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결혼 끝, 후회는 사절입니다: Chapter 11 - Chapter 20

30 Chapters

제11화

도해산은 눈을 들어 회의실을 한 바퀴 훑어봤다.“그 작품들, 아무거나 하나만 해도 값이 장난 아니야. 하나라도 망가뜨리면 너희는 물론이고 작업실까지 통째로 물어내도 감당 못 해.”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은 곧바로 잠잠해졌다.“심씨 가문이라고요?”누군가 참지 못하고 숨을 삼키듯 조그맣게 말했다.“어느 심씨 가문인데요?” 종수가 물었다. “심명그룹 그 심씨 가문인가요?”“그럼 또 누가 있겠냐?” 도해산이 종수를 노려봤다. “진짜 큰손이야. 다들 행동 조심해.”주예는 고개를 숙인 채 자료를 넘겨봤다. 그 말이 아주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심명그룹.해외 P국에서 기반을 잡은 뒤, 사업을 전 세계로 뻗어 나간 집안이었다. 경울시 재벌들조차 함부로 고개를 들지 못할 만큼 위세가 대단한 곳.다만 심씨 가문의 총수는 워낙 베일에 싸인 인물이었다. 공개된 정보는 손에 꼽을 정도였고, 사진은 찾아보기조차 쉽지 않았다.늘 해외에 머문다는 말도 있었고, 심씨 가문 안쪽 사정이 복잡해서 외부에 드러나는 걸 꺼린다는 얘기도 돌았다.하지만 주예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회의가 끝난 뒤, 도해산이 주예를 불렀다.“주예야, 잠깐 남아.”다른 사람들은 하나둘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안에는 주예와 도해산만 남았다.“네 , 이번에 들고 가.”도해산의 말에 주예는 눈을 들었다.“스승님, 그건 아직 덜 여문 작업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내가 가져가라면 가져가는 거야.” 도해산은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신작 구역에 걸어.”“덜 여물긴 뭐가 덜 여물어.” 도해산이 입꼬리를 비죽였다. “그건 내가 기준이 높아서 그렇게 말한 거고. 네 그림 정도면 밖에 내놔도 충분해. 내가 키운 제자인데 수준이 빠질 리가 있겠어?”주예는 대꾸하려다 말문이 턱 막혔다.“쓸데없는 소리 말고.” 도해산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거 팔리면 네가 모두한테 밥이나 한번 사.”“스승님, 너무 손해 안 보는 장사만 하시는 거 아니에요?”주예가 어이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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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남자가 손을 뻗어 성아의 손목을 잡으려 했다.주예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으면서 곧장 남자를 밀어냈다.“내 친구 건드리지 마.”그 남자는 주예를 보더니 되레 더 눈을 빛냈다.“오, 자세히 보니까 이쪽이 더 끝내주네?”주예는 오늘 밤 와인빛 벨벳 롱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군더더기 없는 재단이 허리선을 매끈하게 살려줬다. 액세서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긴 머리만 느슨하게 올려 묶어 목선과 또렷한 쇄골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옆에 있던 다른 두 사람도 곧장 다가와 주예와 성아 주변을 에워쌌다. 두 사람의 뒤쪽 길을 막으려는 기색이 빤했다. 밤공기 속에서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지럽게 흔들렸고, 도로에는 차들이 계속 오갔지만 이쪽의 소란을 제대로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성아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자기야, 우리 아까 올 때 여기 순찰 도는 보안팀 봤던 것 같은데?”상대는 ‘보안팀’이라는 말에 되레 더 크게 웃었다.“보안팀? 이 거리 우리 구역이야. 누가 와서 참견하는데?”남자는 말을 마저 마치기도 전에 표정이 굳어졌다.골목 어귀에는 어느 틈엔가 백화점 로고가 붙은 소형 순찰차 한 대가 멈춰 서 있었다. 헤드라이트 빛이 그들 쪽을 정면으로 비추고 있었다.보안요원 두 명이 차에서 재빨리 내려왔다. 단호한 걸음에, 손에는 무전기도 들려 있었다.“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앞장선 보안요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여성분들 괴롭히는 겁니까?”그 몇 사람의 낯이 바로 굳어졌다.“오해입니다, 오해예요.” 그중 하나가 억지웃음을 지었다. “아는 사이예요. 장난 좀 친 겁니다.”“장난?”보안요원이 코웃음을 쳤다.“그 장난, 가서 천천히 해명하시죠. 일단 같이 가시죠.”맨 앞에 섰던 남자는 아직도 버텨 보려고 했다.“아니, 저희가 무슨...”보안요원이 한 걸음 앞으로 붙으며 나서자, 남자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남자들은 서로 눈치만 주고받으며 욕지거리를 내뱉었지만, 감히 대들지는 못했다. 결국 얌전히 끌려가다시피 순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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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진후가 차에서 내렸다.짙은 색 코트를 걸친 진후는 검은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모습이었다. 드러난 낯은 여전히 익숙한 그 단정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진후는 주예와 성아를 보자 당황한 기색이 뚜렷했다.“당신이 왜 여기 있어?”진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차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오빠.”규나가 차에서 내렸다. 두꺼운 외투를 단단히 여민 규나는 안색이 창백했다. 목에 두른 커다란 머플러 탓에 규나는 더 작고 위태로워 보였다.진후는 바로 몸을 돌려 규나를 붙잡았다.“조심해. 바닥 미끄러워.”옆에서 성아가 싸늘하게 웃었다.그제야 진후의 시선이 주예에게 닿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조금 어수선한 옷차림이 진후 눈에 들어왔다.“당신... 왜 그래?”“아, 밥 먹고 나오는데 취객이 좀 들러붙었지.”“들러붙어?” 진후가 미간을 좁혔다. “누군데?”“보안요원들이 이미 데리고 갔어.”성아가 먼저 말을 잘랐다. 그리고 주예 앞을 막듯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한 대표가 신경 쓸 일 아니야.”진후는 성아의 말에 담긴 비아냥을 못 들은 사람처럼 주예만 바라봤다.“다친 데는 없어?”“없어.”“안 다쳤으면 됐어.”주예는 입꼬리를 비틀었다.겉으로만 다정한 척, 늘 저랬다. 막상 진후가 마음속 깊은 데까지 들어오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예전의 나는 대체 왜 저 겉치레 같은 다정함에 속았을까?’규나가 진후의 소매를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목소리는 부드럽고 가늘었다.“오빠, 주예 언니 아까 많이 놀라셨을 텐데... 오빠가 집까지 모셔다 드리는 게 어때? 나는 기사님이 데려다 주시면 돼.”진후는 고개를 숙여 규나를 봤다.“혼자 괜찮겠어?”“괜찮아.” 규나가 얌전하게 웃었다. “멀지도 않고, 내가 애도 아니잖아.”규나는 눈을 들어 진후를 올려다봤다. 물기 어린 눈매가 약하게 떨렸다.“저 길 건너 약국 가서 약만 받아오면 돼. 집에 가면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약 잘 챙겨 먹을게.”조금 전 진후는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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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주예는 원래 분별 있는 사람이잖아. 나중에 내가 잘 설명하면 돼. 지금은 네 몸이 제일 중요해.”진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규나를 달랬다.“응.”규나는 작게 답한 뒤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도 규나 눈 밑에는 감추지 못한 만족감이 스쳐 갔다....한편, 성아와 주예가 그 자리를 뜬 지 채 오 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성아 가방 안의 핸드폰이 숨 돌릴 틈도 없이 다급하게 울려 댔다.“아, 우리 보스가 찾네. 급한 일 생겼다고 지금 바로 회사로 들어오래.”통화를 끊은 성아는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핸드폰을 흔들어 보였다.“자기야, 미안해. 집까지 같이 가주기로 했는데.”“괜찮아. 일부터 봐야지.”주예는 고개를 저으며 오히려 성아를 안심시켰다.“빨리 가. 상사 기다리게 하지 말고.”“그럼 내가 택시라도 불러 줄까?”성아는 말하면서 이미 핸드폰 화면을 바삐 넘기고 있었다.“아니, 괜찮아.”주예는 앞쪽을 손으로 가리켰다.“얼마 안 걸려. 걸어가면 돼. 마침 동네도 좀 익혀 두고 싶었어.”“그럼... 조심해서 가. 집에 도착하면 꼭 연락하고!”“알았어. 너 얼른 가.”성아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주예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밤바람에는 선선한 기운이 섞여 있었다. 길가에 수북이 쌓인 플라타너스 잎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도 가볍게 들렸다.주예는 코트 여밈을 한 번 더 여몄다. 그다음 몸을 돌려 인도를 따라 천천히 발을 옮겼다.핸드폰이 한 번 진동했다.주예는 꺼내서 화면을 확인했다. 진후가 보낸 메시지였다.주예는 짧은 문장을 한 번 훑어본 뒤,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때 발밑이 힘없이 꺼지는 듯했다.아까 그 남자들에게 밀쳐질 때 발목을 한 번 접질렀던 탓이었다. 잠시 서 있을 때는 그럭저럭 버틸 만했지만, 오래 걸으니 통증이 서서히 올라왔다.주예는 길가에 잠깐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다시 걸었지만, 걸음은 어느새 절뚝이는 모양이 되어 있었다.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 둔 차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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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비틀거리는 주예의 걸음을 본 정재의 목소리가 더 차가워졌다.“지금 네 상태로는 어디도 못 가.”“차에 타.”명령처럼 떨어지는 말투였다.“고마워.”주예는 등을 돌린 채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혼자 갈 수 있어.”주예는 정재에게 어떤 빚도 지고 싶지 않고, 사소한 호의 하나조차 받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주예는 그대로 정재를 비켜 지나가려고 했다.하지만 한 발을 내딛자마자 바로 발목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훅 치고 들어왔다. 칼끝으로 찌르는 듯한 아픔에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였다.‘큰일이야.’주예의 몸이 휘청였다. 시야가 흔들리더니 중심이 그대로 무너졌다.몸이 기울어지던 그때, 주예의 귀에 정재의 낮은 호통소리가 꽂혔다.“주예야!”곧바로 단단한 팔이 주예를 받아 냈다. 주예의 몸은 그대로 정재 품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주예는 거의 반사적으로 굳어 버렸다.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듯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숨마저 턱 막혔다.익숙하면서도 낯선 서늘한 체취가 주예를 감쌌다. 밤공기의 싸늘함이 그 기운에 섞여 들어와 손끝까지 저릿하게 만들었다.주예가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정재는 주예를 그대로 안아 들었다. 망설임 하나 없이 차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문 열어.”“네!”진석이 허둥지둥 차 문을 열었다.넓은 뒷좌석에 몸이 내려놓인 뒤에야 주예는 굳어 있던 감각을 겨우 조금 되찾았다.당장이라도 옆으로 물러나고 싶었다. 하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너무 의식하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자신이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정재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아무렇지도 않은 척해야 해.’주예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요동치는 감정을 억지로 눌러 담고는 자세를 바로 세웠다. 그런 뒤 막 옆에 앉은 정재를 차분한 눈으로 바라봤다.“고마워.”말끝에는 분명하게 선을 긋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정재는 고개를 돌려 주예를 봤다. 어두운 조명 아래 가라앉은 눈빛은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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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른 채 잠들어 있던 주예의 뺨을 누군가 가볍게 두드렸다.“다 왔어.”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언제까지 이러고 버틸 건데?”주예는 속눈썹을 가늘게 떨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흐릿하던 시야가 조금씩 또렷해졌다.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이었다.아직 정신이 다 돌아오지 않은 주예는 멍하니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오빠...?”그 한마디에 정재의 기분이 묘하게 풀렸다. 정재가 담담하게 대꾸했다.“응.”그리고 무심한 목소리로 덧붙였다.“그럼 누구겠어, 설마 네 남편일까?”그제야 주예는 정신이 조금씩 제자리로 돌아오는 걸 느꼈다. 그녀는 지금 정재의 차 안에 있었고, 눈앞에 있는 사람 역시 7년 전 그 시절의 오빠가 아니었다.차 안 공기가 다시 싸하게 가라앉았다. 두 사람은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이 서서히 차 안을 메웠다.“데려다 줘서 고마워.”주예가 먼저 말했다. 말투는 분명하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저 앞에서 꺾으면 돼. 거기 세워줘.”정재는 그런 주예를 바라보다가 문득 비웃듯이 입꼬리를 올렸다.“대단하네.”말끝에 비꼬는 기색이 묻어 있었다.“길바닥에 내팽개쳐지고 나서도 아직도 그쪽 편을 들어줄 생각이 들어?”주예는 손가락 마디에 힘을 줬다.“그건 당신이랑 상관없어.”“그래?”정재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그럼 누구랑 상관있는데. 너 자신?”주예는 눈을 감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어쨌든, 그쪽하고는 상관없어.”정재의 울대가 천천히 움직였다. 더 말을 잇지 않던 정재는 한참 뒤에야 차갑게 한마디만 던졌다.“마음대로 해.”정재는 고개를 내렸다. 주예의 붉게 부어 오른 발목이 시야에 들어왔다. 발목은 이미 찐빵처럼 퉁퉁 부어 있었다. 정재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의사 부를게.”주예도 정재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봤다. 심하게 부어 있었지만, 주예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곧장 시선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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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현관 센서 등이 켜졌다. 진후는 반사적으로 주방 쪽을 봤지만 텅 비어 있었다.예전 같았으면 이 시간에 주예는 이미 일어나 있었을 것이다. 커피머신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공기에는 진후에게 가장 익숙한 커피 향기가 배어 있을 시간이었다.그런데 오늘은 아무것도 없었다.진후는 미간을 찌푸린 채 외투를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던졌다.“여보?”대답이 없었다.진후는 식당 쪽으로 걸어갔다. 식탁은 지나치게 말끔했다. 아침도 국도 없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꽃도 며칠 전 그대로여서 금방이라도 시들 것처럼 축 처져 있었다.진후의 속이 묘하게 가라앉았다.“이모님, 주예는 어디 있어요?”진후가 여주댁에게 물었다.여주댁은 목소리를 낮췄다.“사모님께서... 어젯밤에는 안 들어오셨습니다.”진후는 잠깐 말을 잃었다.“안 들어왔어요?”“예.”진후는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주예 번호를 눌렀다. 신호는 갔지만 받지 않았다.진후는 미간을 더 깊게 찌푸렸다. 한 번 더 걸었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가슴 아래쪽에서부터 짜증이 서서히 치밀어 올랐다.진후는 몸을 돌려 침실로 들어갔다. 옷장도 그대로였고 화장대도 그대로였다. 주예가 자주 입던 옷도 얼핏 보기엔 하나도 빠진 것 없이 제자리에 걸려 있었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그제야 진후는 조금 숨을 돌렸다.어젯밤 주예가 성아와 함께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마 성아 집에 머무는 모양이었다. 그쪽이 낫다고도 생각했다. 기분이 상해 있을 테니, 친한 친구와 같이 있으면서 마음도 풀 수 있을 테니까.진후는 금세 그렇게 결론 내렸다.‘그래. 그럴 거야.’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진후는 고개를 숙인 채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놀 만큼 놀았으면 집에 들어와.]잠깐 생각하더니, 한 줄을 더 붙였다.[계속 남의 집에서 지내는 것도 불편하잖아.]그 시각.주예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어젯밤 마주친 정재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자꾸만 되살아났다.그 이름도, 그 얼굴도. 7년 만에 다시 나타난 뒤로 주예의 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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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박 집사가 옆에서 말을 보탰다.“행동이나 몸에 밴 습관까지, 예전 아가씨랑 정말 많이 닮으셨습니다.”고홍근은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나지막하게 말했다.“계속 알아봐.”짧은 침묵 뒤, 고홍근이 다시 입을 열었다.“확실한 답이 필요해.”차는 천천히 공원묘지를 빠져나갔다.주예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오갔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다음 날 이른 아침, 공항은 사람들로 북적였다.주예는 기내용 캐리어를 밀면서 앞서 걸었다. 평소보다 발걸음이 조금 느렸다.종수는 주예보다 약간 뒤에서 따라가고 있었다. 종수의 시선은 계속 주예의 발목에 머물렀다.“발목 아파?”불쑥 떨어진 질문에 주예는 잠깐 멈칫했다.“많이 아프진 않아요.”“역시 다쳤네.”종수가 주예 말을 잘랐다.“괜히 버티지 마.”그렇게 말하면서 종수는 주예의 캐리어 손잡이를 자연스럽게 잡았다.“이건 내가 들게.”주예는 반사적으로 사양했다.“안 무거워요.”“알아.”종수는 이미 캐리어를 끌며 앞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그래도 지금 네가 힘을 쓸 수 있는 상태는 아니잖아.”보안검색대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한참 서 있다 보니 주예의 발목이 점점 욱신거렸다. 자기도 모르게 미간도 살짝 찌푸리게 되었다.종수는 그 표정을 옆에서 보고도 굳이 캐묻지 않았다. 대신 주예를 데리고 옆의 비즈니스석 발권 창구로 방향을 틀었다.“가자. 좌석 바꾸게.”주예는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안 그래도 돼요.”“줄 서서 오래 기다리면 더 힘들어.”종수 목소리는 당연하다는 듯 담백했다.보안검색을 마친 뒤, 종수는 캐리어를 주예 앞에 놔두면서 말했다.“잠깐만 기다려.”그 말을 남기고 종수는 어디론가 금방 사라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종수는 근처 편의점 쪽에서 돌아왔다. 손에는 작은 스프레이 하나가 들려 있었다.“붓기 빼는 거야.”종수는 주예에게 약을 건넸다.“약국에서 약을 사는 김에 같이 샀어. 비행기 타기 전에 한 번 뿌려.”스프레이를 받아 든 주예의 손끝이 살짝 멈칫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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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경매 시작 시간이 임박하자, 직원들이 하나둘 사람들을 메인 홀 쪽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그때 입구 쪽에서 미세한 술렁임이 번졌다.사람들은 무슨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해졌다.“오셨다.”“누가요?”“저기.”모든 시선이 한꺼번에 입구로 쏠렸다.짙은 색 수트를 입은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넥타이는 흐트러짐 하나 없이 반듯했고, 서두르지도 늦지도 않은 걸음이었다.뒤로는 비서와 수행 인력이 따라붙었다.천장에서 쏟아진 조명이 남자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심씨 가문 총수래.”누군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심씨 가문의 총수, 심정재.주예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시선이 그 얼굴에 닿는 순간, 주예는 숨이 턱 막히면서 겨우 숨을 들이마셨다.종수는 주예의 이상한 기색을 바로 알아챘다. 종수는 주예가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아는 사람?”주예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정재만 바라봤다.정재는 사람들 한가운데 서 있었다.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정재의 표정은 오만하고 차갑게만 느껴졌다. 이런 자리조차 정재에게는 익숙한 영역인 듯했다.정재는 가끔 고개를 끄덕이면서 짧게 응대했다. 예의는 갖추고 있었지만 전혀 빈틈이 없었다.그 모습을 보던 주예는 그제야 모든 조각이 맞아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임정재... 심정재... 그렇구나.’주예는 가볍게 웃었다. 웃음은 아주 희미했고,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그 안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비웃음도 조금 섞여 있었다.종수는 이번 전시의 가장 큰 후원자를 맞으러 걸음을 떼려다가, 주예의 미묘한 표정을 슬쩍 곁눈질로 봤다.“뭐가 그렇게 웃겨?”주예는 이미 시선을 거둔 뒤였다. 표정도 다시 평온해져 있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주예는 귓가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한 발 앞으로 나섰다.“가시죠. 저희 큰손 고객님 맞으러요.”종수가 피식 웃었다.“그 호칭, 누가 들으면 큰일 나겠네.”“칭찬으로 들으면 되죠.”주예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받았다.두 사람은 앞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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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주예는 정재를 다시 자리로 안내한 뒤, 정재 옆에 조용히 앉았다.두 사람의 거리는 어쩔 수 없이 가까워졌다. 너무 가까운 거리라서 주예는 정재 몸에 밴 서늘한 향까지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주예는 본능처럼 정재보다 반 박자쯤 뒤로 물러선 자세를 취했다. 시선도 내내 전시장의 다른 쪽만 향했고, 정재 쪽은 좀처럼 보지 않았다.그런데 정재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사람 같았다. 자리에 앉아 몸을 기대자마자, 정재가 옆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말끝에는 빈정거림이 살짝 배어 있었다.“목 삐었어?”주예는 정재가 일부러 비틀린 자세를 꼬집고 있다는 걸 바로 알아들었다. 자신을 애써 피하려는 모습까지 다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아니에요.”주예는 그제야 시선을 돌려 정재 쪽을 봤다. 주예의 목소리는 평온했다.“회장님, 혹시 따로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요?”“그래?”정재가 소리 없이 웃었다.“그럼 왜 자꾸 나를 안 봐. 내가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주예는 그대로 정재의 시선을 마주했다.“못 볼 이유는 없습니다.”주예는 한 글자씩 분명하게 말을 이었다.“회장님께서 작품에 대해 궁금하신 부분이 있으시면 얼마든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다만 그 외의 일까지 신경 쓰시는 건, 회장님께서 너무 지나치게 나가시는 것 아닌가요?”‘또 시작이네.’말을 꺼낸 주예 자신도 아주 잠깐 멈칫했다.정재만 나타나면 주예는 이상하게도 꼬박꼬박 받아치고 싶었다. 어릴 때는 정반대였다. 그 시절의 주예는 ‘정재 오빠’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다. 정재가 동쪽이라고 하면 주예는 한 번도 서쪽으로 가지 않았다.그런데 방금 주예가 던진 ‘지나치게 나가신다’는 말이... 정재의 마음속 깊숙한 곳을 정확히 건드린 듯했다.정재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입가에 걸쳐 있던 가벼운 미소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내가 무슨 자격으로 널 신경 써.”정재의 목소리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넌 원래 네 마음대로 제일 잘하잖아.”두 사람 사이 공기가 그대로 굳어 버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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