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고 소란스러웠던 연회장을 뒤로하고, 황제의 사적인 구역으로 들어서자 공기부터 서늘하게 가라앉았다.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설렘 때문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시작될 진짜 전쟁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였다.안내하는 시종장의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에서, 블랑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세뇌했다.‘나는 블랑이다. 기억을 잃은 여자, 블랑.’그녀는 자신의 처소를 지나쳐, 황제의 본실로 곧장 이어지는 안쪽 문 앞에 섰다.카시안은 빈틈이 없는 남자다. 그는 블랑을 탐하면서도, 동시에 끊임없이 시험할 것이다.오늘 밤, 그와의 동침은 피할 수 없다. 작위를 받았고, 판을 벌였으니 응당 치러야 할 대가였다.‘한 번은 거쳐야 해.’블랑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남편이었던 자가 아닌 다른 사내를 받아들이는 것.하지만 망설일 시간 따윈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아야 했으니까.“도착했습니다, 백작님.”시종장이 거대한 양문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커다란 문에는 드라켄 황실의 상징인 포효하는 검은 늑대가 조각되어 있었다. 마치 아가리를 벌리고 그녀를 기다리는 괴물 같았다.[끼이익.]문이 열리고, 블랑은 깊게 심호흡을 하며 발을 내디뎠다.작은 무도회장을 통째로 옮겨 놓은 듯 넓었고, 어두웠다. 은은한 조명만이 거대한 침대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그녀는 당연히 가운 차림의 카시안이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거나, 와인잔을 들고 있을 거라 예상했다.하지만.“……아.”블랑의 발이 바닥에 못 박힌 듯 멈췄다.침대 곁에는 카시안 대신, 조그마한 체구의 시녀 한 명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익숙한 갈색 머리, 주근깨가 흩뿌려진 앳된 얼굴. 그리고 공포에 질려 있으면서도 어딘가 그리움이 묻어나는 눈동자.에다.엘런의 계략에 휘말려 죽을 뻔했던 아이.로제가 몰래 손을 써서 이곳 드라켄으로 빼돌렸던, 바로 그 아이였다.‘네가 왜 여기에…….’블랑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그 찰나의 동요를 놓칠 리
Last Updated : 2026-05-19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