 않고 다시 시동을 걸었다.
봄의 끝자락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장대비가 쏟아지는 아침이었다. 희수는 눅눅한 습기를 머금은 공기를 뚫고 가게 문을 열었을 때부터 예감했다.오늘 하루가 유난히 길고 고될 것임을.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오전부터 대형견 미용 예약이 줄을 이었고, 평소 얌전하던 강아지들마저 빗소리에 예민해졌는지 내내 칭얼거렸다. 희수는 젖은 털의 비린내와 사투를 벌이며 쉬지 않고 가위질을 했다. 손목은 시큰거렸고, 서 있는 다리는 부어올라 카디건 아래로 느껴지는 압박 스타킹의 존재감이 어느 때보다 묵직하게 다가왔다.하지만 희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육체적인 피로가 아니었다. ‘하... 진짜 방해돼.’희수는 소독약을 뿌리며 주머니 속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애써 무시했다. 재원은 아침부터 부지런히 자신의 일상을 중계하고 있었다. [본사 회의 끝][점심은 샌드위치로 때웠어][서울 비 많이 오네. 가게 앞은?]희수는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이 ‘용건 없는 보고’들을 업무 중간중간 확인하고 있었다. 가위질을 멈추고 휴대폰 화면을 힐끗거리는 자신의 모습은, 희수가 가장 경계하던 ‘감정에 휘둘리는 전문가’의 모습이었다. 희수의 자괴감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미용실을 운영하며 그녀가 가장 공들여 세운 것은 자신만의 철저한 '방어 루틴'이었다. 퇴근 1시간 전에는 무조건 기구를 소독하고,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오늘의 감정을 정돈하는 시간. 그 시간이야말로 희수가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고 온전한 '나'로 돌아가는 의식이었다.그런데 재원이 돌아온 이후, 그 견고했던 성벽에 금이 가고 있었다. 재원이 보낸 사과 사진 한 장에 웃음을 터뜨리고, 그가 젤리를 사 왔다는 사실에 마음이 풀려버린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희수는 지독한 패배감을 느꼈다. 그것은 재원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스스로의 통제권을 너무나 쉽게 내어주고 있는 자신에 대한 실망이었다.오후 7시. 보라색 간판 불을 끌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을 때, 딸랑이는 종소리와 함
희수를 집 앞까지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 재원은 핸들을 잡은 채 연신 헛기침을 내뱉었다. 차 안에는 여전히 희수가 남기고 간 은은한 향기가 떠다니고 있었다. 그 향기 때문인지, 아니면 방금 전 편의점에서 들이킨 컵라면 국물 때문인지 가슴팍이 자꾸만 간지러웠다. [진짜 웃겨. 너 사실 마음 약해진 거 아니야?] “...약해지긴 누가.” 재원은 아무도 없는 차 안에서 혼잣말을 내뱉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백미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입꼬리는 이미 제 의지를 배신하고 느슨하게 풀려 있었고, 눈가에는 묘한 생기가 돌았다. 평소의 그 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아주 비효율적이고 나사 풀린 표정이었다.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운 재원은 한참 동안 내리지 못하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그는 '연락'이란 그저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라고 믿었다. 용건 없는 메시지는 시간 낭비였고, 감정 섞인 안부는 업무 흐름을 방해하는 노이즈일 뿐이었다. 그랬던 그가 무슨 짓을 했는가. 기상 보고부터 시작해 본사의 날씨 중계, 심지어는 아무 구도 없이 찍은 사과 사진까지 전송했다. 재원은 등받이에 머리를 툭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래서 내가 곰탱인가...’ 희수의 그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했다. 평생을 엘리트 코스만 밟으며 날카롭고 예민하다는 소리만 듣던 인생에 갑자기 나타난 '곰탱이'라는 별명.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더 기가 막힌 건 그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희수가 자신을 그렇게 정의해준 것이 일종의 '입국 허가'처럼 느껴져 내심 안도하기까지 했다. “미쳤나 봐, 진짜.” 재원은 스스로가 한심해 헛웃음을 터뜨리며 차에서 내렸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서늘한 공기가 평소보다 유난히 쓸쓸하게 다가왔다. 이 넓은 아파트에서 희수와 보냈던 시간은 사실 그
퇴근길, 희수의 집 앞 가로등 밑에는 여전히 검은색 세단이 서늘한 광택을 내며 서 있었다. 차에서 내린 재원은 평소처럼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가 내민 작은 종이 상자 위로 내려앉은 시선만은 평소보다 조금 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나왔네?”재원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희수는 걸음을 멈추고 팔짱을 낀 채 그를 응시했다. 그는 '미안하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대신 잘못된 걸 바로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 성미대로, 행동으로 그 공백을 메우려 들 뿐이었다. “그건 뭐야? 또 뭘 나한테 버릴려고.”희수의 가시 돋친 농담에도 재원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상자를 희수의 가슴팍 쪽으로 툭, 밀어 넣듯 건넸다. “작년 이맘때, 네가 잃어 버렸다고 했던 거..”상자 안에는 희수가 연애 초기에 잃어버렸다고 한참을 찾았던 작은 키링이 들어 있었다. 희수는 황당한 표정으로 재원을 보았다.“재원 씨. 이걸 1년 동안 자기 차에 두고 이제 주는 거야? 장난치는 거아?”희수의 쏘아붙임에도 재원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하지만 희수는 알 수 있었다. 재원이 넥타이를 괜히 한 번 고쳐 매는 그 짧은 손길이, 그가 나름대로 이 '민망함'을 견디고 있다는 신호라는 걸. 재원은 타인의 감정에 기민한 편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희수 앞에서 자신이 저지른 시간적 태만이 얼마나 비논리적으로 보일지는 알고 있는 듯했다.“세차하다 발견했어. 그냥 뒀다가 잃어버릴까 봐 가져온 것뿐이야.”재원의 말투는 여전히 무뚝뚝하고 딱딱했다. 제 버릇 개 못준다고, 조금 편해지니 원래대로 돌아가는 듯 했다.절대로 미안해서 찾아왔다는 말은 죽어도 안 하겠다는 완강한 고집이 느껴졌다. 하지만 상자 안에는 키링만 있는 게 아니었다. 희수가 예전에 “이거 맛있는데 요즘은 잘 안 보이네”라며 지나가듯 말했던, 수입 젤리 몇 봉지가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이 젤리는 뭐야? 이것도 세차하다가 시트 밑에서 나왔어?”
가게 한켠에서 머리를 질끈 묶고 정리하던 희수는 재원의 루틴이 오늘은 단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소 [12:30 / 15:40 / 18:00] 같이 칼같이 들어오던 보고였다.희수는 처음엔 “바빴겠지” 하고 넘겼다.하지만 점심시간도, 퇴근 시간도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자, 슬슬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왜 보고 안 해…?’예측할 수 없는 상황은 희수에게 불안감이라는 감정을 선물했다.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희수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고는, 진심을 담아 길게 메시지를 보냈다.[자기 늦어도
가게 한켠에서 머리를 질끈 묶고 정리하던 희수는재원이 아침부터 보내는 ‘초건조 모드’를 보며슬슬 불쾌함이 쌓여갔다.[회의들어간다] 09:30[끝났다] 10:10[밥먹고 쉰다] 12:31[일하는 중] 13:05평소에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오늘은 유난히 ‘정보만 던지고 사라지는’ 느낌이었다.심지어 온도도 없음.희수는 메시지를 보낼 때마다나름의 감정을 조금씩 섞었다.[나 지금 밥먹었어!] 13:30[오늘 손님 많아 ㅠㅠ 지쳐어~] 14:25그런데 돌아오는 답은—[네에] 15:40[집이다 쉰다] 15:4
무릎 수술 후 회복기.희수는 여전히 두꺼운 보조기를 차고 있었다.집 안에만 갇혀 있는 게 답답해, 재활 겸 아주 천천히 집 앞 편의점을 다녀오는 길이었다.절뚝, 절뚝.걸음은 느렸고, 땅거미가 내려앉은 골목은 조용했다.봉지를 든 손이 조금 시리다고 느꼈을 때였다.저만치 앞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어?’재원이었다.칼퇴근을 하고 집 근처로 온 모양이었다.반가움에 희수가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하려던 순간, 그녀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그는 혼자가 아니었다.옆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직장
그날의 ‘외면 사건’ 이후, 며칠이 지났다.표면적으로는 다시 평화로운 루틴이 돌아왔다.[기상] 06:11[출근 준비] 06:12하지만 희수의 마음속에는 아직 잔여물이 남아 있었다.친구들에게 하소연했을 때, 돌아온 반응은 예상대로였다.“야, 그거 완전 나쁜 놈 아니야?”“지인한테 숨기는 거? 빼박이지. 어장관리 아니야?”“희수야, 너 가스라이팅 당하는 거 같아.”친구들의 말은 논리적이었다.사생활 숨김, 차가운 말투, 감정 회피.전형적인 ‘나쁜 남자’의 체크리스트와 일치했다.희수도 흔들리지 않은 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