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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든 꽃의 계절의 모든 챕터: 챕터 11 - 챕터 20

83 챕터

10화. 새장의 열쇠

10화. 새장의 열쇠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집안은 서늘했다.재현은 코트를 아무렇게나 소파에 던져두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책상 위, 단정하게 정리된 물건들 사이로 이질적인 종이 뭉치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재현의 시선이 그곳에 멎었다.하얀 봉투 겉면에 찍힌 관인과 익숙한 서체의 이름.순간, 재현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그는 낚아채듯 우편물을 집어 들어 봉투를 거칠게 찢어발겼다.내용을 확인하는 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었고, 이내 짐승 같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씨발…….”입영 통지서였다.입소 날짜가 적힌 숫자들이 재현의 눈앞에서 조롱하듯 일렁였다.고작 2주 뒤였다.겨우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 하늘, 그 완벽한 인형을 자신의 성에 가둬두기 위해 온갖 공을 들였던 시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바다라는 거대한 벽을 어떻게 무너뜨릴지 고심하던 찰나에 날아든 이 종이 쪼가리는, 재현이 설계한 완벽한 세계를 단번에 무너뜨릴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재현은 통지서를 구겨 쥐었다.하얗게 질린 마디마디에 핏줄이 돋아났다.“가족? 책임?”바다가 내뱉었던 말들이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군대에 가 있는 동안 하늘이 다시 바다의 품으로, 완전히 돌아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다.자신이 없는 사이 하늘의 곁을 채울 누군가를 상상하자 속이 뒤틀렸다.재현은 책상 위의 물건들을 한꺼번에 쓸어버렸다.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추락하는 잡동사니들 사이로, 하늘과 찍었던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이 뒤집힌 채 떨어졌다.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휴대전화를 들었다. 화면 속, 여전히 순진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하늘의 프로필 사진을 노려보았다.이제 시간이 없었다.2주.그 안에 하늘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면, 이 모든 게임은 패배로 끝날 터였다.재현의 눈에 서늘한 광기가 어렸다.그는 떨리는 손으로 하늘에게 메시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학원 강의실, 강사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배경음처럼 깔렸다.책상 위에 엎어둔 휴대전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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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열린 문에도 도망치지 않는 새

11화. 열린 문에도 도망치지 않는 새멀리, 어제 보았던 그 고층 호텔의 서늘한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그곳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소년 같은 재현이 서 있었다.택시가 호텔 입구에 멈춰 서기도 전에 하늘은 문을 열고 튀어 나갔다.멀리 로비 기둥 옆, 수척해진 얼굴로 서 있던 재현이 하늘을 발견하고는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재현은 하늘을 마주하자마자 마치 지탱하던 기둥이 뽑힌 건물처럼 그녀의 어깨 위로 무너지듯 안겨 왔다.“누나…….”그의 뜨거운 숨결이 귓가를 적셨다.재현의 커다란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늘 여유롭고 당당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위태로움만이 가득했다.하늘은 그런 재현을 놓칠세라 두 팔로 그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안았다.“재현아, 나 여기 있어. 괜찮아. 응?”“나 군대 가기 싫어. 누나랑 떨어지기 싫어. 나 없으면 누나 또 혼자 울 거잖아. 오빠한테 시달리고, 나 없이 어떻게 견뎌…….”재현은 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지는 않았지만, 짓눌린 신음 같은 목소리로 애원했다.그의 손가락이 하늘의 코트 자락을 찢어질 듯 움켜쥐었다.그것은 사랑을 고백하는 연인의 손길이라기보다, 벼랑 끝에서 유일한 생명줄을 붙잡은 조난자의 발버둥에 가까웠다.“내가 없는 동안 오빠가 누나를 어디론가 치워버리면 어떡해? 나 다시는 누나 못 보게 하면 어쩌냐고.”“안 그래, 재현아. 내가 안 그럴게. 내가 너 기다릴게.”“아니, 누나 마음만으로는 안돼. 오빠는 누나를 자기 소유물로 생각하잖아. 내가 없는 틈을 타서 누나를 완전히 망가뜨려 놓을 거야.”재현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붉게 충혈된 눈동자 속에는 절망과 함께 형언할 수 없는 집요함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그는 하늘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절박하게 속삭였다.“방법은 하나뿐이야. 누나랑 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자. 딱 2주 만이라도 오빠 없는 곳에서 우리끼리만 있자. 응? 누나, 나 버릴 거야?”하늘은 재현의 눈물 어린 눈을 피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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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일상

12화. 일상2주의 유예기간은 모래시계의 구멍이 넓어진 것처럼 속절없이 쏟아져 내렸다.연병장 앞, 삭막한 공기 속에서 재현은 낯선 짧은 머리를 어색하게 만지며 서 있었다.그 주변은 아들의 어깨를 붙잡고 오열하는 부모들과 입술을 깨무는 연인들로 북적였지만, 재현의 곁은 기이할 정도로 한산했다.하늘은 재현의 까슬한 뒷머리를 보며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평소라면 당연히 자리를 지켜야 했을 그의 가족들이 보이지 않았다.“재현아, 부모님은…… 안 오셨어?”하늘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재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짧아진 머리카락 탓에 그의 눈매는 평소보다 날카롭고 선명해 보였다.그는 입가에 미미한 호선을 그리며 하늘의 뺨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응, 내가 오지 말라고 했어. 오늘만큼은 누구한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거든.”재현의 손가락이 하늘의 귓바퀴를 느릿하게 훑었다.마치 이 감촉을 지문처럼 뇌리에 새기려는 듯한 집요한 움직임이었다.“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이제 매일 못 보는데, 고작 몇 분이라도 누나 아닌 다른 사람한테 내 눈길을 나눠주는 건 너무 아깝거든.”그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안에 담긴 소유욕은 여전히 무거웠다.재현은 주변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하늘을 제 품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하늘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빳빳한 군복의 질감과 그 위로 배어 나오는 재현 특유의 체취가 코끝을 찔렀다.재현의 심장 박동이 그녀의 가슴팍에 직접 닿는 것처럼 생생하게 울렸다.그가 떠난 뒤 찾아올 정적이 벌써 두려웠다.재현은 그런 그녀의 떨림을 즐기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뒷머리를 깊숙이 파고들었다.멀리서 입소를 알리는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정적을 찢고 들려왔다.사람들의 작별 인사가 비명처럼 섞이는 가운데, 재현은 마지막까지 하늘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그것은 연인의 배웅이라기보다, 자신의 영토에 표식을 남기고 떠나는 맹수의 확신에 가까웠다.“갔다 올게. 내 생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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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동혁과 재현

13화. 동혁과 재현그날도 동혁은 퇴근길의 소란스러움을 털어내며 할머니의 병실로 향했다.복도 끝,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익숙한 뒷모습이 스테이션을 지키고 있었다.동혁은 잠시 멈칫했다.손에 들린 커피와 케이크 봉지에 힘이 들어갔다.하지만 이내 평소와 다름없는 덤덤한 표정으로 데스크에 다가가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고생하시는데 이거 드세요.”커피를 받아 든 그녀의 얼굴에 번진 것은 형식적인 친절이 아닌, 아이처럼 맑고 진심 어린 감사였다.“어머, 정말요? 세상에,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그녀의 목소리는 병원의 가라앉은 공기를 가볍게 뒤흔들 만큼 생기가 넘쳤다.동혁은 찰나의 순간,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늘 차분하고 어딘가 사연 있는 눈을 하고 있던 평소의 하늘과는 전혀 다른 결의 에너지가 그에게 부딪혀 왔다.이유는 알 수 없었다.그저 해맑은 감사 인사가 가슴 한구석에 '괜찮은 사람'이라는 인장을 꾹 눌러 찍는 기분이었다.누군가를 판단하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때가 있다.찰나의 표정, 투명하게 드러나는 감정의 농도만으로도 충분했다.동혁은 할머니의 병실로 걸음을 옮기며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사실 동혁이 처음부터 하늘에게 케이크를 건넸던 것은 아니었다.몇 달 전, 병원 뒤편의 작은 간이 정원에서 동혁은 혼자 앉아 있는 하늘을 우연히 본 적이 있었다.환자들의 산책로로 쓰이는 그곳에서 하늘은 환자복을 입은 박순자 할머니의 굽은 등을 가만히 쓸어내리고 있었다.할머니가 정신이 온전치 않아 같은 질문을 수십 번 반복하며 떼를 쓰는데도, 하늘은 단 한 번도 미간을 찌푸리지 않았다.오히려 하늘은 할머니의 마른 손등에 제 뺨을 갖다 대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괜찮아요, 할머니. 저도 가끔은 여기가 어딘지 잊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그냥 우리 같이 길을 잃었다고 생각해요.“그건 간호사로서의 직업의식이라기보다, 스스로가 가진 거대한 슬픔을 타인의 고통에 포개어 위로하는 동병상련의 모습에 가까웠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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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첫 폭력

14화. 첫 폭력아침 8시,요양병원의 육중한 자동문이 열리며 쏟아진 빛은 밤샘 근무로 초췌해진 하늘의 얼굴을 가차 없이 파고들었다.스테이션을 정리하고 동료들과 짧은 인수인계를 마치는 내내, 그녀의 신경은 온통 병원 정문 너머에 쏠려 있었다.새벽 4시에 도착했다던 재현의 메시지가 주머니 속 휴대전화를 달구고 있었기 때문이다.유리문 밖, 밤새 시동을 끄지 않아 윙윙거리는 진동을 뱉어내고 있는 재현의 검은 차가 보였다.안개 낀 아침 공기 속에서 그 차는 거대한 관처럼 정지해 있었다.하늘이 주춤거리며 다가가자, 운전석 문이 열리고 재현이 내렸다.밤을 꼬박 지새운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정갈한 차림이었지만, 붉게 충혈된 그의 눈은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수고했어, 누나.”재현은 다가와 하늘의 가방을 낚아채듯 받아 들었다.다정한 목소리였으나 가방을 쥔 손가락 끝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그는 하늘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제 쪽으로 거칠게 당겼다.“잠도 못 자고 힘들지? 우리 집 가서 푹 쉬자. 내가 누나 좋아하는 거 다 준비해놨어.”그것은 제안이 아니라 통보였다.하늘은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다.8시간의 노동 끝에 그녀가 간절히 바란 것은 자신의 방, 그 익숙하고 낡은 침대 안으로 숨어드는 것이었다.재현의 공간은 언제나 그가 정해놓은 규칙과 시선이 지배하는 곳이었고, 그곳에서의 ‘휴식’은 늘 긴장의 연속임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재현아, 나 그냥 우리 집 가서 자고 싶어. 너무 피곤해서 씻지도 못하고 바로 쓰러질 것 같아.”하늘이 조심스럽게 팔을 빼려 하자, 재현의 걸음이 뚝 멈췄다.느릿하게 돌아가는 그의 고개와 함께 공기가 순식간에 영하로 곤두박질쳤다.“싫어?”짧은 한마디였다.하지만 그 말속에는 어젯밤 스테이션에서 목격했던 동혁의 잔상이, 그리고 밤새 차 안에서 짓씹었을 질투의 파편들이 고스란히 박혀 있었다.재현의 눈동자가 하늘의 눈동자 속을 파헤치듯 집요하게 머물렀다.하늘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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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멍든 나날의 시작

15화. 멍든 나날의 시작재현은 초를 다투며 하늘의 일상을 난도질했다.오피스텔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재현의 손길은 거칠어졌다.그는 하늘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거울 앞으로 끌고 가 그녀의 초라한 안색을 직시하게 했다.“이것 봐. 나랑 있을 때는 죽을상인데, 그 새끼 앞에서는 입꼬리가 실룩거리네? 누나, 내가 우스워? 내가 군대에서 썩는 동안 저런 놈이랑 시시덕거리려고 기다린 거야?”‘짝—!’거실의 정적을 깨는 파열음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하늘은 바닥으로 무너져 내리며 신음조차 내뱉지 못했다.소리를 내면 매질이 더 길어진다는 것을 몸으로 배웠기 때문이다.재현은 쓰러진 하늘의 위로 올라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짐승처럼 헐떡였다.“아파? 아파야지. 그래야 딴 놈 생각을 안 하지.”재현은 하늘의 몸에 새겨진 푸른 멍울들 위에 기괴할 정도로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소유권을 확인하는 낙인을 찍듯, 그의 손톱이 하늘의 하얀 살결을 파고들었다.하늘은 천장을 바라보며 감각을 마비시키려 애썼다.지옥은 더 이상 멀리 있지 않았다.동혁이 건네는 다정한 위로가 선명해질수록, 재현이 휘두르는 폭력의 강도는 정비례하며 높아졌다.하늘은 이제 동혁의 친절이 두려워 그를 피하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럴수록 재현은 “왜 그 새끼를 피하느냐, 차라리 당당하게 만나지 그러냐?”라며 역정을 내며 다시 손을 올렸다.탈출구가 없는 원형의 감옥 안에서 하늘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재현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마다 그녀의 영혼은 한 뼘씩 깎여 나갔고, 이제 그녀의 눈동자엔 생기 대신 깊은 절망의 늪만이 고여 있었다.한여름의 열기가 병원 유리창을 달굴 때도 하늘은 꿋꿋하게 긴팔 카디건을 여몄다.실내 에어컨 바람이 서늘하다는 핑계는 이제 동료들 사이에서도 의아함을 자아냈지만, 그녀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재현은 영악했다.그는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은밀한 곳, 옷가지로 충분히 은닉할 수 있는 부위만을 골라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탈의실에서조차 누군가와 마주칠까 봐 퇴근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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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좁아진 새장

16화. 좁아진 새장간호사스테이션의 백색광이 유독 시리게 쏟아지는 새벽이었다.고요를 짓누르던 적막 위로 불쑥 검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소스라치게 놀란 하늘이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평소보다 더 깊게 가라앉은 눈을 한 동혁이 서 있었다.그는 아무 말 없이 흰 비닐봉지 하나를 데스크 위로 밀어 놓았다.봉투 사이로 비치는 연고의 실루엣이 하늘의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했다.낱낱이 파헤쳐진 치부가 백일하에 드러난 것처럼, 하늘의 얼굴이 화끈거리다 못해 타들어 갈 듯 달아올랐다.“이러시지 않으셔도…….”뒷걸음질 치는 하늘의 목소리가 젖은 종이처럼 힘없이 찢어졌다.하지만 동혁은 물러서지 않았다.오히려 가운 너머 감춰진 그녀의 팔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꼭 바르세요. 그리고, 신고하십시오.”“네?”“폭력을 당하고도 침묵하는 게 정답은 아닙니다. 선생님이 감당해야 할 몫이 아니에요.”하늘은 마른침을 삼켰다.목구멍이 바짝 말라붙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재현의 손길이 닿았던 뺨과 팔뚝이 다시금 욱신거리는 환상통에 휩싸였다.“그건 제가…… 제가 잘못을 해서 그런 거예요. 그 사람이 나쁜 게 아니라…….”“잘못했다고 해서 폭력이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설령 진짜로 죽을죄를 지었다고 해도요.”동혁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단단한 무게감이 스테이션의 공기를 흔들었다.그는 잠시 시선을 떨어뜨리더니, 자신의 묵직한 과거 한 조각을 꺼내놓았다.“저도 가정폭력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 지옥 같은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때 저를 지켜준 건, 지금 저기 누워계신 할머니였어요. 할머니가 제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 지금과는 전혀 다른 괴물이 되어 있었을 겁니다.”동혁의 시선이 하늘의 떨리는 눈동자에 멈췄다.“선생님 곁에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기꺼이 방패가 되어줄 사람이요.”동혁의 질문에 하늘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오빠, 바다의 얼굴이었다.늘 자신을 과보호하며 세상의 풍파로부터 막아주려 애쓰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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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날갯짓을 시작하는 새

17화. 날갯짓을 시작하는 새벽을 타고 무너져 내린 하늘의 귓가로 재현의 가벼운 발소리가 멀어졌다.밤공기는 차가웠지만, 재현의 손가락이 머물다 간 뺨 위에는 오물처럼 끈적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닦아냈다.하늘은 비틀거리며 다시 스테이션 안으로 들어왔다.동혁이 두고 간 하얀 봉투가 여전히 데스크 위에 놓여 있었다.그 안의 연고와 소독약들은 마치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낙인 같았다.하늘은 그것들을 낚아채 쓰레기통 깊숙한 곳으로 처박았다.도와달라는 외침이 어떤 피바람을 몰고 오는지 방금 확인했다.재현이 웃으며 살의를 내비칠 때마다, 하늘의 세계는 한 뼘씩 더 좁아지는 새장이 되었다.퇴근 시간이 되자 하늘의 몸은 기계적으로 반응했다.병원 로비를 빠져나가는 발걸음에는 생기가 없었다.정문 앞,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웅웅거리며 낮은 진동을 내뱉는 검은 차가 보였다.하늘이 뒷좌석 문을 열려 하자, 재현이 조수석 문을 직접 열어주며 화사하게 웃었다.“누나, 뒤에 앉으면 내가 기사 같잖아. 옆에 앉아.”재현의 목소리에는 어젯밤의 서늘함이 조금도 묻어나지 않았다.그는 안전벨트까지 직접 채워주며 하늘의 코끝을 가볍게 톡 건드렸다.“오늘 누나 좋아하는 파스타 재료 사놨어. 집에서 내가 해줄게.”재현은 운전대를 잡은 채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차 안은 재현이 미리 뿌려둔 은은한 방향제 냄새로 가득했다.불과 몇 시간 전, 병원 문밖에서 머리채를 휘어잡던 남자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하지만 하늘은 알고 있었다.재현이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을 때마다, 그 손아귀에 힘이 조금씩 실리고 있다는 것을.“그 남자 말이야.”재현이 신호 대기 중에 툭 던졌다. 하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냥 보호자라며. 근데 왜 그렇게 걱정스러운 눈으로 누나를 봐? 기분 나쁘게.”“재현아, 그건…….”“됐어. 누나가 예뻐서 그런 거겠지. 내가 이해해야지, 뭐.”재현은 하늘의 손을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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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세상 좁은 인연

18화. 세상 좁은 인연식품 개발팀 회의실의 공기는 신입 사원들의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동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책상 위에 놓인 세 개의 인사 기록 카드를 훑었다.서류 더미를 넘기던 그의 손가락이 유독 한 장의 서류 위에서 멈췄다.‘유바다.’흔치 않은 이름이었다.그 글자를 읽는 순간, 소독약 냄새 진동하는 병원 복도에서 보았던 한 여자의 얼굴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새벽의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도망치듯 멀어지던 그녀, 하늘.바다와 하늘.지독하게도 잘 어울리는 연상 작용이었다.“유바다 씨.”동혁이 고개를 들었다.다부진 체격에 눈매가 선하면서도 어딘가 고집스러워 보이는 청년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동혁은 그가 입고 있는 빳빳한 정장보다, 자신을 응시하는 그 눈동자 속에서 묘한 기시감을 읽어냈다.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과 닮은, 그 단단한 시선.“혹시, 여동생이 있습니까?”뜬금없는 질문에 주변의 시선이 집중됐다.바다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네. 세 살 터울의 여동생이 하나 있습니다.”동혁의 가슴 한구석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매끄러운 이음새였다.할머니를 돌보며 자신의 상처를 ‘푸른 꽃’이라 자조하던 그 여자가, 눈앞의 이 청년이 그토록 아끼는 동생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머릿속을 스쳤다.하지만 동혁은 이내 감정을 억누르며 시선을 기록 카드로 돌렸다.세상에 이름 비슷한 남매야 흔하디흔했다.그런 드라마틱한 인연이 현실에서 그리 쉽게 맺어질 리 없다고 자신을 다독였다.아니, 어쩌면 그 인연이 사실일까 봐 겁이 났는지도 몰랐다.만약 하늘이 이 청년의 동생이라면, 그녀의 몸에 피었던 그 멍들은 이 오빠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으니까.“유바다 씨 사수는 제가 직접 맡도록 하죠.”동혁의 목소리가 회의실 정적을 깼다.팀원들 사이에서 의외라는 듯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다.팀장이 신입의 사수를 자처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팀장님이 직접요? 유바다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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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두 남매

19화. 두 남매퇴근 시간의 도심은 갈 곳을 잃은 불빛들로 어지러웠다.동혁은 평소라면 서둘러 할머니가 계신 병원으로 향했겠지만, 오늘은 굳게 닫힌 차창 밖을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옆자리에는 갓 입사한 신입 사원, 바다가 빳빳한 서류 가방을 무릎에 올린 채 앉아 있었다.“팀장님, 귀한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대접해야 하는데 이렇게 얻어먹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바다의 목소리에는 신입 특유의 활기와 예의가 묻어났다.동혁은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짧게 답했다.“사수로서 밥 한 끼 사는 건 당연한 겁니다. 유바다 씨 일하는 게 맘에 들기도 했고.”식당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로 고기 굽는 연기가 피어올랐다.몇 잔의 술이 오가자, 바다의 긴장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그는 동혁이 묻지도 않은 가족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사실 제 밑으로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그놈이 제 삶의 전부나 다름없습니다. 부모님 일찍 여의고 둘이서 참 치열하게 살았거든요.”바다가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액정 속에는 햇살이 부서지는 바다를 배경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하늘의 모습이 있었다.지금 병원 복도에서 보던 그늘진 얼굴과는 딴판인, 생기 넘치는 모습.동혁은 그 사진 속 하늘의 깨끗한 팔뚝과 뺨을 보며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동생이 요양병원에서 일하는데, 밤샘 근무가 많아서 얼굴 보기도 힘듭니다. 그래도 요즘은 좋은 사람 만나서 연애도 하는 모양이라 마음이 좀 놓입니다. 재현이라고, 제 매제 될 놈이 아주 지극정성이거든요.”바다의 그 해맑은 웃음 뒤로 동혁은 자신이 목격한 ‘그림자 속의 남자’를 떠올렸다.바다가 ‘지독한 사랑’이라 믿고 있는 그 관계의 실체가 무엇인지, 동혁은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같은 시각, 하늘은 재현의 차 조수석에 앉아 좁은 골목길을 지나고 있었다.차 안은 기괴할 정도로 정적이 감돌았다.재현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남은 한 손으로는 하늘의 손등을 연신 부드럽게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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