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무서워서 그랬어요. 폐하가 절 장난감처럼 쓰다 버리실까 봐… 그래서 그 후작을 만나러 간 거였어요.”블랑의 섬세한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카시안의 허벅지 안쪽, 가장 뜨겁고 위험한 곳을 향해 느릿하게 기어 올라갔다.“화 푸세요, 네? 폐하가 원하시는 건 뭐든 다 할게요. 여기서 옷을 벗으라면, 당장 벗을게요.”카시안은 숨을 멈췄다. 미쳐버릴 것 같았다.절대 제 손에 길들지 않을 것 같던 여자가, 지금 제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엉망으로 다뤄달라며 제 발로 기어들어 왔다.허벅지에 닿은 그녀의 매끄러운 뺨, 가쁜 숨결, 사타구니를 향해 올라오는 끈적한 손길.당장이라도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책상 위로 끌어올린 뒤, 서류고 뭐고 다 쓸어버리고 짐승처럼 박아넣고 싶었다.하지만.‘여기서 눕히면 내가 지는 거다. 완벽하게 목줄을 채워야 해.’카시안은 아랫도리로 몰리는 터질 듯한 쾌감을 악물고 억누르며, 서늘하게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조금 더 애타게, 조금 더 비참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는 내 앞에서 다른 남자의 이름을 담지 않겠지.카시안은 천천히 손을 뻗어 블랑의 가느다란 턱을 쥐었다.부드럽게 쓰다듬는가 싶더니, 이내 억센 악력으로 그녀의 고개를 뒤로 밀어냈다.“후우…….”카시안이 짐짓 지루하다는 듯 길게 한숨을 쉬었다.“블랑. 네가 이 방에서 당장 꺼낼 수 있는 무기가 몸뚱이 하나뿐이라는 건 잘 알겠는데.”그는 허벅지를 어루만지던 블랑의 손을 차갑게 쳐냈다.“오늘은 발정 난 고양이를 달래줄 기분이 아니군.”블랑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잘게 흔들렸다.거절당했다.수치심을 내던지고 다리 사이로 기어 들어가 애원했는데, 철저하게 외면당했다.“폐, 폐하……?”“밀린 서류가 산더미야. 네 얄팍한 재롱을 받아주기엔 내 시간이 너무 비싸서 말이지.”카시안은 무감한 얼굴로 다시 펜을 잡았다. 시선은 이미 그녀를 지워버린 듯 서류로 향해 있었다.“나가 봐.”협박이 아닌 진짜였다.블랑은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
오후 2시. 황제의 집무실.공기는 숨이 막힐 듯 무거웠다.시종장도, 호위기사들도 숨소리 한 번 크게 내지 못했다.카시안은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넘기고 있었지만, 시선은 자꾸만 굳게 닫힌 문 쪽을 향했다.“다시 써와.”짜악!카시안이 보고서를 바닥으로 쳐내자, 종이가 눈송이처럼 허공에 흩어졌다.그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눈가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팼다. 머릿속에선 어젯밤 블랑이 뱉어낸 서늘한 독설이 귓가를 맴돌았다.[어설픈 사랑놀음에 장단 맞춰주다가 목이 잘리는 건 저라고요.]‘어설픈 사랑놀음?’“빌어먹을.”카시안은 손에 쥐고 있던 펜을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졌다.만년필이 대리석 벽에 부딪혀 박살이 나고, 검은 잉크가 핏자국처럼 흉측하게 튀었다.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제 유일한 진심을 비웃고 짓밟은 그녀가 미치도록 밉고 원망스러웠다.하지만 그보다 더 끔찍하게 화가 나는 건, 그 모욕을 당하고도 지금 당장 문을 박차고 나가 그녀의 향기를 맡고 안고 싶어 미칠 것 같은 사내의 발정 난 본능이었다.“폐하.”그때, 시종장이 얼어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블랑 백작 부인께서…… 돌아가라고 할까요?”카시안의 턱관절이 뻐근해지도록 힘이 들어갔다.어젯밤, 그녀는 레녹 후작을 등 뒤에 세운 양 턱을 치켜들고 자신을 몰아세웠다. 하지만 카시안은 그 어설픈 허세에 코웃음이 났다.순진한 진짜 ‘블랑’이라면 모를까, 가짜 껍데기를 뒤집어쓴 ‘로제’에게 레녹은 방패가 되어줄 수 없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권력과 부가 아닐 테니.그 위태롭고 앙증맞은 기만극을 빤히 알면서도, 기꺼이 속아 넘어가 주며 서연합으로부터 그녀를 지킬 이는 드라켄의 황제인 카시안 자신뿐이었다.제 살길을 영악하게 계산하는 그 여자가 그 뻔한 이치를 모를 리 없었다.결국 레녹이라는 카드는 드라켄에서 살기 위해 쥐어 짜낸 허세일 뿐, 그녀가 비를 피할 곳은 결국 내 발밑밖에 없다.지금쯤 굳게 닫힌 문 너머에서, 하나뿐인 진짜 동아줄을 잃을
[에필로그 : 악마에게서 온 편지]제국 북부의 끝자락.일 년 내내 축축한 안개가 걷히지 않는 저주받은 영지, 그레이필드.남작가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녀를 은밀히 숨겨둔 곳.오랫동안 방치되어 흉가나 다름없는 북부의 낡은 별장은 낮게 가라앉은 빗물 냄새와 매캐한 곰팡이, 그리고 썩어가는 나무 비린내로 절어 있었다.스산한 바람이 창틀을 흔들 때마다, 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여자가 발작하듯 몸을 떨었다.“……비 전하.”늙은 유모가 가늘게 떨리는 촛불을 들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그 아주 작은 기척에도 여자는 흠칫 놀라며 제 품 안의 아이를 미친 듯이 끌어안았다. 얇은 슬립 새로 드러난 여자의 앙상한 쇄골과 어깨 위에는, 미치광이 남편 엘런이 남긴 시커먼 멍과 채찍 자국들이 흉측하게 얽혀 있었다.“그이인가요? 그자가, 그 미치광이가 결국 날 찾아낸 건가요?! 나와, 내 아들을 죽이러……!”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는 완전히 초점을 잃고 핏발이 서 있었다. 제국 최고의 미녀라 칭송받던 고귀한 장미는 온데간데없고, 매질에 길들여진 가여운 짐승 한 마리만이 바르르 떨고 있었다.“아닙니다, 전하. 엘런 저하의 사냥개들이 아닙니다. 제국 수도에서…… 전령이 편지를 두고 갔습니다.”“편지……?”타티아나의 메마른 눈동자가 아래로 향했다.유모의 손에 들린 것은 달콤한 장미향이 배어 있는 최고급 양피지. 그 위에는 눈이 시릴 정도로 선명한 페온 공작가의 붉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타티아나는 부러진 손톱으로 봉투를 신경질적으로 낚아채듯 가져갔다.다정한 필체로 씌어 내린 문장들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시시각각 기괴하게 일그러졌다.공포에서 의심으로. 의심에서 서늘한 경멸로.그리고 마지막엔…… 지독하리만치 거대한 열망으로.[- 너를 기다리는 오랜 친구, 아이린.]“……아하하.”타티아나의 갈라진 입술 사이로 마른 실소가 터져 나왔다.친구? 카시안 대신 그 미치광이의 번지르르한 껍데기와 혓바닥에 홀리도록 완벽한 함정
쾅-!카시안이 테이블을 내리쳤다.굴러다니던 술병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산산조각이 났다.“지금… 나를 그 새끼와 비교하는 건가?”“비교가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블랑은 발밑으로 파편이 튀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폐하는 감정적이에요. 늙은 공작이 도발하면 화부터 내시죠. 그러니 매번 지는 겁니다. 하지만 레녹 후작은 다르더군요. 그는 감정을 죽이고, 완벽한 계산을 하더군요.”“그만.”“그 남자는 제게 명분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폐하가 쥐여주지 못한, 아주 확실하고 치명적인 칼을요.”“그만하라고 했어!”카시안이 블랑의 어깨를 거칠게 움켜쥐었다.뼈가 으스러질 듯한 악력. 그 거대한 손아귀에 잡힌 가녀린 어깨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비명을 질렀다. 평소라면 그녀를 녹여내렸을 그 뜨거운 체온이, 지금은 노골적인 폭력과 살기를 품고 있었다.훅 끼쳐오는 독한 술 냄새와 특유의 짙은 체향. 숨결이 닿을 만큼 아찔한 거리였지만, 블랑은 고개를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치켜든 턱 끝이 그의 흉포한 턱선에 닿을 듯 아슬아슬하게 맞물렸다.그는 그저 위로를 원했다.오늘만큼은 품에 안겨 '폐하가 최고'라고 맹목적으로 속삭이며 상처를 핥아주는 여자를 원했다.그런데 눈앞의 여자는 찢어진 상처에 소금을 들이붓고, 왜 더 잘하지 못했냐며 발밑으로 그를 짓밟고 있었다.“나는 네가, 온전한 내 편인 줄 알았어.”카시안의 성대가 고통스럽게 긁혔다.“그런데 적의 수장과 손을 잡고 와서 나를 비웃어?”“비웃는 게 아니라 정신 차리시라는 겁니다!”블랑이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소리쳤다.“폐하의 그 어설픈 사랑놀음에 장단 맞춰 주다가 단두대에 목이 잘리는 건 저라고요! 저는 폐하의 위로나 해주는 인형이 되려고 여기 있는 게 아니에요!”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두 사람의 시선이 날 선 칼날처럼 허공에서 팽팽하게 부딪쳤다.카시안은 처음으로 블랑에게서 낯설음을 느꼈다.자신이 누군지 몰라 벌벌 떨던 순진한 처녀도, 침대 위에서 열락에 젖어 달콤하게
아이린이 빠져나간 집무실은 다시 무거운 적막에 잠겼다.페온 공작은 지팡이를 옆에 내려놓고, 육중한 가죽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독은 독으로 잡는다…….”공작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번졌다.맞은 뺨을 감싸 쥐고도 꼿꼿하게 셈을 하던 딸년은 스스로 제법 영악한 수를 냈다고 자만하겠지만, 아직 아비의 큰 그림을 온전히 읽지는 못했다.아이린의 계산은 어디까지나 카시안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황위를 유지한다는 전제하에 짜인 판이었다. 하지만 늙은 너구리의 셈법은 달랐다.‘서연합과의 전쟁에서 카시안이 패배한다면?’나쁠 것 없는 시나리오였다.아니, 오히려 페온 가문에게는 가장 달콤한 결말일지도 모른다.페온은 이미 오래전부터 서연합의 은화를 삼키며, 제국의 심장부에서 캐낸 최고급 철광석과 무기를 몰래 적국으로 빼돌려주고 있었다.만약 카시안이 이끄는 드라켄이 무너진다면, 페온 가문은 서연합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이자 새로운 시대의 개국공신으로 군림하게 될 것이다.반대로 카시안이 이긴다면?그때는 아이린의 말대로 타티아나를 구출해 온 영웅 행세를 하며 블랑을 쳐내고, 타티아나를 방패막이 삼아 또다시 황제를 주무르면 그만이었다.‘누가 이기든, 권력은 내 발밑에 있어야지.’드라켄 제국이 피바다가 되든, 카시안의 목이 땅에 떨어지든 공작의 알 바가 아니었다.&n
“설마… 타티아나를 다시 제국으로 부르겠다는 거냐? 그 서연합에서 망가질 대로 망가진 년을?”“아름다운 조각상일수록, 처참하게 망가졌을 때 더 깊은 동정심을 자극하는 법입니다.”공작의 미간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그년은 이제 서연합의 인질이나 다름없다. 엘런의 아내를 제국으로 빼돌렸다가는 당장 서연합과 전쟁이 터질 명분을 내어주는 꼴이야! 내 철광석이 거덜 난 마당에 전쟁이라니, 다 같이 죽자는 거냐?”“전쟁은 어차피 터집니다. 카시안 폐하께서 늘 속으로 벼르시던 일 아닙니까?”아이린이 소리 없이 웃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오히려 가장 완벽한 명분이 생기니 반기시겠죠. 게다가 비참하게 짓밟힌 가여운 첫사랑을 구출해 냈다는 영웅적 서사까지 더해지면, 폐하의 이성은 완전히 그 계집에게 멀어버릴 겁니다. 그 틈에 길바닥에서 주워 온 블랑 따위는 하루아침에 성가신 짐덩이로 전락하게 되겠지요.”“…….”“아버지는 그저 혼란에 빠진 폐하를 대신해 다시 의회를 장악하시고, 가문의 손실을 긁어모으시면 됩니다. 욕받이는 블랑과 타티아나가 알아서 해줄 테니까요. 게다가 지옥에 떨어져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목줄을 쥐고 다루기가 아주 쉽거든요.”공작은 잠시 숨을 죽이고 제 딸을 응시했다.살이 터지도록 뺨을 맞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국의 전쟁마저 장기판의 말처럼 굴리며 남의 약점을 파고들어 다음 수를 계산하는 딸.자신이 빚어낸 핏줄이었지만, 가끔은 척추를 타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정이 없는 완벽한 괴물이었다.“……확실히 해라. 다시는 내 얼굴에 먹칠하지 않도록.”“물론이지요.”아이린은 치맛자락을 쥐고 우아하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존경이나 복종이 아니었다. 그저 거래가 성사되었음을 알리는 아주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었다...그날 밤.아이린은 촛불 아래 홀로 앉아 깃펜을 들었다.그녀는 수납장 가장 깊은 곳에서, 최고급 양피지와 달콤한 장미향이 나는 붉은 잉크를 꺼냈다. 쓰레기통에 처박힌 짐승에게 던져주기엔 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