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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가장 잔인한 축복: Chapter 201 - Chapter 210

255 Chapters

201화. 판을 뒤엎는 법

두 사람 사이에 일촉즉발의 스파크가 튀는 가운데, 신한성 면세점의 최상위 입점 심사위원들과 유럽계 수석 바이어 엘레나를 비롯한 글로벌 바이어들이 들어서며 마침내 입점 브리핑이 시작되었다.첫 번째 발표자로 나선 것은 도진이었다. 도진은 괜히 CB의 수장이 아니었다. 그는 면세점의 생리와 여심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시작부터 대형 스크린에 화려한 3D 매장 조감도를 띄우며 좌중을 압도했다.“신한성 면세점 프라임 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체 면세점의 상징성과 여성 VVIP의 집객력입니다. CB는 듀플렉스 1층 전체를 A국 최고 명장 파티시에와 협업한 하이엔드 디저트 & 샴페인 라운지 ‘CB 르 카페’로 꾸밀 것입니다.”심사위원석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터졌다. 최근 해외 최상위 명품 하우스들이 도입해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킨 ‘플래그십 카페’ 콘셉트를 면세점 최초로 프라임 존에 이식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1층에서 오감을 사로잡아 면세점을 찾은 모든 여성 고객을 흡수한 뒤, 전용 엘리베이터로 연결된 2층에서 CB만의 독보적인 여성 파인 주얼리와 하이엔드 워치를 선보일 것입니다. 휴식과 쇼핑이 완벽히 결합된 이 듀플렉스 라운지는 신한성 면세점 전체의 매출을 견인할 확실한 앵커 스폿이 될 것입니다.”도진은 정곡을 찌르는 완벽한 상업적 제안을 던졌다. 1층의 화려한 디저트와 2층의 눈부신 보석. 엘레나 수석 바이어를 비롯한 심사위원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도진의 입꼬리가 승리감으로 오만하게 올라갔다.그러나 이어 단상으로 걸어 나간 지수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지수는 준비해 온 프레젠테이션 스크린을 켰다. 스크린에 떠오른 타이틀을 확인한 순간, 도진과 심사위원들의 눈이 일제히 커졌다.[ J-AURA HOMME & BEAUTY : 글로벌 VVIP를 위한 맞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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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2화 아슬아슬한 왕좌

최종 입점 브랜드 표결 당일 아침. 신한성 면세점 대회의실 전면 전광판에는 심사위원 10인의 이름 대신 숫자만이 차갑게 떠올라 있었다.심사위원석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이었다. CB가 제안한 'CB 르 카페' 중심의 확실한 여성 VVIP 동선과, 제이아우라가 던진 '옴므 융합 & 글로벌 옴니채널'이라는 파격적인 블루오션. 양측의 명분이 너무나 팽팽했기에, 무기명 투표를 앞둔 심사위원들의 속내도 갈수록 복잡해졌다.도진은 정장 매무새를 정돈하며 단상 아래의 지수를 훑어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아무리 파격적인 기획이라도 면세점의 보수적인 내부 위원들은 안전빵을 택하게 되어 있어. 1층의 디저트 라운지와 여성 주얼리 파이는 당장 내일부터 눈에 보이는 현금 창구니까.’도진의 계산대로, 신한성 면세점 내부 임원진으로 구성된 보수파 위원 4명은 이미 CB 쪽으로 마음을 완전히 기울인 상태였다.바로 그때, 심사위원석 한가운데 자리한 유럽계 수석 바이어 엘레나가 손을 들었다.“표결에 들어가기 전, 제이아우라 측에 마지막 확인을 하나 하고 싶군요.”엘레나의 시선이 지수에게 향했다.“제이아우라의 남성 파인 주얼리 라인이 가진 아우라는 훌륭합니다. 하지만 남성 주얼리가 여성 주얼리만큼이나 현장에서 VVIP들의 실질적인 구매욕을 자극할 수 있는지, 그 실물 감각을 심사위원단에 증명할 수 있습니까?”CB 측 임원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남성 주얼리 시장의 구매력과 실물 착용감에 의문을 던지는 결정적인 질문이었다.하지만 지수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지수가 고개를 차분히 숙이며 손짓하자, 민철이 정성스럽게 포장된 옻칠 케이스를 들고 엘레나 앞으로 다가갔다.“증명해 드리죠. 말보다는 눈으로 직접 확인하시는 게 빠를 테니까요.”지수의 말에 엘레나는 케이스 안에 담긴 제이아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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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화 젖줄을 거머쥐다

CB 대표실.도진은 면세점 참패의 충격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초조함을 감추듯 담배 연기를 깊게 마셨다. 잿빛 연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갔다 나오며 공중에 어지럽게 흩어졌다.“이탈리아 펠레 로사 쪽 원단 수급, 확실한 거지? 선급금까지 배로 얹어줬으니 이번 컬렉션 일정엔 1분 1초도 차질이 없어야 해. 면세점 패배는 이번 프리미엄 라인으로 한 방에 덮는다.”“네, 대표님. 걱정 마십시오. 펠레 로사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최고급 원단 가공업체라 제이아우라 같은 신생 브랜드는 감히 명함도 못 내밀 곳입니다. 원자재만 제때 들어오면 판세를 뒤집는 건 시간문제입니다.”정지상 실장의 보고에 도진은 그제야 길게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원자재 공급만큼은 완벽하게 수급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치명적인 패배 뒤에 찾아올 완벽한 반격의 기회. 도진은 자신이 쥔 이 카드가 판을 뒤엎을 절대적인 치트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안도감도 잠시, 도진의 눈이 책상 위에 흐트러진 신규 라인 시안들을 향하자마자 다시 서늘하게 굳어졌다.탁!도진이 시안집을 책상 위로 거칠게 던져버렸다.“원자재는 완벽한데, 문제는 디자인이야! 작년보다 디자인이 형편없잖아! 원단이 아무리 최고급이면 뭐 해, 옷 꼬라지가 이 모양인데! 정 실장, 당장 이유 찾아와!”도진의 날카로운 불호령에 정지상 실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문제 파악에 나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긴장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대표님…… 실무진 쪽을 확인해 보니, 지난 시즌 대비 메인 디자이너들의 공백이 큰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과거 한수진씨가 전 디자인 총괄로 있던 시절, 그녀에게 부당한 대우와 공적 훔치기를 당했던 베테랑 디자이너들이 대거 사직서를 내고 이직한 여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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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화 돌아갈 수 없는 둥지

손가락 마디마다 스며든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음식물 썩는 악취.수진은 브로커에게 1억 원이 입금되는 순간,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이 지저분한 동네와 관짝 같은 지하실에서 마침내 벗어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현실은 수진에게 그리 쉽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어느 공인중개사를 찾아가도 지금 수진의 수중에 있는 금액으로는 그저 지금보다 아주 조금 나은 집을 소개할 뿐, 영원히 이 낡은 동네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사실만 뼈저리게 깨닫게 해줄 뿐이었다.수진은 피곤한 다리를 뻗으며 습기로 눅눅해진 지하 단칸방 구석에 앉아, 손바닥 위에 놓인 영롱한 보석 반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도진이 그녀에게 남겨준 유일한 귀금속. 핑크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영원한 사랑' 라인의 첫 번째 작품임을 증명하는 '01'이 각인된 반지였다. 한때 자신의 특별한 신분을 증명해 주던 희대의 주얼리였다.‘그래, 나한테는 이게 있었어. 이것만 팔면…… 적어도 이 동네에서 벗어날 수 있어.’하지만 음지의 명품 매장을 찾아간 수진에게 돌아온 것은 차가운 냉대뿐이었다.“손님, 이거 강도진 대표가 소장하던 라인 아닙니까? 지금 시장에 강 대표가 한수진 씨 버렸다는 소문 싹 다 돌았습니다. 이거 괜히 사들였다가 CB 쪽 법무팀한테 발목 잡히면 우리만 날아갑니다. 안 사요.”밀수 보석상 그 누구도 강도진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는 이 반지를 받아주려 하지 않았다. 버림받은 여자에게 남아 있는 장물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세상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결국 수진이 선택한 것은 단 하나였다. 자신이 고객 정보를 팔아치웠던 블랙마켓 브로커.[장물 특성 감안해서 최대 1억 8천입니다. 각인 지우고 해외 세탁하는 비용 빼면 이것도 많이 드리는 겁니다. 시가 3억이든 5억이든 지금 당신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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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화 섬뜩한 추적과 도망자

전세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들어온 옛 아파트.그러나 텅 빈 거실 한복판에 홀로 선 수진을 맞이한 것은 환상 속의 따스함이 아닌, 가슴을 옥죄어 오는 서늘한 고독과 케케묵은 먼지 냄새뿐이었다.수진은 주저앉아 멍하니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과거의 일상을 찾기 시작했다.거실 한구석, 낡은 벽지 위에는 각기 다른 색펜으로 그어진 작은 선들과 그 옆에 삐뚤삐뚤 적힌 날짜들이 남아 있었다. 현수와 현지가 하루가 다르게 자랄 때마다 진우와 함께 웃으며 키를 재주던 흔적이었다.수진은 홀린 듯 아이들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밤마다 두 아이를 양옆에 누이고 잠들 때까지 읽어주던 동화책 한 권이 겉표지에 까만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책장을 넘기자 손때 묻은 페이지마다 아이들의 냄새가 묻어나는 듯했다.욕실 문을 열자,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던 거품 놀이를 위해 진우가 큰맘 먹고 설치해 주었던 커다란 욕조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자신이 '구질구질하고 답답하다'며 제 발로 차버린 추억들이 하나둘씩 가시가 되어 수진의 온몸을 찌르고 들어왔다.‘내가…… 도대체 뭘 버리고 간 거지?’이제는 다시 찾을 수 없는 행복했던 시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지독한 허탈감과 절망이 수진의 이성을 짓눌렀다."아니야. 다시 찾을 수 있어. 진우는 날 버리지 않아. 그래, 우리에겐 아이들이 있잖아. 애들도 분명…… 내 온기를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스스로 만들어낸 정교한 망상이 눅눅한 절망을 빠르게 덮어버렸다. 수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들어 진우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도 않아 전화는 툭 하고 끊겨버렸다. 그리고 이내 차가운 문자가 도착했다.[할 말 있으면 문자로 해. 전화하지 마.]차가운 답장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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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화 보이지 않는 방패

지수의 시야에서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눈앞에 있던 아이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현수야! 현지야! 예인아!"밀려드는 사람들의 어깨너머로 아이들의 작은 정수리가 완전히 묻혀버린 것을 깨달은 순간, 지수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어떡해…… 진우 씨, 어떡해요! 애들이…… 애들이 사라졌어요!"지수는 심장이 밑바닥으로 내팽개쳐지는 듯한 극심한 패닉에 빠져 비틀거렸다. 손끝이 벌벌 떨리고 호흡이 가빠지며 눈앞이 하얗게 노이즈처럼 일렁였다. 세상이 온통 무너져 내린다면 이런 기분일까. 지수는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눈물만 흘리며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버렸다.그때, 진우의 단단하고 따뜻한 손길이 지수의 떨리는 어깨를 강하게 감싸 안았다."지수 씨, 정신 차려요. 괜찮습니다. 나 좀 봐요."진우의 낮고 서글서글하지만 굳건한 목소리가 지수의 귓가를 울렸다. 진우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빠르게 보안 애플리케이션을 실행시켰다."이것 좀 봐요. 애들 폰에 미리 위치 추적 프로그램을 깔아뒀습니다. 화면 보세요. 멀지 않은 곳에 다 같이 모여 있어요."화면 속, 반짝이는 푸른 점들이 놀이공원 중앙 광장 벤치 쪽에 멈춰 서 있었다. 지수는 그제야 막혔던 숨을 터뜨리며 참았던 눈물을 훔쳐냈다.진우의 손을 꼭 잡고 달려간 벤치에는, 도망친 수진을 놓치고 길을 잃어 울먹거리며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세 아이가 모여 있었다.지수는 주저 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아이들을 한꺼번에 품에 끌어안았다."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아이들의 작은 몸을 끌어안은 지수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진심 어린 온기와 떨림을 느낀 현수와 현지, 예인이도 지수의 목을 꼭 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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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화 정당한 승부

햇살이 투명하게 비쳐 드는 제이아우라의 대표실.서류를 검토하던 지수의 맞은편 소파에 앉은 진우가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어제부로 강도진이 목매달고 있던 유럽의 핵심 원자재 기업, 우리 쪽으로 인수 절차 완전히 끝났습니다."진우의 싱거운 듯 담담한 말에 지수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유럽 명품 브랜드들조차 원단을 확보하기 위해 줄을 서는 세계 최고의 직물 기업이었다. 진우는 탁자 위로 두툼한 서류철 하나를 가볍게 밀어주며 나지막이 덧붙였다."내 사인 하나면 당장 CB 쪽에 들어가는 다음 시즌 원단 납품을 무기한 지연시키거나 아예 취소해버릴 수 있어. 피를 말려 죽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손쉬운 방법이죠. 지수 씨 생각은 어때?"서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지수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아뇨, 진우 씨. 납품은 계약대로 진행해 주세요.""역시 당신이라면 그렇게 이야기할 것 같았어."진우는 다시 펠레로사의 서류를 챙겼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호기심 어린 빛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편한 길을 갔으면 하는 내 욕심도 있었어."진우의 말에 지수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강도진이 사람을 버리고 짓밟는 그 오만함과 이기심은 결코 용서할 수 없어요. 하지만……."지수의 눈동자에 서늘하면서도 명확한 불꽃이 일었다."그 사람이 디자인을 보는 안목과 사업가로서 트렌드를 읽어내는 감각만큼은 진짜예요. 그래서 제가 CB가 힘들 때 도와준 것이기도 하고요. 그 점만큼은 인정했었으니까요. 만약 원자재를 틀어막아서 이기면, 강도진은 평생 '내가 디자인에서 진 게 아니라 더러운 자본 싸움에서 밀린 것뿐'이라고 핑계를 댈 거예요."지수는 진우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곤 진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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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화 회의실의 불협화음

CB 대회의실. 차가운 공기가 흐르는 가운데, 이번 컬렉션의 첫 단추인 '시즌 컨셉 및 주제 선정 회의'가 한창이었다.프로젝터 화면에는 유명 해외 브랜드에서 억대 연봉을 주고 스카우트해 온 신임 수석 디자이너 찰스 킴이 준비한 무드보드(Mood Board)와 대형 키워드들이 떠 있었다.[주제: Neo-Vanguard (새로운 전위)]화려하고 파격적인 실루엣, 과감한 비대칭 절개선, 그리고 거친 트위드가 매치된 무드보드를 보며 찰스 킴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발표를 이어갔다."이번 시즌의 주제는 '새로운 전위'입니다. 뉴욕 트렌드 쇼의 핵심 기류를 반영했죠. 아방가르드한 절개선과 거친 트위드 매치가 시청자들과 바이어들의 눈을 단번에 사로잡을 겁니다."회의실 안의 모든 디자이너가 찰스 킴의 명성에 눌려 고개를 끄덕였지만, 상석에 앉아 있던 도진의 미간은 갈수록 깊게 패어 들어갔다. 도진은 펜을 든 손가락으로 툭, 툭, 정적을 깨며 탁자를 두드렸다."찰스."도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회의실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좋아. 다 좋은데, 너무 유행을 따라가지 마. 난 이번 기회에 CB의 색에 당신들의 개성을 한 스푼 더하길 바라는 거지, 이렇게 주제부터 전부 뒤집고 싶은 게 아니야."도진이 무드보드를 가리키며 차분하지만 뼈 있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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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화 혼돈 속에서 피어나는 빛

같은 시각, 제이아우라 대회의실의 공기는 CB와는 또 다른 의미로 뜨겁게 과열되어 있었다.제이아우라가 브랜드의 명운을 걸고 처음으로 내놓는 ‘여성복 메인 라인’의 첫 기획 회의. 총괄 책임자인 지나 수석과 CB 등 대형 브랜드 출신의 이직 디자이너들, 그리고 중소 패션 업체 출신의 현장파 디자이너들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신입 디자이너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눈치만 살피는 중이었다."지나 수석님, 오트쿠튀르 감성은 명품관 팝업 행사에서나 먹히는 겁니다! 저희가 현장에서 굴러라며 체득한 건 시장에서 당장 매출을 찍어내는 '입을 수 있는 옷(Wearable Look)'이에요. 첫 컬렉션부터 이렇게 웅장한 드레스 라인과 하이엔드 테일러링만 고집하시면 대중성은 어디서 찾습니까?"중소 브랜드 팀장 출신의 이직 디자이너가 시안을 탁자에 툭 던지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프랑스 유명 패션하우스 출신이자 엘리제의 수제자인 지나가 차가운 눈빛으로 응수했다."대중성이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스파(SPA) 브랜드 스타일을 베껴 오자는 말씀인가요? 유진 씨의 '호프' 라인이 이미 주얼리에서 대중적 매출을 든든하게 견인하고 있고, 남성복 역시 정갈한 클래식 수트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여성복 메인 라인은 제이아우라라는 브랜드의 수준과 우아함을 증명하는 격조 높은 기둥이 되어줘야 해요. 시작부터 타협하면 브랜드 가치는 그대로 하향 평준화됩니다.""타협이 아니라 생존입니다! 고고한 프리미엄만 찾다가 재고 싸이고 브랜드 휘청이는 거 한순간이에요!""시장의 눈높이에 맞춘다는 핑계로 평범한 기성복을 내놓을 거라면, 바이어들이 왜 굳이 제이아우라의 여성복을 찾겠습니까?"실크와 트위드, 스트리트 감성과 드레스 라인이 한데 엉킨 무드보드 위로 날 선 언성들이 오갔다. 서로 다른 패션 현장에서 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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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화 타협의 무게

CB 대회의실의 차가운 정적 속, 테이블 위에는 찰스 킴과 외부 디자이너 팀이 밤을 새워 수정해 온 메인 컬렉션 스케치 패널들이 빽빽하게 깔려 있었다."다시 제출한 스케치들입니다, 대표님."상석에 앉은 도진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테이블 위를 천천히 쓸어내리는 그의 손가락 끝에 디자이너들의 침이 바짝 말라갔다.도진이 마침내 첫 번째 스케치 패널을 집어 들었다. 찰스 킴이 제안한 메인 아우터 라인이었다. 지난 회의 때의 과격한 비대칭 절개선은 대폭 수정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카라와 어깨선 라인에 찰스 특유의 뾰족하고 날카로운 디테일이 남아있었다."찰스.""예, 대표님.""어제보다 훨씬 낫군."도진의 입에서 의외의 긍정이 나오자 찰스 킴의 어깨가 슬며시 올라갔다. 하지만 이어진 도진의 말은 어김없이 칼날 같았다."하지만 이 트위드 소재 매치는 빼. CB의 클래식 라펠에 거친 트위드를 얹으면 오버핏이 아니라 그냥 옷이 무거워 보여. 원단은 우리가 기존에 쓰던 160수 울 숄더로 가고, 대신 당신이 쓴 이 비대칭 카라 각도를 5도만 낮춰서 봉제선 안으로 숨겨. 그러면 걸을 때만 당신의 개성이 살짝 비칠 테니까."도진은 망설임 없이 붉은색 펜으로 스케치 위에 수정선을 쓱 그었다. 도진의 손끝이 지나갈 때마다, 겉돌던 찰스의 개성이 CB라는 단단한 틀 안으로 절묘하게 이식되어 갔다."이 메인 아우터 피스는 승인(Pick)이다. 방금 고친 스펙대로 패턴실에 넘겨.""……알겠습니다."자존심 센 찰스조차 군말을 할 수 없었다. 도진의 피드백은 감정적인 꼬투리가 아니라, 옷의 구조와 상업성, 그리고 브랜드의 정체성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압도적인 안목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었다.이어서 신입 및 경력 디자이너들이 가져온 스케치들의 검수가 숨 가쁘게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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