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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핏빛 유산: Chapter 51 - Chapter 60

74 Chapters

51화 — 오빠, 또 어디로 가는 거야

최상층 라운지.유리창 너머로 도시가 깔려 있었다. 윤지연은 창가에 기대 서 있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천천히 웃었다.“왔네.”뒤돌지도 않고 말했다.“오빠.”그 한 단어가 공기를 바꿨다.강태준이 안으로 들어왔다.지연이 천천히 돌아봤다.눈이 바로 맞았다.“…왜 왔어.”태준이 짧게 말했다.“확인.”지연이 피식 웃었다.“뭘.”“네가 뭘 들고 있는지.”지연이 한 발 다가왔다.“그거 보려고 왔어?”짧게 웃었다.“아니면— 또 흔들려서?”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지연이 더 가까이 왔다.“오빠.”낮게.“나 버릴 거야?”태준이 눈을 살짝 좁혔다.“그 질문 의미 없는거 알잖아.”지연이 웃었다.“아니, 있어.”한 발 더 다가왔다.“오빠는 항상 그러거든.”짧게.“버릴까 말까.”태준이 말했다.“난 선택 안 한다.”지연이 고개를 기울였다.“…그래?”“상황 만든다.”짧은 침묵.지연의 눈이 번뜩였다.“…역시 오빠네.”그리고 웃었다.“그래서 왔어? 나 이용하려고?”태준이 바로 말했다.“응.”그 솔직함에 지연이 잠깐 멈췄다.“…와.”짧게 웃었다.“진짜 변한 거 하나도 없네.”태준이 한 걸음 다가왔다.“너도.”지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나?”“아직도 감정으로 움직이잖아.”정적.지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다시 풀렸다.“그래서?”“거래하자.”“뭔데.”“네가 가진 거 보여줘.”지연이 웃었다.“대신?”태준이 말했다.“서아.”짧게.“어디까지 왔는지 알려준다.”순간—지연의 눈이 완전히 달라졌다.“…진짜야?”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지연이 웃었다.“하… 진짜 미치겠다.”고개를 흔들었다.“결국 여기로 오네.”그리고 돌아섰다.서랍을 열었다.USB를 꺼내면서 말했다.“이거.”짧게.“언니 끝낼 수 있는 거.”태준의 시선이 그걸 따라갔다.지연이 고개를 돌려 그를 봤다.“근데 오빠.”짧은 숨.“이거 받으면— 진짜 끝이야.”“뭐가.”지연이 웃었다.“오빠.”짧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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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 내가 본 건 뭐지

최상층 라운지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서아는 벽에 기대 서 있었고, 도윤은 옆에서 조용히 층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숫자가 하나씩 올라갈수록 공기가 더 무거워졌다.“지금 올라가시면—”도윤이 말을 꺼냈다가 멈췄다.서아가 눈도 안 돌리고 말했다.“봤으면 좋겠어?”“아니요.”“그럼 조용히 있어.”엘리베이터가 멈췄다.문이 열리자마자 서아는 바로 걸어나갔다. 발걸음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딱 멈추지 않을 속도였다.복도를 지나 라운지 앞에 도착했을 때, 문이 완전히 닫혀 있지 않았다.아주 미세하게 틈이 벌어져 있었다.그 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그래서 왔어? 나 이용하려고?”지연이었다.서아의 걸음이 멈췄다.도윤이 조용히 손을 뻗었지만, 서아는 막지 않았다.안쪽에서 태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응.”짧고,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다.서아의 눈이 순간 굳었다.지연이 웃었다.“와… 진짜 변한 거 하나도 없네, 오빠.”“너도.”“나?”“여전히 감정으로 움직이잖아.”지연이 낮게 웃었다.“그래서 싫어?”“편하진 않지.”짧은 침묵.그리고—지연의 목소리가 더 가까워졌다.“그럼 거래하자.”서아의 손이 천천히 굳었다.“네가 가진 거 보여줘.”태준의 목소리였다.“대신—”지연이 말했다.“서아.”그 이름이 그대로 박혔다.“…어디까지 왔는지 알려준다.”정적.그 한 문장이, 그대로 공기를 찢었다.서아의 시선이 완전히 굳었다.도윤이 낮게 말했다.“…서아 씨.”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안쪽에서 지연이 웃었다.“하… 진짜 미치겠다.”짧게.“결국 여기로 오네.”서랍 여는 소리가 났다.“이거.”지연의 목소리였다.“언니 끝낼 수 있는 거.”서아의 숨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 순간—문 안쪽에서 두 사람의 거리가 더 가까워졌다.지연이 말했다.“근데 오빠.”짧은 숨.“이거 받으면 진짜 끝이야.”“뭐가.”태준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다.지연이 웃었다.“오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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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 네가 만든 함정

라운지 안 공기는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 불빛은 화려했지만, 그 안에 서 있는 세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긴장은 차갑고 날카로웠다.윤지연은 태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작은 USB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그 USB가 둘 사이의 비밀처럼 보였는데, 서아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그건 바로 칼이 됐다.지연이 먼저 웃었다.“왔네, 언니. 생각보다 빨랐어. 아니, 어쩌면 생각보다 늦은 건가?”서아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냥 천천히 안으로 들어와 시선을 태준에게만 고정했다. 지연이 옆에서 일부러 웃고 떠들어도, 마치 존재 자체를 잘라낸 것처럼 태준만 보고 있었다.도윤이 문 가까이에 멈춰 서서 상황을 지켜봤다. 그도 알았다. 지금 이 순간 잘못 끼어들면 오히려 더 망가진다는 걸.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지금 뭐 하고 있어.”짧은 말이었지만, 방 안 공기가 그 한마디에 그대로 조여들었다.태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지연의 입꼬리가 더 올라갔다.“보면 모르겠어, 언니? 거래 중이잖아.”지연이 대신 대답했다.“오빠가 궁금한 게 있고, 나도 확인하고 싶은 게 있고. 서로 필요한 거 주고받는 중이었어. 별거 아니야.”서아가 그제야 시선을 지연 쪽으로 아주 잠깐 돌렸다.“넌 가만히 있어.”짧고 차가운 말이었다.“지금 너한테 묻는 거 아니니까.”지연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하지만 화를 내는 대신 더 환하게 웃었다.“그래, 그건 상관없어. 어차피 언니가 보고 싶은 건 나보다 오빠잖아.”그 말이 끝나자, 서아는 다시 태준을 봤다.“말해.”짧은 침묵.“저거 받을 거야?”태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 USB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확인 중이야.”그 한 문장이 떨어지는 순간, 서아의 표정이 완전히 식었다.“확인?”서아가 아주 천천히 되물었다.“지금 내 앞에서 그 말이 나와?”지연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와, 언니 진짜 웃긴다. 오빠가 바로 네 편 들어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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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 내가 짜는 판

라운지 문이 닫히고 나서도 한동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윤지연은 그대로 서 있었고, 강태준은 손에 쥐어진 USB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작은 장치 하나가 지금 상황을 완전히 뒤틀어 놓은 중심 같았다.지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왜, 안 열어봐?”태준은 시선을 들지 않았다.“여기서 확인 안 해.”지연이 피식 웃었다.“겁나?”태준이 짧게 말했다.“확인은 혼자 할 때 하는 거야.”지연이 한 걸음 다가왔다.“오빠.”짧게.“지금 그거— 나한테서 받은 거야.”태준이 고개를 들었다.“알아.”“그럼 더더욱 여기서 열어봐야지. 나도 궁금하거든. 오빠가 이거 보고 무슨 얼굴 할지.”태준은 잠깐 그녀를 보다가 말했다.“넌 이미 알고 있잖아.”지연이 웃었다.“그래서 더 보고 싶은 거지.”짧은 침묵.“망가지는 얼굴.”태준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가라앉았다.“넌 항상 그거다.”“뭐가.”“결과부터 본다.”지연이 고개를 기울였다.“…그래서?”“과정 안 본다.”짧게.“그래서 망한다.”지연이 웃음을 터뜨렸다.“와… 아직도 그 말 하네.”한 걸음 더 가까이 붙었다.“오빠, 그거 알아? 오빠는 항상 과정만 보다가 타이밍 놓쳐.”태준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래서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거야.”지연이 멈칫했다.아주 찰나였다.“이번엔 다를 거 같아?”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USB를 주머니에 넣었다.지연이 그걸 보고 웃었다.“그래. 가져가. 대신—”짧게.“돌아갈 생각은 하지 마.”태준이 말했다.“원래 없었어.”지연이 입꼬리를 올렸다.“그 말, 마음에 들어.”잠깐 정적이 흐르고,지연이 다시 말했다.“오빠.”“왜.”“나 배신 안 할 거지?”짧은 침묵.태준이 말했다.“그건 상황 봐야지.”지연이 웃었다.“역시.”짧게.“끝까지 솔직하네.”태준이 돌아섰다.“간다.”지연이 마지막으로 말했다.“오빠.”그가 멈췄다.“이번엔— 진짜로 내 거 돼.”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그대로 문을 열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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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 단절

별관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복도는 조용했고, 새벽 공기는 싸늘했다. 그런데도 서아는 하나도 춥지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이 이상할 정도로 뜨거웠다. 방금 전 라운지에서 본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윤지연의 웃음. 태준의 침묵.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USB.배신이라고 단정하기엔 아직 설명되지 않은 것들이 남아 있었고, 연기였다고 믿기엔 너무 차갑게 보였다. 문제는 그 둘 사이에 놓인 그 애매한 틈이, 지금 서아를 가장 미치게 만들고 있다는 거였다.회의실 문이 닫히자 도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지금 바로 정리하셔야 합니다.”서아는 대답하지 않고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밖은 아직 어두웠다. 밤도 아니고 아침도 아닌 시간. 세상이 잠깐 숨을 고르고 있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도윤이 다시 말했다.“지금 상황에서 가장 위험한 건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겁니다. 태준 씨가 실제로 배신한 건지, 아니면 다른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건지 아직 단정하기 어렵습니다.”그 말에 서아가 아주 천천히 돌아봤다.“넌 방금 그걸 보고도 아직 단정 못 하겠어?”도윤은 잠시 말을 고르듯 숨을 들이켰다.“제가 본 건 결과가 아니라 장면입니다. 그리고 장면 하나로 전부를 확정하는 건, 지금 우리가 제일 경계해야 할 방식입니다.”서아는 피식 웃었다.“그건 회장 방식 아니야?”“맞습니다.”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더 조심해야 합니다.”짧은 침묵이 흘렀다.서아는 창가에 기대지 않았다. 그냥 똑바로 서서 도윤을 보고 있었다. 흔들리는 것 같지 않았지만, 도윤은 알았다. 지금 서아는 흔들리지 않는 게 아니라, 일부러 무너지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는 중이라는 걸.“좋아.”서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그럼 이렇게 생각하자.”도윤이 조용히 기다렸다.“태준이 연기 중일 수도 있어. 나도 알아. 그 인간 원래 끝까지 다 안 보여주고, 남들이 못 보게 판 짜는 인간이라는 거.”짧은 숨.“근데.”그 한 단어가 방 안 공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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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 병원 아래층

태성병원은 겉으로 보면 평범했다. 아침이 시작되기 직전이라 로비에는 환자보다 직원이 더 많았고, 간호사들이 교대 준비를 하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그런데 서아는 그 풍경이 이상하게 느껴졌다.사람들은 평소처럼 움직이는데, 이 건물 안에 누군가는 아이의 출생을 바꾸고, 기록을 조작하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시스템이 있다는 걸 알고 나니까—모든 게 가짜처럼 보였다.도윤이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정문으로 들어오신 건 좋은 선택입니다. 지금 시간대는 출입 통제가 느슨합니다.”서아가 짧게 답했다.“들키면 끝이니까.”“그래서 더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게 낫습니다.”도윤이 직원용 출입카드를 건넸다.“임시 권한입니다. 오래 못 씁니다.”서아가 카드 받아 들며 말했다.“얼마나.”“최대 15분.”짧은 침묵.“그 안에 끝내야 합니다.”둘은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았다. 대신 계단으로 내려갔다.지하 관리구역 문이 닫히자마자, 바깥 세계가 끊긴 것처럼 조용해졌다.기계 돌아가는 낮은 소리만 바닥을 깔고 있었다.도윤이 단말기로 빠르게 다가가며 말을 꺼냈다.“지금 접속 계정 세 개입니다, 하나는 위층 검사실, 하나는 이동 중이고… 하나는 이 안에서 직접 접속 중입니다, 이 단말 라인을 건드리고 있습니다.”서아가 바로 반응했다.“여기 안에 있다고?”“네, 지금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로그 갱신 속도 봐서는 몇 초 전까지도 작업하고 있었습니다.”서아가 고개를 아주 천천히 돌렸다.“좋네, 찾을 필요 없네.”그 순간, 뒤쪽 캐비닛에서 금속 서랍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둘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으로 꽂혔다.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손에는 샘플 케이스.그는 둘을 보자마자 멈췄고,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누구십니까.”도윤이 먼저 걸어 나갔다.“관리팀입니다, 야간 점검입니다.”남자의 눈이 좁아졌다.“관리팀은 이 시간에—”서아가 그 말을 끊어버렸다.“박성우.”짧은 정적이 흘렀다.남자의 눈동자가 아주 짧게 흔들렸다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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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 관리된 아이들

총성이 멎은 뒤에도, 한동안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깨진 유리창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었고, 바닥에 쓰러진 박성우의 피가 천천히 번지고 있었다.서아는 그 장면을 그대로 보고 있었다.아까까지 살아서 말을 하고 있던 사람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바닥에 놓여 있었다.도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여기 오래 있으면 위험합니다, 추가 인원 들어오기 전에 빠져야 합니다.”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냥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봤지.”도윤이 짧게 답했다.“…네.”“저 정도면…”짧은 숨.“말도 못 하게 막는 수준이네.”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단순한 은폐가 아닙니다, 제거 기준이 명확합니다.”서아가 고개를 들었다.“‘말하려고 한 순간’ 죽었어.”짧은 침묵.“그럼…”서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우리가 지금 건드린 게 어느 정도인지 감 오지.”도윤이 조용히 답했다.“…네, 범인을 건드린 게 아니라, 구조를 건드린 겁니다.”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서아는 천천히 박성우 쪽으로 걸어갔다.쪼그려 앉아서, 그의 얼굴을 내려다봤다.눈은 반쯤 떠 있었고, 입은 끝까지 다물리지 못한 채 멈춰 있었다.“끝까지 말 안 했네.”짧은 침묵.“아니.”서아가 고개를 저었다.“못 한 거지.”도윤이 뒤에서 말했다.“…그 차이가 중요합니다.”서아가 물었다.“왜.”도윤이 한 걸음 다가왔다.“의지가 아니라 시스템입니다.”짧은 침묵.“사람이 아니라 구조에 의해 막힌 겁니다.”서아가 그 말을 곱씹듯 중얼거렸다.“…구조.”그리고 천천히 일어났다.“도윤.”“네.”“아까 걔가 한 말 기억나?”도윤이 바로 답했다.“관리 구역… 그리고 아이들.”서아의 눈이 좁아졌다.“출생을 바꿨다는 느낌 아니었어.”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바꿨다’보다 ‘나눴다’에 가까운 표현이었습니다.”짧은 침묵.서아가 말했다.“그럼 이건 단순히 누가 딸이고 가짜고 문제가 아니네.”도윤이 바로 이어받았다.“애초에 분류 기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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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 이건 사건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병원 지하를 빠져나와 차량에 올라탄 뒤에도, 아무도 바로 출발하지 않았다.엔진은 켜져 있었고, 차 안에는 미세한 진동이 흐르고 있었지만, 공기는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서아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병원 건물 외벽,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서 있는 구조물, 그 안에서 방금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평온한 풍경.도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지금까지 확보한 정보 정리하겠습니다.”서아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해.”도윤이 차분하게 이어갔다.“첫째, 샘플 조작은 단독 범행이 아닙니다, 오버라이드 권한이 필요하고, 최소 두 개 이상의 승인 라인이 존재합니다, 둘째, 실행자는 병원 내부 인력이지만, 지시 주체는 외부 혹은 상위 구조입니다, 셋째—”잠깐 멈췄다.“…입막음이 즉각적으로 실행됩니다.”서아가 낮게 말했다.“말하려는 순간 죽였지.”“네, 사후 대응이 아니라, 실시간 감시입니다.”짧은 정적.서아가 천천히 물었다.“그럼 우리도 지금 보고 있다는 거네.”도윤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가능성 높습니다.”서아가 피식 웃었다.“재밌네.”짧은 숨.“사람 죽는 거 생중계로 보는 취미라도 있나.”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침묵 자체가 답이었다.서아가 고개를 기대며 말했다.“좋아, 그럼 이제 질문 바꾼다.”도윤이 시선을 들었다.“네.”“이게 병원 일이야?”짧은 침묵.도윤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태성 일이야?”“그것도 아닙니다.”짧은 정적.“그럼 뭐야.”도윤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둘 다 포함된 구조입니다.”서아의 눈이 천천히 움직였다.“연결돼 있다는 거네.”“네.”도윤이 이어서 설명했다.“병원은 실행 기관입니다, 샘플 관리, 출생 기록, 데이터 조작… 물리적인 작업을 담당합니다, 그리고 태성 쪽은—”잠깐 멈췄다.“접근 권한과 승인 라인을 제공합니다.”서아가 바로 받아쳤다.“돈.”“네, 그리고 권력입니다.”짧은 침묵.“둘이 합쳐지면—”도윤이 말을 이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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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 구조의 균열

차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병원 지하에서 빠져나온 뒤에도, 서아와 도윤은 바로 태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태성 본관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다시 감시선 안으로 들어간다는 걸 둘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 안은 조용했지만, 그 조용함은 생각을 정리하는 정적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들어와서 오히려 말이 막히는 상태에 가까웠다.서아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병원 외벽은 멀어지고 있었고, 새벽빛이 아주 천천히 하늘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지하 관리구역의 금속 냄새와 총성이 남아 있었다.도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제 정리해야 합니다. 방금 전까지는 샘플 조작 사건을 쫓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 큰 구조가 확인됐습니다. 문제는 방향입니다. 이걸 병원 쪽에서 더 파고들지, 아니면 태성 내부부터 흔들지.”서아는 창밖을 보다가 낮게 말했다.“둘 다 해야지.”도윤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물리적으로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움직이면 노출도 같이 올라갑니다. 지금 우리 쪽이 가진 우위는 하나뿐입니다.”서아가 고개를 돌렸다.“뭔데.”도윤은 짧게 답했다.“상대가 우리가 어디까지 왔는지 확신 못 한다는 것.”짧은 침묵.“그걸 유지해야 합니다. 박성우가 죽었고, 우리가 거기 있었다는 건 이미 알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디까지 말했는지, 우리가 뭘 가져갔는지는 아직 불확실할 수 있습니다.”서아는 피식 웃었다.“그럼 더 좋네. 우리도 모르는 척하면 되잖아.”“문제는 모르는 척의 방향입니다.”도윤이 말을 이었다.“지금처럼 ‘위원회’를 안 상태로 움직이면, 상대는 금방 눈치챕니다. 우리가 박성우에게서 뭘 들었는지 확인하려 들 겁니다.”서아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도윤.”“네.”“나 아까 태준이랑 통화하면서 하나 걸렸어.”도윤이 바로 시선을 들었다.“어떤 부분입니까.”서아는 기억을 더듬듯 말을 이었다.“위원회라는 단어, 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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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 비공식 결재선

차는 태성 본관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았다.도윤이 일부러 한 블록 떨어진 지하 주차장 입구 앞에 차를 세웠다. 정문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감시선 안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걸 셋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엔진이 꺼지자, 차 안은 더 조용해졌다.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여기서부터는 말 정확히 해.”태준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뭘.”“비공식 결재선.”짧은 침묵.“아까 네가 말했잖아. 병원보다 태성이 더 빨리 지워진다고.”도윤이 바로 말을 이었다.“그리고 ‘봤다’고 하셨습니다. 직접.”태준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창밖을 잠깐 보고, 다시 시선을 내렸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공식 결재선은 다 알지. 팀 → 실 → 본부 → 회장. 근데 그거 말고 하나 더 있어.”서아가 바로 물었다.“숨겨진 라인.”“숨긴 게 아니라…”태준이 말을 고르듯 멈췄다가 이어갔다.“아는 사람만 쓰는 라인.”도윤이 낮게 중얼거렸다.“…병원 오버라이드 권한이랑 같은 개념이군요.”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비슷해. 차이가 있다면— 병원은 ‘기록을 덮는’ 권한이고, 태성은 ‘기록을 남기지 않는’ 방식이야.”짧은 정적.서아가 눈을 좁혔다.“아예 안 남긴다고?”태준이 고개를 저었다.“남아. 대신— 우리가 못 보는 데 남지.”도윤이 바로 물었다.“물리 서버 분리입니까, 아니면 오프라인 결재입니까.”태준이 말했다.“둘 다 아니야.”짧은 숨.“결재 자체가 다른 형식이야.”서아가 바로 받아쳤다.“설명해.”태준이 सीट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태성에는 공식 시스템 말고, 특정 코드로만 열리는 결재 경로가 있어. 문서 제목도 없고, 작성자도 안 뜨고, 결재자도 이름 대신 코드로만 찍혀.”도윤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로그는요.”“일정 시간 지나면 자동 삭제.”짧은 침묵.“근데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야.”서아가 물었다.“그럼 어디 남아.”태준이 말했다.“결과만 남아.”정적.도윤이 바로 이해했다.“…과정은 지우고, 결과만 남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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