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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멍든 꽃의 계절: Chapter 21 - Chapter 30

83 Chapters

20화. 사랑이라 포장 된 가스라이팅

20화.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한 걸음 더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오늘 우리 팀에 들어온 신입 사원이랑 저녁을 먹었습니다. 이름이 참 예쁘더군요. 유바다 씨라고.”순간, 하늘이 쥐고 있던 펜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데스크 아래로 숨긴 그녀의 손이 눈에 띄게 떨리기 시작했다.동혁은 그 떨림을 외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이름이 선생님이랑 너무 잘 어울려서 혹시나 했습니다. 그 친구가 동생 자랑을 하도 유난스럽게 하길래 궁금했는데…….”동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하늘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직접 보니까 알겠네요. 왜 그렇게 과보호하며 아끼는지. 선생님 같은 동생이면, 저라도 누가 털끝 하나 건드리는 거 못 참을 것 같습니다.”하늘의 안색이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렸다.동혁의 말은 위로였으나, 하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경고였다.재현이 오빠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의 공포, 그리고 오빠가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느낄 무너짐.그 두 가지 두려움이 그녀를 짓눌렀다.“……오빠한테…. 제 이야기하셨나요?”하늘의 목소리가 울음 섞인 비명처럼 가늘게 갈라졌다.동혁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동혁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씁쓸하게 덧붙였다.“하지만 하늘 씨, 비밀은 지키는 게 아니라 사라지는 겁니다. 숲이 불타면 숨어있던 새도 날아오를 수밖에 없어요. 그전에…… 선생님이 먼저 안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하늘은 대답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동혁은 더 이상 그녀를 몰아세우지 않고 몸을 돌렸다.동혁이 떠난 복도에는 그의 구두 소리만 길게 꼬리를 물다 사라졌다.하늘은 텅 빈 스테이션에 홀로 남겨진 채, 그가 두고 간 약국 봉투를 멍하니 응시했다.바스락거리는 비닐 소리가 마치 재현의 낮은 경고음처럼 귓전을 때렸다.소리 없는 눈물이 차올랐다.하늘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재현은 자신을 사랑한다.그의 지독한 소유욕을 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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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동혁

21화. 동혁비밀을 들킨 아이처럼 하늘의 어깨가 떨렸다.“……오빠는 몰라요.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그런 것 같더군요. 바다 씨 앞에서는 아는 척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예요? 저한테 왜 신경을 쓰시냐고요.”하늘이 울분 섞인 질문을 던졌다.동혁은 잠시 침묵하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어릴 적 제 모습이 겹쳐 보여서 그런가 봅니다.”“동정하는 건가요? 불쌍해서?”“호감입니다.”단호한 고백에 하늘의 숨이 멎었다.“제가 남자 친구가 있는데도요? 미친 거 아니에요?”“그런 놈은 남자 친구라고 부를 수 없으니까요.”“제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세요?”“아니요. 선생님의 마음이 아니라, 그 남자의 뒤틀린 집착이 사랑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하늘은 입술을 짓이기며 신음했다.자신이 평생을 걸고 지켜온 유일한 세계가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더 이상 제게 호의를 베풀지 마세요. 부탁이에요.”“그 남자 때문입니까?”“네.”“그건 사랑해서 지키는 건가요, 아니면 두려워서 도망치는 건가요?”하늘은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동혁과 함께 있는 모습을 재현이 보게 된다면, 그날 밤의 지옥이 다시 반복될 것이다.그것은 명백한 두려움이었다.하지만 하늘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자신의 인생이 그저 폭력의 희생양이었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순간, 과거에 행복했던 찰나의 기억들마저 모두 재가 되어 사라질 것 같아 애써 붙잡고 있었다.동혁은 카디건을 집어 들어 하늘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덮어주었다.그의 손길은 재현과는 결이 달랐다.뜨겁지 않았지만, 심장을 잔잔하게 울리는 온기가 있었다. 하늘은 그 온기가 무서워 서둘러 병실을 빠져나왔다.동혁은 멀어지는 하늘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그녀가 남기고 간 서늘한 공기가 병실 안을 무겁게 감돌았다.조금 전 목격한 그 ‘푸른 꽃’들의 잔상이 망막에 화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았다.동혁은 천천히 침대 옆 의자에 몸을 묻었다.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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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사고

22화. 사고짝!고막을 찢는 듯한 파열음과 함께 하늘의 고개가 힘없이 꺾였다.비릿한 혈흔의 맛이 혀끝을 스치기도 전, 재현의 서늘한 음성이 좁은 거실을 얼어붙게 했다.“내가 누나 야근할 때마다 밖에서 얼마나 기다리는지, 잊었어?”“다, 당연히 알고 있지. 재현아, 제발…… 갑자기 왜 그래.”하늘은 떨리는 손으로 화끈거리는 뺨을 감싸 쥐었다.그러나 재현은 짐승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몰아세웠다.“어제저녁, 그 남자랑 무슨 얘길 그렇게 길게 했어? 누나가 제 발로 병실까지 쫓아가던데.”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재현이 병원 앞에서 자신을 감시하고 있으리라곤, 아니, 그가 그림자처럼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어제는 잠시 잊고 있었다.동혁이 내민 연고와 그가 던진 ‘호감’이라는 단어에 홀린 듯 303호로 향했던 대가는 혹독했다.“벼, 별말 안 했어. 할머니 상태가 안 좋으셔서 설명해 드린 것뿐이야. 보호자가 병실에서 상태 좀 봐달라고 부탁하길래…….”“누나. 이제 나한테 거짓말까지 하는 거야?”재현의 눈에 일렁이는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그것은 소유물을 훼손당한 주인의 뒤틀린 광기였다.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 재현의 손발이 무차별적으로 하늘을 향해 쏟아졌다.하늘은 비명을 지르는 법조차 잊은 채, 그저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려 급소를 방어했다.바닥을 구르는 둔탁한 소리만이 정적을 메웠다.하늘이 저항도 없이 폭력을 받아내자, 재현은 오히려 기묘한 답답함을 느꼈다.그 불쾌한 감정은 불에 기름을 부은 듯 그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재현은 바닥에 널브러진 하늘의 머리채를 움켜쥐어 낚아챘다.“이 눈으로 똑바로 봐. 누나가 누굴 화나게 했는지!”억지로 끌어올려진 하늘의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렸다.그 찰나, 재현의 손바닥이 다시 한번 허공을 갈라 그녀의 안면을 강타했다.중심을 잃은 하늘의 몸이 종잇장처럼 튕겨 나가 바닥을 향해 고꾸라졌다.쿵!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재현은 숨을 몰아쉬며 쓰러진 하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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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기억

23화. 기억사흘간의 깊은 잠은 비정상적으로 고요했다.그 침묵을 깨고 하늘이 눈을 떴을 때, 병실 안의 공기는 안도감이 아닌 기묘한 괴리감으로 뒤덮였다.매일 저녁 요양병원에서 이곳으로 곧장 퇴근해 동생의 곁을 지키던 바다가 가장 먼저 그 움직임을 포착했다.“하늘아, 오빠 보여? 정신이 들어?”바다가 다급하게 간호사를 호출했고, 곧이어 상현이 차트를 들고 나타났다.그는 노련한 손길로 하늘의 동공을 살피고 몇 가지 질문을 던졌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상현의 계산마저 빗나가게 했다.“오빠, 나 왜 여기 있어? 며칠이나 지난 거야? 나 학원이랑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어떡해?”하늘의 목소리는 맑았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현재의 시간 축을 완전히 이탈해 있었다.바다는 얼어붙은 채 상현의 눈치를 살폈다.상현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하늘 씨, 지금이 몇 년도인지 기억합니까?”“그걸 왜 물으세요? 당연히 2024년이잖아요.”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이 바다를 덮쳤다.2024년.하늘이 요양병원에 취직하기도 전, 그리고 문제의 ‘재현’과 깊은 관계가 되기 전의 시간이었다.바다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상현을 간절하게 쳐다보았다.상현은 바다를 복도로 데리고 나갔다.무거운 정적이 흐르는 복도에서 상현이 낮게 입을 뗐다.“해리성 기억상실증으로 보입니다. 충격으로 인해 뇌가 특정 시점 이후의 기억을 거부하는 거죠. 일시적일 수도, 영원할 수도 있습니다.”“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억지로 기억을 되살리려 자극하지 마세요. 방어기제가 작동한 상태라 무리한 자극은 정신적인 붕괴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일주일 정도 예후를 보고 퇴원하시죠. 병원비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전액 부담하겠습니다.”바다가 손사래를 쳤으나 상현의 태도는 완강했다.“제 아들의 연인이기도 하고, 같이 있다가 난 사고니 책임지게 해주십시오.”상현의 목소리는 정중했으나 눈빛은 차가운 비즈니스맨의 눈빛이었다.바다는 그 눈빛에서 묘한 압박감을 느끼며 입을 다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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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기시감

24화. 기시감욕실 문이 열리며 몽글몽글한 수증기가 배어 나왔다.갓 씻고 나온 하늘의 얼굴은 뽀얗게 상기되어 있었으나, 재현의 눈에는 그 온기조차 위태로운 전조처럼 읽혔다.재현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옆 의자를 다급히 정리하며 짐짓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아, 재현아.”하늘이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내며 낮게 그를 불렀다.재현은 제 발끝이 들릴 정도로 몸을 뻣뻣하게 세우고 그녀의 기색을 살폈다.“누나, 벌써 다 씻었어? 몸도 안 좋은데 좀 천천히 하지.”재현의 목소리는 다정했으나, 시선은 하늘의 목덜미나 손목처럼 환자복 밖으로 드러난 피부를 강박적으로 훑고 있었다.하늘은 대답 대신 수건을 내려놓고는 재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그 눈동자에 서린 낯선 의구심에 재현의 심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응. 근데 재현아…….나 쓰러지기 전에 정말 무슨 일 없었어?”“왜? 갑자기 그건 왜 물어.”재현은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치며 뒷걸음질 치는 본능을 간신히 억눌렀다.하늘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시선을 떨어뜨렸다.욕실 거울 앞에서 마주했던 그 기괴한 보랏빛 얼룩들이 환영처럼 눈앞을 어지럽혔다.누군가에게 짓눌리고 두들겨 맞은 듯한 그 정직한 통증의 흔적들을 사랑하는 연인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아, 그게…….”막상 입을 떼려니 말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2년이라는 공백 사이에 혹시 재현 몰래 누군가에게 험한 일을 당했던 건 아닐까, 혹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추악한 사건에 휘말렸던 건 아닐까 하는 막연한 공포가 혀를 굳게 만들었다.재현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믿어서였다.자신이 겪었을지도 모를 불행을 말했을 때, 그가 받게 될 충격이나 자신을 바라볼 동정 어린 시선이 두려웠다.하늘은 환자복 소매를 자꾸만 끌어 내려 손목을 감췄다.“그냥, 몸이 너무 여기저기 쑤셔서. 쓰러질 때 많이 굴렀나 싶어서 물어봤어.”하늘은 결국 진실을 삼키고 어설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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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대면

25화. 대면일주일간의 연차.바다에게 그것은 휴가가 아니라 일종의 형벌이었다.동생이 사고를 당할 때 곁에 없었다는 자책감은 그를 주방으로, 청소기로, 그리고 하늘의 방 앞으로 끊임없이 내몰았다.“하늘아, 전복죽 좀 더 먹을래? 오빠가 간 딱 맞춰놨는데.”바다는 국자를 든 채 거실을 기웃거렸다.소파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보던 하늘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2024년의 기억 속에 멈춘 하늘에게, 훌쩍 커버린 오빠의 헌신적인 모습은 듬직하면서도 왠지 모를 서글픔을 자아냈다.띵동-.정적을 깬 것은 초인종 소리였다.바다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현관으로 달려갔다.“재현인가 보네. 아까 퇴원 축하한다고 케이크 사 온다더니.”바다가 활짝 문을 열었지만, 그곳에 서 있는 것은 화려한 케이크 상자가 아니었다.감색 코트 깃을 세운 채, 서늘한 눈매를 가진 사내.동혁이었다.“……팀장님? 아니,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바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회사에서는 칼같이 공사를 구분하던 사수였다.그런 그가 직원의 집까지 직접 찾아온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유바다 씨가 자리를 비우니 업무 진척이 안 돼서 말입니다. 근처에 왔다가 들렀습니다.”동혁의 시선은 바다의 어깨너머, 소파에 앉아 있는 하늘에게 머물렀다.바다는 당황하면서도 그를 안으로 안내했다.“하늘아, 인사드려. 오빠 사수 되시는 구동혁 팀장님이야.”하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동혁을 마주했다.2024년의 기억 어디에도 없는 남자였다.그런데 이상했다.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심장 한구석이 날카로운 바늘에 찔린 듯 따끔거렸다.뇌는 모른다고 말하는데,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처음 뵙겠습니다. 유하늘입니다.”하늘의 정중한 인사에 동혁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그는 바다가 차를 준비하러 주방으로 간 사이, 테이블 위에 작은 약국 봉투를 내려놓았다.“기억을 잃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우리가 어떤 사이였는지도 잊으셨겠군요.”동혁의 낮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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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생각지도 못한 위기

26화. 생각지도 못한 위기창틀을 잡은 하늘의 손끝이 하얗게 질려갔다.얇은 커튼 너머로 보이는 동혁의 실루엣은 미동도 없었다.마치 그 자리에 뿌리내린 고목처럼, 혹은 밤의 어둠 그 자체가 된 것처럼. 휴대전화가 손바닥 안에서 다시 한번 묵직하게 떨렸다.[바다 씨가 있어서 아무 일 없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안심되지 않아서 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지랖 부려서 죄송합니다.]동혁의 문장은 지나치게 정중해서 오히려 그 이면의 절박함을 드러냈다.하늘은 자판 위에서 망설이던 손가락을 움직였다.재현이 곁에 있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묘한 해방감이 손가락 끝을 타고 흘렀다.[아니에요. 저에게 몰래 연락처를 주신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전송 버튼을 누르기가 무섭게 말풍선이 떴다.동혁은 이미 답장을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제가 말한 푸른 꽃에 대해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알고 계신가요?][하늘 씨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선택.그 단어가 하늘의 가슴을 서늘하게 할퀴고 지나갔다.하늘은 등 뒤의 닫힌 방문을 돌아보았다.거실에서는 바다가 TV를 끄고 방으로 들어가는 발소리가 들렸다.집 안은 완벽한 정적에 잠겼지만, 하늘의 머릿속은 거울 앞에서 보았던 그 보랏빛 멍 자국들이 난생처음 보는 기괴한 꽃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알고 싶었다.기억이 도려내진 2년이라는 공백, 그리고 다정한 미소로 자신을 옭아매는 재현의 진실을.하지만 동시에 본능적인 공포가 발목을 잡았다.저 꽃의 뿌리가 어디에 닿아 있는지 확인하는 순간, 자신이 알던 평온한 세계가 산산조각 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자신은 왜 이 남자에게 그 멍 자국을 '푸른 꽃'이라 명명하며 보여주었을까.그것은 구조 신호였을까, 아니면 돌이킬 수 없는 절망의 고백이었을까.하늘은 다시 창밖을 보았다.동혁은 여전히 그곳에 서 있었다.그의 존재는 거대한 물음표가 되어 하늘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내일,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하늘이 보낸 마지막 문자에 동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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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새장 속을 벗어나려는 새

27화. 새장 속을 벗어나려는 새세면대에서 흘러나오는 물소리가 요란했지만, 하늘의 머릿속은 그보다 더 시끄러운 경고음으로 가득 찼다.아무리 쥐어짜 봐도 당장 재현의 감시를 따돌릴 묘수는 보이지 않았다.‘언제든 기다리겠습니다.’어젯밤 동혁이 보낸 마지막 문장이 부표처럼 떠올랐다.그 ‘언제든’이라는 말은, 설령 오늘 하루 종일 재현의 그림자에 갇혀 숨죽이고 있더라도, 어제처럼 모두가 잠든 깊은 밤이 되어서야 겨우 틈이 나더라도 상관없다는 뜻일지도 몰랐다.하늘은 거울 속의 창백한 자신을 응시했다.오늘 하루, 유일한 방패는 오빠 바다였다.평소에는 무뚝뚝하게만 느껴졌던 오빠의 존재가 지금은 재현이라는 광기를 막아줄 유일한 벽이었다.오빠가 재현과 자신만 남겨두고 자리를 비우는 순간, 이 집은 숨소리조차 검열당하는 밀실이 될 터였다.문제는 재현의 습관이었다.언제부터 그랬는지 알 수 없으나, 재현은 마치 당연한 권리라도 되는 양 하늘의 휴대전화를 수시로 들여다보곤 했다.만약 오늘 그가 동혁과의 대화창을 열어보는 날엔, 다정함이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그의 소유욕은 걷잡을 수 없는 폭주로 이어질 것이 분명했다.‘변명을 만들어야 해.’하늘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세면대 가를 짚었다.만약 들킨다면,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방패 삼아야 했다.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와서 누구인지 물었을 뿐이라고,기억을 찾고 싶은 마음에 그랬을 뿐이라고.하지만 재현의 저 섬뜩한 직감을 속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하늘은 마른세수하며 결심했다.오늘 하루, 철저하게 오빠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겠다고. 오빠가 화장실을 가면 거실로 나오고, 오빠가 주방에 가면 식탁에 붙어 앉을 것이다.재현의 집착이 닿지 않는 유일한 안전지대, 오빠라는 보호막 안에서 동혁이 약속한 ‘언제든’의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화장실 문밖에서 재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누나, 안에서 무슨 일 있어? 물소리가 계속 나네.”다정한 말투였지만 문손잡이를 잡고 흔드는 기색은 조급했다.하늘은 급히 물을 잠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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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새장의 진실

28화. 새장의 진실재현이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하늘은 도망치듯 방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오빠, 나 너무 피곤해서 바로 자려고.“바다의 대답도 듣기 전에 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에 몸을 웅크렸다.하루 종일 재현의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휴대전화의 진동 하나, 화면의 빛 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웠더니 관자놀이가 깨질 듯 지끈거렸다.다행히 재현은 바다의 환심을 사느라 평소처럼 하늘의 휴대전화를 쥐 잡듯 뒤지지 않았다.바다와 재현, 두 남자가 거실에서 서로를 탐색하며 붙어 있었던 시간이 역설적이게도 하늘에게는 가장 안전한 방패막이가 되어준 셈이었다.어둠 속에서 휴대전화 화면이 눈부시게 피어올랐다.하늘은 재현의 잔향이 아직 문밖을 서성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누르며, 떨리는 손가락으로 자판을 눌렀다.[연락이 늦어서 죄송해요. 알고 싶어요. 당신이 말한 푸른 꽃에 대해서.]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 심장 소리가 귓가를 때릴 정도로 크게 울렸다.답장은 기다렸다는 듯, 밤의 정적을 뚫고 도착했다.[내일 오전 11시, 바다 씨 회사 근처 카페에서 뵙겠습니다. 재현 씨가 눈치채지 못하게 나오실 수 있겠습니까?]동혁은 이미 재현의 집착과 감시 패턴을 다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하늘은 마른침을 삼켰다.오늘처럼 하루종일 붙어 있을 재현을 피해 나갈 자신이 없었다.[재현이 집에 간 후가 아니면 힘들어요. 밤에 나가는 것도 오빠 때문에 몰래 나갈 시도를 해야 해서 쉽지 않아요. 직접 만나서 해야 할 이야기인가요?]어둠 속에서 휴대전화 화면만이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으며 그녀의 얼굴을 창백하게 비췄다.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그럼, 전화 통화는 괜찮으십니까?]동혁의 문자에 하늘은 짧게 [네.]라고 답했다.전송 버튼을 누르기가 무섭게 휴대전화가 손바닥 안에서 묵직하게 진동했다.하늘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조심스럽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행여나 방문 너머 거실에 있을 바다에게 소리가 새 나갈까 봐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여보세요.”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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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다시, 출근

29화. 다시, 출근야간 근무, 병원의 고요한 복도, 아무도 없을 거라 방심했던 그 시간.카디건 속에 꽁꽁 감춰두었던 추악한 흔적들을 치매 노인의 눈앞에 무방비하게 드러냈던 자기 모습이 잔상처럼 스쳤다.구동혁은 그 비극적인 풍경을 침대 커튼 사이로, 혹은 스치듯 지나가며 보았을 것이다.“하늘 씨는 그 멍을 보며 본인의 잘못이라고 말했습니다. 본인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라고요. 그때 제가 저도 모르게 끼어들었습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순간,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하늘은 베갯잇을 꽉 움켜쥐었다.억눌려 있던 서글픈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가슴이 먹먹해지다 못해 숨통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정말 제가 잘못한 걸 수도 있잖아요! 제가 못나서, 제가 그 사람을 미치게 해서…….”하늘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억지를 부리며 소리를 죽여 울었다.데이트 폭력의 피해자라는 낙인을 스스로 자기 이마에 새기고 싶지 않은 마지막 발악이었다.차라리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 맞는 게 낫지,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람의 본질이 악마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너무도 고통스러웠다.전화기 너머에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그 침묵은 하늘의 울음소리를 묵묵히 받아내고 있었다. 마침내 동혁이 입을 뗐다.“아무리 큰 잘못을 했다고 한들, 정상적인 연인은 상대를 때리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살결이 찢어지고 멍드는 걸 보며 쾌감을 느끼는 건 사랑이 아닙니다. 그건 그저 파괴적인 소유욕일 뿐이죠.”“…….”“저 역시 가정 폭력의 피해자입니다. 일전에 이미 말씀드렸지만, 기억이 안 나실 테니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휘두르는 폭력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하늘 씨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 2년 동안, 당신은 사랑을 한 게 아니라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던 겁니다.”동혁의 말은 단호했고, 그만큼 무거웠다.하늘은 입술을 깨물었다.몸속의 세포들이 동혁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반응하며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이제야 이해가 갔다.왜 재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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