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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도깨비의 아이: Chapter 31 - Chapter 40

66 Chapters

31화

“지금 이 사람이 입고 있는 수트, 차고 있는 시계랑 벨트까지 전부 계산해서 저희집으로 보내주세요. 아, 구두는 신고 있는거 말고 제일 신상으로.” ​KG백화점 명품관 VVIP룸. 지희는 우아하게 소파에 기대앉아 턱을 괸 채, 칠흑 같은 빛을 내뿜는 블랙카드를 눈 앞의 직원에게 내밀었다. 대한민국 상위 0.05%에게만 허락된다는, 부와 권력의 상징. ​카드를 받아 든 직원이 황송한 듯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계산대로 사라졌다. 지희 옆에 서 있던 독고춘은 안절부절못하며 제 손목에 감긴 시계와 수트를 번갈아 보았다. ​“...이건 좀 과한 것 같은데." “이거 공짜 아니거든요? 우리 엄마 앞에서 완벽하게 내 남자친구인 척 연기해달라는 대가에요! 뭐, 도와주는것도 고맙고.” ​지희가 틱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독고춘에게 다가가 삐딱하게 매여 있는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겨 바로잡았다.​​“대충 입고 가는거 보다 이렇게 차려 입고 가야 그나마 덜 의심할 거예요. 일단 우리 엄마는 꼬춘씨처럼 잘생긴 남자한테 약하거든.” "...잘생긴 남자?" 지희는 순간 자신이 내뱉은 말에 움찔하고는 독고춘의 가슴팍을 툭 밀치며 홱 돌아섰다. "크, 크흠! 얼른 옷 갈아 입고 밥 먹으러 가요." 그때, 지희의 아랫배에서 검은 연기 대신, 푸른 불꽃의 기운이 잠깐동안 일렁거렸다. --- 백화점을 나선 지희가 독고춘을 이끌고 도착한 곳은 골목 깊숙한 곳에 위치한 한옥 식당이었다. 겉은 허름해 보였지만, 안으로 들어서자 복도를 따라 깔끔한 테이블들이 늘어서 있었다. ​지희는 익숙하게 직원과 대화 후, 조용한 룸으로 안내 받았다. ​“자, 꼬춘 씨는 뭐 먹을래요?” "...같은걸로." "오케이. 그럼 곱창전골 2인분. 여긴 이게 맛있어요. 그리고 공깃밥 2개랑 계란찜." 능숙하게 테이블 위에 있는 키오스크를 두드려 주문을 완료한 그녀는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돌변했다. "꼬춘씨, 우리 엄마 앞에서는 무조건 똑 부러지는 남친 연기를 해야 해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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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아... 머리야....” ​촬영장으로 향하는 차 안. 지희는 창문에 이마를 대고 신음하고 있었다. 속은 울렁거리고, 머릿속에선 어젯밤의 파편들이 날카로운 얼음 조각처럼 콕콕 박혀왔다. 조수석에 앉은 독고춘은 어제 지희가 사준 깔끔한 수트 차림으로 명상하듯 눈을 감고 있었다. ​“아우, 속쓰려.” ​지희가 계속 괴로워하자, 독고춘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그녀를 향해 무심하게 핀잔을 던졌다.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술을 마시는건 미련한 짓 아닌가?” ​“미련? 아니, 하... 아악, 열받아!” ​지희가 빽 소리를 질렀지만, 욱신거리는 두통에 금세 다시 고개를 떨궜다. 뭐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어쨌든 업혀 들어온 건 자신이었기에, 지희는 그저 입술을 삐죽거리며 분을 삭일 뿐이었다. ​그때, 독고춘의 입가에 아주 희미하고 옅은 미소가 번졌다. 평소의 돌부처 같은 얼굴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노래는 잘 하더군.” ​“노...노래?” ​지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설마, 설마 했던 그 기억의 조각이 현실로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흠~흠흠 흠흠흠~흠흠흠 흠흠흠~" ​독고춘은 동요 '산토끼'와 '코끼리 아저씨'의 멜로디를 흥얼 거렸다. ​“아아악! 하지 마요! 제발! 진짜 하지마!” ​지희가 귀를 막고 의자에서 발버둥을 쳤다. 얼굴은 이미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희가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칠수록, 독고춘의 미소는 조금 더 짙어졌다. 누군가를 골려주는 게 이토록 즐거운 일인지 본인도 처음 깨닫는 중이었다. ​운전석에서 두 사람을 살피던 지아의 입가에도 묘한 미소가 걸렸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둘이 언제 이렇게 달달해졌지?’ ​지아는 둘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언니, 오빠. 우리 이제 촬영장 거의 다 왔어요.” ​지아의 말에 지희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독고춘은 그런 지희를 바라보다가 다시 창문쪽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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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재벌가의 밤을 재현한 대형 세트장은 눈부신 조명으로 가득했다. 긴 테이블 위엔 고급 와인병과 디저트가 장식처럼 놓여 있었고, 화려한 드레스와 정장을 차려입은 엑스트라들이 잔을 들고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 촬영 분량은 극 중 재벌가 파티 장면. 지희는 계단 위쪽 메인 동선에서 주연 배우와 대사를 주고받는 장면을 준비 중이었고, 그 아래 홀 한쪽엔 분위기를 채워줄 엑스트라들이 배치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 단정한 네이비 수트를 입은 독고춘이 어색한 자세로 서 있었다. “지희씨 매니저님.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감독이 모니터를 보며 손짓했다. “그냥 배우분이랑 나란히 서 계시면 됩니다. 대사도 없고 움직임도 없어요. 자연스럽게 파티 즐기는 느낌만 내면 돼요.” 독고춘은 못 미더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에 선 조연 배우는 단아한 노란색 드레스를 입은 배우 서가연이었다. 가연은 독고춘을 힐끗 올려다보더니,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안녕하세요~ 저번에는 정말 고마웠어요. 저 기억 하시죠?” 독고춘은 예전 촬영장에서 조명이 떨어졌을때, 지희 대신 밀쳐냈던 여자라는걸 기억해 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랜만입니다." 멀찍이 메인 자리에서 대기하던 지희는 독고춘과 가연이 웃으며 인사하는걸 지켜보다가 괜히 심기가 불편해졌다. '하...또 헤벌레 하고 있네.' “모두 준비해 주세요! 갑니다!” 카메라가 레일 위에 올라가고, 조명이 한 번 더 조정됐다. 배우들이 위치를 잡고 음악이 깔리자 화려한 파티장의 분위기가 단숨에 살아났다. 지희는 계단 위에서 상대 배우와 시선을 맞추며 타이밍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의 신경은 자꾸만 아래쪽 홀로 향했다. 독고춘은 지시받은 대로 가연 옆에 나란히 서 있었다. 딱 거기까지면 지희 입장에서는 완벽했을 터였다. 그런데 촬영 시작과 동시에 가연이 자연스럽게 웃으며 독고춘의 팔에 두 손을 감아 올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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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따뜻한 조명이 식탁 위를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 정갈하게 차려진 한식 코스 요리와 은은한 와인 향, 잔잔하게 흐르는 클래식 음악까지. 겉으로 보기엔 고급 레스토랑 분위기의 저녁 식사 자리였다. 하지만 지희에게 이곳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맞은편에 앉은 박도윤이 젓가락을 들 때마다, 자신을 쳐다보며 미소 지을 때마다 아랫배 안쪽이 서늘하게 뒤틀렸다. 마치 뱃속의 사랑이가 그의 존재를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느낌이었다. 지희는 애써 고통을 참으며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식사를 이어 가고 있었다. “오늘 촬영은 어땠니?” 혜련이 식사를 하며 온화한 미소로 입을 열었다. “...그냥 늘 하던대로야.” “늘 하던 대로라기엔 피곤해 보이네. 얼굴도 상했고.” “엄마가 갑자기 부르지만 않았어도 집에서 쉬고 있었겠지.” 지희가 퉁명스럽게 받아치자 혜련은 눈썹을 가늘게 치켜올렸다. 그러나 곧 다시 우아한 미소를 되찾았다. “도윤씨 앞에서 왜 그렇게 날이 서 있니. 손님 모셔놓고 그게 할 소리야?” 도윤이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지희씨다운 솔직함이 오히려 좋군요. 역시 지희씨는 실물이 훨씬 아름답습니다.” “...아, 네.” “다음 작품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혹시 시간이 되시면 제가 투자하는 영화쪽 이야기도—” “...일 얘기는 회사 통해서 하세요.” 말을 자르듯 내뱉은 지희가 젓가락을 내려놓자, 식탁 위 공기가 순간 싸늘하게 식었다. 혜련은 곧장 미간을 찌푸렸다. “강지희.” 낮지만 날카로운 혜련의 경고에도 지희는 대꾸하지 않았다. 속이 뒤집힐듯 아파오고 있었다. 식은땀이 목덜미를 타고 흘렀고, 가까스로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그때 도윤이 오히려 여유롭게 웃으며 분위기를 거두어냈다. “대표님, 괜찮습니다. 제가 아직 지희씨와 친해질 시간이 부족했던건 사실이니까요.” “도윤씨가 이해심이 많아서 다행이에요. 그렇다고 너무 오냐오냐 해주면 안돼요.” 혜련은 만족스럽다는 듯 가볍게 웃더니 냅킨을 곱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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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으음..." 지희는 어둠 속으로 가라앉던 의식 끝에서, 익숙한 체온을 느꼈다. 단단하면서도 이상하게 편안한 온기. 코 끝을 간지럽히는 은은한 향과, 심장을 진정시키는 듯한 묵직한 안정감.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흔들리는 차 안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곧, 바로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깼나.” 낮고 담담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독고춘이었다. 지희는 멍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서야 자신이 지금 무엇에 기대어 있는지 깨달았다. 독고춘의 허벅지. 정확히는 뒷좌석에 길게 누운 채, 그의 허벅지를 베고 있었다. “뭐, 뭐야? 뭐가 어떻게 된거지?” 화들짝 놀란 지희가 벌떡 일어나려 하자, 독고춘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 “...누워 있어.” 짧고 무심한 한마디였지만, 이상하게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지희는 괜히 입술만 달싹이다가 다시 얌전히 누웠다. 심장은 아까보다 더 요란하게 뛰고 있었다. 운전석에서 백미러로 뒤를 살피던 지아가 반색하며 소리쳤다. “언니! 깼어요? 괜찮아요?” “지아야, 어떻게 된 거야? 둘이 집에 안갔어?” “원래 가고 있었죠! 거의 중간까지 갔는데—” 지아는 신이 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갑자기 오빠가 완전 무섭게 '지희가 너무 걱정되서 안되겠어! 빨리 차 돌려!' 라고 말하는 거 있죠? 그래서 저 바로 불법 유턴 했잖아요!” "...하아...내가 언제 그런말을 했지?" “가다가 차를 돌렸다고?” 지희가 눈을 크게 뜨자 지아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빠 표정이 평소랑 다르게 진짜 싸늘해서 저도 순간 뭔 일 났구나 싶었어요.” 지희의 시선이 천천히 독고춘에게 향했다. 그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한숨을 쉬며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박도윤은?” 그 질문에 지아가 기다렸다는 듯 몸을 들썩였다. “아, 그 십색...이 아니라 그 남자요? 오빠가 딱 나타나서 손목 잡는 순간 얼굴색이 싹 변하더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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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그러니까...박도윤이 사랑이 아빠라고요?” ​지희의 입에서 떨어진 말은 질문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이미 반쯤 확신이 섞여 있었다. 곧, 식탁 위 공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독고춘은 잠시 동안 지희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이의 원한(怨恨)이 그 남자에게 향하고 있으니 틀림 없겠지." 지희는 충격을 받아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등줄기를 타고 기분 나쁜 소름이 쫙 돋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지희는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잔상에 눈을 가늘게 떴다. ​예전, 사랑이가 꿈속에서 보여주었던 지독한 풍경. 임신한 여자에게 차가운 눈으로 아이를 지우라고 협박하고 욕설을 내뱉던 남자. 흐릿했던 그 꿈 속 남자의 얼굴 위로 매끄러운 박도윤의 얼굴이 겹쳐졌다. ​“아...” ​지희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왜 그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숨이 막히고 고통스러웠는지, 왜 사랑이가 제 배를 찢어놓을 듯 울부짖었는지,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뒤늦게 맞춰지기 시작했다. 사랑이를 원귀로 만든 장본인이 하필 박도윤이라니. ​“하... 참나. 세상 참 좁다더니 이런 식으로 엮이네.” ​그녀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의자 뒤로 몸을 깊숙이 기댔다. 그리고 곧, 인상을 찌뿌리며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기가 막히고 허탈했지만, 이내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이 골치 아픈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때, 가라앉은 정적을 깨고 지희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엄마] 지희는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조용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 여보세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내려 했지만 끝이 아주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오늘 스케줄 다 취소 했다. 지금 네 남자친구 데리고 사무실로 와.- 뚝. 뚜우-뚜우- 할 말만 마친 전화가 무자비하게 끊겼다. 혜련의 목소리는 사라졌지만, 그녀가 남긴 압박감은 여전히 공기 중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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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H금융 부사장실. 따사로운 햇볕이 짙게 깔린 사무실, 도윤은 셔츠 소매를 신경질적으로 걷어붙였다. 그는 창가에 서서 제 팔목에 남은 기괴한 피멍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독고춘이 남긴 상처는 여전히 욱신거렸지만, 그는 그 통증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 생소한 감각이 무미건조한 그의 일상에 기분 좋은 자극을 주고 있었다. ​도윤에게 세상은 거대한 장난감 상자였다. 돈과 권력으로 사람을 사고,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하나씩 빼앗으며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걸 지켜보는 것. 그가 유일하게 살아있음을 느끼는 '취미'였다. ​"...강지희." ​그는 입 안에서 지희의 이름을 굴려보았다.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 고결하고 오만한 그 여자가 공포에 질려 눈물을 흘리고, 결국 자신에게 무릎 꿇으며 망가지는 순간. 그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오랫동안 KG그룹과의 친분을 유지했고 매너좋은 신랑감 연기를 기꺼이 수행해 왔다. ​그때, 집무실 문이 열리고 여비서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부사장님, 요청하신 서류입니다 그리고 오후 2시에 투자팀 회의가 있습니다." ​여비서의 목소리에 도윤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입가에는 언제나처럼 눈부시게 다정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도윤은 서류를 든 채 서 있는 비서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여비서가 멈칫하며 고개를 숙이자, 도윤은 아주 부드럽고 매너 있게 그녀의 어깨 근처로 손을 뻗었다. ​"아, 잠시만요. 정 비서님." ​"네? 아, 네... 부사장님." ​도윤은 비서의 어깨에 묻은 아주 작은 먼지 하나를 떼어내듯 손가락 끝으로 톡톡 털어주었다. 그리고 마치 아주 소중한 보석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삐져나온 머리카락 한 가닥을 귀 뒤로 정성스럽게 넘겨주었다. ​"오늘 옷차림이 참 단정하고 보기 좋네요. 늘 세심하게 신경 써줘서 고맙습니다." ​"아... 아닙니다. 과찬이십니다, 부사장님." ​여비서의 볼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도윤의 다정한 목소리와 은은한 향수 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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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이른 아침의 나른한 햇살이 거실 깊숙이 스며들었지만, 지희의 기분은 그 햇살과는 정반대로 눅눅했다. 전날 밤, 백미러 속에서 마주쳤던 독고춘의 웃는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아 밤잠을 설친 탓이었다. 거울 속 쾡한 눈밑을 보며 지희는 애꿎은 세면대만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그 인간이 뭐라고 잠을 설쳐, 진짜 짜증 나게!” ​지희가 부스스한 머리로 거실에 나오자마자, 현관문 도어락 소리와 함께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거실에서 깔끔한 수트 차림의 독고춘과 눈이 마주쳤고, 깜짝 놀란 지희는 다시 후다닥 화장실로 향하며 짜증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 정말! 노크 좀 하고 들어오던가!" "...?" 화장실로 도망치듯 들어온 지희는 세면대 거울 앞에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부스스하게 뻗친 머리에 퀭한 눈가라니. 대한민국 톱배우 강지희 인생에 이런 굴욕적인 비주얼을 보여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독고춘에게. 지희는 찬물로 얼굴을 헹궈내고는 후다닥 화장대 앞에 앉아 고도의 ‘꾸안꾸’ 기술을 시전했다. 톤업 크림을 얇게 펴 발라 다크서클을 감쪽같이 가리고, 입술엔 혈색만 살짝 도는 립밤을 발랐다. 머리카락은 마치 방금 일어난 듯 자연스럽게 헝클어뜨린 뒤 고무줄로 대충 묶었지만, 사실은 목선이 가장 예뻐 보이는 각도를 치밀하게 계산한 결과였다. 거울 속 제 모습이 ‘막 자고 일어났음에도 빛이 나는 톱배우’의 형상을 갖추자, 지희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턱을 치켜들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 ​거실에는 독고춘이 소파 옆에 꼿꼿이 서 있었다. 아침 햇살을 등진 그의 수트 차림은 전날의 그 묘한 웃음기는커녕, 다시금 날 선 검처럼 딱딱하고 무거웠다. "크흠, 왔어요?" "...?" "좀 기다려요. 옷 갈아입고 올테니까." 지희가 도도하게 뒤돌아서 옷장으로 향할때, 지아가 태블릿 PC를 양손에 움켜쥐고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언니! 언니! 큰일 났어요! 비상! 초비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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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폭풍이 몰아치기 전의 고요함이란 이런 것일까. 밤새 포털 사이트를 뒤덮은 가짜 열애설의 여파로 세상이 떠들썩한 것과 대조적으로, 지희의 집 주변은 기괴할 정도로 정적만이 감돌았다. ​지희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복장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은은한 은빛의 쉬폰 드레스. 달빛이 내려앉은 것처럼 부드럽게 빛나는 그 드레스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볍게 찰랑거리며 지희의 유려한 몸매를 한층 더 부각 시켰다. ​거기에 심플하면서도 세련된 화이트 골드 목걸이와 손목에 감기는 슬림한 은빛 뱅글팔찌, 작은 다이아가 촘촘히 박힌 최고급 귀걸이까지 착용하고 나니 톱스타다운 아우라가 완벽하게 완성되었다. “언니, 너무 오버하는거 아닐까요? 사모님한테 한소리 들을거 같은데...” ​지아는 걱정하느라 밤새 한숨도 못 잤는지 퀭한 눈으로 태블릿을 두드리며 안절부절 못했다. “정작 필요할때 전화 안받은게 누군데?” ​지희는 무심하게 대답하며 마지막으로 입술에 붉은색을 덧칠했다. ​“너 답지 않게 왜 쫄고 그래? 얼른 가자.” --- 집 지하 주차장에서 밴에 올라타는 과정은 신속하고 조용했다. 차 문이 닫히고 묵직한 엔진음이 실내를 채우자, 조수석에 미리 타 있던 독고춘이 룸미러로 지희를 응시했다. 은빛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그녀의 모습에 그의 눈동자가 아주 잠시 흔들렸고, 혹시나 눈이 마주칠까봐 얼른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그 뒤로 한동안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차는 무리없이 기자 회견장에 도착했다. 안전벨트를 푸는 독고춘에게 지희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꼬춘씨, 저번에 사무실에서 엄마랑 대화 나눈거 기억나요?" 독고춘은 잠시 갸웃하다가 대답했다. "...물론." "그거... 진심이었어요?" 그는 대답 대신 단호하고 깊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이 어떤 화려한 말보다 묵직한 확신이 되어 지희에게 전달되었다. "좋아요. 그럼 가죠." 지희는 그제야 팽팽하게 굳어 있던 얼굴을 풀고 차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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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지희의 폭탄 발언이 떨어짐과 동시에 회견장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그리고 찰나의 정적 뒤, 여기저기에서 하얀 섬광이 눈부시게 터졌다.수십 대의 카메라 셔터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고, 그 엄청난 번쩍임 속에서 지희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톱스타다운 면모를 보여 주었다.​그때, 정면만 응시하던 독고춘이 지희의 귓가로 낮게 얼굴을 가져갔다.타인들이 보기엔 연인의 은밀한 속삭임이었으나, 지희의 귓가에 꽂힌 목소리는 서늘하기 그지없었다.​“...이게 무슨 짓이지?”​지희는 카메라를 향한 톱스타의 완벽한 미소를 유지한 채, 입술만 달싹여 대답했다.​“감당할 수 있다면서요? 할 거면 제대로 하고, 도망치고 싶으면 지금 말해요. 기회 줄 테니까.”​​지희의 도발에 독고춘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아까 차 안에서 그녀가 넌지시 던졌던 질문 위로, 며칠 전 혜련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단단히 들어왔다.‘너 말고 고춘씨가 감당할 수 있겠냐는 말이야.’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내뱉었던 자신의 대답.'...괜찮습니다.'​설마 그 감당의 시작이 이런 식의 전 국민적 스캔들일 줄 그 누가 알았을까?그는 찌푸려진 미간을 풀지 않은 채,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도망치기엔... 이미 늦은 거 같은데.”그녀는 독고춘의 말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고는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속삭였다."그럼 웃어요, 꼬춘씨. 지금 찍히는 사진이 메인이니까.""...하아... 못 당하겠군."​딱딱하게 굳어 있던 독고춘은 드디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하지만 그 어설픈 표정은 오히려 기자들에게 '톱스타 여친 앞에서 쩔쩔매며 수줍어하는 남친'이라는 완벽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곧, 포토타임이 끝나고 기자들의 폭발적인 질문이 쏟아졌다.“지금 공식적으로 연인 관계라는 말씀이십니까!”“언제부터 사귀신 겁니까!”“결혼 전제로 만나고 계신 건가요!”지희는 질문공세를 퍼붓는 기자들과 카메라를 향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제가 다음 스케줄 때문에 급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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