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남편은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Chapter 171 - Chapter 179

179 Chapters

171화

검은 안개 숲을 등지고 모습을 드러낸 타르타스는, 대륙의 법망이 닿지 않는 무법지대답게 거칠고도 기묘한 활기로 들끓고 있었다.저 멀리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드넓은 항구에는 국적을 알 수 없는 무역선들이 빽빽하게 정박해 있었고, 성벽 안쪽의 상업지구에는 날 선 무기를 찬 용병들과 각국의 대상인들이 뒤엉켜 욕설과 흥정을 주고받았다. 오직 돈과 칼끝만이 법을 대신하는 약육강식의 도시였다.로제와 레온이 도시 중심부의 가장 거대한 석조 요새로 걸음을 옮기자, 성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단정한 복식의 레녹과, 그 곁에서 초조하게 손을 모으고 있던 에다였다.“생각보다 걸음이 빠르셨군요, 여왕님.”가장 먼저 다가와 우아하게 예를 갖춘 것은 레녹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반가움으로 빛났다.“그런데 이쪽은…….”레녹의 시선이 자연스레 로제의 반걸음 뒤에 서 있는 거구의 사내에게로 향했다. 위압적인 체격과 행색만 봐서는 드라켄에서부터 그림자처럼 그녀를 따르던 호위병, 카일이 분명했다. 하지만 가면을 벗은 얼굴이 예상과 전혀 달랐다.‘분명 얼굴이 흉측하다고 했는데…….’흉측하기는커녕, 햇빛을 받아 타오르는 듯한 황금빛 머리카락 아래로 조각처럼 수려하고도 서늘한 이목구비가 드러나 있었다. 게다가 눈동자를 번뜩이며 사내의 몸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저 막대한 마력의 파장은, 도저히 사람이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로제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실제 얼굴은 처음 보죠? 카일이에요. 얼굴이 흉측하다는 소문은 조금 과장되었을 뿐이랍니다.”로제가 태연하게 그를 카일이라 소개하자, 레녹은 내심 혀를 내두르면서도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그의 등 뒤에서 뒤따라오던 에다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마마, 무사하셔서 정말…… 앗.”반갑게 달려오던 에다가 로제의 곁에 선 사내의 민얼굴을 마주하고는 숨을 삼키며 흠칫 걸음을 멈췄다. 눈부신 금발과 차가운 금빛 눈동자. 가면에 가려져 있던 과묵한 용병 카일의 정체가 다름 아닌 레온이라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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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화

“하!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말은 백번 옳소! 하지만 어째서 그 왕좌의 주인이 당신이어야 한단 말이오!”상단주가 식은땀을 닦으며 턱을 치켜들었다.“이 타르타스의 부를 일구고 용병들을 먹여 살린 건 내 금고에서 나온 황금이오! 나라를 세운다면 당연히 돈과 상권을 가장 많이 쥔 내가 왕이 되어야지, 빈손으로 굴러들어온 여인이 무슨 자격으로 왕좌에 앉겠다는 거요!”로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그래서, 그 잘난 금고 속의 황금이 당장 코앞까지 몰려온 드라켄의 대군도 막아주나?”“그, 그건……!”“카시안의 시퍼런 칼끝 앞에서도 금화 자루를 흔들며 목숨을 구걸해 보시지 그래?”정곡을 찔린 상단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발악하듯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그, 그럼 당신은 무슨 수로 그 괴물 같은 카시안 황제의 침공을 막아내고 우리 상권을 지켜준단 말이오! 저 뒤에 서 있는 호위 한 명으로 드라켄의 대군을 상대할 셈이오?!”바로 그 순간이었다.벌컥-! 회의실 문이 열리며, 외곽 망루를 지키던 정찰병이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뛰어 들어왔다.“보, 보고드립니다! 검은 안개 숲 입구에 도착한 드라켄의 선봉대가…… 숲속에서 쏟아져 나온 마수 군단에 가로막혀 완전히 고립되었습니다!”“뭐라?! 마수들이 군대처럼 움직여 드라켄 군을 막아섰다고?”상단주들과 용병단장들이 경악하며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멍하니 벌어진 그들의 입을 보며, 로제가 미소를 피워 올렸다.“내가 왜 너희의 여왕이 되어야 하는지 물었나? 저 검은 안개 숲의 마수들을 내 사냥개로 부릴 수 있다는 조건 하나면, 대답이 되었을 텐데.”회의실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로제는 탐욕과 경외로 흔들리는 상단주들의 눈을 똑바로 꿰뚫어 보며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지금까지 너희는 저 마수들이 두려워 내륙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오직 저 좁아터진 항구 무역에만 매달려 피 터지게 싸웠겠지. 하지만 내 아래로 들어와 하나의 나라가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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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화

대회의실의 육중한 철문이 닫히고, 복종을 맹세한 상단주들과 용병단장들의 발소리가 복도 너머로 멀어졌다. 눈치 빠른 레녹까지 가볍게 목례를 올린 뒤 자리를 비우자, 드넓은 회의실 안에는 마침내 로제와 레온 단둘만이 남았다.숨 막히는 정적을 먼저 깬 것은 레온이었다.“……설명해 봐, 로제.”우뚝 서 있던 레온이 성큼성큼 단상 위로 걸어 올라와 로제의 앞에 섰다. 꽉 쥔 그의 두 주먹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눈동자에는 배신감과 혼란이 거센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이게 대체 다 무슨 짓이지? 성문 앞에서 날 카일이라 부른 것도, 저 드라켄의 귀족 놈이 이곳에서 너를 여왕으로 추대할 준비를 마쳐 놓은 것도…… 전부 언제부터 계획한 거야?”레온이 타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으며 로제의 가녀린 어깨를 붙잡았다.“분명 동굴에서 나와 약속했잖아. 이곳으로 와서 아르센을 재건하고, 우리의 왕국을 다시 세우자고! 그런데 너 혼자 새로운 왕좌에 앉겠다니, 그럼 나와 아르센은 네게 대체 뭐였던 거지?”상처 입은 짐승처럼 구는 레온을 올려다보던 로제가,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어깨를 잡은 그의 손목을 매정하게 떼어냈다.“우리의 왕국이라니, 아직도 꿈에서 덜 깼나 보네요, 레온.”“……뭐?”“아르센이 무너지던 날, 내 몸을 미끼로 던져 당신의 목숨을 살렸어요. 그걸로 황후로서의 내 의무도, 당신과 나의 인연도 전부 끝난 거예요.”차갑게 선을 긋는 목소리에 레온의 숨이 턱 막혔다.“인연이…… 끝났다고?”“그래요. 이 타르타스는 당신이 아니라 내가 목숨을 걸고 적진에서 굴러가며 쟁취한 땅이에요. 그런데 내가 왜 빈손으로 굴러들어온 망국의 황제에게 내 왕좌의 절반을 내어주어야 하죠?”로제가 왕좌에서 일어나 레온의 턱 끝까지 바짝 다가섰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서늘한 눈동자가 핏기가 가신 레온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나와 다시 대등하게 서고 싶나요? 그렇다면 내 치맛자락을 붙잡고 따질 게 아니라, 당신 혼자 힘으로 아르센을 되찾아서 일국의 황제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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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화

같은 시각, 타르타스의 국경을 가로막은 검은 안개 숲 초입.콰아아앙-! 크아아아악!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속에서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었다.“사, 살려줘! 괴물이다!”“대열을 유지해라! 창병대, 앞으로…… 크아악!”기세등등하게 숲으로 진격했던 드라켄의 선봉대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도륙 당하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그림자 늑대들이 병사들의 목덜미를 물어뜯었고, 집채만 한 갑피 괴수가 내뿜는 산성 독기에 중장갑 기사들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녹아내렸다.단순히 영역을 침범당해 날뛰는 야생 마수들이 아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지휘관의 통제를 받는 정예 군단처럼, 마수들은 드라켄 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조직적으로 숨통을 조여 오고 있었다.서걱-! 푸화아악!그 아비규환의 한복판에서, 카시안이 시커먼 심연의 흑기를 휘감은 검으로 달려드는 키메라의 목을 단숨에 베어 넘겼다.시뻘건 마수의 피를 뒤집어쓴 카시안의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는 마수들의 몸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낯익은 황금빛 마력의 잔재를 느끼고는 이를 갈았다.‘레온……! 감히 드래곤의 힘으로 숲의 마수들을 복속시켜 내 앞길을 막아?’눈앞의 괴물들이 움직이는 방식은 명백히 타르타스로 향하는 길을 봉쇄하기 위한 방어 진형이었다. 즉, 이 숲 너머에 로제와 레온이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도 했다.“폐, 폐하! 더 이상의 진격은 무리입니다!”피투성이가 된 부관이 말을 몰아 카시안의 곁으로 다가오며 절규했다.“안개 때문에 방향조차 잡을 수 없는데, 숲 전체의 마수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본대까지 전멸합니다! 일단 숲 밖으로 퇴각해 전열을 재정비하셔야……!”부관의 절규에 카시안의 붉게 충혈되었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그의 시선이 안개 속에서 마수들에게 처참하게 물어뜯기면서도, 황제의 명을 받들기 위해 끝까지 사투를 벌이는 병사들에게로 향했다. 수년간 전장에서 자신과 생사를 함께해 온 드라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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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화

무거운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낯선 천장의 화려한 문양이 흐릿한 시야에 들어오고, 곧이어 축 늘어진 손등 위로 뚝뚝 떨어지는 뜨거운 물기가 느껴졌다.로제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침대 맡에 두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는 레온의 황금빛 정수리가 보였다.“……아직도 안 떠나고 여기 있었네요.”갈라진 목소리로 내뱉은 차가운 한마디에, 레온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로제! 정신이 들어? 몸은…… 어디 아픈 데는 없어?”핏기 없이 창백해진 얼굴에 벌겋게 충혈된 금빛 눈동자가 물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로제는 대답 대신 그의 손아귀에서 자신의 손을 매정하게 빼냈다.“아르센의 황좌를 되찾으러 간다더니, 왜 아직도 남의 침실에서 이러고 있는 거죠?”“내가 잘못했어, 로제. 아까 내가 한 말은 진심이 아니었어…… 내가 질투에 눈이 멀어서 미쳤던 거야.”레온이 다급하게 침대 시트를 움켜쥐며 애원했다.“너한테 그런 모진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어. 제발 화 풀고 안정을 취해야 해. 지금 네 몸이…….”어쩔 줄 몰라 하며 말을 잇지 못하는 레온의 시선이 조심스럽게 로제의 아랫배로 향했다.그 시선을 따라가던 로제는, 정신을 잃기 직전 아랫배 깊은 곳을 훑고 지나갔던 낯설고도 묵직한 통증을 떠올렸다.로제가 자신의 배 위에 천천히 손을 얹었다.“나…… 왜 쓰러진 거죠? 의원이 다녀갔나요?”레온이 마른침을 삼키며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아이가…… 생겼대. 태기가 막 자리 잡기 시작한 극초기라고 했어.”순간, 로제의 손끝이 미세하게 움찔했다.그녀가 눈을 감고 내면에 집중하자, 몸 안을 흐르던 따뜻한 태양의 기운이 자궁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작은 생명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그리고 그 여린 생명력의 중심에서 맥동하는 고유한 마력의 빛깔을 확인한 순간, 로제는 아이의 진짜 아버지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렇군. 이 아이의 아버지는…….’심장이 기묘하게 뛰었으나, 로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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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화

석양이 핏빛으로 물들어 가는 타르타스의 거대한 성문 앞.검은 안개 숲을 단신으로 뚫고 나온 카시안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수들의 피를 뒤집어쓴 그의 행색은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수라(修羅) 그 자체였다.성벽 위를 지키던 용병들이 그 살벌한 기세에 질려 일제히 창끝을 겨누었다. 카시안이 성문을 단숨에 박살 내기 위해 검에 시커먼 흑기를 끌어올리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끼이이익- 쿵!굳게 닫혀 있던 육중한 철제 성문이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듯 스스로 활짝 열렸다.성문 안쪽의 광장에는 수백 명의 무장한 용병들이 도열해 있었으나, 그 누구도 카시안에게 섣불리 달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일제히 좌우로 물러서며, 도시 한복판에 우뚝 솟은 거대한 중앙 요새까지 곧게 뻗은 길을 터주었다.‘……레온, 그가 이미 이 도시 전체를 제 손아귀에 넣었다 이건가.’숲의 마수들을 굴복시켰던 그 거대한 드래곤의 위압감으로 이 무법지대의 패거리들을 찍어 누른 모양이었다.거친 숨을 고르며 걸음을 옮기던 카시안의 머릿속에, 그제야 의문 하나가 피어올랐다.‘아르센이 무너지던 날까지만 해도, 그놈은 곱상한 껍데기만 내세우던 온실 속의 나약한 황제에 불과했어. 대체 어떻게 그토록 흉포한 고대의 힘을 깨운 거지?’빼앗긴 여자를 되찾겠다는 지독한 집념이 그 유약하던 사내를 한계 너머로 밀어붙여 각성하게 만든 것일까.‘설마 블랑…… 너는 처음부터 그놈을 각성시키기 위해 이 모든 판을 짰던 건가?’자신의 침소에서 달콤하게 미소 지으며 순종하던 모든 순간마저 오직 옛 남편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기만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자, 카시안의 심장이 다시금 시커먼 배신감으로 뒤틀렸다.그러나 그가 살기를 삼키며 중앙 요새의 입구에 다다랐을 때,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내의 얼굴을 본 순간 카시안의 미간이 사납게 좁혀졌다. 분명 드라켄의 수도에 있어야 할 자신의 신하, 레녹이었다.“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카시안 폐하.”“……레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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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화

부서진 문짝의 나무 파편이 바닥을 나뒹구는 침실 안으로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금방이라도 방 안의 모든 것을 갈기갈기 찢어발길 듯 날뛰던 카시안의 흑기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어 갔다.“……아이?”카시안의 입술에서 낮게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피비린내를 뚝뚝 흘리며 서 있던 그의 시선이 로제의 새하얀 손끝이 감싸 쥔 아랫배에 못 박힌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아이를 가졌다고? 지금 저 뱃속에……?’순간 카시안의 머릿속으로 지난 수 주간 드라켄의 황궁 침소에서 그녀와 얽혀 보냈던 수많은 밤들이 폭풍처럼 스쳐 지나갔다.그토록 집요하게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탐하고 제 흔적을 새겨 넣었던 밤들이었다. 시기상으로 따져보아도 제 씨앗이 뿌리를 내렸을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았다.하지만 그와 동시에, 침대 곁을 지키고 선 레온의 존재가 시야에 걸리자 카시안의 눈동자가 다시금 사납게 일그러졌다.“……누구의 아이지?”카시안이 검자루를 으스러져라 고쳐 쥐며 한 걸음 다가섰다.“내 침소에서 잉태한 내 핏줄인가, 아니면…… 내가 없는 사이에 저놈과 뒹굴어 만든 씨앗인가!”다시금 꿈틀거리며 피어오르는 카시안의 살기에, 옆으로 물러서 있던 레온이 반사적으로 검자루에 손을 얹으며 앞을 가로막으려 했다.그러나 레온이 움직이기도 전에, 로제가 먼저 차갑게 입을 열었다.“그 검부터 당장 치워요, 카시안.”로제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카시안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방금 의원이 다녀갔어요. 태기가 막 자리 잡기 시작한 극초기라, 작은 충격에도 아이가 잘못될 수 있다고 하더군요.”“…….”“만약 당신이 이 방에서 날뛰다가 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때는 어쩔 건가요? 당신의 손으로 직접 당신의 첫 후계자를 죽인 셈이 될지도 모르는데, 그 대가를 감당할 수 있겠어요?”‘당신의 첫 후계자’라는 단어가 떨어지는 순간, 카시안의 호흡이 컥 막혔다.단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자신의 아이일 수 있다면, 그 앞에서 칼을 휘두르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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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화

손바닥을 스치는 카시안의 뜨거운 입술 위로 시커먼 집착이 번뜩였다.당장이라도 침대 위로 기어 올라와 그녀를 집어삼킬 듯한 기세였으나, 로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그의 턱을 손끝으로 가볍게 밀어냈다.“말은 바로 해야죠, 카시안. 내 침실을 차지하는 게 아니라, 내가 허락할 때만 이 방에 발을 들일 수 있는 거예요.”차갑고도 우아한 목소리가 카시안의 정수리로 내려앉았다.“먼저 그 역겨운 피비린내부터 씻고, 숲 밖의 드라켄 군대를 물리는 황제의 칙서부터 가져오세요. 만약 내 마음에 들지 않게 굴거나 아이를 놀라게 한다면…… 그땐 내 침실은커녕 평생 내 얼굴조차 보지 못하게 될 줄 알아요.”순간, 짐승처럼 끓어오르던 카시안의 욕망이 찬물을 끼얹은 듯 우뚝 멈추었다.이전의 그였다면 감히 자신을 밀어내는 여인을 힘으로 찍어 눌렀을 터였다.그러나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로제는, 까딱 잘못 건드렸다가는 뱃속의 아이와 함께 영원히 제 손아귀에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는 절대적인 갑(甲)이었다.그날 밤, 카시안은 로제의 명대로 몸에 말라붙은 마수의 피를 깨끗이 씻어낸 뒤, 타르타스의 독립을 인정하고 독점 무역로를 개방하는 칙서를 작성해 그녀의 발치에 바쳤다.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대륙 최강의 제국을 굴복시킨 로제의 승리는 완벽했다.레녹은 드라켄과의 무역로를 통해 막대한 부를 쓸어 담았고, 과거 서연합의 포로수용소에서 구출된 아르센의 유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 자신들의 유일한 구원자인 로제의 친위대가 되어 왕궁을 철통같이 호위했다.그리고 밤마다 로제의 침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제국의 폭군 카시안이었다.“……속이 또 메스꺼운 건가? 가만히 있어 봐.”깊은 밤, 카시안은 침대 위에조차 감히 올라가지 못한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로제의 아랫배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전장을 휩쓸던 파괴적인 흑기 대신, 행여나 태아에게 해가 될까 봐 수천 번을 정제해 낸 따뜻한 마력이 그녀의 자궁을 부드럽게 감싸며 입덧을 달래주었다.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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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화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지난 열 달간 두 사내의 피를 말렸던 ‘진짜 아버지’가 누구인지 만천하에 밝혀질 터였다.숨이 턱 막히는 정적 속에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마침내 굳게 닫혀 있던 침실 문 너머로, 세상을 깨우는 듯한 우렁차고 맑은 아기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응애-! 으아아앙-!”울음소리가 들리자마자 카시안과 레온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문을 박차고 침실 안으로 뛰어들었다.“로제!”“로제, 괜찮아? 정신이 들어?”두 사내는 약속이라도 한 듯 침대 머리맡으로 달려가, 땀에 젖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로제의 양손을 하나씩 거머쥐었다.창백해진 얼굴로 두 남자를 번갈아 바라본 로제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녀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두 황제의 시선이, 그제야 비단 강보에 싸인 아기를 안고 다가오는 에다에게로 동시에 꽂혔다.꿀꺽.대륙을 호령하는 두 절대자의 목울대가 동시에 무겁게 오르내렸다.“여왕 폐하를 쏙 빼닮은 건강한 공주님이십니다!”에다의 감격에 찬 목소리와 함께 강보가 살짝 젖혀졌다.‘검은색인가!’‘황금빛인가!’두 사내가 숨을 멈춘 채 강보 속을 들여다보았다.그러나 아기의 자그마한 얼굴을 확인한 순간, 카시안과 레온의 표정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돌처럼 굳어졌다.아기의 보송보송한 배냇머리는 카시안의 칠흑 같은 검은빛도, 레온의 찬란한 황금빛도 아니었다.설상가상으로 울음을 그친 아기가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눈을 깜빡였는데, 그 맑은 눈동자마저 카시안의 핏빛 적안도, 레온의 날카로운 금안도 아니었다.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심지어 조그맣게 오므린 입술과 눈매의 모양까지 거울로 찍어낸 듯 오직 로제 한 사람만을 완벽하게 빼닮은 ‘로제의 축소판’이 그곳에 누워 있었다.“……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왜 내 금빛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거야? 아니, 카시안 네놈의 시커먼 색도 전혀 없잖아!”당혹감에 휩싸인 두 황제가 멍하니 아기와 로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그런 두 사내의 황망한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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