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라디오 방송국의 복도는 조용했다.
하지만 조명 아래에 깃든 공기는 묘하게 무거웠다.“오빠, 저쪽.”지아가 손으로 안내하자, 독고춘은 굳은 얼굴로 뒤따랐다.그의 시선은 계속 천장과 벽을 오갔다.일렁이는 희미한 그림자들, 그리고 그 틈새에서 작게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이때까지 독고춘은 아직 검은 연기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복도를 지나다 보니 어느새 스튜디오에 도착했다.지아가 문을 열자, 따뜻한 조명이 쏟아졌다.“안녕하세요.”지희는 활짝 웃으며 모두에게 인사하고 자리에앉았다.스탭들과 작가들이 분주히 움직였고,독고춘은 문 옆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얼마후,방 안에서 들려오는 라디오 오프닝 음악,지희의 맑은 목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별빛처럼 사라진 것들을 기억하는 시간, 강지희의 ‘별빛사이’입니다.”---라디오 방송이 끝나고, 밤.“오늘도 완벽했어요! 언니 최고!”지아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지희는 피곤한 듯 손을 흔들었다.“이제 드라마 촬영장으로 바로 가죠!”지아는 태블릿을 확인하고 씩씩하게 앞서 걸었다.세 사람이 라디오 건물을 나올때, 독고춘은 한 번 뒤돌아봤다.붉은 네온 아래, 누군가 그를 지켜보는 듯한 시선이 스쳤다.---드라마 세트장은 밤에도 낮처럼 밝았다.커다란 조명탑들이 하얀 빛을 쏟아내며 인공의 낮을 만들고 있었다.지희는 긴 머리를 묶고 의상 점검을 받으며 스탠바이 중이었다.그 옆엔 오늘 첫 촬영을 함께하는 서가연이 있었다.“지희 언니! 진짜 오랜만이에요.같이 작품 하는 게 벌써 세 번째죠?”서가연의 눈웃음은 달콤했다.사탕을 입에 문 듯한 웃음,누가 봐도 사랑받는 얼굴이었다.지희도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그러게, 오랜만이야. 이번엔 서로 싸우는 역할이라 좀 어색하네?”“제가 완전 불리해요! 이렇게 이쁜 언니랑 싸우는데 제가 어떻게 이기겠어요?”가연이 장난스럽게 손가락으로 하트를 그렸다.그 모습에 주변 스태프들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러나 독고춘만은 인상을 잔뜩 구기며 높은 곳에서 빛을 밝혀주는 조명들에게 시선을 두었다.조명탑 위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검은 연기 한 줄기가 미세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독고춘은 본능적으로 몸을 굳혔다.“조명 준비 완료! 배우들, 4신 2테이크 들어갑니다!”감독의 목소리가 울리자, 모두 일제히 움직였다.지희와 가연은 서로를 마주 본 채 감정이 폭발하는 장면을 연기했다.가연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지희의 얼굴은 차가운 분노로 물들었다.그 순간 —‘찌익—!’조명탑 위에서 작은 불꽃이 튀었다.금속선이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거칠게 흔들거리는 커다란 조명.그 방향은 지희와 가연의 한가운데 쪽이었다.“위험해!”독고춘은 반사적으로 뛰어들었다.조명이 떨어지려는 순간,그는 지희가 아닌, 옆에 있던 가연을 밀쳐냈다.‘쾅!’폭발음과 함께 하얀 불빛이 산산조각났다.그리고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후,스탭들과 배우들의 비명 소리들 속에서 독고춘은 오른팔에 뜨거운 통증을 느꼈다.“꼬춘씨!!”지희가 달려왔다.지아도 놀라 달려와 그의 팔을 붙잡고 발을 동동 굴렀다.“피! 피나요! 119! 119! 누가 119좀 불러줘요!! 롸잇 나우!!!”“..,.괜찮으니까 호들갑 떨지마.”독고춘은 단호히 말했다.그의 눈은 여전히 천장을 향해 있었다.그곳에는 이미 검은 연기가 사라진 자리만 남아 있었다. ‘이 현장에...원귀를 품은 인간이 있었다.’---촬영은 중단되었고, 스태프들이 분주히 움직였다.가연은 울먹이며 독고춘에게 다가왔다.“정말... 고맙습니다. 그쪽 아니었으면... 죽었을지도 몰라요.”독고춘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저었다.“...별거 아닙니다.”“그래도... 나중에 제가 꼭 보답할께요.”가연은 그의 손등을 조심스레 붙잡고 얼마동안 몇마디를 더 나누었다."그럼 다음에 또 봐요."독고춘의 양손을 꽉잡은 가연이 생긋 미소를 짓더니 스탭들 사이로 사라졌다.지희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말없이 돌아섰다.그 눈빛 속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스며 있었다.---밤의 도로는 길고 조용했다.창밖으로 스쳐가는 가로등 불빛이 차 안을 번갈아 비췄다.깜빡이는 불빛마다 세 사람의 얼굴이 잠시씩 드러났다.말없이 핸들을 잡은 지아, 창가에 시선을 둔 지희, 그리고 팔에 붕대를 감은 독고춘.“오빠, 진짜 병원에 안가봐도 돼요?”지아가 조심스레 물었다.“...괜찮아.”짧은 대답.그는 여전히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차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지아가 독고춘과 지희를 힐끔 봤지만 괜히 끼어들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조금 뒤, 지희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조명이 가연이쪽으로 떨어지는거 어떻게 알았어요?”그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 쪽으로 돌아왔다.하지만 아무 감정도 읽히지 않는 눈이었다.“...감.”“감으로? 그게 다에요?”“...그냥.”“...그냥?”그녀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가연이 바로 옆에 저도 있었거든요? 그 조명이 저한테 떨어졌으면 어쩌려고요?”"...밀쳤겠지."지희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다시 얼마간의 침묵이 이어졌다.잠시 후, 지아가 뒤를 돌아보며 말문을 열었다.“자자~ 와아, 분위기 참 무겁다. 오늘 진짜 다들 고생했어요! 사고도 있었지만...그래도 아무 일 없었잖아요? 다행이에요, 그쵸?”지희는 작게 미소를 지었고, 독고춘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지아가 일부러 더 떠들기 시작했다.“나는 진짜 오빠가 슈퍼맨인줄 알았다니까요? 막 날라다녀~ 참! 그리고 오늘 뉴스에 나올지도 몰라요! ‘신참 매니저, 스타 구하다!’ 뭐 이런 식으로요. 그러다가 대중의 주목을 받고...갑자기 잘나가는 스타가 되는 전개! 어? 이 장면 어디서 본거 같은데?”“그만해, 지아. 진짜 그럴거 같아서 무섭잖아.”지희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렸지만, 그 웃음에는 어딘가 힘이 없었다.그때, 독고춘의 시선은 불현듯 창밖에 멈췄다.도로 옆 가로수 사이, 희미하게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 한 줄기.그는 순간적으로 몸을 굳혔다.지희와 지아는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도심의 불빛이 스쳐 지나가며 그 검은 형체를 잠깐 드러냈다.사람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그들의 차를 따라오고 있었다.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지아가 갑자기 표정이 일그러진 그를 보며 말했다.“왜 그래요?”그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기분이 묘하군.”지아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묘한 기분이요? 그게 어떤 기분? 고양이 같은 기분?”농담 섞인 말투였지만, 독고춘의 눈빛은 웃지 않았다.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는 이제 세 사람의 숨소리만 남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무너져 있던 주미의 얼굴엔 어느새 날 선 경계심이 떠올라 있었다. 가늘게 떨리는 손끝이 무릎 위에서 움켜쥐어졌다. “...은정이를...본 적 있어요?” 그 물음에 독고춘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본 것 같군.” 그 순간, 지희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아랫배 깊은 곳에서 낯익은 감각이 스치듯 지나갔다. ‘...갑자기 뭐지?’ 지희는 무심코 배를 한 번 쓸어내렸다. 그 묘한 감각이 채 가시기도 전에 주미의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방금 봤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에요? 그 애는...이미 죽었는다고요...” 끝내 말을 잇지 못한 그녀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지희는 당황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급히 끼어들었다. “아니, 그러니까...너무 놀라지 말아요. 이 사람이 원래 좀... 그런 걸 봐요. 귀신 같은 거? 저도 처음엔 믿기지 않았는데...하, 내가 지금 뭐라는 거야.” 말을 하던 지희가 괜히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작게 흘렸다. 그 사이 독고춘은 여전히 말없이 주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긴 검은 머리카락 사이, 그녀 어깨 위를 짙게 감싼 검은 기운이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채 일렁이고 있었다. 주미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독고춘을 노려보았다. “...귀신을 본다고요? 하!” 주미의 입술 사이로 허탈한 실소가 터져 나왔다. 대낮에 공원 벤치에서 귀신 타령이라니. 평소 같았으면 미친 사람들을 만났다며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터였다. 하지만 지희의 횡설수설하는 변명에도 주미는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저 놀리는 거죠?” 그 말에 지희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런 거 절대 아니에요! 저도 처음엔 안 믿었어요. 근데... 고은정씨가 누구에요?” 지희의 물음에 독고춘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박도윤과 깊게 얽혀 있던 것 같더군.” 순간 주미의 호흡이 거칠게 흔들렸다
주미는 호텔 로비를 빠져나온 뒤에도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겉으로 보기엔 흐트러짐 없는 상류층 여자의 걸음이었다.고개는 곧게 세워져 있었고, 어깨선도 흐트러짐 없이 단정했다.하지만 그 모습에선 살아 있는 사람 특유의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마치 오래전부터 몸에 밴 습관만으로 움직이는 사람처럼.햇살이 비치는 호텔 정문을 지나 바깥 공기 속으로 걸어 나가는 순간에도 그녀의 표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눈 밑엔 여전히 짙은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고, 초점이 흐릿한 눈동자는 자꾸만 허공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지희는 선글라스를 코끝까지 슬쩍 끌어내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저 여자, 병원부터 데려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괜히 따라 나온 건가 싶다가도, 저 위태로운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그냥 지나칠수 없었다.독고춘은 대답 대신 묵묵히 주미를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시선은 주미의 외견에 닿아 있지 않았다.정확히는, 그녀의 어깨와 목덜미를 감싸듯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에 머물러 있었다.실오라기처럼 가늘게 흩날리던 아지랑이는 점점 더 짙게 피어 올랐다.그 안엔 사람 하나를 집어삼킬 만큼 무거운 한이 엉겨 붙어 있었다.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주미의 발걸음이 횡단보도 앞에서 멈췄다.주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신호등을 올려다보며 걸음을 멈췄지만, 이상하게 그녀만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붉은 신호등이 선명하게 켜진 채였는데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본 채 천천히 앞을 향해 나아가려고 했다.뒤쫓아가던 지희는 화들짝 놀라 크게 소리쳤다.“뭐하는 거에요! 빨간불인데!”휙—그 순간, 독고춘의 몸이 재빠르게 움직였다.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그는 차도로 발을 내딛으려던 박주미의 손목을 거칠게 낚아챘다.“읏—!”균형을 잃은 주미는 그대로 독고춘의 품에 안겼다.부우우우웅—!그와 동시에, 눈앞을 검은 승용차 한 대가 거칠게 스쳐 지나갔다.바람이 옷자락을 세게 흔들었고, 옆에 서 있던 사람이 놀란 얼굴로 욕설을 내뱉었다.“아니, 빨간불인
지희는 선글라스를 손끝으로 슬쩍 내리며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가까이서 보니 여자의 상태는 생각보다 더 좋지 않았다. 화장은 흐트러짐 하나 없이 말끔했지만, 그 아래 숨겨진 피로까지 감추진 못한 얼굴. 지희는 괜히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특유의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크흠, 저기요~” 그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짙은 다크서클 아래, 날카롭지만 지친 눈동자, 경계심이 먼저 스친 얼굴이었다. “누구세요?” 지희는 한 번 숨을 고른 뒤, 천천히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맞은편 의자를 슬쩍 가리켰다. “잠깐 앉아도 돼요?” 햇빛 아래 드러난 지희의 얼굴을 확인한 여자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분명 놀란 기색은 있었지만, 그것도 찰나였다. 곧바로 피곤과 경계가 뒤섞인 눈빛이 다시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그러세요.” 지희는 허락이 떨어지자 자연스럽게 맞은편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 옆에는 독고춘이 말없이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그래서 절 찾아오신 이유가 뭐죠?"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정작 다가오긴 했는데, 막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네? 아, 그게 그러니까..." 그쪽 몸에 귀신이 붙어 있다고 할 수도 없고, 미치고 환장하겠네. 진짜. 지희가 입술을 달싹이던 순간, 여자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와 독고춘 사이를 오갔다. 정확히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과 분위기를 훑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둘이 빨리 헤어지는 게 좋을 거예요.” “네?” 그 말에 지희의 눈썹이 움찔 올라갔다. 박주미는 피곤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안 그러면...우리 오빠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그 말은 이상할 만큼 서늘했다. 마치 경고 같기도, 체념 같기도 한 목소리. 지희가 무언가 되묻기도 전에, 여자가 먼저 말했다. “아, 제 소개를 안 했네요.” 여자는 테이블 위에 얹은 손을 만지작거리다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박주미예요. 그쪽...
“하, 열받아 죽겠네.”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독고춘을 노려보던 지희가 작게 중얼거렸다.분명 어젯밤.남의 볼에 입술이나 찍어 놓고, 아침이 되자마자 하는 소리가 뭐?"그럴 리가 없지? 하, 참나."생각할수록 얄미웠다.속이 부글부글 끓는 지희와 달리 독고춘은 오늘도 지나치게 평온한 얼굴이었다.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심지어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이, 태연하게 엘리베이터 층수만 바라보고 있었다.그 뻔뻔한 태도에 지희의 속이 다시 한번 뒤집혔다.“꼬춘씨, 진짜 기억 안 나요? 어젯밤에 술 취해서—”“...그렇다고 해두지.”“하아?”덤덤한 그의 대답에 지희의 눈썹이 홱 치켜 올라갔다.“뭐라구요? 그렇다고 해둬?”독고춘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아주 희미하게 움직였다.그 모습이 더 얄미웠다.바로 그때,띵—엘리베이터가 9층에서 멈춰 섰다.문이 열리고, 한 젊은 여자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길게 내려오는 검은 생머리.절제된 화려함이 느껴지는 트위드 재킷과 눈에 익은 명품 백.누가 봐도 상류층 자제라는 게 고스란히 드러나는 화려한 차림새였다.지희는 혹시라도 자신을 알아볼까 싶어 재빨리 주머니 속 선글라스를 꺼내 슬쩍 얼굴 위로 걸쳤다.그녀는 지희를 힐끗 보는가 싶더니, 별다른 관심 없이 조용히 한쪽에 섰다.분명 그녀의 얼굴은 눈길이 갈 만큼 아름다웠다.하지만 눈 밑엔 희미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창백한 안색 때문인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마치 오랫동안 제대로 잠들지 못한 사람처럼.그 순간, 말없이 서 있던 독고춘의 시선이 천천히 가라앉았다.여자의 어깨와 목덜미 주변.보통 사람 눈엔 보이지 않을 검은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실오라기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그리고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1층에 가까워질 무렵, 지희의 표정이 갑자기 일그러졌다.“읏...”아랫배 깊숙한 곳에서 낯익은 고통이 스멀스멀 치고 올라왔다.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이 아랫배를 움켜쥐었다.방금 전까지 씩씩대며 독고춘에
30분 후,과실주가 남긴 붉은 열기가 독고춘의 뺨을 따라 천천히 타고 올라갔다.언제나 단단히 잠겨 있던 돌부처의 입꼬리가, 지희의 눈앞에서 서서히 헐겁게 풀리기 시작했다.“...푸, 푸후후.”독고춘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평소의 그 무뚝뚝하고 날 선 기색은 어디 가고, 눈까지 반쯤 감은 채 헤실헤실 웃는 얼굴.처음 보는 그의 무방비한 모습에 지희는 순간 멍하니 멈춰 섰다.‘됐다! 드디어 취했네, 이 곰탱이!’속으로는 저번에 동요 주정으로 자신을 놀려댔던 독고춘에게 완벽하게 한 방 먹였다며 쾌재를 불렀다.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붉어진 얼굴로 바보처럼 생글생글 웃고 있는 독고춘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지희의 심장이 묘하게 간지러워졌다.수트를 입었을 때의 그 치명적인 아우라는 어디 가고, 대책 없이 순해진 얼굴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하, 이 와중에도 귀여우시겠다?’지희가 혼자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삐죽이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툭.“...꼬춘씨?”독고춘의 고개가 힘없이 앞으로 꺾이더니, 그대로 테이블 위로 쓰러져 버렸다.완전히 필름이 끊긴 모양이었다.“아우, 진짜! 꼬춘씨, 침대 가서 누워요!”지희는 비틀거리는 독고춘의 거대한 몸을 제 어깨 위로 간신히 걸쳐 멨다.온천과 마사지를 받아 나른해진 몸체에 가뜩이나 무거운 남자의 몸뚱이가 더해지니,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발에 힘 좀 줘 봐요! 와, 나 진짜 허리 부러지겠네!”가까스로 침대 가장자리에 도착한 지희는 독고춘을 매트리스 위로 툭 쓰러뜨렸다.“헉, 헉. 됐다.”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찰나였다.휙—!“어... 앗!”순식간에 시야가 한 바퀴 빙글 돌더니, 몸이 붕 떴다.독고춘의 큼지막한 두 팔이 지희의 허리를 밧줄처럼 감싸 안은 채, 그대로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지희의 얼굴이 독고춘의 단단한 가슴팍에 코가 닿을 정도로 바짝 밀착됐다.
뜨끈한 온천물 위로 하얀 김이 은은하게 피어올랐다.독고춘은 눈을 감은 채 묵묵히 물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곳에 익숙했던 사람처럼, 지나치게 평온했다.눈 감고 있는 얼굴.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태연한 표정.지희는 저 혼자만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아 조금 얄미울 정도였다.그녀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손끝으로 물을 툭 건드렸다.찰박.“...”독고춘 얼굴에 물방울이 조금 튀었지만 별 반응은 없었다.설마 못 느꼈나?지희는 괜히 입꼬리를 올리며 이번엔 조금 더 세게 물을 튕겼다.촤악.얼굴에 제법 물을 맞은 독고춘의 눈꺼풀이 그제야 천천히 열렸다.“...뭐 하는 거지?”“풉. 아니, 여기 벌레가 있어서요.”지희는 들킨 아이처럼 웃음을 참으며 딴청을 피웠다.독고춘의 시선이 잠시 그녀 얼굴에 머물렀다.그러더니 아주 태연하게 손으로 물을 한 움큼 떠올려 지희 얼굴에 뿌렸다.촤아악.“꺄악! 아, 진짜! 뭐 하는 거예요?”“...모기가 있군.”"한겨울에 무슨 모기에요? 말이 되는 소리를..."촤아악."아씨, 지금 해보자는 거죠?"둘이 서로 물을 뿌려대고 있을 때였다."크, 크흠."등 뒤에서 들려온 아주 정중하고도 민망한 헛기침 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홱 돌아갔다.“실례하겠습니다. 고객님, 아로마 케어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이제 마사지 베드로 이동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아, 네..."지희는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은 심정으로 얼굴을 붉히며 탕에서 벌떡 일어났다.독고춘은 젖은 머리를 한번 쓸어넘기곤,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남긴 채 천천히 그녀 뒤를 따랐다.직원이 안내한 곳에는 나란히 놓인 두 개의 마사지 베드가 있었다.“두 분, 편하게 누워 계시면 바로 시작하겠습니다.”아로마 향이 은은하게 번지는 가운데, 지희는 어느새 베드에 누워 눈을 감았다.---“손님, 끝났습니다.”"...음? 아, 수고하셨어요."지희가 마사지 베드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는 어느새 어둑한 저녁이 내려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