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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도깨비의 아이: Chapter 21 - Chapter 30

84 Chapters

21화

독고춘과 눈이 마주친 순간, 남자의 입가에서 미소가 걷혔다. 남자는 스태프들 사이로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독고춘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천천히 그쪽으로 몸을 틀었다. "꼬춘 씨…?" 의자에 앉아 물을 마시던 지희는 그의 시선이 한곳에 박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 끝에 누가 서 있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희는 저도 모르게 그의 팔을 꽉 붙잡았다. 가지 말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지켜 주겠다고 한 사람을 붙잡는 것이 옳은지, 지희는 알 수 없었다. 독고춘은 그녀를 돌아보고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빠르게 세트 뒤편의 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세트 뒤편에서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좁은 복도에는 묘한 냉기가 감돌았다. 툭, 툭, 툭. 앞쪽에서 투박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독고춘은 그 소리를 따라 짐승처럼 몸을 낮추고 거리를 좁혔다. 복도 끝, 남자가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멈춰." 남자가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 드러난 얼굴은 사람의 것이었지만 눈만은 그렇지 않았다. 동공이 새까맣게 번져 있었고, 입가는 가늘게 일그러진 채 웃고 있었다. 안에 들어앉아 있던 검은 연기가 남자의 목덜미에서 피어올라 벽을 타고 천장까지 번져 갔다. 공기가 짓눌리는 듯한 무게가 복도에 내려앉았다. "…또 보는군." "그 여자는… 내 것이다. 그 여자의… 안에 있는 것까지… 전부…" 낮고 기괴한 목소리가 뒤섞여 흘러나왔다. 검은 연기가 그 말에 맞추어 더욱 짙게 부풀었다. "…이제 그만 사라져라." "크하하하, 웃기는 소리!" 남자는 절규하듯 웃더니 문을 벌컥 열고 주차장으로 달아났다. 추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막다른 벽까지 몰린 남자가 품에서 흉기를 꺼내 들었다. 한쪽 얼굴은 겁에 질려 있었고, 다른 한쪽 얼굴은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가까이… 오지 마! 죽여… 버린다!" 독고춘은 대꾸 없이 뚜벅뚜벅 다가갔다. 지난번처럼 불꽃을 쏟아부으면 겁에 질린 저 얼굴까지 태우게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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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일주일 뒤, 늦은 밤의 호텔 스위트룸. 텔레비전에서 앵커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배우 강지희 씨를 스토킹한 혐의를 받는 피의자가 오늘 오후 구속됐습니다. 지난 17일 경찰에 붙잡힌 김 씨는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며 혐의를 부인했는데요. 법원은 검찰이 제시한 증거를…" 소파에 깊이 기대앉은 지희가 리모컨을 눌러 화면을 껐다. 긴장은 풀렸지만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선명했다. 벽을 뒤덮은 붉은 글씨도, 구급차에 실려 가던 독고춘의 모습도. 벽의 글씨는 지웠다지만 그 집으로 돌아갈 엄두는 아직 나지 않았다. 탁자 위에는 지아가 깎아 놓은 사과가 놓여 있었다. "내일부터 다시 촬영이구나…" 지희가 크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러게요, 언니. 그동안 경찰서 왔다 갔다 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는데… 하~암." 지아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태블릿을 덮었다. 독고춘은 사흘 전에 병원에서 나왔다. 더 누워 있으라는 의사의 말도, 지희의 잔소리도 소용이 없었다. 휘몰아치던 며칠이 지나가고, 세 사람은 겨우 평온을 되찾은 듯 보였다. ─── 다음 날, 드라마 촬영장. 세트 한쪽에는 작은 트리가 반짝이고 있었고, 스태프들은 일하는 틈틈이 캐럴을 흥얼거렸다. 크리스마스였다. "컷! 오케이, 이번 씬 좋았어요! 30분 휴식!" 감독의 외침에 현장이 잠시 숨을 돌렸다. 조명이 꺼지고 스태프들이 장비를 옮기느라 분주해졌다. 대기실로 돌아온 지희는 소파에 앉아 물을 마시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언니, 오늘 씬 완전 예쁘게 잘 나왔어요!" "그래? 뭐, 당연한 거 아니야?" 웃으며 받아쳤지만 얼굴에는 피로가 묻어 있었다. 그때 문이 조용히 열리고 독고춘이 들어왔다. 평소와 다름없는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여긴 왜 왔어요? 차에서 쉬고 있으라니까." 지희가 놀라 물었다. 등의 상처가 다 아물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지루해서." 짧게 대답한 그는 대기실 구석에서 의자 하나를 꺼내 앉았다. 손에는 낡은 그림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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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해가 바뀌었다. 새해 첫 주, 밤새 내리던 비가 갓 그친 아침이었다. KG엔터테인먼트 본사 최상층의 유리벽은 젖은 하늘을 받아 은빛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지희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대표실로 들어섰다. 고급스러운 향수 냄새와 함께,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하이힐 소리가 작게 울렸다. 안쪽에서는 정장 차림의 윤혜련이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여전히 단정하고 빈틈없는 모습이었지만 어딘가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엄마!" 지희가 달려가 반갑게 안기자, 혜련은 딸의 등을 몇 번 두드려 준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희야… 정말 오랜만이네." 혜련은 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반가움보다 놀람과 짙은 피로가 먼저 비치는 눈이었다. "미국에 있는 동안 뉴스로 네 이름을 수도 없이 들었어." 혜련이 손끝으로 태블릿을 두드렸다. 화면에는 기사 제목들이 빽빽했다. "이게 다 뭐니?" 지희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냥… 촬영하다가 좀 무리해서. 별일 아니야, 엄마." "별일이 아니라니? 쓰러지고, 입원까지 했는데? 스토커 사건까지 터졌잖아. 이게 별일이 아니야?" 혜련의 목소리가 단단하게 갈라졌다. 지희는 고개를 숙였다. 혜련은 작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네 아빠는 뭐라고 안 하디?" "아빠가 언제 나한테 신경 쓴 적 있어? 연락 한 번 안 왔어. 물론 나도 안 했고." "그래, 그렇겠지." 혜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계속 생각했어. 내 딸이 왜 갑자기 그렇게 무너졌을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희의 시선이 흔들렸다. "…말했잖아. 그냥 피곤해서 그랬다고." "거짓말하지 마." 혜련이 한 발 다가섰다. "엄마 눈엔 다 보여. 자기 몸을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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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그날 저녁, 대표실 유리창에는 서울의 불빛이 차갑게 번지고 있었다. 똑똑— "들어와요." 혜련이 태블릿을 덮자 김 비서가 서류철을 품에 안고 들어왔다. "사모님, 요청하신 건 정리되었습니다." "그래요, 앉아요." 딸을 지키다 칼까지 맞았다는 사람이었다. 고맙다는 말부터 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딸의 곁에 두어도 되는 사람인지는 다른 문제였다. 김 비서는 혜련의 맞은편에 앉아 서류를 보며 말했다. "그 남자 이름은 독고춘이라고 합니다." "흐음, 신기한 이름이네. 출생지는?" "인천 미추홀구 주안동으로 되어 있습니다." "부모는 뭐 하시고?" "두 분 다 사망했습니다. 사인은 교통사고로 추정됩니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당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학력은? 어느 대학 졸업했죠?" "초등학교를 중퇴한 뒤로는 이력이 없습니다." "...초등학교를 중퇴?" 혜련이 눈썹을 찌푸렸다. "뭐, 학교는 그렇다 치고… 그럼 그 뒤의 기록은?" "없습니다. 그 뒤로 세상에서 사라졌다가,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나타난 사람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기록이 없다니?" "20년 동안 주민등록을 고친 적도 없고, 세금 기록도 없습니다. 신용카드나 계좌 내역도 확인되지 않습니다." 혜련은 잠시 말이 없었다. 손 끝이 책상 위를 툭, 툭 두드렸다. "…사람이 20년 동안 기록 없이 산다는 게 가능해?" "그게… 문제입니다." 김 비서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아홉 살 이후의 기록이 아예 없습니다. 어디서 살았는지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혜련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김 비서에게 서류를 건네받았다. 이름과 출생지, 부모의 사망 기록. 그 뒤로는 믿기 어려울 만큼 공백뿐이었다. 누군가 일부러 흔적을 지운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온 것일까. 어느 쪽이든 평범한 사람의 이력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부모를 잃은 아홉 살짜리 아이가 20년 동안 어디서, 누구 손에 자랐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런 남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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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그날 저녁, 촬영을 마친 세 사람의 차가 어둑해진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뒷좌석에 기댄 지희는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본 지희는 잠시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엄마?" -지희야, 아직 촬영 중이야?- 혜련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단단했다. "아니, 이제 끝나고 가는 중이야." -그래? 얘는, 끝나면 연락하라니까.- "왜? 무슨 일 있어?" -일은 무슨. 그냥 오랜만에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혜련은 잠시 말을 고르더니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지아랑 고춘 씨도 같이 집으로 와. 옆에 있지?- 지희가 눈을 떴다. 어제는 당장 그만두게 하라던 엄마였다. 그런 엄마가 하루 만에 그를 집으로 부르고 있었다. "집으로? 엄마, 그냥 밖에서 먹으면 안 돼?" -네 아빠 없으니까 걱정 말고 집으로 와.- "알았어. 일단 물어보고…" -꼭 데려와. 그럼 끊는다.- 뚜우, 뚜우— 전화가 끊기자 지희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운전하던 지아가 룸미러로 지희를 보며 물었다. "왜요, 언니? 사모님이 집으로 호출하셨어요?" "지아야." "네?" "오늘… 우리 셋이 본가에 가야 할 것 같아." 지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요?" "응. 엄마가 셋이 같이 오래. 저녁 먹자고." "우와… 사모님이 저녁 식사에 초대해 주신 거예요? 근데… 오빠도요?" 지희는 조심스럽게 조수석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하게 창밖을 보던 독고춘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희와 눈을 맞췄다. "…가야 하나?" "아니, 뭐.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요.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 "…그럼 안 갈…" "아! 사랑이가 꼬춘 씨 안 가면 가기 싫다는데요? 이거 어쩌지? 엄마한테 못 간다고 다시 전화해야 하나…" 지희는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독고춘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의 시선이 지희의 손이 놓인 아랫배에 잠시 머물렀다. "…할 수 없군." 지아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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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늦은 저녁, 혜련은 현관까지 나와 손님들을 배웅했다. 가정부가 문을 열자 서늘한 겨울바람이 실내의 따스한 공기를 한순간에 흩어 놓았다. "오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모님." 지아가 환하게 인사했다. 그 옆에서 지희가 혜련에게 안기며 말했다. "엄마, 음식 너무 맛있었어. 고마워." "그래, 이제 집에 자주 와서 저녁 먹고 가." 혜련은 딸을 안아 주면서도 시선은 현관에서 구두를 신는 독고춘에게 두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단정한 자세로 말없이 허리를 숙였다. 그 순간 지희의 눈길이 그를 향했다. 그 눈빛에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독고춘이 고개를 들었을 때,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맞닿았다. 찰나의 정적이었다. 하지만 혜련은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지희의 얼굴에 어린 미묘한 빛, 그리고 독고춘의 눈동자에 번진 부드러운 흔들림. 혜련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조심히 가." 평정을 잃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묘한 굴곡이 스며 있었다. 문이 닫히고 세 사람의 차가 멀어질 때까지 혜련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거실의 불빛이 대리석 바닥 위로 그녀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지희가 남자한테 저런 눈을 한 적이 있었던가?" 혜련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어릴 때부터 지희는 다른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특히 남자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욱 그랬다. 누군가 호의를 보이면 먼저 경계했고,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이 보이면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런 딸이 오늘은 달랐다. 독고춘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경계보다 익숙함이, 불편함보다 편안함이 담겨 있었다. 단순히 자신을 지켜 주는 매니저를 향한 신뢰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혜련은 어머니로서 알 수 있었다. 딸이 누군가를 바라볼 때, 아주 조금씩 달라지는 표정을. 혜련의 입꼬리가 천천히 굳어 갔다. ─── 한남동을 떠나는 차 안에는 엔진 소리뿐, 말소리도 웃음소리도 없었다. 운전석의 지아가 룸미러로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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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그날 저녁, KG엔터의 대표실. 김 비서가 USB 하나를 내밀었다. "사모님, 요청하신 촬영장 기록입니다." 혜련은 조용히 노트북을 켰다. 화면 속에서 지희가 웃고 있었다. 혜련의 시선이 딸의 표정에서 멈췄다. 카메라 앞에서 짓는 웃음이라면 수없이 보아 왔다. 하지만 이건 그 웃음이 아니었다. 꾸미지 않은, 진심에서 나온 예쁜 웃음이었다. "…저 애가 저런 얼굴로 웃을 수 있구나." 혜련은 짧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곧게 들었다. 딸의 곁에는 무뚝뚝한 얼굴의 독고춘이 서 있었다. 그런데 그 눈빛만큼은 이상하리만치 따뜻했다. 그의 눈은 너무나 분명하게 딸을 향하고 있었다. 딸이 저렇게 웃는 것은 반가웠다. 그래서 더, 그 웃음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가 마음에 걸렸다. 혜련은 화면에서 눈을 떼고 차갑게 미소 지었다. "좋아요. 당분간… 계속 부탁해요." "네, 사모님." ─── 다음 날, 해가 기울어 가는 오후였다. "거기 조명 조금만 더 내리세요! 네, 좋습니다! 배우들, 준비해 주세요!" 감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트장 근처에 앉아 대본을 보던 지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부터 가시지 않는 시선 때문에, 독고춘은 평소보다 한 걸음 더 가까이 그녀의 곁에 서 있었다.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바닥의 케이블에 힐이 걸리며 몸이 휘청했다. "아앗—!" 그 순간 독고춘의 팔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지희의 허리를 감싸 안았고, 그 힘에 이끌린 그녀의 몸이 그의 품 안으로 턱 하고 안겨 들었다. 다 아물지 않은 등이 뻐근하게 당겼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멍하니 있던 지희의 얼굴이 뒤늦게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심장은 제멋대로 뛰었고 귀 끝까지 열이 올랐다. "…괜찮나?" 그의 손이 허리에서 떨어졌는데도 지희는 한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단단히 붙잡고 있던 팔의 감각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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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며칠 뒤 오전, KG엔터테인먼트 대표실. 통유리 너머의 도심은 오늘도 바쁘게 일렁이고 있었지만 실내는 서늘할 만큼 고요했다. 혜련은 책상 위의 서류 한 장을 손끝으로 톡, 톡 두드렸다. 아홉 살 이후의 기록이 통째로 사라진 남자, 독고춘의 서류였다. 그때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와 함께 지아가 들어왔다. "사, 사모님. 부르셨어요?" 평소의 씩씩함은 어디로 갔는지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혜련은 고개를 들어 부드럽지만 뼈가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아야, 앉으렴. 우리 지아가 고생이 많지? 지희 뒤치다꺼리하랴, 새로 온 매니저 가르치랴." "아, 아니에요! 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지아는 땀이 밴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르며 소파에 조심스레 걸터앉았다. 혜련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예고도 없이 물었다. "그래서, 그 '유명하신 분'이 누구니?" "…네?" "고춘 씨가 전에 모셨다는 그 유명한 분 말이야. 우리 김 비서가 아무리 뒤져도 그 사람 지난 20년 기록이 안 나오더구나. 세금 기록도, 통장 내역도 없이 유령처럼 산 사람이 어떻게 유명한 사람의 매니저를 할 수 있었을까?" 혜련의 시선이 지아의 눈동자를 꿰뚫듯 파고들었다. 지아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어… 그, 그게… 진짜 유명하신 분은 맞는데, 연예계 쪽이 아니라서…" "지아야." 혜련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난 내 딸 곁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 있는 걸 용납 못 해. 네가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난 고춘 씨를 당장 지희 옆에서 치울 수밖에 없어. 지희를 지키다 칼을 맞았든 어쨌든 상관없이." 치운다는 말에 지아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지희가 겨우 안정을 찾았는데, 독고춘이 사라지면 사랑이는 어떻게 되고 지희는 또 어떻게 무너질지 눈앞이 캄캄했다. 결국 지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산속에 계세요." "산속?" "네… 오빠는 아홉 살 때부터 거기서 명옥 님이라는 분이 길러 주셨다고 들었어요…"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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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그날 오후, 촬영이 잠시 멈춘 세트장의 대기실. 창가로 스며드는 겨울 햇살은 따스했지만 지희의 마음은 그보다 훨씬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대본을 손에 쥐고 있어도 활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선은 자꾸만 문가에 묵묵히 서 있는 독고춘에게로 향했다. 그는 늘 그렇듯 무뚝뚝한 얼굴로 스태프들의 동선을 살피고 있었다. 며칠째 가시지 않는 시선 때문인지 요즘은 한시도 경계를 풀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참 답답하게도 서 있네' 하고 말았을 텐데, 이제는 그 투박한 실루엣마저 묘하게 듬직해 보였다. 지희는 며칠 전 자신을 낚아채듯 붙잡아 안던 단단한 팔의 감촉을 떠올렸다.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자, 얼굴이 화끈거려 급히 대본으로 얼굴을 가렸다. '…강지희, 너 정말 미쳤어? 왜 이러는 거야? 설마 저 곰탱이 같은 남자한테 반한 건 아니지?' 거기까지여야 한다던 다짐은 며칠도 가지 못했다. 마음은 머리처럼 통제되지 않았고, 독고춘을 힐끗거릴 때마다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 괜히 목이 타서 물병을 집어 들었지만 물병은 어느새 텅 비어 있었다. "아이 참… 꼬춘 씨." 조심스럽게 부르는 목소리에 독고춘이 고개를 돌렸다. 그 깊고 정직한 눈과 마주치는 순간 지희는 숨을 들이켰다. "…왜 그러지?" "아, 그게… 물 좀." 독고춘은 말없이 새 생수병을 가져와 뚜껑을 따서 내밀었다. 늘 손이 닿지 않게 건네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서두른 지희의 손이 먼저 그의 손가락을 스쳤다. 찰나의 접촉이었지만 지희는 감전이라도 된 듯 깜짝 놀라며 물병을 낚아채듯 받았다. "어머, 지희 씨!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요?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놀라 다가오자 지희는 더 당황해 손부채질을 했다. "아, 아니요? 오늘 조명이 유난히 뜨겁네? 조명 탓, 조명 탓." 지희는 찬물을 들이켜며 유난히 큰 소리로 얼버무렸다. 아랫배의 사랑이는 그런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분 좋게 푸른빛을 내며 살짝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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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는 차 안은 평소보다 훨씬 무거운 정적에 잠겨 있었다. 핸들을 잡은 지아가 룸미러로 뒷좌석의 지희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 박… 뭐시기인가 하는 남자, 촬영장 위치는 어떻게 알고 대기실까지 들어왔지? 언니 스케줄은 외부 비공개인데." "글쎄… 그것보다 난 아직도 소름 끼쳐." 지희는 창밖을 보며 아랫배를 가만히 쓰다듬고 있었다. 박도윤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의 그 지독한 오한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잠시 뒤, 지희가 조수석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꼬춘 씨. 아까… 그 남자가 위험하다고 했죠? 그냥 느낌 때문이에요? 아니면 뭔가 보여요?" 독고춘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희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가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지희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엄마'였다. 지희는 약간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지희야, 촬영 끝났니?- 혜련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응, 끝났어. 무슨 일이야, 엄마?" -촬영장에서 박도윤 부사장 봤지?- "봤어. 안 그래도 그 얘기 중이었는데, 엄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촬영장 위치 알려 줬어. 아까 회사에 찾아왔길래 네 얼굴 보고 가라고 했지.- 지희는 왈칵 짜증을 냈다. "아, 엄마! 왜 쓸데없이 일을 만들어!" -시끄러, 이 기지배야. 아무튼 보니까 어때? 멀끔하니 괜찮지? 지금 찍는 드라마 끝나면 정식으로 자리 만들 거니까 그런 줄 알고 있어. 그럼 끊는다.- "아니, 잠깐만! 엄마! 엄마?" 뚜우, 뚜우— 무정한 신호음만 남긴 채 전화가 끊겼다. 지희는 휴대폰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다가 가방 속으로 휙 집어 던졌다. "지아야, 들었지? 윤 여사님께서 직접 위치를 알려 주셨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진짜." 지희는 다시 아랫배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박도윤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몸이 싸늘하게 식었다. 사랑이의 공포는 곧 지희의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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