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남편은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Chapter 61 - Chapter 70

76 Chapters

63화

[스르륵.]지퍼가 척추뼈를 타고 내려감과 동시에, 순백의 실크 드레스가 그녀의 얇은 어깨 아래로 힘없이 허물어졌다.아슬아슬하게 가슴골과 매끄러운 맨등이 고스란히 드러났다.차가운 밤공기가 맨살에 닿아 오소소 소름이 돋았지만, 등 뒤에 선 사내의 거대한 체온이 그녀를 집어삼킬 듯 훅 끼쳐왔다.하지만 블랑은 몸을 가리는 대신, 오히려 고개를 꼿꼿이 들었다. 그녀의 시선이 거울을 통해 등 뒤에 선 카시안과 맞부딪혔다.“선택이라.”블랑은 도발적으로 입꼬리를 올렸다.“폐하께선 이미 선택하신 것 같은데요. 이 밤에, 제 방에 들어오신 순간부터.”“건방지군.”말과는 달리, 카시안의 거친 손이 부드러운 어깨선을 꽉 틀어쥐었다.그가 고개를 숙여, 적나라하게 드러난 하얀 목덜미와 쇄골 사이에 짐승처럼 뜨거운 입술을 파묻었다.“읏… 아!”날카로운 통증과 찌릿한 쾌감이 동시에 밀려왔다.단순한 입맞춤이 아니었다. 살점을 뜯어낼 듯 집요하게 깨물고, 여린 살갗을 혀로 진득하게 핥아 올리는 노골적인 소유의 행위였다.블랑은 본능적으로 그의 단단한 팔뚝을 움켜쥐었다. 아랫배가 속절없이 저릿해졌다.이것은 애정 행각이 아니다. 그가 내일 나에게 쥐여주는 가장 강력한 방패다. ‘그래, 더 깊게 새겨. 아이린이 이 흔적을 보고 질투에 눈이 멀어 미쳐버릴 만큼.’한참 후, 카시안이 붉게 젖은 입술을 떼어냈다.하얗던 그녀의 어깨 위에 잇자국이 선명한 핏빛 울혈이 만개한 꽃처럼 피어났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새겨진, 황제의 지독한 낙인이었다.“내일 연회장에는 저 드레스를 입고 갈 테지.”카시안이 엄지로 붉은 흔적을 꾹 누르며 만족스럽게 속삭였다.“가리지 마라. 그게 네 목줄이자 신분증이 될 테니.”블랑은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방금까지 우아하게 서 있던 귀족 영애는 사라지고, 황제의 손길에 헝클어진 관능적인 창부가 서 있었다.수치심?아니, 이건 완벽한 훈장이었다.블랑은 몸을 돌려 카시안을 마주 보았다.허리춤까지 아슬아슬하게 흘러내린 드레스 자락을 굳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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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같은 시각, 서연합의 본거지인 사막 도시 카르탄.벨모어와 엘런이 빠진 거대한 군막 안은, 남겨진 연합국 왕자들의 탐욕스러운 성토장으로 변해 있었다.군막 안에는 싸구려 독주와 피비린내, 그리고 진득한 정액 냄새가 역겹게 뒤섞여 있었다.발가벗겨진 채 목줄이 채워진 아르센의 여성 포로들이 왕자들의 발밑에서 벌벌 떨며 술잔을 채우고 있었다.“아니, 이게 말이 됩니까? 벨모어 그 미친놈이 벌써 아르센 황궁에 깃발을 꽂고 옥좌에 앉았다니요!”한 부족의 왕자가 발밑의 포로를 걷어차며 분통을 터뜨렸다. 여자의 억눌린 비명이 울렸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빈집 털기가 쉽다는 건 알았지만, 아르센의 알짜배기 금은보화며 쓸만한 귀족 년들까지 지가 다 독식할 줄은 몰랐소! 우린 뭐, 다 찌그러진 변방 영지나 주워 먹고 들러리나 서란 거요?”“맞소! 이러다 아르센 전체가 벨모어의 개인 번식장이 되게 생겼단 말이오!”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전리품과 여자.벨모어가 아르센을 독식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피에 굶주린 하이에나 떼의 모습이었다.그때, 벗은 포로의 헐떡이는 등을 발걸이 삼아 비스듬히 누워 독주를 홀짝이던 제3왕자 자하드가 피식 웃으며 끼어들었다.“다들 너무 흥분하지 마십시오. 벨모어 형님이 독식에 미친 건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자하드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게다가 그 잘난 형제들이 지금 제정신이 아니잖아요. 엘런 형님 소식은 들으셨습니까?”“엘런? 그 발정 난 망나니 놈 말입니까? 아르센 황궁에 같이 들어갔다던데.”“글쎄, 그 망나니가 아주 꼴 좋게 당했답니다. 아르센 황후 년을 어떻게 벗겨보려다가, 바지춤 내리기도 전에 오히려 그 독한 년 단검에 얼굴이 쫙 그어졌다더군요.”“허, 얼굴이?”“살점이 너덜거릴 정도로 완전 개차반이 됐답니다. 짐승처럼 덮치려다 계집애 칼질 한 번에 불알이 쪼그라든 충격으로, 반쯤 미쳐서 지금 아르센 구석에 처박혀 있다고 하더군요.”왕자들 사이에서 비열한 웃음과 조롱 섞인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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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다음 날 아침. 황궁은 이른 시각부터 소란스러웠다.“세상에, 들었어? 어젯밤 폐하께서 뒷방에 온갖 최고급품을 다 들이부으셨대!”“맞아. 게다가 시중들러 들어갔던 애들 말로는, 그 여자 어깨에 폐하께서 남기신 키스 자국이 선명했다던데? 당장이라도 잡아먹으려는 걸 겨우 참고 나오신 얼굴이었대!”시녀들의 수군거림이 복도를 타고 퍼져나갔다.그리고 그 소문은 가장 먼저, 아이린이 머무는 페온 공작가의 저택에 닿았다...[페온 공작저의 집무실]집사의 예상과 달리, 아이린은 보고를 받고도 목소리를 높이거나 흥분하지 않았다.그녀는 그저 우아하게 찻잔을 내려놓고, 눈앞에 펼쳐진 두꺼운 가죽 장부를 한 장 넘겼다.[사각.]종이 넘기는 소리가 숨 막히는 정적을 갈랐다.“……황실 내탕고를 열어, 그 천한 것에게 최고급 드레스와 보석을 바쳤다고?”그녀의 목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차분했다.보고를 올린 전령이 오히려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조아렸다.“예, 예…. 게다가 폐하께서 남기신 붉은 흔적이 어찌나 살벌하던지, 시녀들이 감히 고개도 들지 못했다고 합니다. 마치 누구도 손대지 못하게 경고하는 것 같았다고….”아이린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재밌네. 싸구려 전리품인 줄 알았더니, 폐하의 눈을 꽤 멀게 만든 비싼 장난감이었나 봐.”그녀에게 카시안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다.드라켄 제국이라는 거대한 왕관에 박힐, 가장 화려하고 값비싼 다이아몬드였다.‘가장 완벽한 내 장식품이어야 하는데.’감히 길거리에서 주워 온 잡동사니가 흠집을 냈다.질투심보다는 소유물에 대한 불쾌감이 먼저였다. 그것은 마치 아끼는 값비싼 구두에 오물이 묻은 듯한 찝찝함과 비슷했다.“폐하께서 요즘 군비 문제로 골머리를 앓으시더니, 아주 판단력이 흐려지셨나 봐. 쥐어준 권력에 취해, 진짜 주인이 누군지 잊으시다니.”아이린은 붉은 잉크가 묻은 펜을 들었다.그녀가 보고 있던 것은 드라켄 제국 전체의 철광석 생산량 및 납품 장부였다. 그녀는 장부의 한 줄을 붉은 펜으로 좍 그어버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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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황궁 대연회장은 이미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샹들리에의 불빛 아래, 화려한 드레스와 제복을 입은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 주제는 단 하나였다. “들었나? 어젯밤 폐하께서 그 여자 방에 온갖 귀물들을 쏟아부으셨다더군.”“세상에, 내탕고를 열다니. 즉위 후 처음 있는 일 아닙니까?”“게다가 오늘 아침 황궁 시녀들의 눈이 다 뒤집혔답니다. 대체 어떤 요물이길래 그 냉혈한 황제를 짐승으로 만든 건지….” 그때,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시종장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제 폐하의 동반자, 블랑 님 입장하십니다!” 순간, 연회장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수백 개의 시선이 입구로 쏠렸다. 그 적대적이고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으며, 블랑이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저, 저 여자야?”“……세상에, 어깨 좀 봐!” 그들이 상상한 건 요사스러운 꽃뱀이나 촌스러운 시골 처녀였다.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여자는, 창백할 만큼 하얀 피부와 신비로운 은회색 눈동자를 빛내며 마치 이 연회장을 사찰 나온 감찰관처럼 여유롭게 걷고 있었다. 무엇보다 귀족들의 혀를 내두르게 한 것은, 파격적으로 파인 오프숄더 드레스 위로 적나라하게 드러난 핏빛 낙인이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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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이제 제 자격은 증명된 건가요? 공녀님.”아이린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더 이상 이 여자를 쫓아내려 한다면 그건 황제에 대한 불경죄였다.패배감과 굴욕감에 아이린의 몸이 휘청거렸다.그때였다.“늦었군.”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칼날로 쪼개듯 인파가 갈라지고, 검은 제복을 입은 카시안이 걸어오고 있었다.그는 사색이 된 아이린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장 블랑의 곁으로 다가왔다.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내 여자를 세워두고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카시안의 시선이 싸늘하게 아이린을 향했다.아이린은 입술을 깨물었다.황제가 직접 등판한 이상, 물러서야 했다.하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폐하. 법도를 지키라고 말씀드리는 중이었습니다.”아이린이 부채를 꽉 쥐며 또박또박 말했다.“황실 연회는 제국에 적을 둔 귀족만이 참석할 수 있습니다. 출신도, 작위도 없는 여인이 이곳에 있는 건 명백한 국법 위반입니다.”그녀의 말에 주변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아무리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 해도, 신분 사회의 룰을 깰 수는 없는 법.이것만큼은 아이린의 논리가 완벽했다.블랑은 짐짓 곤란한 표정으로 카시안을 올려다보았다.“그렇다는데요, 폐하? 제가 주제를 몰랐나 봐요.”그녀는 카시안의 옷깃을 살짝 잡아당기며, 물러나려는 시늉을 했다.카시안이 그런 블랑의 손을 덥석 잡았다.“법도라.”카시안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 웃음이 너무나 오만해서, 아이린의 등골이 서늘해졌다.“공녀. 그대가 말하는 귀족의 자격이란 게 뭐지? 오래된 핏줄? 썩어빠진 영지?”“……폐하.”“드라켄에서 귀족의 자격은 오직 황제인 내가 정한다.”카시안은 시종에게 손짓해 샴페인 잔을 받아 들었다.그리고 연회장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선언했다.“듣거라.”모든 시선이 황제에게 집중되었다.“짐은 오늘부로 그대들의 앞에 있는 이 여인, 블랑에게….”그가 잠시 뜸을 들이며, 사색이 된 아이린을 곁눈질했다.“드라켄 북부의 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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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폭풍이 지나간 연회장엔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았다.블랑은 시종이 건넨 샴페인 잔을 쥐고 주위를 훑었다.단순한 구경꾼들이 아니었다.그들은 저마다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황제의 새로운 총애이자, 북부의 새로운 지배자 블랑 백작. 그녀가 가진 이용 가치를.그때였다. 팽팽한 침묵을 가르고, 나른하면서도 귓가를 긁어내리는 듯한 미성이 울려 퍼졌다.“과연, 폐하의 안목은 틀림이 없으시군요.”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쏠렸다.인파를 가르고 걸어 나온 남자의 모습에, 장내의 공기가 묘하게 뒤틀렸다.그는 이질적일 만큼 창백하고 유려한 사내였다.햇빛을 보지 않은 듯 투명할 정도로 하얀 피부, 단정하게 넘긴 은발.가녀린 선을 가진 병약하고 퇴폐적인 외모였으나, 은테 안경 너머로 호선을 그리는 눈매만큼은 서늘하고 교활했다.에크하르트 후작가의 젊은 후계자, 레녹.무력을 숭상하는 드라켄에서 오직 법과 논리, 그리고 피도 눈물도 없는 지략으로 늙은 의원들을 뒷방으로 걷어차 버린 괴물.20대의 나이에 실질적인 의회 수장 자리를 꿰찬 유일한 문관이었다.레녹이 긴 손가락으로 은테 안경을 추어올리며 블랑을 내려다보았다.그의 시선이 블랑의 헐벗은 어깨와 핏빛 낙인을 느릿하게 훑었다. 천박한 정욕이 아니었다. 가장 완벽한 예술품, 혹은 가장 치명적인 무기를 감정하는 눈빛이었다.‘페온 가문의 무식한 늙은이들을 단숨에 찍어 누를, 아주 위험하고 매력적인 물건이 굴러들어왔군.’레녹이 블랑을 향해 정중하게, 그러나 명백한 유혹의 의도를 담아 샴페인 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북부의 새로운 여주인 서임을 축하드립니다, 백작님. 앞으로 의회에서도 자주 뵙기를 기대하겠습니다.”끝을 흐리는 나른한 어조. 그 안에 담긴 뜻은 명확했다.‘내 손을 잡아. 당신의 완벽한 정치적 뒷배가 되어 주겠어.’블랑의 눈이 가늘어졌다.무식하게 칼만 휘두르는 놈들보다, 저렇게 웃으면서 사람 피를 말리는 부류가 더 까다롭지만…… 동시에 가장 써먹기 좋은 칼이 되는 법이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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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카시안의 입매가 비틀려 올라갔다.“밤새 내 침대 위에서 흐느끼며 온갖 짓거리를 버텨내던 몸뚱이가, 춤 한 곡쯤 못 맞출까.”“……폐하.”블랑이 작게 이를 갈며 붉어진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주변에서 숨죽인 기침 소리가 터졌다.‘하지도 않은 짓을 참 뻔뻔하게도 떠드는군.’살점만 뜯어놓고 도망치듯 나간 쪽은 자신이었으면서, 남들 앞에서는 아주 밤새 저를 취한 것처럼 굴고 있었다.하지만 은밀한 침실의 농담은, 황제의 입에서 연회장 한가운데로 쏟아진 순간 그것은 모든 사내들에게 보내는 노골적인 소유권 선언이 되어버렸다.블랑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좋아. 그 정도로 날 갖고 놀고 싶다면, 끝까지 맞춰 주지.’ 카시안이 그녀를 이끌어 중앙으로 나서자, 다른 귀족들이 홍해처럼 갈라지며 무대를 비웠다.블랑은 숨을 고르고, 그가 이끄는 대로 한 발, 한 발 스텝을 밟았다.“생각보다 제법인데.”“기억을 잃기 전에, 저도 춤 정도는 췄던 모양이네요.”“이런 황궁 연회에서?”블랑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지만, 이내 요사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글쎄요. 그랬다면 지금쯤 저기 하인들 틈에서 접시나 닦고 있었겠죠.”카시안은 제 입맛대로 다루듯 그녀의 허리를 옭아매고 세밀하게 스텝을 조정했다.[스윽.]얇은 실크 드레스 너머로 카시안의 단단한 허벅지가 블랑의 허벅지 사이를 노골적으로 파고들며 아슬아슬하게 교차했다. “내 이름을 아주 잘 갖다 쓰더니, 내 품에서 딴 주머니 찰 생각부터 하나?”카시안이 블랑의 귓불을 지그시 깨물며 낮게 속삭였다. 레녹과 눈을 마주친 것에 대한 추궁이었다.“나중에 의회 늙은이들을 장악하려면, 저런 남자도 하나쯤 필요하거든요.”“하. 발칙한 핑계는.”그가 블랑의 허리를 쥔 손에 힘을 주어 더 바짝 밀착시켰다. 두 사람 사이에는 종이 한 장 들어갈 틈조차 없었다.“전쟁은 국경에서만 나는 게 아니다.”카시안이 그녀의 시선을 집어삼킬 듯 옭아매며 중얼거렸다.“이 연회장도 훌륭한 전장이지. 돈줄과 입김, 숨겨진 세력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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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화려하고 소란스러웠던 연회장을 뒤로하고, 황제의 사적인 구역으로 들어서자 공기부터 서늘하게 가라앉았다.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설렘 때문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시작될 진짜 전쟁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였다.안내하는 시종장의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에서, 블랑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세뇌했다.‘나는 블랑이다. 기억을 잃은 여자, 블랑.’그녀는 자신의 처소를 지나쳐, 황제의 본실로 곧장 이어지는 안쪽 문 앞에 섰다.카시안은 빈틈이 없는 남자다. 그는 블랑을 탐하면서도, 동시에 끊임없이 시험할 것이다.오늘 밤, 그와의 동침은 피할 수 없다. 작위를 받았고, 판을 벌였으니 응당 치러야 할 대가였다.‘한 번은 거쳐야 해.’블랑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남편이었던 자가 아닌 다른 사내를 받아들이는 것.하지만 망설일 시간 따윈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아야 했으니까.“도착했습니다, 백작님.”시종장이 거대한 양문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커다란 문에는 드라켄 황실의 상징인 포효하는 검은 늑대가 조각되어 있었다. 마치 아가리를 벌리고 그녀를 기다리는 괴물 같았다.[끼이익.]문이 열리고, 블랑은 깊게 심호흡을 하며 발을 내디뎠다.작은 무도회장을 통째로 옮겨 놓은 듯 넓었고, 어두웠다. 은은한 조명만이 거대한 침대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그녀는 당연히 가운 차림의 카시안이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거나, 와인잔을 들고 있을 거라 예상했다.하지만.“……아.”블랑의 발이 바닥에 못 박힌 듯 멈췄다.침대 곁에는 카시안 대신, 조그마한 체구의 시녀 한 명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익숙한 갈색 머리, 주근깨가 흩뿌려진 앳된 얼굴. 그리고 공포에 질려 있으면서도 어딘가 그리움이 묻어나는 눈동자.에다.엘런의 계략에 휘말려 죽을 뻔했던 아이.로제가 몰래 손을 써서 이곳 드라켄으로 빼돌렸던, 바로 그 아이였다.‘네가 왜 여기에…….’블랑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그 찰나의 동요를 놓칠 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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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명령은 짧았고, 공기는 무거웠다.블랑은 잠시 굳어 있었지만, 이내 천천히 손을 들어 드레스의 매듭에 손을 올렸다. ‘수치심 따위는 개나 줘버려.’여기서 울먹이거나 망설이면, 방금 전 연회장에서 보여준 당당한 파트너의 가면이 깨진다.그녀는 턱을 꼿꼿이 치켜들고, 카시안의 붉은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매듭을 풀었다.[스르륵.]값비싼 실크 드레스가 허물처럼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곧이어 얇은 속옷조차 걸치지 않은, 완벽한 나신이 드러났다.한기 때문인지, 아니면 전신을 핥아 내리는 듯한 남자의 시선 때문인지 하얀 피부 위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카시안은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그 모습을 감상했다. 블랑의 나신이 드러나자 그의 눈빛이 먹물을 푼 듯 짙게 가라앉았다.“생각보다 망설임이 없군.”손끝으로 확인했던 몸, 그러나 아직 온전히 파헤치지 못한 금단의 성역.볼 때마다 타오르는 지독한 갈증을 그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폐하께서 살려준 몸이니까요. 마음대로 쥐고 흔드시는 것도 폐하의 권리죠.”블랑은 짐짓 요염하게 웃으며 한 걸음 다가갔다. 하지만 등줄기는 식은땀으로 축축했다.그때, 카시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 다가왔다.“항상 말은 잘해.”그는 다가온 블랑의 허리를 단숨에 낚아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얇은 몸이 그의 단단한 허벅지 사이에 속절없이 갇혔다.“그런데 표정은 왜 그 모양이지?”그 질문에는 장난기가 없었다. 온전히 제 것이라 여긴 먹잇감에게서 다른 사내의 흔적을 발견한 것처럼, 붉은 눈동자가 살벌하게 좁혀졌다.블랑은 떨리는 숨을 삼키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어떻게든 이 압도적인 공기를 환기해야 했다. “그런데 폐하께… 여쭤볼 게 있습니다. 오늘 연회에서 본 사람들 중에… 레녹 후작가에 대해서…….”말을 꺼내자마자 공기가 얼어붙었다. 순식간이었다.“…그래? 그 안경잡이 새끼에게 발정이라도 났나?”낮게 깔린 목소리에 담긴 흉폭한 질투는 명백했다.블랑이 변명할 틈도 없이, 그의 크고 거친 손이 그녀의 뒷목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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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서연합 국경 외곽, 전쟁 노예를 실은 수송 수레]덜컹거리는 진동과 함께 육중한 쇠사슬이 부딪쳤다.축축한 천막 틈새로 스며드는 한겨울의 냉기와 썩어가는 피 냄새가 진동했다.수레 안에 짐짝처럼 구겨진 노예들의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목숨값보다 사슬값이 더 비싼 고기방패들.그중 구석에 처박힌 한 남자, 레온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웅크리고 있었지만, 어둠 속에서 들썩이는 흉통만큼은 짐승처럼 기괴하고 묵직한 숨을 뱉어내고 있었다.‘……조금만 기다려.’죽어 있던 그의 심장이, 오직 한 여자의 흔적을 쫓아 미친 듯이 박동하기 시작했다.아르센.그의 모든 것이자, 모든 걸 잃은 곳. 그리고 잃어버린 아내가 있는 곳.천막 바깥에서 병사들의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이 노예들은 아르센 국경에 넘기면 된다지?”“그래. 서연합이 고용한 전선 보조라고… 뭐, 그냥 죽이기엔 아깝다나?”“아깝다고? 이런 고깃덩어리들이?”비웃음 섞인 발걸음이 멀어져 갔다.그 순간, 레온의 입꼬리가 어둠 속에서 기괴하게 찢어지며 비틀렸다. 그것은 비웃음이 아니라, 먹잇감의 목을 물어뜯기 직전인 맹수의 환희였다.아르센 국경. 드디어 도착했다.이 냄새나는 수송 수레에 얌전히 짐짝처럼 타준 것은, 오직 이곳에 빠르고 조용하게 도달하기 위함이었을 뿐.[쩌적- 투둑!]돌조각으로 갉아낼 필요조차 없었다.레온이 전완근에 핏줄이 터질 듯 힘을 주자, 그를 구속하던 두꺼운 강철 사슬이 종잇장처럼 허무하게 뜯겨 나갔다.“어이, 쥐새끼들. 조용히들 하…….”순찰을 돌던 경비병이 인원 점검을 위해 천막을 걷어 올린 순간,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어둠 속에서 세로로 찢어진 금안(金眼)이 섬뜩하게 번뜩였고, 레온의 거대한 손아귀가 병사의 안면을 통째로 짓눌렀다.[우드득-!]끔찍한 파열음과 함께 병사의 목이 기괴하게 꺾였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즉사였다.두 번째 병사가 기겁하며 검을 뽑으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투기장의 지옥에서 살아남은 괴물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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