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정재의 벤틀리가 진후의 하늘빌을 향해 달렸다. 지금 느끼는 감정은 십여 년 전과 묘하게 겹쳤다.주예가 정재를 기다리는 동안 진후도 만반의 준비를 했다. 옷매무새까지 가다듬었다. 주예의 ‘오빠’를 직접 만나 볼 생각이었다.그때 핸드폰이 울렸다.바로 박효주에게서 온 전화였다.어머니가 자신이 퇴원한 걸 알고 전화했겠거니 하고 무시했다.하지만 전화는 좀처럼 끊어지지 않았다. 결국 진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박효주의 말을 듣자 표정이 급격히 달라졌다.[진후야, 너 규나랑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니? 네 아이를 가졌다는데?]박효주는 원래 다른 일도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눈앞의 일 중에서 이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진후의 낯이 굳었다.“그럴 리가 없는데요?”[네 아이라고 분명히 말했어. 산전 검사 결과지도 가져왔고. 임신한 지 한 달이 넘었대.]박효주는 이제 규나 이름만 꺼내도 불쾌했다. 어제부터 온갖 방법으로 비위를 맞추더니, 이럴 속셈이었던 것이다.아이를 앞세워서 자리를 차지하는 일은 재벌가에서 드물지 않았다. 박효주는 이미 진후의 혼처로 몇몇 집안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고씨 집안의 고하늘도 괜찮은 후보였다. 규나 역시 강씨 집안을 이끄는 실력자의 친동생인 데다가 극진한 사랑을 받아서, 예전에는 박효주도 꽤 마음에 들어 했었다.그러나 규나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적이 있었다. 이후에는 한씨 집안을 어지럽히기까지 했다. 박효주는 규나가 점점 더 못마땅해졌다.그런 규나가 오늘 오후에 연락하더니 진후와 관련된 중요한 일이 있다고 했다. 그게 이런 얘기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날벼락을 맞은 것만 같았다. 한편으로는 한씨 집안에 아이가 생겼다는 기쁨도 있었다. 진후의 첫 아이였다. 주예와 결혼해서 살던 삼 년 동안은 아이가 생기지 않았으니까.박효주는 규나를 본가로 데려와서 응접실에 앉혔다. 식구들이 평소 머무는 공간과는 멀찍이 떨어진 곳이었다. 확실해지기 전에는 시어머니 권수영에게 알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주예의 목소리에는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한 서운함이 묻어 있었다.전화 너머로 정재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전남편이랑 다시 만난다며?]주예는 진후가 정재에게 뭔가 말했겠거니 싶었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지금 같은 상황만 아니었다면 맞는 말이라며 한 번 더 놀려 줬을 것이다. 정재가 얼마나 발끈하는지 보고 싶었다.하지만 지금은 용건부터 짧게 말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진후가 또 무슨 일을 벌일지 몰랐다. 오늘 진후는 감정이 불안정한 데다가, 말과 행동도 계속 뒤집혔다.주예가 곧바로 말했다.“나 하늘빌에 있어. 진후가 내 친부모에 대해서 알아냈대. 여기서 하룻밤 지내면 알려 주겠다고 했어.”진후가 실제로는 자신이랑 하룻밤 자라고 했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정재가 그대로 폭발할 것 같았기에.그래도 정재의 목소리를 듣자 기댈 곳이 생긴 듯한 기분이었다.주예는 부담 없이 상황을 전부 털어놓았다.[그래서 거기서 하룻밤 지내고 싶어?]목소리는 잔잔했다. 하지만 주예는 그 안에 숨은 위험을 예민하게 알아챘다.겉으로는 질문이었지만, 받아들일 답은 하나뿐이었다.‘이런 와중에도 그걸 묻네.’‘정말 어이없어. 남자들은 하나같이 똑같다니까.’주예가 일부러 되물었다.“그러고 싶다고 하면?”진후는 줄곧 이쪽의 대화를 살피고 있었다. 정재의 질문도 들었다. 주예의 대답에 은근한 기대가 생기면서, 동시에 가슴속이 시큰해졌다.‘오빠’와 통화하는 주예의 표정은 생기가 넘쳤다. ‘오빠’와 사이가 정말 좋은 모양이었다.예전에는 진후와 진짜 규나도 그랬다.[너한테는 결정권 없어. 거기서 기다려. 내가 데리러 갈 테니까.]...한편, 정재의 얼굴은 잔뜩 굳어져 있었다. 주예가 반박할 틈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은 뒤 진석에게 지시했다.“더 빨리 가.”차 시트에 기대면서 정재의 생각은 자연스레 먼 과거로 흘렀다.주예가 중학교에 다닐 때 친구 집에서 자고 오겠다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 자신의 주관이 막 생기기 시작한 나이였고, 가까이 지내
여주댁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닭백숙 국물을 한 그릇 올렸다. 짙은 약재 냄새가 침실 안에 퍼졌다.‘어혈을 풀어주는 약재.’‘임신 중인데, 저런 국물을 억지로 마시면 아이가 위험해질 거야.’주예는 바로 거절했다. “괜찮아. 따뜻한 물만 마실게.”“안 먹으면 내가 직접 먹여 줄 수밖에 없어.”진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이 다시 올라왔다. 도자기 그릇을 들고 주예의 거부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한 숟가락씩 먹이려고 했다.주예는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자 더 피할 곳도 없었다.진후의 숟가락이 점점 다가왔다. 곧 입술에 닿을 것 같았다.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닫자 주예는 불쑥 꾀를 냈다. “우욱!”거칠게 헛구역질을 하면서 재빨리 그릇을 쳐서 바닥에 떨어뜨렸다. 뜨거운 국물이 진후의 옷과 침실의 값비싼 캐시미어 카펫 위로 쏟아졌다.여주댁이 곧 가사도우미들을 불러 치우게 했다.처음에는 국물을 마시지 않으려고 연기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구역질이 시작되자 멈추지 않았다. 속이 거세게 뒤집히면서 여러 번 헛구역질을 했다. 눈가에는 반사적으로 눈물까지 맺혔다.진후는 크게 놀랐다. 바로 의사를 부르려고 했다.겨우 진정한 주예가 힘없이 숨을 몰아쉬었다.“신경 쓰지 마. 뭘 잘못 먹었나 봐.”진후는 입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리고 정말 겁이 났다. 창백하고 여린 몸으로 침대 구석에 웅크린 주예를 보니, 진후가 찾던 ‘진짜 규나’인 주예는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조심스럽게 보살펴야 하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억지로 강요해서는 안 됐다.진후는 가슴이 아파서 자꾸 움츠러들었다. 주예를 힘껏 안고 위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주예는 진후를 그토록 거부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그 자리에 선 채 어쩔 줄 몰랐다.“핸드폰 줘.” 조금 진정한 주예가 말했다.진후의 표정이 누그러진 때를 놓치지 않았다.주예는 진후를 너무 잘 알았다.지난 3년 동안 늘 진후의 표정을 살폈다. 만든
정재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진석은 속으로 또 말을 쏟아 냈다. ‘임주예 씨하고 관계를 확인한 적이 언제 있다고, 혼자 지금 만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까?’‘바람피우는 걸 잡겠다니요?’‘그 부부한테 가서 뭘 잡으시겠다는 겁니까?’‘게다가 바람피우는 현장이라니, 회장님 분위기하고는 너무 안 어울리는데요.’전협은 계속 주예와 연락하려고 했다.전화할 때마다 진후가 받자 깊이 숨을 들이마시면서 말했다. “한진후 대표님, 임주예 씨에게 전화 좀 넘겨주시겠습니까? 직접 통화하고 싶습니다.”[자고 있어서 곤란합니다. 자기 집 침실에서 쉬는 건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소파에 기대 앉은 진후가 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차갑게 두드렸다. 목소리에는 경고가 실려 있었다. [운전기사치고는 참견이 지나치시군요.]전협도 난감했다. ‘그러게. 부부가 같이 있는 게 무슨 문제겠어?’ 주예에게 이혼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절차가 어디까지 진행됐는지도 몰랐다. 다시 마음이 돌아선 걸 수도 있었다.게다가 진후는 주예 대신 칼까지 맞았다.무작정 들어가야 할지, 전협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진후는 정재가 지금 만나는 사람이라고 한 말에 잔뜩 자극을 받았다. 말투에서 소유욕이 분명히 느껴졌다. ‘주예가... 벌써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위층으로 올라가 문을 열었다. 주예에게 확실히 물어볼 생각이었다.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주예가 고개를 들었다.“너... 남자친구 있어?” 진후는 주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인정하면 이 방에 영원히 가둬 둘 것 같은 눈이었다.“뭐?” 주예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너무 갑작스럽고 맥락도 없는 질문이었다.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진후는 마음을 놓았다. 주예의 놀란 표정은 연기가 아니었다.‘역시 그 남자가 날 떠본 거였어.’진후는 질문을 바꿔가며 반응을 살폈다. “네 오빠가 전화했어. 내가 받았고.”주예의 눈이 바로 밝아졌다. “오빠가 전화했어? 뭐라고 했는데?” 이내 진후를 나무
방금 일만 해도 예전 같았으면 진후의 상처를 걷어찼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일찍 퇴원한 걸 후회하게 만들었을 터였다.마음을 가라앉힌 주예는 침실 문을 열어보려고 했다. 열리지 않았다. 전협이 구하러 와 주기를 바라기 시작했다. 진후와 다투는 사이에 핸드폰을 아래층에 두고 왔다.한 시간이 지났다. 전협은 주예가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었다. 핸드폰을 꺼내서 주예에게 전화했다....집 안 거실이었다.진후는 상처를 다시 드레싱하는 중이었다. 의사에게 진통제 주사를 맞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상태가 한결 나아졌고, 이성도 돌아왔다.문득 테이블 위에서 핸드폰이 진동하자 눈길이 갔다. 주예의 핸드폰이었다.진후가 집어 들었다. 발신자 이름은 ‘오빠’였다.진후의 동공이 움츠러들었다. 차 안에서 주예가 잠결에 중얼거린 말이 떠올랐다. 주예에게는 정말로 오빠가 있었다.잠시 화면을 바라보다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나지막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진후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졌다.일부러 말을 하지 않았다. 상대가 더 말하기를 기다렸다.[주예야?]다시 목소리가 들렸다.‘주예야? 저렇게 다정하게 부르다니. 대체 누구야?’진후는 속에서 분노가 치밀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여보세요. 제 아내에게 무슨 볼일이십니까?”정재는 막 비행기에서 내리자 주예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진후가 전화를 받을 줄은 몰랐다.아내라는 말을 듣자 정재의 얼굴에 짙은 먹구름이 내려앉았다.진후가 다시 물었다. “누구십니까?”정재는 비웃듯 웃었다.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 [주예는 어디 있습니까? 전화기 넘겨주시죠.]말에 소유욕이 짙게 묻어났다.진후도 물러서지 않았다. 목소리가 차가웠다.“찾으시는 사람은 제 아내입니다. 용건이 있으시면 제가 전하겠습니다. 그런데... 선을 넘으시는 건 아닙니까?”정재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아내요? 이미 이혼했다고 들었습니다만...]‘이혼한 걸 알고 있네. 정말
주예가 진지하게 물었다. “잠깐, 확인 좀 할게. 친남매는 아니지? 피가 섞인 사이는 아닌 거지?”진후는 말문이 막히면서 표정이 굳어졌다. “당연히 아니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주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에게는 오빠가 정재 하나면 충분했다.또 다른 오빠까지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특히 여동생과 아내도 구별하지 못하는 이런 오빠는 사양이었다.그제야 표정을 가다듬고 진후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한참 뒤 고개를 저었다. “어릴 때 일은 잘 기억 안 나. 당신을 만난 기억도 없어.”진후의 얼굴에 실망이 드러났다.주예가 바로 덧붙였다. “만난 적이 있다고 해도 당신도 나를 못 알아봤잖아. 아니면 왜 이제야 내가 누군지 알았겠어?”맞는 말이었다. 그 말이 진후의 가슴 한가운데를 바로 찔렀다.주예는 더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서 바로 물었다. “내 친부모가 누군지 말해 줄래?”이번에는 진후가 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주예야, 우리 방은 다 정리해 뒀어. 너 없는 동안 이모님하고 다른 분들이 매일 청소했어.” “시트도 새로 갈았고, 네가 좋아하는 색이야. 오늘 밤은 여기 있어 주면 안 돼?”“거절하지 마. 오늘 밤 여기 있으면 친부모가 누군지 말해 줄게.”진후의 말투가 강해졌다. 그러다 한발 뒤로 물러섰다. “나는 손님방에서 자도 돼. 너만 안 가면 돼.”주예는 어이가 없었다.“내 친부모 소식을 알 수 있으면 물론 좋겠지. 하지만 몰라도 괜찮아. 지난 20년 동안 모르고도 잘 살았어.”“그걸로 날 협박할 거면 더 얘기할 필요 없어. 누가 날 낳았든 고경란하고 임필수는 영원히 내 엄마 아빠야. 그건 달라지지 않아.”주예는 곧바로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가지 마! 못 가!”진후가 미친 사람처럼 거칠게 붙잡았다. 다쳤어도 주예가 이길 수 있는 힘은 아니었다. 겨우 ‘진짜 규나’를 되찾았는데 다시 떠나게 둘 수는 없었다.“놔!”임신한 걸 아는 주예는 온 힘을 다해 몸부림칠 수가 없었다. 진후는
주예는 가슴이 답답하게 막혀 왔다.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쉰 뒤, 진후의 SNS 계정을 다시 열었다.화면이 넘어가자 진후가 기록해 둔 일정들이 줄줄이 떠올랐다.[규나 건강검진][규나 항공권, 호텔 예약][규나 생일][규나...]주예와 관련된 기록은 맨 아래까지 내려가서야 하나 나왔다. 3년 전, 혼인신고를 한 날이었다.주예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손끝이 조금씩 식어 갔다.‘정말 끝까지 이랬네.’주예는 올라오려는 감정을 꾹 눌러 삼킨 채 다른 폴더를 열고 나서, 진후가 최근에 사들인 부동산, 주식 거래 내역
밤, 7시 반.주방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 차 있었다.도미찜은 찜기 위에서 김을 올리고 있었고, 갈비찜은 자작하게 졸아들고 있었으며, 두부는 반듯한 모양으로 가지런히 썰려 있었다. 냄비에 담긴 육수는 불 위에서 천천히 끓고 있었다.진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짙은 색 코트 안에는 날렵하게 재단한 수트를 받쳐 입고 있었고, 넥타이는 느슨하게 조금 풀어져 있었다.주예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진후의 매서운 눈매가 조금 누그러졌다.주예는 주방에서 분주히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기척이 들렸는데도 주예는 돌아보지 않
진후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마치 어디까지나 주예를 배려하는 사람처럼 들렸다.하지만 주예는 진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말들은 결국 진후 자신이 품고 있는 보잘것없는 죄책감을 덜어 내기 위한 것이었다. 진후는 주예가 늘 그랬듯 알아서 사양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그래.” 주예가 받아들였다.“응? 뭐라고 했어?” 진후가 멈칫했다. 뜻밖이라는 기색이 스쳤다.“좋다고. 이제 몸도 거의 다 나았고, 당신 친구들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주예는 가볍게 웃었다.‘어차피 앞으로는 만날 일도 없을 테니까.’...다음
“사모님?”여주댁이 문을 살짝 열고 안을 들여다봤다.“아직 안 주무셨어요?”“응...”주예는 대답하려 했지만 목이 잔뜩 잠겨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겨우 숨 섞인 소리만 흘러나왔다.여주댁은 급히 안으로 들어와 주예의 이마에 손을 대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어머, 이게 무슨 일이에요? 열이 너무 심하잖아요.”“비를 좀 맞아서 그런가 봐요.”주예는 힘겹게 웃어 보였다.“약은 먹었어요.”“이렇게 있으면 안 되죠.”여주댁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이대로 열이 더 오르면 큰일 나요.”여주댁은 곧장 핸드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