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남편은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Chapter 81 - Chapter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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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이제 막 이른 아침의 따스한 빛이 들어오기 시작한 후작저의 집무실.레녹은 방금 전 끝난 의회의 속기록 사본을 탁 소리 나게 덮으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후.”웃음은 짧고 가벼웠다.그러나 그 안에는 치열했던 밤샘 공방전을 모두 복기한 자의 여유가 섞여 있었다.블랑 백작의 도발.귀부인들의 증언.심야에 기습적으로 판을 깐 황제의 개입.자신이 앞장서서 물어뜯었던 페온 공작의 숨통.그리고…끝끝내 막아낸 늙은 공작의 완강한 방어.“결국… 한 끗 차이로 못 꺾었군.”개국공신. 선황제의 유훈.칼로는 자를 수 없는 낡은 명분들이 오늘 의회에서 또 한 번 승리했다. 자신이 벼려낸 법안이 늙은 거목의 껍질조차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간 꼴이었다.레녹은 피곤한 듯 안경을 벗어 만지작거리며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그래도 꽤 재미있는 판이야.”황제가 졌다.하지만 완전히 진 건 아니었다.그의 패배는 짙은 갈증을 남겼고, 그 갈증은 반드시 더 잔혹하고 파격적인 다음 수로 이어진다.그때였다.“후작님.”따뜻한 찻잔을 내어오던 시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일전에 별궁 쪽에 수상한 소문이 돌면 즉시 보고하라 명하시지 않았습니까. 방금,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들어왔습니다.”레녹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벌써 나오는 소문이 있어?”“어제 오후, 다과회가 난장판이 된 직후의 일 말입니다. 폐하께서 블랑 백작을 친히 침소로 들이시지 않았습니까.”시종은 잠시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고르다 덧붙였다.“폐하께서 떠나신 후, 침소를 정리하러 들어간 하녀들의 말에 따르면… 방 안이 엉망진창일 만큼 요란했다고 합니다. 고통이 섞인 비명이 아니라, 숨 넘어갈 듯 애원하고 무너지는 교성이 해가 지기 전까지 길게 이어졌다고.”“흠.”거기까지는 흔한 치정극이었다.대낮부터 황제가 총애하는 정부를 침대에서 농락하는 뻔한 이야기.하지만 레녹은 긴 손가락으로 책상 가장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그런데 왜, 네놈 표정은 그걸로 끝이 아니라는 얼굴이지?”“……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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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비상 의회가 파한 직후의 이른 아침. 서쪽 별궁의 접견실.창가로 눈 부신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들이닥쳤다.블랑은 얇은 실크 슬립 위에 가운만 대충 걸친 채,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찻잔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쇄골 아래로는 어제 카시안이 남긴 붉은 잇자국들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었다.“백작님.”에다가 창백한 얼굴로 들어왔다.“페온 공작님께서… 당장 문을 열라며 들이닥치셨습니다.”블랑은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챙그랑.올 것이 왔다.밤새 의회에서 황제의 칼을 막아내고 승리감에 젖어있을 늙은 거목.“모셔라.”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서게 문이 거칠게 열리고,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들어왔다.백발이 성성했지만, 사람을 내리깔아 보는 눈빛은 소름이 돋을 만큼 날카롭고 흉흉했다.그는 헐벗은 수준인 블랑의 옷차림과 붉은 흔적들을 보더니 벌레를 씹은 듯 미간을 구겼다.일개 정부 따위에게 제국의 공작이 먼저 고개를 숙일 이유는 없다는 듯한 태도.기선 제압이었다.하지만 블랑도 일어나지 않았다.그녀는 흐트러진 가운의 옷깃을 여미지도 않은 채, 나른하게 턱을 괴고 그를 올려다보았다.“누구 덕분에 폐하께 시달렸더니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서요. 일어서서 맞이하지 못하는 결례를 용서하시죠, 공작님.”노골적인 선공이었다.페온 공작의 눈썹이 험악하게 꿈틀했다.딱 봐도, 어디 천한 것들 밑에서 자란 계집애가 황제의 냄새를 풍기며 제 앞에서 기를 편다?하지만 그는 노련한 정치인이었다.순식간에 표정을 지우고, 입가에 사람 좋은 미소를 띠었다.“괜찮습니다. 폐하의 수발을 드는 일은 퍽 고단하셨을 테지요.”그는 지팡이를 옆으로 치우고, 가볍게 고개를 까딱했다.“못난 제 여식 일로 폐하께 큰 꾸중을 들었습니다. 자식 교육을 잘못 시킨 이 아비의 죄가 커, 사죄의 뜻으로 올해 철광석 생산량의 3할을 황실에 헌납하기로 했습니다.”페온은 품에서 고액 수표 다발이 든 두툼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소리 나게 던졌다.“그런데 폐하께서 직접 사과할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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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같은 시각. 언덕 위에 자리한 황궁 밖 레녹 후작의 저택.새벽부터 피워둔 화로 덕분에 집무실 안은 훈훈했다.레녹은 몇 시간 전 미리 지시해 두었던 최고급 찻잎이 알맞게 우러나는 것을 여유롭게 지켜보고 있었다.그때, 후작저의 정보 수장이 조심스럽게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후작님. 조금 전, 페온 공작이 서쪽 별궁에서 쫓겨나듯 빠져나왔습니다. 호위 기사의 전언에 따르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여 당장이라도 피를 토할 기세였다고 합니다.”“하하.”레녹의 입꼬리가 싱그럽게 말려 올라갔다.보나마나 돈으로 해결을 하러 갔다가, 오히려 제 속만 다 뒤집혀서 도망치듯 나온 꼴. 서쪽 별궁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안 봐도 뻔했다.“그나저나 대단한 독종입니다. 일개 정부의 몸으로 그 페온 공작을 상대로 기세에서 잡아먹다니요.”시종장의 감탄에 레녹은 안경을 우아하게 추어올렸다.“기세뿐만이 아니지. 기어코 저 늙은 너구리의 위선적인 가면을 제 손으로 벗겨내고 기저에 깔린 살의를 끌어낸 거다.”판을 짜고, 스스로 가장 치명적인 독이 되기를 선택한 여자.“……과연, 내 예상대로 완벽하게 움직여주는군.”레녹의 중얼거림은 단순한 정치적 파트너로서의 흥미가 아니었다. 완벽한 동족을 발견한 희열이었다.“그리고 후작님. 조금 전 별궁의 은밀한 문을 통해 마차 한 대가 출발했다고 합니다. 행선지는…….”“당연히 이곳이겠지.”레녹은 마침내 향긋한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대문을 활짝 열어 두어라. 귀한 동업자께서 곧 당도하실 테니.”아침 햇살이 저택의 대리석 바닥을 길게 가르고 있었다.그의 확신대로, 서쪽 별궁에서 출발한 마차 한 대가 빠르게 후작저의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에필로그 : 사냥꾼의 추적]아르센의 공기는 드라켄보다 가벼웠다.그러나 그 가벼운 공기 속에는 더 많은 혀와, 더 많은 눈이 숨어 있었다.레온은 성문을 통과하자마자 낡은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이곳에서 눈에 띄는 체격은 죄였다.등과 팔, 목덜미에 새겨진 흉터들은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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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태양이 가장 높이 뜬 정오 무렵, 블랑은 별궁을 나섰다.마차의 커튼을 내리자 한낮의 눈부신 햇살이 좁은 틈새로 스며들었다.그 빛은 갓 벼려낸 칼날처럼 희고 서늘했다.“행선지는… 레녹 후작 저택이 맞습니까.”마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황궁의 하인들조차 그 이름을 말할 때는 한 박자 늦는다.블랑은 고개만 끄덕였다.‘의회 수장의 문 앞이라.’아직 속내를 알 수 없는 자. 그의 손을 잡는 것이 과연 옳은 수일까. 잉크를 다루는 자들의 치밀하고 교활한 덫은, 무식하게 휘두르는 칼날보다 피하기 어려운 법.그 낯선 긴장감에 블랑은 매끄러운 팔등을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두려움이 아니라, 철저한 계산에서 비롯된 서늘함이었다.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조금 전, 페온 공작이 남기고 간 살의가 아직도 피부에 끈적하게 남아 있었다.그 늙은 거목은 오늘은 물러났지만, 다음엔 가지를 뻗어 기어이 목을 조를 것이다.마차가 골목을 돌아나가자 도시의 냄새가 바뀌었다.황궁 주변의 달콤한 향수 냄새 대신, 젖은 잉크와 오래된 양피지 냄새가 스몄다.문관들의 구역.칼 대신 법과 치밀한 기록으로 남의 목을 죄는 곳이었다.레녹 후작 저택은 외려 소박했다.귀족들의 과장된 과시가 없었고, 정원도 억지로 넓히지 않았다.대신 모든 것이 정교하고 숨 막히게 통제되어 있었다.문지방의 높이, 기둥의 간격, 석상 하나의 시선까지.들어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검열하고 계산하게 만드는 집이었다.문이 열리고 집사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블랑 백작님을 뵙습니다. 후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기다리고 있었다.]블랑은 그 말속에서 이미 게임이 시작됐음을 느꼈다.저택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접견실은 대낮임에도 서늘하고 묘하게 어두웠다.창의 절반을 가린 두꺼운 커튼 탓이었다. 밝은 밖과 달리, 오직 상대를 읽어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짙은 그림자를 깔아둔 공간.레녹은 여유롭게 소파에 기대앉아 있었다.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검은 예복, 이지적인 은테 안경, 그리고 가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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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후작님의 말은… 참 단정하십니다.”“단정해야 살아남지요. 특히… 흙도 없이 꺾여 온, 뿌리 없는 꽃은.”블랑의 손끝이 찻잔 가장자리를 꾹 눌렀다.그 말은 조언이 아니라 오만한 선고였다.너는 뿌리가 없다. 그러니 내가 내어주는 화분에 심겨야 한다는 뜻.하지만 블랑은 그 교활한 유도에 말리지 않았다.“그날 다과회에서 후작님께서 먼저 찾아오셨던 건, 제 뿌리가 되어 주겠다는 제안이었죠.”“네, 아직 유효합니다.”“대가도 여전히요?”“물론.”그가 나른하게 미소 지었다.가장 친절한 얼굴로 가장 잔인한 짓을 지시하는, 특유의 우아한 표정이었다.“다과회에서 드렸던 제 조언은 아주 훌륭하게 써먹으셨더군요. 이제는 한 발 더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폐하의 소유욕을, 당신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맹목적인 광기로 바꾸십시오.”블랑은 눈을 내리깔았다.소유욕. 질투. 독점.그 모든 것이 자신을 살릴 동아줄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언제든 목을 조를 밧줄이 될 수도 있었다.“후작님.”블랑이 천천히 잔을 들었다.첫 모금은 마시지 않았다. 그저 찻잔을 손에 쥐는 동작 하나만으로도 밀실의 공기 흐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얕은 수로 저를 시험하지 마시죠, 후작님. 황제가 아무리 저를 위해 이성을 잃고 검을 휘두른다 한들, 그건 폭군의 난동일 뿐 공작을 합법적으로 칠 명분은 되지 못합니다. 도리어 페온에게 '황제가 정부에 미쳐 정사를 망친다'며 반역을 일으킬 구실만 쥐여 주는 꼴이 되겠죠.”레녹의 안경 너머로 짙은 이채가 번뜩였다.아주 가볍게 던져본 시험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도리어 판의 핵심을 정확히 찔러오는 완벽한 대답이었다.“정확합니다. 저 거대한 페온 가문은 황제의 시퍼런 권력으로도 함부로 무너뜨릴 수 없지요.”“그럼요.”레녹은 길고 창백한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개국공신. 선황제의 유훈. 대대로 이어진 위임. 그건 명분이라는 이름의 견고한 돌입니다. 황제의 시퍼런 검도 그 돌만큼은 자르지 못하지요.”블랑의 시선이 느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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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블랑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문장을 읽어내렸다.[제7조. 단, 해당 가문이 제국의 안위를 위협하거나 황실에 대한 중대한 기만행위가 있을 시, 황제는 의회의 동의를 거쳐 즉시 권한을 회수할 수 있다.]블랑의 숨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칼은 이미 300년 전부터 그들의 목 밑에 놓여 있었다.다만, 페온 가문의 위세에 눌려 아무도 꺼내지 못했을 뿐.“이 조항을 발동시키려면 중대한 기만행위가 증명되어야겠군요.”“정확합니다.”레녹이 미소 지었다.“그리고 그 과실을 만드는 건… 여론입니다. 백작님, 당신은 대중의 혀를 움직일 수 있지 않습니까. 귀부인들을 다루는 솜씨가 능숙하시던데.”블랑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전 혀보다 손을 움직이게 만드는데 더 능숙합니다만.”“그게 더 좋습니다. 혀는 돌아서지만, 손은 기록을 남기니까.”블랑은 잠시 침묵했다.그 침묵 속에서 자신의 다음 수를 조립했다.칼날은 이미 남자의 손에 쥐여 있었다.그에게 부족한 것은 단 하나, 그 칼을 휘두를 완벽한 명분뿐이었다.나를 부른 이유가 그것이라면 기꺼이 되어주지. 하지만 단순히 던져지는 미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남의 손에 쥐인 칼이 아니라, 내 손으로 칼자루를 함께 쥐어야 한다.블랑은 레녹을 똑바로 바라봤다.“후작님. 저는 전면에 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말씀하십시오.”“실패했을 때 버려지지 않을 보장. 그리고….”블랑이 한 발짝 다가갔다.“이 조항이 발동되어 특별 감사 위원회가 열리면.”그녀의 눈빛이 야망으로 서늘하게 타올랐다.“그 위원회의 황실 대리인 자리를 제게 주십시오.”레녹의 눈이 커졌다.단순히 이름을 알리는 명예직이 아니었다.페온 가문의 장부를 뒤지고, 죄를 심판할 수 있는 실질적인 집행관의 권한을 요구하는 것이다.“……욕심이 과하시군요.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페온이 죽이려 들 텐데.”“상대의 목을 치려면, 내 팔 하나 잘리는 것쯤은 두려워하면 안 되죠.”블랑은 물러서지 않았다.“하지만, 피를 흘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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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페온 공작의 저택은 거대한 무덤처럼 고요했다.현관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하인들은 벽지처럼 숨을 죽이고 바닥만 응시했다. 주인의 흉포한 기분을 감지한 탓이었다.공작은 겉옷을 받으려는 하인의 손길마저 거칠게 뿌리친 채, 단 한마디도 없이 2층 계단을 쿵쿵 밟고 올라갔다.숨 막히는 적막 속에서 오직 그 폭력적인 발소리만이 일직선으로 저택을 가로질렀다. 이내 거친 발소리가 2층 끝에 위치한 집무실 안으로 들이닥쳤다.어두운 마호가니 책상 앞, 꼿꼿한 자세로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아이린이 치맛자락을 쥐며 우아하게 무릎을 굽혔다.“다녀오셨습니…….”쾅-!인사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무실 문이 부서질 듯 닫혔고, 공작의 두꺼운 지팡이가 바닥을 자비 없이 내리쳤다.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 온 그의 거대한 그림자가 아이린을 덮친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짝!마른 파열음이 서늘한 실내를 날카롭게 갈랐다.아이린의 고개가 속절없이 옆으로 돌아갔다.완벽하게 틀어 올렸던 머리카락이 헝클어졌고, 창백한 뺨 위로 시뻘건 손자국이 흉하게 부풀어 올랐다.그러나 비명은 없었다.그녀는 비틀거리지도, 공포에 질려 울음을 터뜨리지도 않았다.그저 천천히 고개를 바로 세우고, 손등으로 화끈거리는 뺨을 한 번 쓸어내렸을 뿐이다.‘피부는 안 찢어졌네. 내일 일정엔 두꺼운 화장으로 가려지겠어.’그것이 뺨을 맞은 그녀의 첫 번째 생각이었다.아이린에게 아픔이나 수치심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쓰레기 정보였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오직 이 물리적 타격이 내일 사교계 일정에 방해가 되느냐, 아니냐는 건조한 계산뿐이었다.그 소름 끼치도록 무감한 태도가 공작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이 쓸모없는 것!”공작의 얼굴이 붉게 일그러졌다.“네가 그 하찮은 다과회에서 손을 잘못 놀린 대가로, 오늘 내가 치른 값이 얼마인지 아느냐! 감히 굴러먹던 천한 정부 년 따위에게 고개를 숙이고, 기사단 1년 치 무장 비용을 허공에 날렸어!”“…….”“페온 공작가가 한순간에 웃음거리가 되었단 말이다! 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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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설마… 타티아나를 다시 제국으로 부르겠다는 거냐? 그 서연합에서 망가질 대로 망가진 년을?”“아름다운 조각상일수록, 처참하게 망가졌을 때 더 깊은 동정심을 자극하는 법입니다.”공작의 미간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그년은 이제 서연합의 인질이나 다름없다. 엘런의 아내를 제국으로 빼돌렸다가는 당장 서연합과 전쟁이 터질 명분을 내어주는 꼴이야! 내 철광석이 거덜 난 마당에 전쟁이라니, 다 같이 죽자는 거냐?”“전쟁은 어차피 터집니다. 카시안 폐하께서 늘 속으로 벼르시던 일 아닙니까?”아이린이 소리 없이 웃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오히려 가장 완벽한 명분이 생기니 반기시겠죠. 게다가 비참하게 짓밟힌 가여운 첫사랑을 구출해 냈다는 영웅적 서사까지 더해지면, 폐하의 이성은 완전히 그 계집에게 멀어버릴 겁니다. 그 틈에 길바닥에서 주워 온 블랑 따위는 하루아침에 성가신 짐덩이로 전락하게 되겠지요.”“…….”“아버지는 그저 혼란에 빠진 폐하를 대신해 다시 의회를 장악하시고, 가문의 손실을 긁어모으시면 됩니다. 욕받이는 블랑과 타티아나가 알아서 해줄 테니까요. 게다가 지옥에 떨어져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목줄을 쥐고 다루기가 아주 쉽거든요.”공작은 잠시 숨을 죽이고 제 딸을 응시했다.살이 터지도록 뺨을 맞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국의 전쟁마저 장기판의 말처럼 굴리며 남의 약점을 파고들어 다음 수를 계산하는 딸.자신이 빚어낸 핏줄이었지만, 가끔은 척추를 타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정이 없는 완벽한 괴물이었다.“……확실히 해라. 다시는 내 얼굴에 먹칠하지 않도록.”“물론이지요.”아이린은 치맛자락을 쥐고 우아하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존경이나 복종이 아니었다. 그저 거래가 성사되었음을 알리는 아주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었다...그날 밤.아이린은 촛불 아래 홀로 앉아 깃펜을 들었다.그녀는 수납장 가장 깊은 곳에서, 최고급 양피지와 달콤한 장미향이 나는 붉은 잉크를 꺼냈다. 쓰레기통에 처박힌 짐승에게 던져주기엔 과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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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아이린이 빠져나간 집무실은 다시 무거운 적막에 잠겼다.페온 공작은 지팡이를 옆에 내려놓고, 육중한 가죽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독은 독으로 잡는다…….”공작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번졌다.맞은 뺨을 감싸 쥐고도 꼿꼿하게 셈을 하던 딸년은 스스로 제법 영악한 수를 냈다고 자만하겠지만, 아직 아비의 큰 그림을 온전히 읽지는 못했다.아이린의 계산은 어디까지나 카시안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황위를 유지한다는 전제하에 짜인 판이었다. 하지만 늙은 너구리의 셈법은 달랐다.‘서연합과의 전쟁에서 카시안이 패배한다면?’나쁠 것 없는 시나리오였다.아니, 오히려 페온 가문에게는 가장 달콤한 결말일지도 모른다.페온은 이미 오래전부터 서연합의 은화를 삼키며, 제국의 심장부에서 캐낸 최고급 철광석과 무기를 몰래 적국으로 빼돌려주고 있었다.만약 카시안이 이끄는 드라켄이 무너진다면, 페온 가문은 서연합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이자 새로운 시대의 개국공신으로 군림하게 될 것이다.반대로 카시안이 이긴다면?그때는 아이린의 말대로 타티아나를 구출해 온 영웅 행세를 하며 블랑을 쳐내고, 타티아나를 방패막이 삼아 또다시 황제를 주무르면 그만이었다.‘누가 이기든, 권력은 내 발밑에 있어야지.’드라켄 제국이 피바다가 되든, 카시안의 목이 땅에 떨어지든 공작의 알 바가 아니었다.그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도축장에서, 어느 쪽이든 가장 살점이 많이 붙은 고기를 물어뜯을 준비가 완벽하게 끝난 상태였다.공작은 서연합 쪽으로 몰래 빼돌린 무기 밀거래 장부가 들어 있는 두꺼운 책상 서랍을 느릿하게 쓰다듬으며 소리 없이 웃었다.**서쪽 별궁의 침실.해가 막 저문 초저녁이었으나, 방 안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카시안이 등불조차 켜지 않은 채 소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고 블랑을 기다리고 있었던 탓이다.그의 발치에는 이미 비워진 독한 술병이 굴러다녔다.그는 오늘 지쳐 있었다.황제의 오만한 권위도, 검귀의 살기도 내려놓고 그저 유일한 내 편의 품에서 쉬고 싶었다. 늙은 대신들에게 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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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쾅-!카시안이 테이블을 내리쳤다.굴러다니던 술병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산산조각이 났다.“지금… 나를 그 새끼와 비교하는 건가?”“비교가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블랑은 발밑으로 파편이 튀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폐하는 감정적이에요. 늙은 공작이 도발하면 화부터 내시죠. 그러니 매번 지는 겁니다. 하지만 레녹 후작은 다르더군요. 그는 감정을 죽이고, 완벽한 계산을 하더군요.”“그만.”“그 남자는 제게 명분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폐하가 쥐여주지 못한, 아주 확실하고 치명적인 칼을요.”“그만하라고 했어!”카시안이 블랑의 어깨를 거칠게 움켜쥐었다.뼈가 으스러질 듯한 악력. 그 거대한 손아귀에 잡힌 가녀린 어깨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비명을 질렀다. 평소라면 그녀를 녹여내렸을 그 뜨거운 체온이, 지금은 노골적인 폭력과 살기를 품고 있었다.훅 끼쳐오는 독한 술 냄새와 특유의 짙은 체향. 숨결이 닿을 만큼 아찔한 거리였지만, 블랑은 고개를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치켜든 턱 끝이 그의 흉포한 턱선에 닿을 듯 아슬아슬하게 맞물렸다.그는 그저 위로를 원했다.오늘만큼은 품에 안겨 '폐하가 최고'라고 맹목적으로 속삭이며 상처를 핥아주는 여자를 원했다.그런데 눈앞의 여자는 찢어진 상처에 소금을 들이붓고, 왜 더 잘하지 못했냐며 발밑으로 그를 짓밟고 있었다.“나는 네가, 온전한 내 편인 줄 알았어.”카시안의 성대가 고통스럽게 긁혔다.“그런데 적의 수장과 손을 잡고 와서 나를 비웃어?”“비웃는 게 아니라 정신 차리시라는 겁니다!”블랑이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소리쳤다.“폐하의 그 어설픈 사랑놀음에 장단 맞춰 주다가 단두대에 목이 잘리는 건 저라고요! 저는 폐하의 위로나 해주는 인형이 되려고 여기 있는 게 아니에요!”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두 사람의 시선이 날 선 칼날처럼 허공에서 팽팽하게 부딪쳤다.카시안은 처음으로 블랑에게서 낯설음을 느꼈다.자신이 누군지 몰라 벌벌 떨던 순진한 처녀도, 침대 위에서 열락에 젖어 달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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