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 아이 아니라고요!의 모든 챕터: 챕터 121 - 챕터 130

174 챕터

제121화

“병원 안 갈 거야?”하선재가 뉴스를 훑어보며 물었다.“기사 보니까 은유라 정강이뼈에 금이 갔대.”그렇게 높은 곳에서 굴러떨어지고도 뼈에 금만 간 정도라면 불행 중 다행이었다.하지만 은유라는 은씨 가문의 금지옥엽이자 차기 정씨 가문의 며느리이기에 두 집안 모두 발칵 뒤집혔다.기현주는 곧장 해외의 정형외과 전문의까지 수소문해 호출한 상태였다.“안 가요.”신시아는 여전히 힘없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움직였다.“은유라 씨랑 친하지도 않은데 갈 필요 없잖아요.”은유라 역시 자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알았어. 집까지 데려다줄게.”하선재가 차 키를 꺼내며 말했다.“걸을 수 있겠어? 부축해 줄까?”“아니요. 혼자 할 수 있어요.”신시아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했고 목소리조차 미세하게 떨렸다.“너 그렇게 걷는 거 보니까 마음이 안 놓여서 그래.”하선재가 고집을 부렸다.“걱정 마. 사람들 다 빠져서 내가 너 데려다주는 거 아무도 못 봐.”약혼식에 온 하객들에게 신시아는 낯선 얼굴이고 정우진에겐 그저 하급 직원일 뿐 은유라와 비교가 안 됐다.그러니까 두 여자가 똑같이 계단에서 굴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신시아의 상태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거겠지.신시아는 이미 익숙해진 일이지만 가슴속 깊이 차오르는 공허함은 어쩔 수 없었다.“죄송해요, 대표님. 저 그냥 혼자 있고 싶어요.”신시아는 몸을 돌렸다. 여전히 다리에 힘이 풀려 허공을 밟는 기분이라 걷는 속도가 더디기만 했다.하선재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정우진이 대체 무슨 복을 걷어차고 있는 건지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그때, 하선재의 눈에 계단 구석에 떨어진 검은 물체가 포착되었다.주워들어 살펴보니 부러진 하이힐 굽이었다.자세히 보니까 부러진 단면에 인위적으로 접착제를 붙였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하선재는 미간이 확 좁혀지고 즉시 발길을 돌려 보안실로 향했다. 한시라도 빨리 CCTV를 확인해야 했다....병원에서 은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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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2화

악플 테러를 당한 것도 신시아 탓으로 돌리고 이번 일 역시 신시아의 몫이란 말인가?손연경의 말이 끝나자 기현주는 침묵했다.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아무도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현주 씨, 왜 말이 없어요?”손연경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유라가 그 계단 내려오는 연습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게다가 우리 유라는 수년간 하이힐만 신어 와서 발을 헛디딜 리가 없어요. 분명 신시아가 밀었을 거예요!”기현주는 정우진 쪽을 흘끗 본 뒤에야 입을 열었다.“시아 그 아이 정말 가만있지를 못하네요! 걱정 말아요. 이번엔 내가 유라 위해서 확실히 매듭지어줄게요.”손연경은 이런 말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왔다.신시아가 은유라랑 정우진 사이를 이간질해서 싸움 나게 만들었을 때부터, 지금 이런 큰일이 터질 때까지 확실한 해결은커녕 오히려 끊임없이 이슈만 터져 나왔다.“이번에는 내가 직접 나설 겁니다! 우리 유라 위해서 분을 풀어줘야죠!”지난번에도 손연경은 깔끔하게 신시아를 해결하려 했으나 현성월 때문에 무산되었다.이번엔 반드시 직접 만나 대가를 치르게 할 작정이었다.“그래요. 그럼 나도 같이 가요.”기현주는 손연경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걱정 마세요. 유라 괜찮을 테니까.”손연경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시선은 정우진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은근한 걱정이 피어올랐다.30분 후, 은유라가 검사실에서 나왔다.오른쪽 다리에는 깁스했고 창백한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입술이 너무나도 안쓰러워 보였다.나오자마자 그녀는 정우진에게 손을 뻗었다.“우진 오빠.”정우진이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그래, 나 여기 있어. 마음 놓고 푹 쉬어.”“우리 약혼식은...”은유라가 흐느꼈다. 그토록 바라왔던 약혼식이 이렇게 무너지다니.“오늘 비록 제대로 식을 올리진 못했지만 이미 약혼한 거나 마찬가지야. 너희는 이제 예비부부라고!”손연경이 재빨리 끼어들었다.“다리 다 낫거든 다시 하면 되지!”기현주도 옆에서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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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화

기현주, 정우진 모자가 병실을 나서기 바쁘게 손연경이 딸 은유라를 다그쳤다.“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넘어졌어, 계단에서!”은유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저도 모르겠어요. 갑자기 중심을 잃고...”약혼을 코앞에 두고 하필 이런 변수가 생기다니, 그것도 본인에게 말이다.은유라의 가슴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다리 통증은 이 속상하고 답답한 마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무엇보다 신시아가 지금쯤 이 상황을 비웃고 있을 걸 생각하면 치가 다 떨렸다.별안간 은유라가 말을 돌렸다.“그때 내 옆엔 신시아 씨 말고 아무도 없었어요. 그 여자가 수작 부린 게 틀림없어요.”“내 그럴 줄 알았어!”손연경이 코웃음을 쳤다.“넌 아무 생각 말고 치료나 받아. 내일 우진이 엄마랑 같이 신시아 그년 찾아가서 박살을 내버릴 거야. 이번엔 무조건 그년을 우진이 곁에서 쫓아내 버려야 해.”은유라의 짜증은 분노로 바뀌어 가슴속에 쌓여갔다.“맞아요. 엄마가 대신 좀 분풀이 해주세요!”손연경은 한참 동안 딸을 달랬다.한편, 내내 침묵하고 있던 은성빈이 입을 열었다.“너희 약혼식을 어쩌다가 시아가 맡게 된 거야? 게다가 왜 시아가 널 부축하고 내려왔어?”은유라는 속으로 움찔했다.애초에 약혼식 준비를 총무팀에 맡길 이유도, 신시아가 그녀를 부축해서 계단을 내리게 할 이유도 없었다.단지 신시아에게 잘난 척하고 싶어서 그런 거지... 자신과 정우진이 약혼하는 모습을 신시아에게 똑똑히 보여주고 그로써 정우진을 향한 미련을 싹 다 내려놓게 할 꼼수였는데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지금 그런 걸 따져서 뭐 해요?”손연경이 은성빈에게 쏘아붙였다.“딸이 다쳐서 누워 있는데 위로는커녕 꼬치꼬치 캐묻기만 하다니. 당신이 그러고도 애 아빠예요?”은성빈이라고 속상하지 않을 리 있을까?다만 은유라의 부상보다 더 뼈아픈 것은 다 세팅된 약혼식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이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되는데!은씨 가문 사람들이 병실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울 때 온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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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4화

주변의 시선이 신시아에게 꽂혔다. 동정 어린 눈빛도, 구경거리를 대하는 흥미로운 눈빛도 있었다.의외였던 건 주하영이었다. 평소라면 득달같이 달려와 비아냥거렸을 텐데 이번엔 그저 신시아를 한 번 쓱 쳐다보고는 입을 다물었다.접견실은 반투명 창으로 되어있어 그 너머로 기현주와 손연경이 앉아 있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 은밀히 속삭이더니 연신 바깥쪽을 힐끔거렸다.누가 봐도 기세등등한 모습이었다.결국, 피할 곳은 없었다. 신시아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채로 발걸음을 돌려 접견실로 향했다.문을 열고 들어가자 두 사람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의 얼굴 위로 비수처럼 꽂혔다.“저를 찾으신다고요?”신시아는 문을 닫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무슨 일이세요?”이에 기현주가 싸늘하게 웃었다.“그걸 몰라서 물어?”신시아는 고개를 저었다.“네, 잘 모르겠습니다만.”손연경이 신시아와 정면으로 맞붙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녀는 위아래로 신시아를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어제 약혼식에서 일부러 우리 유라 밀어버린 거 모를 줄 알아?”“혹시 증거 있으신가요?”신시아가 담담하게 되물었다.“이런 일에 무슨 증거가 필요해!”손연경은 제법 기세등등했다.“거기에 보는 눈이 얼만데. 우리 다 똑똑히 봤어!”그녀가 입만 뻥긋하면 약혼식에 참석했던 하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보았다’라고 증언해 줄 터였다.신시아는 양옆에 늘어뜨린 주먹을 불끈 쥐었다.역시나 그들은 사건의 전말과 상관없이 모든 죄를 신시아에게 뒤집어씌우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그녀가 서둘러 퇴사를 결심한 것도 이들이 움직이기 전에 떠나고 싶어서였다.하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이야.“사모님, 여사님, 제가 고아로 자란 건 맞지만 바보 멍청이는 아니에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은유라 씨를 밀어버리는 어리석은 짓은 안 해요.”“뭐?”손연경은 그녀의 태도에 분통이 터지는 듯했다.다만 신시아는 말을 자르고 단호하게 이어갔다.“못 믿으시겠으면 경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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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화

손연경의 이 한마디에 기현주는 마치 뺨을 맞은 듯한 굴욕감을 느꼈다.그녀가 어떻게 신시아를 손볼 수 없단 말인가?“좋게 말할 때 안 듣더니, 쯧쯧. 시아야, 이거 다 네가 자초한 일이야.”자리에서 일어난 기현주는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신시아에게 거칠게 내던졌다.“이 보육원 사라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그냥 시키는 대로 해!”그 사진은 보육원 아이들이 찍은 단체 사진이었다.그때의 신시아는 고작 열다섯, 열여섯 살쯤 되었다. 앳된 얼굴은 여리고 풋풋했지만, 한눈에도 예쁘장한 외모였다.그녀는 김지원과 함께 한채은 원장님 양옆에 서 있었고 그 옆으로는 보육원의 모든 아이들이 줄지어 있었다.보육원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고 경원에서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기현주의 수단이라면 이런 보육원 하나쯤 소리소문없이 없애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신시아는 사진을 꽉 움켜쥐었다. 누군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으로 자신의 목을 옥죄어오는 것만 같았다.무표정해 보이는 얼굴 위로 근육이 미세하게 떨렸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무력감을 딱히 어떻게 억누를 수가 없었다.“왜 벙어리가 됐대? 계속 떠들어 봐!”손연경은 그녀가 침묵하자 그제야 속이 좀 풀리는 듯 비아냥거렸다.“우진이를 2년이나 따라다녔으면 재벌가 사모님의 예의나 교양을 배웠어야지 어떻게 잘난 척하고 허세 부리는 것만 배워? 야, 누가 보면 든든한 뒷배라도 생긴 줄 알겠어!”신시아는 침묵했다. 숨통을 조여오는 압박감에 옴짝달싹 못 하고 입술 안쪽을 꽉 깨물었다. 입안이 피로 범벅이 될 때까지도 그녀는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됐다.”기현주가 경멸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훑고는 손연경을 향해 말했다.“기자회견 준비는 연경 씨가 맡아요. 내 생각엔 병원에서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얘 병원 가서 유라한테 직접 사과하게 해야죠.”손연경의 눈동자가 번뜩이더니 이내 다시 물었다.“그럼... 시아 계속 백영 그룹에 남길 생각이세요?”기현주는 무언가 떠오른 듯 안색이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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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화

바로 그때,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임정현이 걸어 나와 신시아 곁에 섰다.“안녕하십니까, 대표님 비서 임정현입니다. 대표님께서 급히 신 비서님을 찾으십니다.”“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해요. 우리 지금 얘 데리고 병원 가야 하거든요.”기현주는 방금 손연경이 뭐라고 속삭였는지 들을 겨를도 없이 서둘러 신시아의 다른 쪽 손을 낚아채려 했다.다만 임정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신시아를 꽉 잡고 있던 손연경의 손까지 자연스럽게 떼어냈다.“대표님께서 지금 당장 신 비서님 찾으시니 먼저 모시고 올라가겠습니다.”그는 신시아를 등 뒤로 보호하듯 서서 어서 엘리베이터에 타라고 몰래 손짓했다.신시아는 망설임 없이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저리 못 비켜?”기현주가 그녀를 못 오르게 엘리베이터 문을 막아서려 했지만, 임정현이 완벽하게 길을 차단했다.엘리베이터 문이 서서히 닫히고 맨 위층을 향해 쭉쭉 올라갔다.비좁은 공간 속, 홀로 남은 신시아는 살짝 도드라진 아랫배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언제까지 이 배를 숨길 수 있을까. 벌써 들통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10분 전, 대표이사실.권미희가 탁자를 내리치며 정우진을 호되게 꾸짖었다.“너희 엄마랑 유라 엄마가 시아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게 안 보여? 진짜 아무것도 몰랐던 거니? 그 머릿속엔 일밖에 없어?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정이란 게 있어야지. 은유라랑 약혼까지 할 거면서 전처를 왜 계속 곁에 두고 괴롭히는 거야?”정우진은 덤덤한 표정으로 앉아 권미희의 질책을 듣더니 미간이 점점 좁혀졌다.“그래, 좋아! 설령 시아 곁에 둔다고 해도 최소한 제대로 보호하란 말이야. 지금 그 아이가 겪는 모든 고통이 너 때문이잖아!”권미희가 다시 한번 탁자를 강하게 내리쳤다.정다슬이 옆에서 권미희의 가슴을 쓸어내리며 정우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할머니 말씀 다 맞아.”하지만 그녀들이 무슨 말을 하든 정우진은 미간만 찌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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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화

은유라의 일로 추궁하는 게 아니라면 정우진은 굳이 대표이사실까지 신시아를 불러올 이유가 없었다.“누가 뒤 봐주니까 배짱이 두둑해 아주!”정우진의 싸늘한 목소리에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다만 신시아의 시선은 그가 아닌 권미희에게 향했다.기현주와 손연경이 자신을 찾아와 윽박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권미희가 서둘러 달려온 모양이었다.결국, 임정현이 자신을 ‘구하러’ 와준 것도 정우진이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권미희의 압박 때문이었다.정우진의 말투에는 내키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은유라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해 영 불편하다는 속내일 터였다.“시아야.”이때 권미희가 정우진을 한 번 흘겨보고는 신시아에게 손짓했다.그녀는 곧장 할머니의 곁으로 다가갔다.“할머니, 다슬 씨.”신시아의 임신 사실을 알고 있는 권미희는 시선이 자연스레 그녀의 배로 향했다.아직 두드러지게 배가 나온 건 아니지만 임산부의 태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더 지체했다간 신시아의 결백은커녕 명예까지 모조리 짓밟히고 말 터였다. 권미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신시아의 편이 되어주기로 마음먹었다.“이 할미는 믿어. 은유라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일은 너랑 아무 상관도 없어.”권미희의 ‘믿는다’라는 그 한 마디가 신시아의 눈물샘을 자극했다.조금 전까지 기현주와 손연경 앞에서 꼿꼿하게 버텨내던 팽팽한 긴장의 끈이 그 한마디에 툭 하고 끊어져 버렸다.신시아는 눈가가 붉어지고 목소리가 다 갈라졌다.“고마워요, 할머니...”“그동안 참 많이 힘들었지. 따지고 보면 다 우리 집안에서 너한테 못 할 짓을 한 거야.”권미희는 최근 은유라가 벌인 일련의 소동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매번 신시아만 억울하게 당하는 꼴을 보니 할머니로서 속이 쓰리고 미안할 따름이었다.하지만 신시아는 그저 고개만 저었다.“괜찮아요, 할머니.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니에요. 다만 앞으로는 더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저는 그저...”“걱정 마라!”권미희가 그녀의 말을 단호하게 끊었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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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화

“안 돼요!”뜬금없는 제안에 신시아는 즉각 반응하지 못했다.그러다 ‘고모’라는 호칭을 듣고는 마치 전기충격이라도 받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할머니가 저를 위해주시는 건 다 알겠는데 이렇게 하면 족보가 너무 꼬여버려요.”권미희는 신시아의 강한 거부 반응을 보고 자신의 황당한 계획이 먹히지 않음을 직감했다.“그럼 어쩔 수 없지. 그냥 양손녀로 하든가.”정다슬은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간신히 그 황당한 대책을 받아들였지만 그래도 양손녀가 되는 게 훨씬 나았다.“그럼 저도 앞으로 시아 언니라고 부를게요. 언니는 이제 우진 오빠 여동생이 되는 거예요.”권미희의 흐릿한 눈동자가 가늘게 좁혀졌다. 속으로는 이미 하씨 가문으로 찾아가서 하선재와 신시아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할지 고민 중이었다.신시아의 할머니가 되어야만 그녀를 위해 당당하게 나설 명분이 생길 테니까.정다슬은 할머니의 깊은 뜻을 알아채고는 몰래 엄지를 치켜세웠다.반면 신시아와 정우진은 굳은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오빠와 여동생?불과 얼마 전까지 법적으로 부부 사이였던 두 사람이 순식간에 남매가 돼버리다니.심지어 뱃속에 정우진의 아이까지 들어 있는데 이 관계는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보다 더 꼬여버린 셈이었다.“그것도 안 돼요!”신시아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할머니, 걱정 마세요. 제가 이미 회사에 사직서 냈으니 저만 백영 그룹을 떠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거예요.”그녀만 정우진에게서 멀어지면 된다.그러면 기현주나 은씨 가문 사람들이 더 이상 그녀를 눈엣가시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또한, 자신의 임신 사실도 사람들에게 들킬 리가 없다.“내 양손녀가 된다고 해서 사직서를 내지 말라는 건 아니야.”권미희는 더 이상 그녀를 백영 그룹에서 혹사하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그녀는 이미 비서에서 총무팀으로 강등까지 당하지 않았던가.하지만 권미희의 뜨거운 애정과 열의가 오히려 신시아에게는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시아 퇴사 문제는 할머니가 결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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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화

신시아는 정우진이 자신을 기현주와 손연경의 손아귀에서 ‘낚아채’ 온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그가 자신을 순순히 놓아주면 기현주와 손연경은 필시 그 책임을 정우진에게 물을 터였다.“이 엉망진창인 상황, 제가 만든 거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떠나기만 하면 전부 해결될 거예요.”그녀를 떠나게 해주는 게 곧 기현주와 손연경이 바라던 바이니까.“억지 부리지 마.”정우진은 그녀의 맑고 하얀 얼굴에 새겨진 고집스러운 표정을 보면서 서늘한 기운을 내뿜었다.신시아는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처분만을 기다렸다.얼마나 지났을까? 깊고 어두웠던 정우진의 눈동자가 서서히 평온을 되찾았다.“여기 사직 동의서야. 서명만 하면 바로 나갈 수 있지만 네 신분이 특수하니 몇 가지 조항을 추가해 뒀어.”그는 오른쪽 서랍에서 사직 동의서 한 장을 꺼내 신시아 앞으로 내밀었다.신시아는 그 서류를 받아 들고 대충 훑어보았다.“감사합니다, 대표님.”깨알 같은 조항들을 지금 당장 다 읽기는 무리이니 일단 챙겨가야 했다.“서명해서 인사팀에 넘겨. 잘 생각하고 결정해. 일단 나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어.”정우진은 펜을 옆으로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책상 위 서류들을 한데 모아 가방에 챙겨 넣더니 말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신시아도 그를 따라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각자의 길로 갈라섰다.신시아는 일반 직원용 엘리베이터 앞에 섰고 정우진은 곧장 대표님 전용 엘리베이터로 향했다.문이 닫히는 순간, 신시아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정우진이 순순히 사직을 허락하다니.물론 조항을 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정우진이라면 상식 밖의 조건을 내걸지는 않았을 터였다.아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가만히 응시하던 신시아의 시선이 그만 허공으로 흐릿하게 흩어졌다.갑자기 휴대폰이 울리면서 그녀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전화를 받자 정다슬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물었다.“어떻게 됐어요? 오빠가 어떻게 해결했대요?”“대표님이 퇴사 허락하셨어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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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화

신시아는 대뜸 걸음을 멈추고 본능적으로 어두운 곳에 몸을 숨겼다.희미한 조명이 깔린 주차장, 마이바흐 옆에 기현주와 정우진 두 모자가 서 있었다.차 문이 반쯤 열린 것으로 보아 정우진이 막 올라타려던 참에 기현주에게 가로막힌 모양이었다.정우진은 신시아를 등지고 서서 차 문틀에 팔을 걸친 채였다.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그가 내뱉는 중저음의 목소리는 고스란히 들려왔다.“그렇게 눈에 거슬리면 진작 치워버리지 그러셨어요.”기현주는 정우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지만 고고한 얼굴에서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그녀는 여전히 미심쩍어하며 다그쳤다.“유라가 버릇없이 구는 건 솔직히 내 탓도 있어. 걔가 일적으로 네게 큰 도움이 못 되겠지만 신시아보단 출신이 낫잖아. 우진이 너! 절대 유라 마음 저버리면 안 돼.”한참 침묵이 흐른 뒤, 정우진의 얇은 입술 사이로 매정한 대답이 튀어나왔다.“네, 그럴 일 없어요.”그 짤막한 대답이 신시아의 가슴을 짓눌러서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그녀는 숨을 멈추고 차가운 벽에 몸을 바짝 밀착했다. 서류를 쥔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잠시 후,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신시아가 고개를 들자 기현주가 차에 올라타 주차장을 떠나고 있었다.정우진은 여전히 한쪽 다리를 차에 올린 채 상체를 숙인 자세로 서 있었다.그녀는 황급히 흐트러진 표정을 가다듬고는 정우진에게 다가갔다.“대표님, 임 비서님이 전해달라고 하신 서류입니다.”정우진이 고개를 돌리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그녀가 내민 손이었다.가늘고 깨끗한 손가락이 하얀 서류 위에서 유독 더 창백해 보였다.서류를 쥔 손끝엔 핏기가 없었고 그녀의 손길이 닿았던 서류 귀퉁이는 이미 볼품없이 구겨졌다.정우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서류를 받아들고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난 또 우리 신 비서가 벌써 결정을 내린 줄 알았는데.”비꼬는 듯한 남자의 말투, 그렇게 떠나고 싶다던 사람이 왜 아직도 내 앞에 있냐고 따져 묻는 뉘앙스였다.신시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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