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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도깨비의 아이: Chapter 1 - Chapter 10

16 Chapters

1화

비가 세차게 내리던 7월의 어느 날.하얀 형광등이 냉랭하게 빛나는 병원 장례식장 한켠에, 아홉살 짜리 소년이 혼자 앉아 있었다. 소년의 이름은 독고춘.그리고 그가 앉아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그의 부모가… 죽었다. 정면의 제단 위에는 나란히 놓인 두 장의 영정사진이 있었다.춘은 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눈물은 나오지 않았다.오히려 모든 감정이 말라붙은 듯,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불과 하루 전 아침이었다.아직 눈이 반쯤 감긴 채로, 춘은 현관 앞에서 부모를 배웅했다.그러다 문득 이상한 말을 꺼냈다. “엄마… 아빠… 몸에서… 검은 연기가 나와.”부모는 피식 웃었다. “우리 춘, 아직 잠 덜 깼구나. 얼른 들어가서 좀 더 자렴.” 그저 아이의 잠꼬대로 넘겼다. 독고춘은 이상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그 검은 연기엔 매우 나쁜 예감이 들었다.하지만 어린 마음에, 괜히 부모의 출근을 막았다가 혼날까봐 입을 다물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그리고 몇 시간 후, 부모는 교통사고로 즉사했다.--- “내가… 말렸더라면…” 소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영정사진을 바라봤다.그 순간, 차가운 공기 사이로 파직—! 하는 소리가 들렸다.두 장의 영정에서 푸른 불꽃 두 개가 피어올랐다. 그 불꽃은 독고춘의 주위를 천천히 맴돌았다.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소년은 겁먹은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그가 두 손으로 불꽃을 감싸 쥐자 따뜻한 감정이 그의 마음속으로 흘러들었다. 그건 분명히… 부모의 마음이었다.‘걱정하지 마라, 춘아.’‘넌 혼자가 아니야. 엄마가 곁에 있을께.’ 그제야 눈물이 터졌다.참고 있던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무너졌다.소년은 울고, 또 울었다.하얀 방 안이 그의 울음으로 가득 찼다.--- 얼마나 울었을까.눈이 퉁퉁 부을 만큼 울고 난 뒤, 소년은 기운이 다 빠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 조용히 문이 열렸다. 비에 젖은 바람과 함께,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여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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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그날은, 평소보다 안개가 더 짙었다. 산 입구에서 낯선 차 한 대가 멈춰섰다. 그리고, 두 여자가 내렸다. 한 명은 마치 화면 속에서 막 걸어나온 듯했다. 도시의 공기 대신 향수를 두른 듯한 여인. 긴 다리, 완벽한 비율, 그리고 어디서든 시선을 잡아끄는 도도한 분위기. 그녀의 이름은 강지희.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배우이자, 대기업의 자녀로 부와 명예를 다 가진 여자였다. 그 뒤를 따라 내리는 또 한 사람, 조심스럽게 안경을 고쳐쓰며 뒤따르는 매니저 이지아. 작고 말랐지만, 눈빛만큼은 호기심으로 가득찼다. 그녀들은 차에서 내린후 천천히 산길을 따라 걸었다. 산 안쪽으로 이어진 길은 커다란 나무들이 햇빛을 가리고 있어서 어두컴컴하고, 곳곳에 무덤으로 보이는 것들이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지아야, 아직 멀었어? 이거 진짜 시간 낭비인거 같은데?" "언니, 거의 다 왔어요. 곧 이쪽 분야에서 굉장히 유명한 분을 만날수 있어요.” “지아야, 미안한데 난 이런거 안믿는다니까." "아쫌! 기껏 시간내서 여기까지 왔는데 반응이 어쩜 그래요? 제가 예약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어휴, 그래. 얼른 가보자." 그녀들은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길이 거의 끝나는 곳은 돌담이었다. 그 너머로는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는데, 그 안에서 한옥의 지붕선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기와 위로 낙엽이 내려앉고, 처마 끝에는 종이 하나 매달려 있었다. 대문 앞에 도착한 그녀들은 '이리 오너라.'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대문을 두드려야 할지, 대문에 매달린 줄을 잡아 당겨야 할지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하지만 결론이 나기전에 대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대문 여는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지자, 산새들이 동시에 푸드덕 하고 날아올랐다. 그리고 대문 안쪽에서는 젊은 남자가 걸어 나왔다. 검은 한복 상의에 흰 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옷이 마치 그에게 붙은 그림자처럼 자연스러웠다. 그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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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밝은 조명들이 환히 비춰주는 서울의 밤 열한 시. 지희의 아파트 창밖으로 고속도로 차량의 불빛이 물결처럼 번졌다. 거실 한쪽엔 트로피와 화보, 광고 포스터가 정리되어 있었지만, 그 어떤 것에도 따뜻함은 없었다. 지희는 소파에 기대 앉아 있었다. 한 손으로 아랫배를 눌렀다. 또다시 따끔거리는 통증이 밀려왔다. 며칠 전보다 더 자주, 더 깊이. '그 아이는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하였느니.계속해서 네 속을 찌를게야.' “말도 안 돼. 그딴 소리 들으려고 내가...” 지희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숨을 멈췄다. ‘…지금, 뭐지?’ 손끝에 닿은 배는 고요했지만, 속에서는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마치 작은 심장이, 아주 잠깐 뛰고 멎은 것처럼. 지희는 황급히 손을 떼고 일어섰다. “아니야… 이건 그냥 신경성이지. 내가 임신했을리가 없잖아?” 그러나 그날 밤, 그녀는 잠들지 못했다. 새벽 두 시가 지나서야 간신히 눈을 감았다.---짙은 안개 속에서 푸른 불꽃이 하나가 떠 있었다. 불빛은 점점 커지며 맥동하듯 숨을 쉬었다. 그 안에서 아이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처음엔 희미했으나, 점점 선명해졌다. 지희는 몸을 돌았다. 그곳엔 낡은 한옥의 마당이 있었다. 낙엽이 바람에 흩날리고, 문 앞에는 자신을 쳐다보던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이 푸르게 빛났다. 지희의 시선이 그에게 닿는 순간,그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배를 바라봤다. “그 아이가...깨어난다.” 지희는 숨을 고르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당신도 그 미친 할머니랑 같은 소리 하는 거에요?” “곧.” 그 남자의 목소리는 꿈속에서도 이상할 만큼 또렷했다. “ 그것은 생명이 아니라...” 지희는 몸부림 치며 소리쳤다. “그만! 그만해—!” --- “지희 언니! 언니!” 누군가 그녀를 거세게 흔들어 눈을 번쩍 떴다. 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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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촬영장은 여느 때처럼 분주했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조명이 지희의 얼굴을 하얗게 비췄다. 현장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그 한가운데 서 있는 지희의 표정에는 묘한 긴장이 스며 있었다. “컷! 방금 좋았는데 지희씨 표정이 살짝 굳었어! 자자, 다시 한번 갈게요!” 감독의 목소리가 울렸다. 지희는 숨을 고르며 고개를 숙였다. 배 안쪽에서 찌릿하고 통증이 올라왔다. 손이 본능적으로 아랫배로 향했다. “지희 씨 괜찮아요?” 조명팀의 누군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지희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네, 괜찮아요. 잠깐… 집중이 좀 안 됐어요.”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상대역 김서준이 다가와 손을 잡는 감정 신. 카메라가 돌아가자마자 또다시 아랫배가 쿡 찔리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표정이 일그러졌고, 대사 톤이 흐트러졌다. “컷! 지희 씨, 다시 한 번 갈까요?” 감독의 목소리가 점점 신중해졌다. 지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 땀을 닦았다. 하지만 다섯 번째 NG가 나오자 결국 감독이 손을 들었다. “오케이, 잠깐 쉬자. 지희 씨 컨디션 안 좋아 보여요.” 조명이 꺼지고, 현장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그때 김서준이 다가왔다. 회색 셔츠에 소매를 걷은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지희 씨, 괜찮아요? 얼굴이 좀 하얘졌어요.” 그는 손을 뻗어 지희의 어깨를 감싸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손 치우시죠.” 지아의 차가운 목소리가 날카롭게 끼어들었다. 서준이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매니저 씨, 그냥 걱정돼서 그런 건데요.” 지아의 눈빛은 단호했다. “언니한테 손대지 마세요. 불필요한 스킨십은 사양할게요.” 잠시 정적. 주변 스태프들이 눈치를 봤다. 서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양팔을 들고 어이없다는 제스처를 취한후, 다시 스태프 쪽으로 돌아갔다. 지아는 지희 옆에 앉아 물을 내밀었다. “언니, 병원 가요. 다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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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하얀 눈이 내리던 12월의 어느 날, CF 촬영 현장. 지희는 새하얀 코트를 입고 조명 아래 섰다. “하나, 둘, 셋— 액션!”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조명이 부드럽게 그녀의 얼굴을 비추는 순간, 갑자기 칼로 찌르듯한 통증이 복부에서 폭발했다. “으—!” 지희가 비명을 억누르며 몸을 굽혔다. “컷! 컷! 지희 씨!” 깜짝 놀란 스탭들이 우르르 지희에게로 달려왔다. 부축할 새도 없이 그녀는 다리가 풀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한순간에 촬영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지아는 "언니!"언니!"를 외치며 지희에게 달려갔다. 지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점점 의식이 흐려지더니 결국 깨어나지 못했다. --- 서울의 어느 큰 병원. 하얀 병실 안에서 기계음이 일정하게 울렸다. 지희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그 주변에는 의사 한명이 난감한 얼굴로 서 있었다. “CT도, MRI도, 혈액 검사도 전부 정상이에요.통증의 원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일수 있으니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시는게 좋을겁니다.” "네, 참고하겠습니다." 의사가 돌아간 후, 지아는 의자를 끌어와 지희의 손을 잡았다. 그 기척에 지희는 힘겹게 눈을 떴다. “지아야, 여기 병원이야? 촬영은?” "촬영은 취소됐어요. 언니가 쓰러졌는데 촬영은 무슨..." "의사는 뭐래?" "저번이랑 똑같은 소리 하고 갔어요. 다 정상이라고.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일수 있으니 정신과 상담 받아보라고 하면서요." "뭐 들으나마나 그 소리겠지." "죽이라도 사올까요? 언니, 오늘 한끼도 안먹었잖아요." "그럴래? 뭐라도 삼켜야 힘이 날거 같아." "그럼 금방 다녀올게요 언니." 지아는 서둘러 옷을 입고 병실 안을 나갔다. 창밖은 벌써 캄캄해진 밤이었다. 지아가 병원을 나서고 얼마 후, 조용하던 그곳의 정적을 깨는 건, 병실에서 터져 나온 지희의 비명소리였다. “아아아아악!”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비명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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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하필이면 눈이 내린다.서울 외곽에서 한참 벗어난 산길. 지아는 운전대를 움켜쥔 손에 힘을 줬다.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고,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조수석에 앉은 지희가 그야말로 죽어가고 있었기때문이다. 가까스로 도착한 새벽녘 산속의 공기는 유난히 차가웠다. 지아는 땀을 뻘뻘 흘리며 지희를 부축해 명옥의 집 대문 앞까지 도달했다. 처음엔 지희의 본가에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지만 지희가 본가에 연락하면 평생 안보겠다고 협박하여 그만 두었다. 결국 옥신각신 끝에 둘이 명옥의 집으로 가는걸로 타협하여 서둘러 이곳으로 온 것이다. 지아는 대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저기요. 이른 시간에 죄송하지만 도와주세요! 문좀 열어 주세요!"마침 마당에서 쌓인 눈을 쓸고 있던 독고춘이 그 소리를 듣고 대문을 열어 주었다. 지아는 독고춘을 보자마자 떨리는 목소리로 눈물을 글썽이며 애원했다. “언니가 죽을것 같아요. 제발 명옥님좀 만나게 해주세요.” "지아야, 호들갑 그만 떨어. 나 안죽어. 윽...좀 고통스럽긴 한데 죽을 정도는 아니야." 독고춘은 빗자루를 멈추고 조용히 그녀들을 바라보다가 딱 잘라 말했다. “지금 여기에 없습니다.” "네? 어디 가셨는데요? 금방 오시겠죠?" "모릅니다." 독고춘의 말에 크게 실망한 지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 앉았다. 옆에서 간신히 서 있던 지희가 지아의 팔을 붙들며 말했다. "됐어, 지아야. 병원으로 가자. 가서 수면제 맞고 한숨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 지겠지...크윽!"말이 끝나기도 전에 엄청난 고통이 지희의 아랫배를 순식간에 덮쳤다. 숨을 쉴 때마다, 살갗을 찢는 고통에 정신이 나갈것만 같았다. 그 고통에 지희가 정신을 잃을때 쯤, 독고춘이 그녀를 번쩍 들어올려 빈 방으로 향했다. 들어오라는 소리는 없었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지아도 따라 들어갔다. 독고춘은 대충 방에 지희를 눕힌후, 천천히 그녀의 아랫배 위에 시선을 고정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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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그로부터 몇 시간 후, 밖에는 눈이 완전히 그쳤고 부드러운 햇살이 내리 쬐고 있었다. 그 햇살이 강지희의 눈꺼풀을 스쳤을 때,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낯선 천장, 낯선 공기. 그리고 본적 있는 남자의 얼굴. 그녀가 놀라며 상체를 일으키자 독고춘이 조용히 손을 들어 진정시켰다. “여긴 어디죠? 당신 집인가요?” 독고춘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희는 두리번 거리며 옆을 돌아봤다. 자신의 옆에서 곤히 잠든 이지아의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긴장하던 지희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그녀는 무심코 손을 아랫배로 가져갔다. 며칠 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독고춘은 그제서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저기요?” 독고춘이 방에서 나가려고 하자 지희가 급하게 불러 세웠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무뚝뚝한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가 작게 말했다. “고마워요.” 독고춘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는 방문을 나섰다. 그 순간, "으음..." 하는 소리와 함께 지아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언니! 깨어났어요?” 지희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지아는 그대로 달려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진짜 다행이에요… 정말…전 언니가 죽는줄 알았다고요! ”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지희는 잠시 놀라다가, 부드럽게 등을 두드렸다. “이제 괜찮아. 걱정 끼쳐서 미안해.” "언니 잘못될까봐 얼마나 걱정했다구요, 엉엉." "그래, 그래. 이제 괜찮으니까 집에 가서 좀더 쉬자. 응?" "네, 언니. 훌쩍..." 지희는 지아를 달래고 방문을 나서는데 마루에 앉아있는 명옥과 눈이 딱 마주쳤다. 명옥은 지난번보다 더 차분한 얼굴로, 그러나 그 눈빛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하얀 눈은 여전히 처마 끝에 매달려 있었고, 찬 공기 사이로 은은한 풀 냄새가 퍼졌다. “얘기는 들었다. 고생했겠구나.” 그 한마디에 지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신비로운 목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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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맞아요! 거기다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인기 많은 언니랑 아기한테 사랑을 주는 경험, 이거 꽤 괜찮은 제안 아니에요?”“...눈앞에 명옥님을 두고도 잘도 그런소리를 하는군.” 독고춘의 혼잣말에 명옥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지희는 황당하다는 듯 소리쳤다. “할머니가 젊었을 때 얼마나 예뻤길래요?”지아는 폭소를 터뜨렸고, 명옥은 기분 좋은듯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잠시 뒤, 그 웃음 사이로 명옥의 목소리가 잔잔히 흘렀다. “원귀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임을 명심하거라. 부디 몸 조심 하렴.” 지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아랫배 위로 올라갔다. “이 아기가 행복하게 스스로 갈 수 있도록 노력해 보고 싶어요. 그러니 도와주세요.” 명옥의 눈빛이 따뜻하게 흔들렸다. 지아는 그 모습을 보며 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언가 신성하고, 또 인간적인 약속 같았다. 그리고 독고춘은 주희의 애처로운 눈과 마주치며 하는수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마음 한구석이 낯설게 흔들리는 듯했다. 그렇게 결정을 내린 세사람은 한옥의 대문을 천천히 열었다. 명옥의 뜰에는 소복하게 쌓여 있던 눈이 조금씩 녹아 내리고 있었다. 독고춘은 대문턱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르며 뒤돌아봤다. 마루에 앉은 명옥이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따뜻했지만 어딘가 쓸쓸했다. “어서 가거라. 부디 그 아이가 스스로 떠날수 있게 잘 하려무나.” 독고춘은 고개를 숙였다. 20년 동안 그가 본 세상은 오로지 이 산속이었다. 산의 바람, 새소리, 그리고 처음 봤을때와 변함 없는 아름다운 명옥.“...금방...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다녀오겠습니다.” 명옥은 부드럽게 웃었다. “사람이 사람을 돕는다는 건, 방법보다 마음이 먼저란다. 네가 그 아이를 돕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그 아이도 널 받아주고 스스로 떠날게다.” 그 말에 독고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사람을 따라 문턱을 넘었다. ---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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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그날 저녁, 지희는 독고춘에게 근처 숙소를 마련해주었다. 그곳은 그녀의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깔끔한 원룸이었다. “이곳에서 지내면 돼요. 필요한 건 다 있을 거에요.” “...방이 하나뿐이군.” “원룸이니까요.” 지희가 웃었다.그녀는 잠시 머뭇하다가,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매니저 일은 처음이겠지만…지아가 옆에서 잘 알려줄거에요. 그러니 너무 부담 갖지 말아 주세요.” 독고춘은 그 말의 의미를 곱씹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현관 쪽에서 지아가 얼굴을 내밀었다. “내일부터 매니저 교육 들어 갑니다! 제가 또 언니 아이돌 시절부터 쫒아다니며 온갖 산전수전 다 겪은 경력 10년차 베테랑 매니저랍니다. 걱정 붙들어 매세요!” “...그러지.” 그의 말투는 단호했지만, 표정은 숨길수 없이 어색했다. 그 모습을 본 지아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리고 멀리서 지희의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그 소리는 낯선 도시에 처음 불어오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원룸 안으로 스며들었다. --- 다음 날 아침. 독고춘은 검은 바지에 흰 와이셔츠, 그리고 지아가 챙겨준 검은 점퍼를 걸쳤다. 머리는 깔끔하게 빗어 넘겼지만, 거울 속의 그는 여전히 어색했다. ‘이게 매니저 복장인가? 불편하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지아가 웃었다. “괜찮아요. 생각보다 잘 어울려요. 언니도 곧 올 거예요.” 현관문이 열리자 지희가 들어왔다. 선글라스와 모자, 트렌치코트. 아직 이른 아침인데, 이미 스타였다. “꼬춘 씨 준비됐어요?” 그녀가 익숙하게 말했다. 강주희의 말을 들은 독고춘은 인상을 구겼다. “아, 또 불편해요?” 지희는 장난스럽게 눈썹을 올렸다. “그럼 뭐라 불려드려요? 춘씨? 아니면 독고씨?” “...둘중 편한대로.”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에이, 둘다 너무 딱딱하잖아. 그냥 꼬춘 씨라고 부를래.” 지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지아는 옆에서 ‘이쯤 되면 즐기는거 아닌가…’ 하는 표정이었다. -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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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다음날, 아직 해가 뜨기 전, 새벽의 공기가 투명했다. 도시의 골목 사이로 한 남자의 그림자가 느릿하게 걸어 들어왔다. 검은 트레이닝복 차림, 묵직한 눈빛. 독고춘이었다.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를 자연스럽게 열자, 차가운 새벽 공기와 함께 먼지 냄새가 스쳤다. 그는 말없이 현관에 신발을 벗고, 한참을 집안을 둘러봤다. 먼지 낀 거실 창문, 설거지되지 않은 식기, 널브러진 옷가지들. “...이게 사람 사는 집인가.” 그는 낮게 중얼거리고 곧장 움직였다. 정확하고 빠르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실 진공청소기 소리가 새벽을 깨웠다. 빗자루와 걸레가 부드럽게 움직이고, 세탁기와 식기세척기가 동시에 돌아가기 시작했다. 창문을 닦고, 식탁 위에 쌓인 서류와 잡지를 가지런히 정리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그의 손끝은 바쁘고 단정했다. 전날 지아에게 청소기, 세탁기, 식기 세척기 등등 전자제품 사용법을 들었던게 큰 도움이 되었다.산속에서 손으로 직접 살림하던 독고춘으로서는 현재의 기술 발전이 여간 편한게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대충 있을건 있군.”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칼을 잡았다. 기름이 지글거리는 소리, 달걀의 노른자가 부드럽게 익는 냄새, 미소가 번질 만큼 고소한 향이 집 안 가득 퍼졌다. "뭐야, 이 냄새?” 지희가 머리를 헝클인 채 방에서 나왔다. “지아야, 이 시간에 네가 요리했어?” “저도 방금 일어났는데요?” 지아는 하품을 하며 옆방에서 나왔다가, 눈앞의 광경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깨끗하게 정리된 거실, 윤이 나는 바닥, 깔끔히 접힌 빨래더미, 그리고 식탁 위에 차려진 한 상의 아침. 두 사람은 동시에 멈췄다. "우리 집 맞지...?” 지희가 중얼거렸다. 그때 부엌에서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나왔다. “...식기 전에 들지.” “꼬춘 씨! 뭐, 뭐예요 이게?” 지희가 놀라서 소리쳤다. “이 시간에 청소하고 요리까지 한 거예요?” “왜 그렇게 놀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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