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남편은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Chapter 151 - Chapter 160

179 Chapters

151화

음날 아침, 흙먼지가 매섭게 몰아치는 칼날 협곡.거대한 진군 나팔 소리가 대지를 찢듯 울려 퍼졌다.“시작이구나.”블랑은 전장이 아득하게 내려다보이는 후방의 고지대 막사 입구에 섰다.“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기세네.”서연합의 방어선을 향해 해일처럼 쏟아져 내리는 드라켄의 철기병들을 보고 있으니 척추를 타고 전율이 흘렀다. 그리고 그 선두에서 적의 진형을 무자비하게 유린하는 자는 다름 아닌 카시안이었다.서연합이 악착같이 짜 올린 창병들의 방어선은 카시안의 검기가 한 번 번뜩일 때마다 얄팍한 종잇장처럼 우습게 찢겨 나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잔혹하고도 유려한 궤적이었다.핏물이 솟구치는 아비규환의 한복판. 오직 적의 목을 치며 나아가는 황제의 움직임만이 기묘할 정도로 고요하고 비현실적이었다. 그것은 전술이나 전투라기보다,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준비된 도륙에 가까웠다.현장을 응시하던 블랑은 천천히 시선을 거두고 제 손에 들린 양피지를 매만졌다.새벽녘, 나른한 정사 끝에 카시안이 직접 황실의 인장을 찍어 하사한 아르센 포로 처분권이었다.[황궁으로 돌아가면 제 거처를 새로 꾸미고 싶어요. 아르센의 포로들을 제게 주세요. 에다를 보니 아르센 사람들이 시중을 꽤 잘 들더라고요. 게다가 폐하께서 주신 권력을 누려보고 싶기도 하고요.]탐욕을 속삭였을 때, 카시안은 기꺼운 실소를 터뜨리며 흔쾌히 응했었다.블랑은 막사 뒤편의 짙은 그림자 속에 묵묵히 대기하던 카일을 향해 입을 열었다.“카시안의 시선은 완전히 전방으로 쏠렸어요. 놈들이 협곡 입구에서 발이 묶인 지금이 유일한 기회예요.”그녀의 나직한 명령에 카일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수용소로 가서 아르센의 백성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거두세요. 목적지는 대륙의 법망이 닿지 않는 무법지대, 자유 항구 타르타스입니다.”타르타스.돈과 폭력만이 유일한 규칙인 거친 용병들의 집결지.정규군이 함부로 개입할 수 없는 그곳이야말로 굶주린 난민들을 대규모로 숨겨두고 은밀히 세력을 키우기에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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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화

엘런은 험준한 능선의 그림자를 타고 올라, 고지대 막사 주변의 동태를 살폈다.‘호위 하나는 제대로 깔아 놨군.’엘런의 시선이 막사를 에워싼 기사들의 면면에 닿았다. 흠집 하나 없는 칠흑의 흉갑, 산 아래의 아비규환 속에서도 곁눈질 한 번 하지 않는 단호한 눈빛과 완벽한 호위 진형.척 보기에도 카시안의 친위대 중에서도 최정예병만 추려 이곳에 박아둔 것이 뻔했다.‘그래, 믿는 구석이 있어서 혼자 뒀다는 거지.’파리 새끼 한 마리 접근할 수 없는 촘촘한 경계였지만, 엘런은 조급해하거나 초조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혀를 내어 마른 입술을 축이며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발밑만 완벽하게 틀어막으면 뭐 하나. 진짜 괴물들은 머리 위에서 떨어질 텐데.’조금 전, 무거운 철창이 열릴 때 엘런은 똑똑히 보았었다. 피비린내를 맡고 미쳐 날뛰는 이형의 괴물들 사이로,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던 놈들이 섞여 있었던 것을. 사방에 진동하는 피비린내에 자극받은 놈이 엉뚱한 고지대 쪽으로 날아오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와라, 단 한 마리면 충분해.’아무리 철저하게 훈련받은 최정예 기사들이라 한들, 이성 없는 짐승이 하늘에서 기습해 내려오는 돌발 상황까지는 통제하지 못할 터였다. 놈들의 완벽한 진형이 흐트러지는 아주 짧은 찰나. 엘런에게는 그 한순간의 사각지대면 충분했다.그의 음습한 예측은 오래지 않아 완벽하게 들어맞았다.끼에에엑-!고막을 찢을 듯한 기괴한 괴성과 함께, 절벽 아래 짙은 흙먼지를 뚫고 흉측한 날개를 단 비행 마수 한 마리가 고지대를 향해 솟구쳐 올랐다.거대한 그림자가 막사 위로 드리워지자, 요지부동이던 호위 기사들의 진형이 일순간 거칠게 출렁였다.“전원 발도! 마수가 막사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라!”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 마수를 베기 위해 전방으로 거칠게 쇄도했다. 마수가 뿜어내는 독기와 흙먼지가 고지대의 시야를 완벽하게 차단한 바로 그 찰나.엘런은 막사 뒤편의 헐거운 천막 틈으로 유령처럼 스며들었다.막사 안.블랑은 밖에서 들려오는 기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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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화

같은 시각, 협곡 뒤편 깊숙한 곳에 자리한 서연합의 포로 수용소.“이 짐승만도 못한 새끼들이! 전방 방어진이 뚫리게 생겼는데 빨리빨리 수레를 끌지 못해!”채찍이 허공을 가르는 파열음과 함께, 어른 허벅지만 한 쇳덩이와 방어용 철목(鐵木)을 나르던 앙상한 노인 하나가 흙바닥에 고꾸라졌다. 서연합 감시병들이 낄낄거리며 쓰러진 노인의 등을 군화발로 짓밟으려던 찰나였다.콰직-!벼락처럼 쏘아져 내린 거구의 흑마가 그대로 감시병의 상반신을 짓뭉개버렸다.“뭐, 뭐야! 쿨럭!”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흑마 위에서 도약한 카일의 묵직한 대검이 은빛 궤적을 그리자, 주변에 서 있던 감시병 네 명의 목이 일제히 허공으로 솟구쳤다.카일의 거대한 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고막을 찢는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검기가 닿은 곳은 뼈와 살이 잘리는 것을 넘어, 겹겹이 덧댄 갑주째로 무참하게 뜯겨 나갔다.전투가 아닌 한 치의 자비도, 군더더기도 없는 도살에 가까웠다.불과 수 분 만에 수용소는 짓이겨진 쇳덩이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붉은 잔해들로 끔찍한 진창을 이루었다.점점이 튄 핏방울을 털어낸 카일이 거친 숨을 내쉬며 돌아섰을 때, 아르센의 유민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카일이 입고 있는 낯선 용병의 무구를 본 그들은 바들바들 떨며 서로를 끌어안았다.“이번엔 드라켄인가?”“우릴 또 어디로 끌고 가려고……!”서연합에서 벗어났다 한들, 나라 잃은 그들에게는 그저 주인이 바뀌는 것에 불과할 터였다. 누구도 섣불리 나서지 못하고 절망 어린 눈으로 카일을 올려다보았다.침묵하는 유민들을 내려다보던 카일의 눈동자가 일순간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수없이 배신당하고 짓밟혀 온 저들에게 필요한 것은 얄팍한 동정이 아니라, 절대적인 맹목(盲目)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카일은 흑마에 올라타며 억눌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너희를 해치러 온 것이 아니다. 타르타스, 새로운 땅으로 안내하러 왔다.”그러나 달콤한 구원의 말에도 유민들은 선뜻 발을 떼지 못했다. 앞줄에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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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화

역겨운 약초 냄새.블랑은 찌르는 듯한 두통과 함께 천천히 의식을 끌어 올렸다.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리자, 거대한 마수의 가죽이 치렁치렁하게 매달린 막사의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손발은 굵은 밧줄로 단단히 결박되어 있었다. 바닥에는 값비싼 모피가 여러 겹으로 깔려 있었으나, 안락함이나 따스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그리고, 흐릿했던 시야가 완전히 초점을 맞춘 순간.“드디어 깨어났나?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로제!”가장 먼저 블랑의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촛불의 일렁임 속에서 기괴하게 번들거리는 사내의 면상이었다.본래라면 꽤나 수려하고 곱상했을 미남의 얼굴. 그러나 오른쪽 이마부터 뺨을 가로질러 턱끝까지, 사내의 얼굴에는 반을 쪼개놓을 듯 길게 그어진 흉측한 검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단검에 깊게 베여 나간 궤적을 따라, 검붉은 살점이 지렁이처럼 두툼하고 기괴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멀쩡한 반쪽 얼굴의 미모마저도 단숨에 악귀처럼 보이게 만드는 상흔이었다.블랑의 시선이 사내의 얼굴에 닿는 순간, 마취의 여파로 몽롱했던 그녀의 머릿속이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서늘하고 기민하게 식어 내렸다.‘역시, 엘런이었어. 그때 얼굴이 아니라 목을 노려야 했는데.’블랑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서릿발 같은 살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눈동자의 초점을 흩트리며, 가녀린 어깨를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로, 로제라니요……? 사람을, 흐윽, 착각하신 것 같아요.”결박된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블랑은 커다란 눈망울에 그렁그렁한 눈물을 매달았다. 겁에 질려 파랗게 질린 입술이 애처롭게 달달 떨렸다.“제 이름은 블랑이에요……. 당, 당신…… 누구죠?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뭐?”엘런의 흉터투성이 눈썹이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그러나 블랑은 그에게 생각할 틈조차 주지 않고, 우둔하고 허영 가득한 여인의 밑바닥을 천연덕스럽게 연기해 냈다.“도, 돈을 원하시는 거라면 폐하께서 얼마든지 주실 거예요! 폐하께선 저를 아주 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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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화

“뭐야, 형!”“그 손 당장 내려.”군화 소리를 내며 막사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온 벨모어는 엘런이 치켜든 단검을 싸늘하게 노려보며 매몰차게 혀를 찼다.“사적인 감정 때문에 더 이상 일을 그르치지 마.”“형님! 하지만 이년의 낯짝을 보면……!”“그 여자가 네 원수든, 그저 닮은 년이든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아.”벨모어는 엘런의 항변을 단칼에 자르며, 바닥에 웅크린 블랑을 내려다보았다.“중요한 것은, 이 계집 하나 때문에 드라켄의 황제가 다 이긴 전쟁을 멈추고 군대를 물렀다는 거다.”“……칫.”엘런은 분통이 터지는 듯 흉터투성이 뺨을 일그러뜨렸으나, 형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억지로 단검을 거두어들였다.그 서슬 퍼런 형제의 대화가 오가는 사이.결박된 등 뒤로 언제든 엘런의 목을 찌르기 위해 근육을 수축시키고 있던 블랑은, 슬그머니 손아귀의 힘을 풀며 다시 가녀린 어깨를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카시안이…… 나 하나 때문에 전면전을 포기했다고?’실질적인 서연합의 지휘관, 벨모어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확실한 정보였다.승리와 이득을 저버리지 않는 냉혹한 군주. 그런 그가 압도적인 승리를 목전에 두고, 고작 자신을 살리기 위해 제국군의 진군을 멈췄다니.블랑의 머릿속이 일순간 멍해졌다.아르센의 황후라는 자리에 있을 때조차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맹목적인 비호였다.‘그저 유희가 아니라, 진심이었나. 어쩌면…… 그때 죽지 말고 그의 곁으로 가는 게 더 나은 선택이었을까.’블랑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뻐근하게 번져나가는 기묘한 전율을 남몰래 삼켜냈다. 황좌의 영광조차 기꺼이 내던진 그 남자의 거대한 무게감이 새삼스럽게 심장을 두드렸다.‘아니! 스스로 서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니야.’카시안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구하러 올 것이다. 하지만 블랑 역시 이대로 얌전히 그의 발목을 잡는 가련한 인질로 남아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좋아, 카시안. 파트너로서의 신뢰는 완벽하게 합격이야.’고개를 푹 숙인 채 훌쩍이는 블랑의 은회색 눈동자가 차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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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화

습하고 무거웠던 막사 안의 공기가 일순간 기묘하게 멈춰 섰다.벨모어는 내려다보던 자세 그대로였지만 입가에는 비스듬한 호선이 그려졌다.“……하하하핫!”마침내 벨모어의 입에서 낮고 서늘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건 비웃음이 아니었다. 뜻밖의 유희거리를 찾아낸 듯, 내리깔린 그의 차가운 눈동자에 서늘하고도 짙은 흥미가 번들거리고 있었다.“형님……?”“그 칼 좀 치우라고, 엘런.”당황한 엘런이 단검을 쥔 채 멍청하게 되물었으나, 벨모어의 시선은 오직 블랑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가진 것 하나 없는 포로 주제에, 황제의 목줄을 쥐고 흔들 테니 내 옆자리를 내놓으라……. 참으로 불쾌하고도 매력적인 제안이군. 하지만 널 뭘 믿고 내 판에 끼워주지?”“제가 카시안의 유일한 약점이라는 사실만으로 충분하지 않나요? 당신 동생보다는, 제가 훨씬 가치 있을 텐데요.”블랑은 엘런을 향해 턱짓하며 얄밉게 속삭였다. 엘런의 흉터투성이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이 년이 감히……!”“엘런.”벨모어의 일갈이 막사 안을 쩡하게 울렸다. 단 한마디였으나, 엘런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압박에 짓눌린 듯 이를 뿌득 갈며 움직임을 멈췄다.“이 여자는 네깟 놈의 사사로운 복수심에 희생시키기엔 패가 너무 아까워.”벨모어가 손짓하자, 막사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서연합의 정예병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바닥에 결박되어 있던 블랑의 양팔을 우악스럽게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형님! 설마 저 요망한 년의 헛소리에 넘어가신 겁니까!”“저 입술에서 나오는 것이 헛소리일지 아닐지는, 내가 직접 내 막사에서 확인하겠다.”벨모어는 엘런의 항변을 벌레 쫓듯 무시하며, 포박된 블랑을 향해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모셔라. 오늘부터 이 여자는 내 귀한 손님이 될 테니.”벨모어의 명령이 떨어지자, 블랑의 팔을 거칠게 쥐고 있던 병사들이 흠칫 놀라며 손을 떼고 길을 내어주었다.여전히 손발이 굵은 밧줄에 결박된 상태였지만, 블랑은 등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당당히 턱을 치켜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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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화

짙은 바닷바람에 싸구려 에일 맥주와 피비린내가 훅 끼쳐왔다. 돈과 폭력만이 유일한 법인 무법 항구, 타르타스.[잘 들어, 에다. 카일이 아르센의 난민들을 데리고 온다면 내 계획은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그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너도 나를 버려야 해.]에다는 블랑이 남긴 말을 곱씹으며 오늘도 항구로 나섰다.“폐하를 다시 저버리는 일은 없어.”바닷물이 철썩이는 안개 낀 해안가. 에다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칠흑 같은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자박, 자박.왁자지껄한 항구의 소음을 뚫고, 무겁고 기괴한 발소리들이 안개 낀 부두 쪽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왔다!”망루를 지키던 용병 하나가 다급하게 소리치자, 에다가 횃불을 치켜들고 뛰어나갔다. 그러나 붉은 불빛이 어둠을 걷어낸 순간, 무기를 쥐고 있던 에다의 손이 툭, 아래로 떨어졌다.“세상에…….”안개를 뚫고 항구의 끄트머리로 걸어 들어온 자들의 몰골은 처참했다.뼈만 남은 앙상한 몸, 족쇄에 긁혀 짓무른 발목. 드라켄의 수용소에서 도살당할 날만 기다리던 아르센의 유민들이, 유령처럼 이 거친 항구의 바닥을 밟고 있었다.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 주저앉아 오열하는 유민들. 그리고 에다의 시선은 그들 맨앞에 서 있는 한 사내의 거대한 등 위로 꽂혔다.“…….”그것은 사람의 형상이라기보다는, 핏덩이로 뭉쳐진 한 자루의 부러진 검 같았다.온몸이 베이고 찢겨나간 끔찍한 상처투성이임에도, 사내는 쓰러지지 않은 채 묵묵히 백성들의 맨앞에 서 있었다. 그의 널따란 등에는 걷지 못하는 노인과 아이가 번갈아 업혀 있었다.가면 사이로 길어져 나온 금발이 피에 젖어 있었고, 그 처참한 몰골 속에서도 형형한 금빛 눈동자만이 번들거렸다. 그 압도적인 살기에, 산전수전 다 겪은 타르타스의 용병들조차 흠칫하며 뒷걸음질을 쳤다.‘일단 시키는 대로 오긴 했는데…….’카일은 쩍쩍 갈라진 입술을 비틀며 눈앞의 무리를 기민하게 훑어내렸다.블랑이 남긴 그 한마디에 죽을힘을 다해 수용소를 뚫고 나왔다. 하지만 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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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화

“당신, 대체 정체가 뭡니까.”그녀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어떻게 저들에게 여왕의 이야기를 한 거죠? 블랑 백작님께서는 분명히… 당신이 이곳에 무사히 도착하고 나면, 그때 당신과 백성들에게 당신의 진짜 정체를 밝히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에다의 날 선 추궁에도 카일은 덤덤했다. 그는 거대한 어깨를 무심하게 으쓱해 보였다.“그 여자가 황후인지 백작인지는 내 알 바 아니지. 하지만 그 여자가 내게 직접 자신의 나라를 세우겠다고 말했으니, 당연히 여왕이 아닌가?”“……예?”“난 저들에게 로제라는 이름이나, 황후라는 칭호 따위는 단 한 번도 입에 담은 적이 없다. 단지 우리의 여왕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했을 뿐.”카일의 덤덤한 대답에 에다는 말문이 막혔다.그러고 보니 방금 전 그 여인의 말도 그랬다. [우리의 여왕께서 오실 거라고 하셨다]고. 카일은 로제 황후의 진짜 정체를 알아서가 아니라, 그저 블랑이 내뿜던 패도를 보고 그녀를 스스로 여왕이라 칭했을 뿐이었다.자신의 오해를 깨달은 에다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사과드리겠습니다. 일이 일이니만큼 제가 너무 예민해져 있었군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에다는 피가 묻은 카일의 몸을 보며 안타까운 얼굴로 덧붙였다.“어서 치료소로 가시지요. 그 몸으로 여기까지 오신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당장 상처를 꿰매지 않으면…….”“아니.”카일이 말라서 갈라진 입술을 열어 그녀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나는 다시 돌아가야 한다.”“예? 돌아가다니요! 그 몸을 하고 대체 어디로……!”“오면서 드라켄 제국군의 퇴각 나팔 소리를 들었다.”카일의 금빛 눈동자가 어두운 밤바다 건너편을 향해 번뜩였다.“다 이긴 전쟁을 코앞에 두고 황제가 군대를 물렸다. 그 여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이겠지.”그 말을 끝으로 카일은 조금 전 자신이 걸어왔던 칠흑 같은 안개 낀 부두를 향해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카일님……!”에다는 차마 그를 붙잡지 못한 채, 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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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화

며칠째, 블랑은 벨모어의 묵인 아래 막사 주변을 거닐며 진영의 공기를 기민하게 읽어내고 있었다.“미친 짓이지. 드라켄 황제가 돌연 군대를 물렸는데도, 2황자 전하께선 고작 제 아내 하나 되찾겠다고 이 전선을 유지해야 한다며 발악이시잖아.”“쉿, 입조심해. 그래도 벨모어 전하의 동복형제이신데.”“에잇, 뭐 어때. 이제 두 분 사이도 예전 같지 않던데. 이러다간 연합에 속한 다른 제후들이 치고 올라오는 것도 시간문제겠어.”“그래서 1황자 전하께서 이 전쟁의 선봉을 자처하신 거 아니겠어? 이번 기회에 기어오르는 동맹국들까지 아주 완벽하게 발아래 두시려고 말이야.”화려한 막사 뒤편, 매캐한 연기 너머로 병사들의 은밀한 험담이 흘러들었다.블랑은 조용히 걸음을 늦춘 채, 그간 수집한 정보의 조각들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짜 맞추었다.서연합에는 이미 보이지 않는 금이 가고 있었다. 엘런의 독단에 지친 군부와 제후들, 그리고 이 기회에 그들 모두를 짓누르고 온전한 권력을 틀어쥐려는 벨모어.블랑은 그 권력의 균열을 파고들 완벽한 타이밍이 바로 지금임을 직감했다.발길을 돌려 막사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가볍게 걸음을 멈추었다.화려한 양탄자 중앙, 묵직한 체스판이 놓인 테이블 상석에는 진영의 진짜 주인인 벨모어가 비스듬히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블랑은 당황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그녀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제 몫으로 놓인 찻잔을 우아하게 매만졌다.“포로 치고는 참으로 대단한 배짱이군. 적장의 한가운데를 마당처럼 돌아다니는 것도 모자라서 이토록 여유롭게 차를 들이켤 줄이야.”자신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블랑의 태도에, 벨모어가 흥미진진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블랑은 소리 없는 미소를 지으며 체스판의 백색 퀸(Queen)을 가볍게 쥐었다.“제가 포로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전하께서도 저를 제국의 군대를 멈춘 열쇠쯤으로 대우해 주셔야 수지타산이 맞지 않겠습니까.”“……오만한 입술이로군.”그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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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화

막사 밖은 이미 살얼음판 같은 긴장감으로 휩싸여 있었다.벨모어와 블랑이 소란의 진원지로 걸음을 옮겼을 때, 진영 한가운데에는 꼿꼿하게 선 드라켄의 사절단과 분노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거리는 엘런이 대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낯빛이 창백하게 질린 타티아나가 서 있었다.“카시안 황제 폐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서연합 제 2황자 전하의 부인을 무사히 돌려보내셨습니다. 약조하신 대로, 제국의 블랑 백작을 넘겨받고자 합니다.”사절의 흔들림 없는 선언에 엘런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자비? 하! 이제 제게 쓸모가 없어진 헌신짝을 던져주고는, 내 패를 내놓으라고? 카시안은 내가 그딴 얄팍한 수에 속아 넘어갈 거라 생각하더냐!”“전하. 폐하의 뜻을 모욕하신다면…….”“닥쳐라! 적진 한가운데로 기어들어 온 주제에 감히 주둥이를 놀려? 당장 저 놈들의 목을 쳐서 드라켄의 막사로 던져버려라!”엘런이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허리춤에서 은빛 권총을 뽑아 들었다.철칵-.정교한 기계 장치가 맞물리는 서늘한 금속음과 함께, 총구가 사절의 미간을 정확히 겨누었다. 손가락 하나만 당기면 당장이라도 사절의 뇌수가 터져나갈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그러나 엘런의 손끝에 힘이 들어가려던 찰나, 묵직한 검집 하나가 튀어나와 엘런의 손목을 강하게 내리쳤다.탕-!!총구가 위로 튕겨 오르며 굉음과 함께 허공으로 오발탄이 날아갔다. 매캐한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가운데, 엘런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서연합 소속의 노장(老將)이었다.“전하, 총을 거두십시오! 아무리 전시라 해도 사절을 해치는 것은 대륙의 불문율을 어기는 짓입니다. 연합의 명예를 깎아내리고 동맹국들의 비난을 어찌 감당하시려고 이러십니까!”“비켜라! 저놈들은 적이다!”“명분을 잃으면 전쟁에서도 지는 법입니다. 부디 이성을 찾으십시오!”주변의 장교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엘런의 앞을 가로막자, 엘런은 분통이 터진 듯 짐승 같은 괴성을 내질렀다.사절단이 빈손으로 물러서지도, 그렇다고 총을 든 광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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