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에필로그 : 악마에게서 온 편지]제국 북부의 끝자락.일 년 내내 축축한 안개가 걷히지 않는 저주받은 영지, 그레이필드.남작가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녀를 은밀히 숨겨둔 곳.오랫동안 방치되어 흉가나 다름없는 북부의 낡은 별장은 낮게 가라앉은 빗물 냄새와 매캐한 곰팡이, 그리고 썩어가는 나무 비린내로 절어 있었다.스산한 바람이 창틀을 흔들 때마다, 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여자가 발작하듯 몸을 떨었다.“……비 전하.”늙은 유모가 가늘게 떨리는 촛불을 들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그 아주 작은 기척에도 여자는 흠칫 놀라며 제 품 안의 아이를 미친 듯이 끌어안았다. 얇은 슬립 새로 드러난 여자의 앙상한 쇄골과 어깨 위에는, 미치광이 남편 엘런이 남긴 시커먼 멍과 채찍 자국들이 흉측하게 얽혀 있었다.“그이인가요? 그자가, 그 미치광이가 결국 날 찾아낸 건가요?! 나와, 내 아들을 죽이러……!”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는 완전히 초점을 잃고 핏발이 서 있었다. 제국 최고의 미녀라 칭송받던 고귀한 장미는 온데간데없고, 매질에 길들여진 가여운 짐승 한 마리만이 바르르 떨고 있었다.“아닙니다, 전하. 엘런 저하의 사냥개들이 아닙니다. 제국 수도에서…… 전령이 편지를 두고 갔습니다.”“편지……?”타티아나의 메마른 눈동자가 아래로 향했다.유모의 손에 들린 것은 달콤한 장미향이 배어 있는 최고급 양피지. 그 위에는 눈이 시릴 정도로 선명한 페온 공작가의 붉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타티아나는 부러진 손톱으로 봉투를 신경질적으로 낚아채듯 가져갔다.다정한 필체로 씌어 내린 문장들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시시각각 기괴하게 일그러졌다.공포에서 의심으로. 의심에서 서늘한 경멸로.그리고 마지막엔…… 지독하리만치 거대한 열망으로.[- 너를 기다리는 오랜 친구, 아이린.]“……아하하.”타티아나의 갈라진 입술 사이로 마른 실소가 터져 나왔다.친구? 카시안 대신 그 미치광이의 번지르르한 껍데기와 혓바닥에 홀리도록 완벽한 함정
쾅-!카시안이 테이블을 내리쳤다.굴러다니던 술병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산산조각이 났다.“지금… 나를 그 새끼와 비교하는 건가?”“비교가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블랑은 발밑으로 파편이 튀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폐하는 감정적이에요. 늙은 공작이 도발하면 화부터 내시죠. 그러니 매번 지는 겁니다. 하지만 레녹 후작은 다르더군요. 그는 감정을 죽이고, 완벽한 계산을 하더군요.”“그만.”“그 남자는 제게 명분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폐하가 쥐여주지 못한, 아주 확실하고 치명적인 칼을요.”“그만하라고 했어!”카시안이 블랑의 어깨를 거칠게 움켜쥐었다.뼈가 으스러질 듯한 악력. 그 거대한 손아귀에 잡힌 가녀린 어깨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비명을 질렀다. 평소라면 그녀를 녹여내렸을 그 뜨거운 체온이, 지금은 노골적인 폭력과 살기를 품고 있었다.훅 끼쳐오는 독한 술 냄새와 특유의 짙은 체향. 숨결이 닿을 만큼 아찔한 거리였지만, 블랑은 고개를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치켜든 턱 끝이 그의 흉포한 턱선에 닿을 듯 아슬아슬하게 맞물렸다.그는 그저 위로를 원했다.오늘만큼은 품에 안겨 '폐하가 최고'라고 맹목적으로 속삭이며 상처를 핥아주는 여자를 원했다.그런데 눈앞의 여자는 찢어진 상처에 소금을 들이붓고, 왜 더 잘하지 못했냐며 발밑으로 그를 짓밟고 있었다.“나는 네가, 온전한 내 편인 줄 알았어.”카시안의 성대가 고통스럽게 긁혔다.“그런데 적의 수장과 손을 잡고 와서 나를 비웃어?”“비웃는 게 아니라 정신 차리시라는 겁니다!”블랑이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소리쳤다.“폐하의 그 어설픈 사랑놀음에 장단 맞춰 주다가 단두대에 목이 잘리는 건 저라고요! 저는 폐하의 위로나 해주는 인형이 되려고 여기 있는 게 아니에요!”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두 사람의 시선이 날 선 칼날처럼 허공에서 팽팽하게 부딪쳤다.카시안은 처음으로 블랑에게서 낯설음을 느꼈다.자신이 누군지 몰라 벌벌 떨던 순진한 처녀도, 침대 위에서 열락에 젖어 달콤하게
아이린이 빠져나간 집무실은 다시 무거운 적막에 잠겼다.페온 공작은 지팡이를 옆에 내려놓고, 육중한 가죽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독은 독으로 잡는다…….”공작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번졌다.맞은 뺨을 감싸 쥐고도 꼿꼿하게 셈을 하던 딸년은 스스로 제법 영악한 수를 냈다고 자만하겠지만, 아직 아비의 큰 그림을 온전히 읽지는 못했다.아이린의 계산은 어디까지나 카시안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황위를 유지한다는 전제하에 짜인 판이었다. 하지만 늙은 너구리의 셈법은 달랐다.‘서연합과의 전쟁에서 카시안이 패배한다면?’나쁠 것 없는 시나리오였다.아니, 오히려 페온 가문에게는 가장 달콤한 결말일지도 모른다.페온은 이미 오래전부터 서연합의 은화를 삼키며, 제국의 심장부에서 캐낸 최고급 철광석과 무기를 몰래 적국으로 빼돌려주고 있었다.만약 카시안이 이끄는 드라켄이 무너진다면, 페온 가문은 서연합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이자 새로운 시대의 개국공신으로 군림하게 될 것이다.반대로 카시안이 이긴다면?그때는 아이린의 말대로 타티아나를 구출해 온 영웅 행세를 하며 블랑을 쳐내고, 타티아나를 방패막이 삼아 또다시 황제를 주무르면 그만이었다.‘누가 이기든, 권력은 내 발밑에 있어야지.’드라켄 제국이 피바다가 되든, 카시안의 목이 땅에 떨어지든 공작의 알 바가 아니었다.&n
“설마… 타티아나를 다시 제국으로 부르겠다는 거냐? 그 서연합에서 망가질 대로 망가진 년을?”“아름다운 조각상일수록, 처참하게 망가졌을 때 더 깊은 동정심을 자극하는 법입니다.”공작의 미간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그년은 이제 서연합의 인질이나 다름없다. 엘런의 아내를 제국으로 빼돌렸다가는 당장 서연합과 전쟁이 터질 명분을 내어주는 꼴이야! 내 철광석이 거덜 난 마당에 전쟁이라니, 다 같이 죽자는 거냐?”“전쟁은 어차피 터집니다. 카시안 폐하께서 늘 속으로 벼르시던 일 아닙니까?”아이린이 소리 없이 웃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오히려 가장 완벽한 명분이 생기니 반기시겠죠. 게다가 비참하게 짓밟힌 가여운 첫사랑을 구출해 냈다는 영웅적 서사까지 더해지면, 폐하의 이성은 완전히 그 계집에게 멀어버릴 겁니다. 그 틈에 길바닥에서 주워 온 블랑 따위는 하루아침에 성가신 짐덩이로 전락하게 되겠지요.”“…….”“아버지는 그저 혼란에 빠진 폐하를 대신해 다시 의회를 장악하시고, 가문의 손실을 긁어모으시면 됩니다. 욕받이는 블랑과 타티아나가 알아서 해줄 테니까요. 게다가 지옥에 떨어져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목줄을 쥐고 다루기가 아주 쉽거든요.”공작은 잠시 숨을 죽이고 제 딸을 응시했다.살이 터지도록 뺨을 맞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국의 전쟁마저 장기판의 말처럼 굴리며 남의 약점을 파고들어 다음 수를 계산하는 딸.자신이 빚어낸 핏줄이었지만, 가끔은 척추를 타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정이 없는 완벽한 괴물이었다.“……확실히 해라. 다시는 내 얼굴에 먹칠하지 않도록.”“물론이지요.”아이린은 치맛자락을 쥐고 우아하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존경이나 복종이 아니었다. 그저 거래가 성사되었음을 알리는 아주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었다...그날 밤.아이린은 촛불 아래 홀로 앉아 깃펜을 들었다.그녀는 수납장 가장 깊은 곳에서, 최고급 양피지와 달콤한 장미향이 나는 붉은 잉크를 꺼냈다. 쓰레기통에 처박힌 짐승에게 던져주기엔 과
페온 공작의 저택은 거대한 무덤처럼 고요했다.현관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하인들은 벽지처럼 숨을 죽이고 바닥만 응시했다. 주인의 흉포한 기분을 감지한 탓이었다.공작은 겉옷을 받으려는 하인의 손길마저 거칠게 뿌리친 채, 단 한마디도 없이 2층 계단을 쿵쿵 밟고 올라갔다.숨 막히는 적막 속에서 오직 그 폭력적인 발소리만이 일직선으로 저택을 가로질렀다. 이내 거친 발소리가 2층 끝에 위치한 집무실 안으로 들이닥쳤다.어두운 마호가니 책상 앞, 꼿꼿한 자세로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아이린이 치맛자락을 쥐며 우아하게 무릎을 굽혔다.“다녀오셨습니…….”쾅-!인사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무실 문이 부서질 듯 닫혔고, 공작의 두꺼운 지팡이가 바닥을 자비 없이 내리쳤다.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 온 그의 거대한 그림자가 아이린을 덮친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짝!마른 파열음이 서늘한 실내를 날카롭게 갈랐다.아이린의 고개가 속절없이 옆으로 돌아갔다.완벽하게 틀어 올렸던 머리카락이 헝클어졌고, 창백한 뺨 위로 시뻘건 손자국이 흉하게 부풀어 올랐다.그러나 비명은 없었다.그녀는 비틀거리지도, 공포에 질려 울음을 터뜨리지도 않았다.그저 천천히 고개를 바로 세우고, 손등으로 화끈거리는 뺨을 한 번 쓸어내렸을 뿐이다.‘피부는 안 찢어졌네. 내일 일정엔 두꺼운 화장으로 가려지겠어.’그것이 뺨을 맞은 그녀의 첫 번째 생각이었다.아이린에게 아픔이나 수치심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쓰레기 정보였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오직 이 물리적 타격이 내일 사교계 일정에 방해가 되느냐, 아니냐는 건조한 계산뿐이었다.그 소름 끼치도록 무감한 태도가 공작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이 쓸모없는 것!”공작의 얼굴이 붉게 일그러졌다.“네가 그 하찮은 다과회에서 손을 잘못 놀린 대가로, 오늘 내가 치른 값이 얼마인지 아느냐! 감히 굴러먹던 천한 정부 년 따위에게 고개를 숙이고, 기사단 1년 치 무장 비용을 허공에 날렸어!”“…….”“페온 공작가가 한순간에 웃음거리가 되었단 말이다! 고작
블랑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문장을 읽어내렸다.[제7조. 단, 해당 가문이 제국의 안위를 위협하거나 황실에 대한 중대한 기만행위가 있을 시, 황제는 의회의 동의를 거쳐 즉시 권한을 회수할 수 있다.]블랑의 숨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칼은 이미 300년 전부터 그들의 목 밑에 놓여 있었다.다만, 페온 가문의 위세에 눌려 아무도 꺼내지 못했을 뿐.“이 조항을 발동시키려면 중대한 기만행위가 증명되어야겠군요.”“정확합니다.”레녹이 미소 지었다.“그리고 그 과실을 만드는 건… 여론입니다. 백작님, 당신은 대중의 혀를 움직일 수 있지 않습니까. 귀부인들을 다루는 솜씨가 능숙하시던데.”블랑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전 혀보다 손을 움직이게 만드는데 더 능숙합니다만.”“그게 더 좋습니다. 혀는 돌아서지만, 손은 기록을 남기니까.”블랑은 잠시 침묵했다.그 침묵 속에서 자신의 다음 수를 조립했다.칼날은 이미 남자의 손에 쥐여 있었다.그에게 부족한 것은 단 하나, 그 칼을 휘두를 완벽한 명분뿐이었다.나를 부른 이유가 그것이라면 기꺼이 되어주지. 하지만 단순히 던져지는 미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남의 손에 쥐인 칼이 아니라, 내 손으로 칼자루를 함께 쥐어야 한다.블랑은 레녹을 똑바로 바라봤다.“후작님. 저는 전면에 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말씀하십시오.”“실패했을 때 버려지지 않을 보장. 그리고….”블랑이 한 발짝 다가갔다.“이 조항이 발동되어 특별 감사 위원회가 열리면.”그녀의 눈빛이 야망으로 서늘하게 타올랐다.“그 위원회의 황실 대리인 자리를 제게 주십시오.”레녹의 눈이 커졌다.단순히 이름을 알리는 명예직이 아니었다.페온 가문의 장부를 뒤지고, 죄를 심판할 수 있는 실질적인 집행관의 권한을 요구하는 것이다.“……욕심이 과하시군요.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페온이 죽이려 들 텐데.”“상대의 목을 치려면, 내 팔 하나 잘리는 것쯤은 두려워하면 안 되죠.”블랑은 물러서지 않았다.“하지만, 피를 흘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