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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도깨비의 아이: Chapter 11 - Chapter 20

84 Chapters

11화

그날 저녁, 촬영을 마친 세 사람은 촬영장 근처 카페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창밖에는 눈이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오빠, 오늘 진짜 고생했어요." 지아가 독고춘을 보며 말했다. "…음." "오, 뭐야?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지희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후우, 피곤하군." 독고춘은 한숨을 쉬며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명옥이 떠올랐다. 식사는 잘 하고 계실까. 마당에 눈이 제법 쌓였을 텐데. "지금 무슨 생각 해요?" 한동안 멍하니 창밖만 보는 그에게 지희가 물었다. 그러자 지아가 손뼉을 치며 맞장구를 쳤다. "그윽하게 창밖을 바라보는 저 눈빛… 혹시 첫사랑 생각?" "오, 그런 거야, 꼬춘 씨? 심심한데 첫사랑 얘기 좀 해 줘 봐. 궁금하네. 산속에는 언제부터 살았어? 그 할머니랑은 무슨 관계야? 친할머니야, 외할머니야?" "…말이 많으면서도… 짧군." 독고춘이 인상을 쓰며 한마디 던지자, 지희가 갑자기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Yo, Yo! 넌 저번부터 말이 짧았지. 하지만 난? 찌질하게 참았지. What? 나는 말 짧으면 안 돼라는 법이 있나? Ye, 그게 우리나라 법인지, 다른 나라 법인지 Ha? 알고 보니 그냥 니가 범인. Yo, 너는 내게 말이 짧다고 지껄이지. No, 그게 바로 한심한 짓거리. 창밖엔 눈이 내리고 너의 눈엔 화가 내리고. Ah, 이건 단순한 사고일 뿐이고 지금 너의 사고는 멈춰 있을 뿐이고. 넌 항상 고개를 끄덕여. 그 덕에 내 기분? 완전 꾸덕. Yeah~" 독고춘은 커피잔을 입가로 가져갔다가 그대로 멈췄다. 대체 무슨 말을 저렇게 빠르게 쏟아 내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오오, 대박! 래퍼 본능 미쳤다, 언니! 이래서 내가 언니한테 반했다니까! 역시 랩 하는 아이돌 출신은 확실히 달라!" "괜찮았어?" "네, 언니! 완전!" 지아는 신이 나서 박수를 치며 떠들어 댔다. 다행히 손님은 세 사람뿐이었고, 카페 사장도 지희의 열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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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달빛이 한옥의 처마 끝을 스치며 흩어졌다. 바람은 차고 공기는 맑았다. 산 아래의 세상은 이미 잠들었지만, 깊은 산속의 이 한옥만은 아직 깨어 있었다. 명옥이 등불을 들고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끝에 푸른빛이 어른거렸고, 그 빛은 작은 생명체처럼 흔들리며 그녀를 따라왔다. "아이야, 보이느냐?" 고요한 밤공기 속에 명옥의 목소리가 울렸다. 어린 독고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은 허공에서 일렁이는 푸른 불꽃 하나에 붙박여 있었다. 엄마 아빠의 영정에서 피어오르던 것과 똑같은 빛이었다. 허공에서 일렁이던 푸른 불꽃이 문득 어린 독고춘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마치 그의 존재를 알아보기라도 한 듯, 작은 불꽃이 아이의 손끝 가까이에서 가늘게 떨렸다. 명옥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무래도 너는 내 후손이 분명한 것 같구나. 기이한 인연이로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독고춘은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허공의 불꽃을 가리켰다. "저게… 뭐예요?" "죽은 자의 의지란다." 명옥은 등불을 내려놓으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미련이 남은 자의 마지막 불씨. 푸른 불꽃은 떠나지 못한 이들의 숨결이야." 명옥이 천천히 손을 내밀자 푸른 불꽃이 그 손끝에 내려앉았다. 바람 한 점 없는데도 불꽃은 살랑이며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었다. "죽음은 끝이 아니란다. 사람은 삶의 끝에서 마음의 모양을 남기고 가지. 그 마음이 깨끗하면 그대로 사라지지만… 한 줌의 미련이 남으면 저렇게 푸르게 깨어나는 거야." 독고춘은 말없이 그 빛을 바라보았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빛이었다. 명옥은 불꽃을 조용히 품에 안았다. 그녀의 손에서 은은한 푸른 기운이 번졌다. "가자, 이제 돌아가야지. 여기는 네가 머물 곳이 아니란다." 명옥이 눈을 감자 불빛은 점점 작아지며 하늘로 스며들었다. 장례식장에서 엄마 아빠의 불꽃이 사라지던 것도 꼭 저런 모습이었다. 그제야 바람이 한 줄기 불어왔다. 한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이윽고 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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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라디오 방송국의 복도는 조용했다. 하지만 조명 아래에 고인 공기는 묘하게 무거웠다. "오빠, 이쪽이에요." 지아가 손짓하자 독고춘은 굳은 얼굴로 뒤를 따랐다. 건물 앞에서 느낀 불길한 예감 탓에 그의 시선은 자꾸만 천장과 벽을 오갔다. 희미하게 일렁이는 그림자들 틈에서 검은 연기가 가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연기는 한 발 먼저 모습을 감추었다. 어느새 스튜디오 앞이었다. 지아가 문을 열자 따뜻한 조명이 쏟아져 나왔다. "안녕하세요." 지희는 활짝 웃으며 모두에게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작가와 스태프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독고춘은 문 옆에 조용히 서 있었다. 이윽고 오프닝 음악이 흐르고, 지희의 맑은 목소리가 스튜디오를 채웠다. "별빛처럼 사라진 것들을 기억하는 시간, 강지희의 '별빛사이'입니다." ─── 방송이 끝났을 때는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오늘도 완벽했어요! 언니 최고!" 지아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희는 피곤한 듯 손만 흔들어 보였다. "근데 언니, 죄송한데… 드라마 팀에서 야간 촬영을 하나 잡았대요. 바로 세트장으로 가야 해요." "라디오가 마지막인 줄 알았는데." "저도요." 지아는 태블릿을 확인하고는 애써 씩씩하게 앞장섰다. 세 사람이 건물을 나설 때 독고춘은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 네온사인 아래에서, 누군가 이쪽을 지켜보는 듯한 시선이 스쳤다. ─── 드라마 세트장은 밤에도 대낮처럼 밝았다. 커다란 조명탑들이 하얀 빛을 쏟아 내며 인공의 낮을 만들고 있었다. 지희는 긴 머리를 묶고 의상 점검을 받으며 대기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오늘 처음으로 함께 촬영하는 배우 서가연이 있었다. "지희 언니! 진짜 오랜만이에요. 같이 작품 하는 게 벌써 세 번째죠?" "그러게, 오랜만이야. 이번엔 서로 싸우는 역할이라 좀 어색하네?" "제가 완전 불리해요! 이렇게 예쁜 언니랑 싸우는데 제가 어떻게 이기겠어요?" 가연이 손가락으로 하트를 그려 보이자 주변의 스태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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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다음 날 오전, 드라마 촬영장. 지희의 대기실은 분주하면서도 묘하게 서늘했다. 화장대 조명 아래에서 지희는 메이크업 브러시의 감촉을 느끼며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완벽하게 꾸며진 얼굴이었지만 그 안의 표정은 어딘가 낯설었다. "언니, 피곤해 보여요." 지아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괜찮아. 그냥 어제 일이 좀… 잊히질 않아서." 지희의 눈이 거울 너머로 구석 자리를 스쳤다. 팔에 붕대를 감은 독고춘이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때 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모자를 깊게 눌러쓴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손에는 예쁘게 포장된 선물 상자가 들려 있었다. "강지희 배우님께 전해 달라는 물건입니다."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상자를 내려놓고는 말없이 빠르게 사라졌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아무도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언니, 열어 봐도 돼요?" "그래. 그냥 팬이 보낸 선물이겠지, 뭐." 지아는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비릿한 피 냄새와 함께 낡은 인형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드레스에 창백한 얼굴을 한 인형은, 배가 칼로 길게 찢겨 있었다. 지아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언니… 이거, 진짜 좀 이상해요…" 지희는 얼굴을 구기며 말없이 입을 막았다. 다른 한 손은 저도 모르게 아랫배를 가리고 있었다. 독고춘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였다. 찢긴 틈새 안쪽에서 검은 기운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순간 등골을 타고 서늘한 감각이 흘렀다. 어젯밤 차창 너머로 보았던 그림자와 같은 기운이었다. 단순히 비슷한 것이 아니었다. 검은 연기가 일렁이는 방식까지 똑같았다. 독고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문을 열고 복도로 뛰쳐나갔을 때는 이미 늦었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발소리도, 모자를 눌러쓴 뒷모습도 어디에도 없었다. "…젠장." 대기실로 돌아온 그는 말없이 상자의 뚜껑을 덮었다. "…버려. 지금 바로." "네? 아, 네…" 지아가 얼떨결에 상자를 받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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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촬영을 마친 밤, 아파트에는 은은한 조명이 켜져 있었다. 창밖으로는 도시의 불빛이 깜빡였고, 부엌에서는 기름이 부드럽게 튀는 소리와 함께 된장찌개의 구수한 냄새가 퍼지고 있었다. 독고춘은 말없이 양파를 썰고 있었다. 인형을 본 뒤로 그는 좀처럼 이 집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저녁을 차리겠다고 나선 것도 실은 그 핑계였다. 지아는 소파에 누워 잡지를 들고 있었다. 눈은 이미 반쯤 감겨 있었다. "아… 오늘은 진짜 체력 바닥이에요.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할 것 같은 그런 나약한 기분?" "…뭘 했다고." "오빠는 참 대단하단 말이야… 안 피곤해요?" "…별로." 그때 욕실 문이 열리며 따뜻한 수증기와 함께 지희가 나왔다. 반쯤 젖은 머리에 하얀 가운 차림이었다. 얼굴에는 피곤함과 함께 아직 풀리지 않은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지아야, 오늘은 푹 쉬자. 내일 스케줄 없지?" "네, 언니." 지아는 하품을 하며 팔을 베고 누웠다. 지희는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저녁 준비해요? 피곤할 텐데 그냥 배달 시켜 먹지." "…딱히 피곤하지 않아." 지희의 눈이 도마 위를 오가는 그의 오른팔에 머물렀다. 소매 아래로 붕대가 보였다. "그 팔로 칼질을 해도 돼요?" "…긁힌 정도야." "뭐, 꼬춘 씨가 저녁 해 주면 나야 좋지만." 지희는 식탁에 팔꿈치를 괴고 앉았다. 낮에 본 장면이 자꾸만 떠올랐다. 물어볼 생각은 없었는데 입이 먼저 움직였다. "가연이 좋아해요?" 칼끝이 도마 위에서 딱 멈췄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갑자기 그게 무슨…" "가연이 귀엽잖아요. 그런 귀여운 타입 좋아할 것 같은데, 아니에요?" 독고춘은 대답 대신 어이없다는 얼굴로 지희를 돌아보았다. "아님 말고. 그럼 말 나온 김에 묻는 건데, 꼬춘 씨는 좋아하는 타입 있어요?" 독고춘은 잠시 골똘히 생각하는 척하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명옥님 같은 사람." 지희의 표정이 굳었다. "명옥님? 그 할머니 같은 타입이 좋다고요? 진심으로?"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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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방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지희의 아랫배에 손을 얹고 눈을 감고 있던 명옥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아이의 기운이 더 강해졌구나." 지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네?" "네 뱃속의 원귀 말이다." 낮고 또렷한 목소리였다. 지아는 깜짝 놀라 숨을 삼켰고, 독고춘은 굳은 얼굴로 명옥을 바라보았다. "그 아이는 네 마음을 먹고 자란단다. 네 마음이 흐려지면 그 아이도 함께 흐려지지. 이대로 두면 그 아이가 너를 상하게 할 게야. 네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지희의 입술이 말라붙었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명옥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슬픔과 이해가 함께 깃든 미소였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독고춘을 바라보았다. "아이야, 이제는 네가 힘을 써야겠구나." 독고춘의 눈빛이 깊게 흔들렸다. "그 아이가 느껴야 할 부모의 사랑은 반쪽짜리가 아니야. 너도 그 아이를 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진심이어야만 해." 독고춘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무릎 위에 놓인 두 손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검은 연기는 그에게서 부모를 앗아 간 것이었다. 스무 해를 미워해 온 그것을, 이제는 품으라는 말이었다. 그는 지희의 배를 바라보았다. 저 안에 있는 것은 자신이 그토록 미워해 온 원귀였다. 하지만 명옥의 말대로라면, 그 아이는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사랑을 느끼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 사실을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스무 해 동안 마음속에 쌓아 온 두려움과 증오가 한순간에 사라질 리 없었다. 그럼에도 춘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그 아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명옥이 다시 지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지었느냐?" 지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름까지는…" "처음 왔을 때 일렀지. 그 아이는 아직 이름을 얻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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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독고춘은 지난밤의 일을 두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다. 네 마음이 흐려지면 그 아이도 함께 흐려진다던 명옥의 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는 차에 오른 뒤로 사이드미러에 비치는 뒤쪽 도로를 몇 번이고 확인했다. 겨울 햇빛이 유난히 눈부신 오후, 지아가 방송국 앞에 차를 세웠다. "언니, 오늘 스케줄은 두 개예요. 첫 번째는 예능 이고, 저녁엔 광고 촬영장으로 바로 이동이에요." "알아. 오늘 하루는 길겠네." 지희는 짧게 웃으며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차 문을 열자마자 플래시가 쏟아졌다. 몰려든 기자들과 팬들을 향해 지희는 익숙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지희 씨, '침착한 여자' 촬영은 순조로우신가요?" "촬영장 조명 사고 때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강지희 씨—! 이쪽도 봐 주세요!" 지희는 무표정과 미소의 경계를 완벽하게 지키며 차분하게 포즈를 취했다. 그런데 사람들 틈 어딘가에서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카메라 렌즈나 팬들의 눈길과는 다른, 무겁고 축축하게 달라붙는 시선이었다. 지희가 고개를 돌리자 수많은 얼굴 가운데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마스크에 모자를 깊게 눌러쓴 남자였다. 남자의 손에는 다른 팬들과 달리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두 손을 가만히 늘어뜨린 채, 지희가 움직이는 대로 눈만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수많은 시선 속에서 살아온 지희는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익숙했다. 호기심 어린 눈빛도, 동경하는 눈빛도, 때로는 노골적인 적대감도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저 남자의 시선은 달랐다. 자신을 바라본다기보다, 마치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지희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지아야." "왜요, 언니?" "저기, 저 사람 좀 봐 봐." 지아가 고개를 돌렸을 때 그 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누구요? 아무도 없는데?" "아니야… 분명히 있었어." 지희는 작게 숨을 삼켰다. 스산한 바람 한 줄기가 등 뒤를 스치고 지나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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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다음 날 아침, 지희는 '침착한 여자'의 세트 위에 서 있었다. 호텔 침대에서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카메라 앞에서는 조금도 티를 내지 않았다. "이건 절대 줄 수 없어! 난 끝까지 버틸..." 대사가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파직! 모든 조명이 한꺼번에 꺼졌다. 세트는 한 줄기 빛도 없는 어둠에 잠겼고, 사람들의 웅성거림만 들려왔다. "차단기 내려갔나?" "빨리 발전기 확인해 봐요!" 그때였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어둠 속 어딘가에서 셔터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누군가 이 어둠 속에서 지희를 찍고 있었다. 셔터 소리라면 평생을 들어 온 지희였다. 하지만 이 소리는 그녀를 사진에 담으려는 소리가 아니었다. 지희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찾으려 했다. 촬영 현장에서라면 카메라의 위치부터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어디에 렌즈가 있고, 누가 자신을 찍고 있는지 알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마치 어둠 그 자체가 셔터를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아랫배를 감쌌다. "누구야…!" 대답은 없었다. 조명은 금방 다시 들어왔지만, 발전기도 전선도 멀쩡하다는 말에 스태프들은 고개만 갸웃거렸다. 지희는 숨을 몰아쉬었다. 눈을 감아도 셔터 소리는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언니, 왜 그래요? 괜찮아요?" "어? 어어, 괜찮아… 그보다 방금 카메라 셔터 소리 못 들었어?" "셔터 소리요? 아뇨, 그런 소리는 못 들었는데요?" 달려온 지아의 대답에 지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독고춘은 차가운 물병을 지희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 역시 셔터 소리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불이 꺼져 있던 그 짧은 사이, 세트 위를 훑고 지나간 습하고 끈적한 기운만은 분명히 느꼈다. 그는 말없이 주먹을 쥐었다. ─── 그날 저녁, 지희는 라디오 인터뷰의 마이크 앞에 앉아 있었다. "네, 요즘 촬영이 좀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말이 끝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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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새벽 두 시, 호텔 스위트룸은 캄캄했다. 지희는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어둠 속의 셔터 소리와 헤드셋 너머의 속삭임이 번갈아 머릿속을 울렸다. 독고춘은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다며 나간 뒤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지희는 배 위에 손을 얹고 숨을 골랐다. 자신이 불안해하면 사랑이도 불안해진다고 했다. 괜찮다고, 엄마는 괜찮다고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되뇌면 되뇔수록 손바닥 아래는 오히려 차갑게 식어 갔고,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파 왔다. "아… 머리야…" 이마를 짚은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옆 침대에서 자던 지아가 놀란 눈으로 몸을 일으켰다. "언니, 괜찮아요?" "…토할 것 같아." 지희는 침대 옆으로 몸을 숙였다. 식은땀이 온몸에 번지고 눈앞이 핑 돌았다. 귓가의 속삭임은 멎지 않았다. 멎기는커녕 점점 커지면서 머릿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사랑해… 널 계속 보고 있었어…' "그만…!" 지희는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소용없었다. 소리는 바깥이 아니라 안쪽에서 울리고 있었다. "언니! 정신 좀 차려요! 언니!" 달려온 지아의 얼굴이 흐릿하게 번졌다. 지희는 그대로 힘없이 침대 위로 쓰러졌고, 지아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찾았다. ───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호텔 앞에서 멎었다. 구급대원들이 들것을 밀며 복도를 빠르게 지나갔다. "제발… 괜찮아야 돼요, 언니…" 지아는 들것에 실린 지희의 손을 붙잡고 울먹였다. 지희 앞에서만큼은 두려운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독고춘은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라진 남자의 흔적을 쫓아 두 시간 가까이 호텔 주변을 뒤지고 돌아온 길이었다. 지희의 배를 감싼 검은 연기는 낮보다 훨씬 짙어져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서 깜빡이던 작은 푸른빛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이 가물거렸다. '네 마음이 흐려지면 그 아이도 함께 흐려지지.' 그는 말없이 들것의 뒤를 따랐다. ─── 지희는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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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기계음만이 일정하게 울려 퍼지고, 병실 안의 공기가 묘하게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그때, ‘철컥.’ 병실 문이 열렸다. “지희 언니!” 지아의 목소리가 밝게 울렸다. 그녀는 도시락이 든 봉투를 들고 있었고, 그 뒤에는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다. “가연이…?” 지희가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언니, 괜찮아요? 촬영 중에 소식 듣고 바로 왔어요.” 가연이 미소를 지으며 과일바구니를 들어 보였다. 지아가 뒤이어 말했다. “복도에서 딱 마주쳤어요. 병문안 왔대요.” 독고춘은 미묘하게 시선을 돌렸다. 병실 안의 온도가,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지희는 순간적으로 손을 배 위로 올리며 살짝 숨을 고르더니, 억지로 웃었다. “이제 괜찮아… 고마워, 가연아.” "엄청 걱정했어요, 언니. 소문으로 들었는데 이상한 일 겪으셨다면서요? 어떤 일이에요?" "응? 아아, 그게..." 가연은 평소에 오컬트나 초자연적인 현상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지희 앞에 바짝 달라 붙어 앉으며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지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지아가 그녀를 힘으로 밀어냈다. "우리 언니 아직 환자거든? 쉬어야 되니까 얼굴 봤으면 그만 꺼져줄래?" "아, 잠깐만! 좀만 있다가...아씨, 어딜 만지는 거야? 그만하라고!" "자자, 얼른 나가세요~ Get out! 이라는 뜻. " 지아는 문을 쾅 닫고는 손을 탁탁 털었다. “하… 진짜 오컬트 덕후는 어쩔 수 없다니까…”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지희 쪽으로 돌아왔다. 지희는 미소를 억지로 짓고 있었지만, 눈가의 피로는 감춰지지 않았다. 독고춘은 창가에 기대어 조용히 병실 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언니, 이제 어떻게 할까요? 기자들도 병원 주변에 몰려 있고, 그 남자도 아직 못 잡았다는데…” 지아가 의자에 앉으며 낮게 물었다. 지희는 대답 대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촬영은 계속 해야 하지 않을까? 이미 드라마 제작팀이 뒤집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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