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자신의 무지를 완벽하게 가려주고, 저 잘난 체하는 디자이너들의 질문을 대신 받아쳐 줄 진짜 대필 작가. 유진을 당장 제 발밑에 묶어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말 매정하네, 유진 씨. 애가 병실에서 저렇게 꺼져가고 있는데 자존심이 밥 먹여 줘?”
늦은 밤, 가온이 입원해 있는 대학병원 VIP 병실 안. 수진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울어 지친 유진의 눈앞에 거액의 수술비 보증 수표와 비밀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숨이 가빠 산소호흡기에 의지하고 있는 딸 가온을 바라보는 유진의 가슴은 이미 난도질당해 피가 흐르고 있었다. 수진은 그런 유진의 모성애를 가장 잔인한 도구로 삼아 숨통을 죄었다.
“가온이 병원비랑 앞으로 들어갈 수술비, 내가 전부 책임져 줄게. 대신 유진 씨는 당장 오늘부터 내 개인 어시스턴트로 들어와. 디자인실 직원들이 묻는 기술적 질문들, 그리고 파인 주얼리 대량 가공 수치 조정까지 조용히 밑바닥에서 나 대신 처리해 주는
자신의 무지를 완벽하게 가려주고, 저 잘난 체하는 디자이너들의 질문을 대신 받아쳐 줄 진짜 대필 작가. 유진을 당장 제 발밑에 묶어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정말 매정하네, 유진 씨. 애가 병실에서 저렇게 꺼져가고 있는데 자존심이 밥 먹여 줘?”늦은 밤, 가온이 입원해 있는 대학병원 VIP 병실 안. 수진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울어 지친 유진의 눈앞에 거액의 수술비 보증 수표와 비밀 계약서를 들이밀었다.숨이 가빠 산소호흡기에 의지하고 있는 딸 가온을 바라보는 유진의 가슴은 이미 난도질당해 피가 흐르고 있었다. 수진은 그런 유진의 모성애를 가장 잔인한 도구로 삼아 숨통을 죄었다.“가온이 병원비랑 앞으로 들어갈 수술비, 내가 전부 책임져 줄게. 대신 유진 씨는 당장 오늘부터 내 개인 어시스턴트로 들어와. 디자인실 직원들이 묻는 기술적 질문들, 그리고 파인 주얼리 대량 가공 수치 조정까지 조용히 밑바닥에서 나 대신 처리해 주는 거야. 알겠지?”딸의 목숨값을 들고 흔드는 수진의 악랄한 협박에 유진은 무너져 내렸다. 평생을 지켜온 예인으로서의 긍지보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자식을 살리는 것이 먼저였다. 유진은 피눈물을 흘리며 서명란에 덜덜 떨리는 펜을 대고 자신의 영혼을 넘겼다.수진은 유진이 서명한 계약서를 품에 안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병원을 나섰다. 한편, 병실에서는 유진의 흐느끼는 소리만이 가득했다.내부의 치명적인 균열을 악랄하게 메운 수진이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을 제, CB 그룹의 꼭대기 층에서는 수진이 미처 예상치 못한 또 다른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스타게이트가…… 기어이 사고를 쳤군.”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던 강도진의 미간이 거칠게 좁혀졌다.도진이 귀찮은 짐덩어리처럼 여겨 처분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던 모델 에이전시, 스타게이트. 그저 그런 삼류 에이전시로 소멸할 줄 알았던 그 작은 회사가 최근 사교계와
CB 그룹 디자인 1팀 회의실에는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공모전 우승으로 화려하게 입성한 신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 한수진에게, 실무 디자이너들이 기성 판매용으로 기획한 ‘새로운 태양’ 파인 주얼리 라인업 시안들을 보고하는 첫 자리였다. 회의 테이블을 가득 채운 이들은 과거 진짜 천재 ‘Z’와 호흡을 맞추며 눈이 머리끝까지 높아진 베테랑들이었다. 수진은 날카로운 피드백으로 첫 단추를 멋지게 끼우고 싶었다.“디렉터님, 이번 ‘새로운 태양’ 파인 라인의 기획 시안입니다.”디자인 1팀 팀장이 화면에 대량 생산을 염두에 두고 독자적으로 변형해 기획한 시안들을 띄웠다. 도안들을 꼼꼼히 살피던 수진이 나름대로 안목을 보여주기 위해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전체적인 무드는 좋은데, 실무진 관점에만 갇혀서 기성 라인의 본질을 놓친 부분이 보이네요.”수진은 턱을 살짝 괴고 화면 속 ‘프로미넌스 드롭 이어링’ 도안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이 귀걸이요. 상단 태양 불꽃을 감싸는 백금 가시 프레임이 너무 거칠고 두꺼워요. 게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드롭 체인의 휨 각도가 비대칭이라 얼핏 보면 불량처럼 보일 수도 있겠는데요? 기성 라인은 대중적인 안정감과 착용감이 우선이에요. 침의 백금 프레임 두께를 조금 더 줄이고, 체인 각도도 깔끔한 대칭형으로 다듬는 게 어떨까요?”그럴듯한 지적이라 생각한 수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옆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에메랄드 컷으로 화려하게 세공된 ‘솔라 이클립스 펜던트’ 시안이었다.
새로운 브랜드 ‘새로운 태양’의 정식 론칭을 앞두고, 강도진과 한수진은 극도의 흥분 속에서 원석 1차 열처리 공정 시찰에 나섰다. 가공 장비가 거친 숨을 토해내며 돌아가는 루체른 측의 핵심 공정 라인이었다.그러나 설레는 마음으로 지켜보던 두 사람의 눈앞에서, 가공을 마친 안젤라이트 원석 몇 점을 꺼내는 순간 미세하게 삐걱거리는 마찰음이 들렸다. 수십 마이크로미터 단위의 얇은 균열들이 조명 아래서 푸르스름하게 떠올랐다. 원석의 열팽창률 문제로 내부 미세 균열이 발생한 것이었다.균열이 보이는 순간 만족으로 가득했던 도진의 얼굴에 팽팽한 균열이 생겼다."이 균열은 뭐죠? 분명 계약할 당시 이 부분은 완벽하게 해결해야만 납품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명시한 것 같은데요!"도진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며 낮게 가라앉았다. 옆에서 공정을 설명해 주던 루체른의 기술 책임자가 도진의 손에 든 '안젤라이트'를 빼앗듯 가져갔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저희가 완벽하게 해결했지만 수만 분의 일로 발생하는 변수까지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필이면 대표님이 오신 자리에서 이런 일이 생겼군요. 계약 이후 처음 생긴 균열입니다.”루체른의 기술 책임자가 비굴하게 굽신거리며 도진에게 설명했다."확률적으로 완벽한 균열 방지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납품하는 제품에는 이런 문제가 절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약속드립니다."도진 역시 가공 과정에서 열팽창률에 따른 변수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쯤은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스테리아와 거래하며 최고 등급의 원석만을 공급받아 온 지난 3년간, 단 한 번도 원석 문제로 사고가 터진 적이 없었다. 그 철옹성 같던 무사고의 기록이 도진의 판단력을 흐려지게 만들었다. 지난 3년의 경험은 원석 유통이란 그리 복잡할 것 없는 영역이라는 오만을 심어주었고, 새로 손을 잡은 루체른 역시 아스테리아처럼 당연히 완벽한 원석만을 납품할 것이라는 안일한 믿음
CB 그룹의 신규 브랜드 '새로운 태양' 메인 컬렉션 공모전의 최종 심사 날. 본사 대회의실은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십 대의 카메라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고, 장내를 가득 채운 국내외 주얼리 학계의 권위자들과 명품 브랜드 디렉터들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출품작들을 훑었다. 비슷비슷한 화려함에 지쳐가던 심사위원단의 눈동자가 일순간 멈춘 것은, 수진이 제출한 안젤라이트 '빛의 정원' 세트가 베일을 벗은 순간이었다.“……경탄스럽군요.”심사위원장의 나직한 한마디에 도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심사위원들의 시선은 수진이 직접 그렸다는 귀걸이와 팔찌를 지나, 가슴 중앙을 유려하게 흐르는 메인 목걸이에 고정되어 있었다. 현대 주얼리 공학의 한계를 시험하듯, 백금 거울 프레임 안에서 수천 번 굴절되며 새벽빛을 뿜어내는 안젤라이트의 광채는 장내를 완전히 압도했다.“이 비대칭 덩굴의 흐름과 굴절률 계산은 그야말로 천재적입니다. 한수진 디자이너, 이번 공모전의 우승은 논의할 가치조차 없겠군요.”수진은 쏟아지는 박수갈채 속에서 단상 위로 올라가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도진은 터져 나오는 환희를 감추지 못한 채 수진을 세차게 끌어안았다. 수진의 우승으로 CB의 주가는 요동칠 것이며, 자신이 선택한 가치가 옳았음을 증명하는 완벽한 순간이었다.수진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트로피를 쥔 수진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심사위원들이 극찬한 그 압도적인 목걸이의 선은 자신이 그린 것이 아니었다. 박수 소리가 커질수록, 제 목을 죄어오는 가짜 왕관의 무게가 서늘하게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같은 시각, 고즈넉한 전통 한복 공방의 안방.은은한 향묵 내음이 감도는 이곳에 전통 복식의 최고 권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장여사의 의뢰에 지수가 독자적으로 진행하는 ‘한복 2차 가공’ 단계였다. 한복의 격조를 최종 완성하기 위해 대삼작노리개와
경리단길에서 살짝 벗어난 후미진 골목의 공방. 유진은 어두운 작업대 조명 아래 홀로 앉아 핀셋을 쥔 손을 덜덜 떨었다. 작업대 구석에는 수진이 던져두고 간 현금 천만 원이 담긴 봉투와, 제 영혼의 처분권을 넘기겠다는 불공정 계약서가 비참하게 놓여 있었다. 그리고 태블릿 화면 속에는 수진이 자로 잰 듯 반듯하게 그려놓은 백금 덩굴과 잎사귀 도안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유진의 눈앞에 불과 3개월 전,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그날의 풍경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심장병을 앓는 가온이의 수술비를 구하기 위해, 유진은 마지막 희망을 안고 강수한 회장의 저택을 찾았었다. 비에 젖은 몸으로 거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유진은 가온이가 회장의 핏줄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내밀며 울부짖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서늘한 멸시였다. 강 회장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1억이 든 봉투를 발치에 던지며 짧게 뱉었다.“이 돈이면 아이 수술비는 충분할 터이니, 다시는 이 집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라. 그 아이는 내 자식이 아니다.”“회장님, 여기 친자 확인 서류가……!”유진의 처절한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강수한의 곁을 지키던 김미자가 달려들어 유진의 손에 들린 서류를 낚아채 바닥으로 내팽개쳤다.“그 서류가 조작이 아니라는 증거 있어? 그리고 너 같은 것들을 내가 한두 번 보는 줄 알아? 아이가 아프다는 것도 거짓말일지 내가 알게 뭐야. 어디서 감히 근본도 모르는 핏덩이를 들이밀어!”
수진은 퀵으로 배달된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서류 봉투를 거칠게 뜯었다.윤유진의 뒷조사 결과였다. 하얀 종이 위를 빽빽하게 메운 문자들을 읽어 내려가는 수진의 눈동자가 흥미로운 빛을 띠며 점점 크게 번뜩였다.윤유진. 지방 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당시에는 중소기업에 불과했던 CB의 모회사에서 강도진의 아버지 강수한 회장의 비서로 비참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여자. 유순하고 귀염성 있는 미모를 가졌던 유진에게 더러운 검은 손길을 뻗은 것은 다름 아닌 강수한이었다. 회식을 빙자해 억지로 술을 먹이고 저지른 성폭행, 그리고 그 끔찍한 비극의 대가로 세상에 태어난 원치 않는 핏줄이 바로 유진의 딸 가온이었다.가온은 현재 신경모세포종으로 수진과 도진이 아이의 성별을 확인하러 다니는 바로 그 대학병원의 소아청소년과에서 하루하루 숨을 헐떡이며 치료를 이어가고 있었다. 유진이 감당할 수 없는 비싼 치료비 때문에 제 딸의 목숨을 담보로 핏줄이라는 명목 하에 강수한을 찾아갔지만, 강수한은 아이의 존재를 인정하기는커녕 단돈 1억 원을 쓰레기처럼 던져주며 비참하게 내쫓았다는 비하인드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이러니 내가 도진 씨 본가에 갔을 때, 그 아줌마가 그렇게 발작하듯 예민하게 굴었네.’수진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도진의 생모인 김미자가 왜 수진을 처음 대할 때부터 날카로운 가시를 세우며 경계했는지, 왜 사생아나 첩의 존재에 그토록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며 발작했는지 비로소 모든 퍼즐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 평생 남편 강수한의 유구하고 지저분한 여성편력에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간 김미자였으니, 젊은 비서 출신으로 도진의 아이를 덜컥 임신해 안방을 차지하겠다고 기어들어 온 수진이 고울 리가 없었던 것이다.동시에 수진의 입가에 묘한 승리감과 함께 거대한 우월감이 차올랐다.자신에게는 아들이면 200억, 딸이어도 100억이라는 거액의 정착금을 조건으로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