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분노와 절망으로 일그러진 최주현을 내려다보며, 현신은 뼈마디가 하얗게 드러나도록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할멈······ 한비단은 본래 사람을 살리고 지키기 위한 숭고한 곳이었어.”“그런 훌륭한 곳을 너희 같은 것들이 부수려 들잖아!”억눌러왔던 울분이 현신의 가슴속에서 검붉게 타올랐다.“할멈이 그 한비단을 당신의 추악한 욕망으로 더럽혔어!”“난 그저 그 남자가 이 나라의 꼭대기에 오르길 바랐을 뿐이야! 그가 우두머리가 되어야 이 썩어빠진 세상이 바로 서는 거니까!”최주현은 주먹을 움켜쥔 채 비명에 가까운 광기를 토해냈다.“아니! 그건 세상을 위한 게 아니라, 그저 할멈 당신의 이기적인 탐욕일 뿐이야! 꼴좋네! 평생을 바쳐 믿었던 남자에게 버려지다니!”현신의 눈동자에도 붉은 광기가 일렁였다.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최주현은 발악하며 주변을 에워싼 요원들을 향해 소리쳤다.“안 되겠어! 저년을 당장 포박해! 가계영을 죽이려면 저년을 미끼로 써야 해!”죽어도 홀로 죽겠다는 서늘한 각오를 품은 현신이 요원들과 눈을 맞추었다. 이미 마음이 돌아선 요원들은 주춤거리며 현신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한 채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최주현은 제 부모를 죽이고, 갈 곳 없는 아이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것도 모자라 우리가 피 흘려 얻은 대가를 갈취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죄를 짓지 말고 도망치세요!”“시끄러워! 당장 에스를 포박하지 않으면 너희부터 총으로 쏴 버릴 거야!”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누구도 악마의 명령에 굴복하지 않았다.
오후 4시가 다다르자, 계영의 저택은 묵직한 정적 속에서 서서히 숨을 죄어오기 시작했다.지난 며칠간 그들은 이 집념의 공간에 모여 사력을 다했다. 오늘 맞이할 한비단의 진짜 흑막, 최주현의 목을 옥죄기 위한 거대한 사냥 작전이었다.“이제 마지막입니다.”“마 실장. 헬기 허가는 떨어졌나? 그리고 한비단 내부 요원들 동향은.”“예. 포섭할 수 있는 인력은 전부 회유하여 우리 쪽 편대로 돌려놓았습니다.”마 실장과 계영은 현신이 사지로 발을 내딛기 전, 마지막으로 모든 변수를 점검하고 있었다.“현신, 네 몸에 차고 있는 통신 장치, 그리고 대인 방어 무기와 비상용 소형 폭탄까지 다 너를 지켜주는 것들이니 잊지 마.”“걱정 마세요. 잘 알고 있어요.”현신은 혹시 모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전투복 안에 모기장처럼 얇은 체인메일(Chainmail) 형태의 특수 섬유 전신 방탄복을 조용히 받아 입었다.살을 파고드는 차가운 감촉이 도리어 정신을 서늘하게 깨웠다.혼자라면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할 작전이었다. 그러나 제 몸을 미끼로 악의 뿌리를 통째로 뽑아내려는 이 사냥은 어지간한 테러 조직을 궤멸시킬 법한 거대한 작전으로 번져 있었다.모든 무장을 갖춘 현신이 침묵을 깨고 계영을 향해 얕은 숨을 내쉬었다.“계영 님. 무사히 잘 다녀올 테니 너무 염려 마세요. 약속할게요.”“너는 내가 아는 가장 유능한 요원이야. 당연히 믿어. 그러니 그 약속, 반드시 지켜.”계영의 거대하고 따스한 손이 현신의 여린 손가락에 조용히 고리를 걸어왔다.단지 이것만으로 온전할 수 있을까. 밀려드는 불안감이 현신의 가슴을 할
“계영 님. 저······ 협박받았어요.”“한비단? 아니면······ 최주현?”현신은 가슴을 누르는 무거운 무게를 대신하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둘 다라고 봐야겠네요.”계영은 현신을 품에 안고 거세게 힘을 주어 끌어안아 주었다.지금 그녀가 얼마나 떨고 있었는지, 지난밤 홀로 얼마나 지독한 고통을 견뎌내야 했는지 전부 알고 있다고 다독여주는 듯, 닿아오는 손길은 눈물겹게 다정했다.“누군가를 인질로 잡고 너를 협박했겠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혼자 나오라고.”“네, 맞아요. 계영 님은 정말 다 아시네요.”“악당들 수법이야 매번 똑같으니까. 그리고 네가 혼자 나가면 그자들은 널 망설임 없이 죽일 테고.”역시 계영을 당해낼 수가 없다고 현신은 생각했다. 그가 덤덤하게 말해주니, 그토록 밤새 괴롭히던 거대한 절망조차 별것 아닌 것처럼 무색해지는 기분이었다.현신은 손을 올려 계영의 뺨을 살포시 쓰다듬었다. 아침 햇살을 가득 머금은 이 남자의 빼어난 얼굴을 눈과 마음에 담아두려는 듯, 제 쪽을 바라보게 한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계영 님, 저 좀 도와주세요.”시련과 고통을 거쳐야 사람이 성장하고, 눈물을 쏟아본 뒤에야 웃음의 가치를 비로소 깨닫는다고 했던가.차오르던 눈물 사이로, 현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계영은 별일 아니라는 듯 현신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그녀의 가슴을
보육원 도우미였던 최주현에게서 온 문자는 현신에게 거대한 충격이었다.심장이 배신감으로 온통 문드러지는 고통이 밀려왔다. 역시 효진의 말이 맞았다. 평생을 가족이라 믿었던 할멈의 존재가 부정당하면서 제 인생 전체가 뿌리째 흔들리고 말았다.어찌 사람이 이토록 사악할 수 있단 말인가.[현신 아가씨. 저 할멈이에요. 주 회장 저택 화재 때 아가씨가 정말 불에 타 엉망이 된 게 맞나요? 확실히 죽은 걸 내 눈으로 확인했어야 했는데. 이상하네요.]떨리는 손으로 문자를 읽고 또 읽었다. 심장이 찢겨나가는 통증 속에서 현신은 자신이 제대로 읽은 게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할멈! 이토록 내가 죽기를 바란 거였어?’김민철의 말대로 최주현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에 불과했다.[아가씨 이름을 빌려주던 소년 ‘이신’을 기억하시죠? 희귀 혈액형이라 수혈이 필요할 때 쓰려고 내가 데리고 있답니다. 아가씨가 오시면 병원에 보내주고, 안 오면 그냥 죽일까 하고요.]그 불쌍한 아이는 현신 자신이 한때 그토록 아끼고 돌보았던 소년이었다. 최주현은 그 아이를 인질로 잡았다는 사실을 악랄하게 털어놓고 있었다.[우리 보육원의 그 불타버린 2층. 거기로 아가씨 혼자 오세요. 2월 28일 오후 5시.]최주현은 철저히 ‘악(惡)’ 그 자체였다. 마지막까지 자신이 최악의 인간임을 입증하듯 쐐기를 박는 문자를 이었다.[절대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되는 거 알죠? 안 그러면 이신이라는 아이는 아깝지만 처리할게요. 죽도록 보고 싶은 현신 아가씨, 우리 꼭 만나요.]최주현이 남긴 메시지는 저주나 다름없었다.잠든 계영을 침실에 둔 채 나온 현신은 밤새도록 거실에서 차마 입 밖으로 소리 내지 못한 채 손으로 입을 막고 울었다.어쩐지 불길하다 했더니.&n
계영이 표정이 이렇게 어둡다니.“아직 연락이 없어.”그리고 그가 건네는 말도 결코 밝은 내용은 아니었다.강무가 혹시 위험에 처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밀려오는 현신이었다.그날 그가 계영을 배신하지 않은 덕분에 자신이 탈출할 수 있었지만, 강무의 현재 상황이 전혀 파악되지 않으니 현신의 마음은 여전히 돌덩이를 얹은 듯 무거웠다.“이탈리아 쪽 동향은 어떤가요? 한동안 잊고 있었어요.”“헤르만이 워낙 능력이 뛰어나서 모든 넘버들을 한국으로 집결시켜 놓았더라. 그쪽에서도 추가 범행을 저지르긴 힘들 거야. 나도 약간의 지원을 보탰고.”자신의 앞가림조차 바쁠 텐데 엘에프 측까지 세심히 신경 써주다니, 계영에게는 그저 고맙고 미안한 마음뿐이었다.진심으로 든든한 아군인 계영을 바라보던 현신은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그러나 과연 이것으로 다 끝난 것일까.슬프게도 현신 자신의 나쁜 예감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아직 강무도, 최주현도, 그리고 자신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을 김민철도 마주해야 했다.기운을 차리고 깨어났음에도 마음 한구석이 찝찝하고 개운치 않은 것은, 앞으로 다가올 더 큰 폭풍우를 암시하는 듯했다.***그날 늦은 오후, 계영의 초대로 무휼과 시온이 펜트하우스를 방문했다. 시온은 목발을 벗고 조금 절뚝거리면서도 제법 안정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무휼아! 시온아!”“흑, 현신아!”“오랜만이다.”시온은 곧장 다가와 현신을 꼭 안아주었고, 무휼은 현신의 어깨를 무뚝뚝하게 툭 치며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그리고 가계영을 향해 예의 바르게
현신은 팽팽하게 조여 있던 긴장이 풀린 탓인지 다음 날부터 몸 상태는 가파르게 나빠졌다.며칠 내내 혹독한 몸살과 열감기를 앓았고, 계영은 가슴을 졸이며 주치의를 펜트하우스로 불러 직접 치료받게 했다.계영은 한시도 현신의 곁에서 멀어지지 않은 채 그녀를 돌보았고, 필요한 업무는 서재에서 화상 회의로만 소화했다.오늘은 거실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펼쳐두고 상황을 점검 중이었다.“마 실장, 여렌은?”-네. 하루가 다르게 건강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용의자도 특정해 냈습니다.“다행이군! 그래서?”계영은 드디어 흩어졌던 사건의 조각들이 하나로 맞물려 간다는 생각에 마동현 실장의 이어질 보고를 기다렸다.경찰청 내부까지 유유히 침투해 여렌을 습격하고 달아난 자가 누구인지, 이제 잡아들이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네. 그 최주현이라는 자가 직접 경찰서로 찾아와 여렌을 찌르고 도주했다고 합니다.“이런, 빌어먹을!”인간의 탈을 쓰고 금수만도 못한 짓을 저지르다니.최주현의 악행은 도대체 어디가 끝인지 화가 치밀어 올라, 계영의 입에서는 참았던 욕설이 터져 나왔다.“목격자인 최 경감은?”-한규련 사장님 측 김 비서 일행이 밀착하여 증인 보호 중입니다.“이제 김민철과 최주현을 법정에 세울 일만 남았군.”-물론입니다. 그동안 수집한 증거와 증인 확보까지 완벽히 끝났습니다.계영은 마 실장에게 외부 활동을 일임하고, 자신은 현신을 보호하기 위해 외출을 철저히 삼갔다.통화를 마친 계영은 침실로 향해 여전히 누워 있는 현신의 안색을 살폈다. 기척을 느낀 현신이 천천히 눈을 뜨더니, 제 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을 확인하
죄를 지었냐고.현신은 너무 많은 죄를 지어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또 거짓말을 하는 수밖에.“···아니요.”“풋, 귀엽게!”“살면서 죄 안 짓는 사람 없다. 거짓말도 죄지.”현신이 입술을 달싹이며 작게 말하자, 한규련과 김강무의 입가에 그 모습이 귀엽다며 옅은 미소가 번졌다.대기업 본사의 로비는 굵직한 해외 파트너사들과의 미팅 준비로 소란스러웠으나, 소파에 모여 앉은 이 세 남자는 마치 다른 시간대 위에 서 있는 사람들처럼 여유로웠다.지나가는 직원들이 사장과 그 거물급 친구들의 등장에 놀라 시선을
3월의 끝자락, 창밖의 공기는 여전히 냉소적이었으나 사무실 안은 화이트칼라들이 뿜어내는 기묘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서류 더미가 스치는 소리, 키보드 두드리는 소음 사이로 현신의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제안서 복사 끝났습니다, 최 대리님!”“어이, 알바생! 여기 오타 좀 확인해 봐.”“예, 갑니다!”현신은 기계적으로 발을 놀렸다.지금 그녀가 걸친 헐렁한 셔츠와 알바생이라는 가명은 정체를 감추기 위한 완벽한 껍데기였다.현신은 구석진 제 책상에 앉아 엘리트들이 내놓은 오만한 종이 뭉치들을 넘겨보았다. 무미건조한 숫자와
이무휼은 현신만 생각하면 미안하고 너무 무모해 스스로에게 화만 났다.“그 자식, 이제 갈 곳도 마땅치 않을 텐데······.”자신은 서시온을 돌봐야 했기에 가장 위험한 활동은 현신 혼자 보냈기 때문에 자괴감만 들었다.“우리 집이 너무 좁아서 안 오는 걸까? 아니면 혹시 뒤라도 밟힌 건가?”“임무 끝나면 원래 철저하게 몸 숨기는 녀석이니까······.”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 앉았음에도 현신에 대한 걱정 때문에 선뜻 수저를 들지 못했다. “내가 다쳐서··· 현신이가 힘든 임무는 혼자 다 도맡아 하는 것 같아.”서시온의 자
현신의 가느다란 손끝이 수치심과 분노로 부르르 떨려왔고, 그녀는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막으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오토바이를 몰아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가계영이 남긴 압도적인 잔상 때문인지 발끝이 바닥에 접착제라도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진짜. 살다 살다 이토록 황당하고 억울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더니, 제 땅에 발을 들이고도 도리어 침입자 취급을 당하는 현실에 현신은 기가 찼다. 마동현 실장이 무심하게 펜을 돌리며 턱을 괴고 그녀를 응시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