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CB 그룹 디자인 1팀 회의실에는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공모전 우승으로 화려하게 입성한 신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 한수진에게, 실무 디자이너들이 기성 판매용으로 기획한 ‘새로운 태양’ 파인 주얼리 라인업 시안들을 보고하는 첫 자리였다. 회의 테이블을 가득 채운 이들은 과거 진짜 천재 ‘Z’와 호흡을 맞추며 눈이 머리끝까지 높아진 베테랑들이었다. 수진은 날카로운 피드백으로 첫 단추를 멋지게 끼우고 싶었다.
“디렉터님, 이번 ‘새로운 태양’ 파인 라인의 기획 시안입니다.”
디자인 1팀 팀장이 화면에 대량 생산을 염두에 두고 독자적으로 변형해 기획한 시안들을 띄웠다. 도안들을 꼼꼼히 살피던 수진이 나름대로 안목을 보여주기 위해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수진의 아이가 자신의 친자가 아니라는 잔혹한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도진에게는 꼬박 2주가 넘는 지옥 같은 시간이 필요했다. 영혼이 사상 초유로 부서진 채 술과 광기 속에 갇혀 있던 그를 간신히 건져낸 것은 정지상의 정성 어린 멘탈케어였다.그러나 2주 만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복귀한 CB 그룹 본사는, 그야말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와 다름없었다.제이아우라로 넘어간 뷰티 사업 부문의 막대한 뒷정리와 수습을 팽개친 채 대책 없이 자취를 감췄던 도진을 향해, 이사회의 서슬 퍼런 분노와 압박이 쇄도하고 있었다. 수많은 안건들이 미결 상태로 남아있었고, 주요 거래처들은 대표의 부재를 빌미로 계약 조항을 흔들려 했다.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난기류 속에서 도진을 가장 숨 막히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어디서부터 흘러나간 것인지, 회사 내부에서 암암리에 퍼지기 시작한 추문이었다. 바로 수진이 낳은 아이가 도진의 친자가 아니라는 소문이었다. 수진이 쫓겨나던 날의 참혹했던 정황과 본가 모친의 서서평평한 고통까지 입을 타고 부풀려져 퍼져나가고 있었다.그 흉흉한 소문은 마침내 이사회의 귀에까지 닿아 "가문의 핏줄 하나 제대로 가리지 못하고 남의 씨에 놀아난 인물에게 경영권을 맡길 수 없다"는 자질 논란으로 번졌다. CB 가문의 후계 문제까지 본격적으로 거론되며 도진의 입지는 그야말로 벼랑 끝까지 내몰렸다. 이사들은 겉으로는 명예를 이야기했지만, 속으로는 거세게 들이닥친 뷰티 부문 매각의 여파를 틈타 도진을 끌어내리고 자리를 차지할 궁리뿐이었다.이 사면초가의 전쟁터 속에서 도진
CB 뷰티의 인수 절차가 차분히 정리되고, 버려졌던 아이를 해외 친척 가정으로 무사히 입양 보내기 위한 서류 작업까지 깔끔하게 마무리된 뒤의 어느 날 저녁.복잡하던 대형 사건들이 한 단락 일단락되자, 비로소 제이아우라 사옥에도 은은하고 평화로운 정적이 찾아왔다.지수는 대표실 넓은 통유리창 앞에 서서 까만 밤하늘 아래로 화려하게 펼쳐진 도심의 야경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달려온 복수의 길. 그 거친 폭풍 속에서 늘 나비처럼 칼날이 서 있던 마음이, 오늘따라 이상하리만치 차분하고 온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똑똑.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대표실 문이 열리며 진우가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찻잔 두 개가 들려있었다.“퇴근 안 하고 뭐 하고 있었어?”“그냥요. 야경이 예쁘기도 하고, 오랜만에 머릿속이 조용해서요.”지수가 돌아서며 가볍게 미소를 짓자, 진우가 다가와 은은한 향이 감도는 찻잔 하나를 지수의 손에 살포시 쥐여주었다. 기분 좋은 따스함이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전해져 왔다.“K국 부모님이랑 통화는 잘 끝났어?”“네. 아주머니 댁에서도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하시면서 당장 한국으로 들어오시겠대요. 아이 건강 검진 기록이랑 예방 접종 내역서까지 정리해서 전달해 드렸더니, 벌써 아이 방을 어떻게 꾸밀지 준비하신다고…….”지수가 찻잔을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미소를 지었다.“강도진과 그 집안에는 피도 눈물도 없이 내가 느꼈던 아픔을 그대로 느끼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 그 핏덩이만큼은 내 손으로 꼭 따뜻한 품에 안겨주고 싶었어요. 내가 완전히 괴물이 되어가는 건 아니라는 걸, 스스로에게 확인받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요
같은 시각, 제이아우라 대표실.지수는 민철로부터 도진과 수진의 파국, 그리고 아이가 보육원으로 보내졌다는 소식을 전달받고 있었다.“……도진 씨가 아이를 보육원에 버렸다고?”지수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미쳐 돌아가는 강도진이라지만, 그렇게 아끼던 핏줄을 그토록 쉽게 버렸다는 사실에 문득 이상한 이질감이 들었다.그때, 지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과거의 한 장면이 있었다.예전에 유진이 아이를 품에 안고 울면서 자신 찾아왔을 때 털어놓았던 그 이야기.‘어머니는 꼭 본인이 지정한 연구소에서 한 친자 검사만 믿겠다고 고집을 부리셨어요…… 다른 대형 병원 결과는 전부 조작이라면서…….’지수의 얼음처럼 차가운 눈동자가 번뜩였다.“김민철 실장님.”“네, 대표님.”“강도진의 어머니가 전담으로 친자 확인을 의뢰한다는 그 연구소…… 지금 당장 은밀하게 조사해 봐요. 뭔가 구린 냄새가 나.”지수의 나지막한 명령과 함께, 강도진 가문을 완벽한 지옥으로 밀어 넣을 마지막 시한폭탄의 핀이 뽑히기 시작하고 있었다.지수의 지시를 받은 태준은 곧바로 도진의 모친이 십수 년간 전담으로 거래해 온 ‘한국 유전체 발전 연구소’의 뒤를 은밀히 밟기 시작했다. 대외적으로는 첨단 바이오 연구 기관으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그 실상은 겉포장과 완벽히 달랐다.사흘 만에 지수의 대표실로 돌아온 민철의 손에는 두툼한 기밀 보고서가 들려있었다.“대표님, 상상 이상입니다.”태준이 서류를 넘기며 차분하지만 서늘한 목소리로 보고를 이
오늘 집에 돌아올 아이를 위해 아이방을 채울 쇼핑을 신나게 마치고 돌아온 수진. 하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낮부터 소파에 엉망으로 쓰러져 술을 마시고 있는 도진이었다.“우리 아들은?”수진은 쇼핑한 물건들을 아이방에 놓아두고 도진의 옆에 앉아 팔짱을 끼며 그의 품에 안겼다. 하지만 도진은 수진의 가식적인 애교에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술잔만 비워낼 뿐이었다.그제야 도진의 서늘하고 날 선 분위기를 눈치챈 수진이 조심스럽게 자세를 바로 세웠다.“우리 아들 어디 있냐고? 그리고 아이가 오는 날 낮부터 술을 마셔? 당신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수진이 다급하게 쏘아붙였다. 도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몰아세우는 수진을 묵묵히 응시하다가, 다시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답답함에 막 다시 재촉하려던 수진의 귓가로, 낮게 가라앉았으나 지독한 살기가 깃든 도진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한 시간 준다. 짐 챙겨서 나가.”
CB 뷰티를 완벽하게 빼앗기고 그룹 이사회에서 쫓겨날 위기에 몰린 강도진에게, 세상은 온통 차가운 잿빛이었다. 숨조차 쉬기 힘든 패배감과 치욕이 사방에서 그를 목 졸랐다. 하지만 그 참담한 지옥 속에서도, 매일 밤 그를 버티게 하는 단 하나의 온기 어린 구원처가 있었다.병원 인큐베이터의 차가운 유리를 견디고 드디어 신생아실로 옮겨진, 수진이 낳은 그의 아들이었다.처음 '정자 운동성 저하'라는 진단서를 손에 쥐었을 때만 해도, 제 아이일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하루가 다르게 핏덩이 같은 얼굴에 온기가 도는 것을 지켜보며, 그의 가슴엔 미련하도록 깊은 정이 뿌리를 내렸다. 이렇게 가슴이 찢어지도록 애틋한데 제 핏줄이 아닐 리 없다는, 처절하고도 어리석은 확신이었다.유리창 너머로 조그마한 손발을 꼼지락거리는 아이를 바라볼 때만큼은, 도진은 세상의 모든 치욕을 잊을 수 있었다.“……아빠가 미안하다. 네가 세상에 나올 때는 훨씬 더 근사하고 당당한 모습이 되어 있으려고 했는데.”도진은 정성스레 준비한 배냇저고리와 앙증맞은 모자를 품에 안은 채, 신생아실 유리창에 가만히 이마를 대었다. 차가운 유리 너머의 아이를 향한 그의 눈빛에는 핏발 선 욕망 대신, 지독할 정도로 애절하고 묵직한 부성애가 서려 있었다.수진과의 관계는 이미 썩어 문드러진 껍데기였을지언정, 이 아이만큼은 도진에게 무너진 인생을 재건해 줄 유일한 희망이자 마지막 피붙이였다. 지수에게 빼앗긴 모든 것을 언젠가 이 아이에게 되찾아주겠
CB 뷰티의 인수 계약이 완료된 다음 날 아침.제이아우라 사옥은 아침부터 축제 분위기로 떠들썩했다. CB 그룹의 핵심 알짜 신사업을 완벽하게 품에 안았다는 기사가 경제지 메인을 장식하면서, 제이아우라의 주가는 단숨에 상한가를 쳤고 회사 로비는 직원들의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대표님! CB 뷰티 핵심 연구진과 실무진 승계 절차, 완벽하게 마쳤습니다! 다들 CB 본사의 꼰대 임원들한테 시달리다가 우리 회사로 넘어온다니까 만세를 부르던데요?”팀원들이 들뜬 얼굴로 보고서를 내밀자, 지수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생 많았어요, 다들. 오늘 저녁은 법인카드 한도 없이 회식하니까 마음껏 즐겨요.”사무실을 뒤흔드는 직원들의 환호성을 뒤로한 채, 지수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한편, 같은 시각 CB 그룹 본사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초상집이었다. TV 화면에서는 연신 앵커의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CB 그룹, 뷰티 사업부 파격 매각…… 사실상 실패 인정][강도진 대표의 무모한 사업 확장, 100억 채무와 승계 비용 본사에 안기며 이사회 반발 극에 달해]뉴스 자막 옆으로는 취재진을 피해 지하 주차장으로 비틀거리며 도망치듯 들어가는 도진의 처량한 뒷모습이 찍혀 있었다. 도진이 커다란 야망으로 시작한 사업을 결국 지수의 손에 쥐어주고, 100억 대의 채무와 승계 정산금만 본사에 떠안긴 그에게 돌아온 것은 이사회의 차가운 해임 건의안과 주주들의 거센 비난뿐이었다.껍데기뿐인 왕좌에 앉아 술병을 거머쥔 도진의 몰락은, 이제 완전히 지수의 관심 밖이었다.저녁 무렵, 지수는 진우의 차를 타고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호젓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거창한 파티 대신, 두 사람만의 소소하고 따뜻한 저녁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테이블
진우가 근무하는 HN은행 근처의 조용한 카페. 진우는 초조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은 슬비를 바라보았다. 슬비는 지현의 비서답게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갑작스러운 연락에 놀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박진우씨"진우는 서류를 열어보려다가 멈칫하며 슬비를 응시했다."저를 어떻게 아시는지, 그리고 이지현태표님의 비서께서 왜 저를 찾으시는지 궁금합니다. 저희 은행은 GS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요?" 슬비는 차갑지만 예의바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으며 서류봉투를 눈짓했다. 거기에는 슬비가 미리 준비한
지수는 사무실 문 앞에서도 도진과 수진의 적나라한 대화를 듣고 있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도진의 목에 팔을 감으며 지수를 반히 쳐다봤다. 도진은 그런 수진을 보며 한 번 씩 웃고는, 손으로 수진의 허리를 쓸며 차갑게 지수를 쳐다봤다" 왜 왔어? 여기가 니가 오고 싶으면 오는 놀이터야?"지수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진이 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을 불렀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지수는 도진의 물음에 대답대신 들고 온 서류봉투를 책상 위에 툭 던져두고 차갑게 돌아서려했다. 그런 지수
A국에 도착한 슬비는 K국과 다른 차갑고 축축한 공기를 마시며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박진우씨 맞으신가요? 저는 GS그룹의 박슬비라고 합니다. 제안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런데 만날수 있을까요?"갑작스러운 전화에 진우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 GS? 내가 아는 그 GS 맞아? 그 큰 회사에서 나를 왜?'라는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피싱 아닌가요? 요즘도 이런 사기에 걸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하며 거칠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슬비는 황당한 표정으로 끊어진 전화를 한참 보다가 진우에게 메세지와 자신의 명함을 전송
이지현은 비서 슬비가 가져온 서류를 검토하다거 결국 참지 못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서류 봉토 안에는 동생 지수의 처절한 결혼 생활과 강도진의 외도 증거들이 빠곡히 담겨 있었다. "하, 이지수,, 이딴 남자 때문에 그렇게 속상해하고 있었던 거야?" 지현은 화가나고 속상한듯 서류를 구기며 슬비를 봤다."박비서님은 지수의 친구이기도 하니 당분간 A국에서 가서 지수 옆에 있어 주실수 있다요? 이건 상사로서 명령이라기 보다는 지수 오빠로서의 부탁입니다. 아 그리고 지수가 부탁한 사람은 이 이사람이 좋겠군요""네 그렇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