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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도깨비의 아이: Chapter 31 - Chapter 40

84 Chapters

31화

KG백화점 명품관 VVIP룸. "지금 이 사람이 입고 있는 수트랑 시계, 벨트까지 전부 계산해서 저희 집으로 보내 주세요. 아, 구두는 신고 있는 것 말고 제일 신상으로요." 저희 집. 한 달 만에 입에 올려 보는 말이었다. 세 사람은 오늘 아침 호텔 방을 뺐다. 지아는 짐을 풀어 놓겠다며 먼저 집에 가 있었다. 스토커가 구속된 지도 한 달이 가까웠다. 붉은 글씨로 뒤덮였던 침실 벽은 새로 도배를 했고, 도어록도 바꿔 달았다. 지희는 소파에 우아하게 기대앉아 턱을 괸 채, 칠흑 같은 빛을 내는 블랙카드를 직원에게 내밀었다. 대한민국 상위 0.05%에게만 허락된다는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카드를 받아 든 직원이 황송한 듯 허리를 90도로 숙이고 계산대로 사라졌다. 지희 옆에 서 있던 독고춘은 안절부절못하며 손목에 감긴 시계와 수트를 번갈아 보았다. "…이건 좀 과한 것 같은데." 독고춘은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반짝이는 금속과 유리 표면은 익숙하지 않을 만큼 깨끗했다. 그는 지금까지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직접 만들거나, 오래된 것을 고쳐 쓰는 편이었다. "…꼭 이렇게 입어야 하나?" "물론이죠. 처음 입어 봐서 어색한가 본데, 불편해도 참아요." 지희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독고춘은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이 여자는 정말 제멋대로군.' "그리고 이거 공짜 아니거든요? 우리 엄마 앞에서 완벽하게 내 남자친구인 척 연기해 주는 대가예요! 뭐, 도와주는 것도 고맙고." 지희가 틱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독고춘에게 다가가 삐딱하게 매인 넥타이를 잡아당겨 바로잡았다. "대충 입고 가는 것보다 이렇게 차려입고 가야 그나마 덜 의심할 거예요. 일단 우리 엄마는 꼬춘 씨처럼 잘생긴 남자한테 약하거든요." "…잘생긴 남자?" 지희는 제 입에서 나온 말에 움찔하더니 독고춘의 가슴팍을 툭 밀치며 홱 돌아섰다. "크, 크흠! 얼른 옷 갈아입고 밥이나 먹으러 가요." 그때 지희의 아랫배에서 검은 연기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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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아… 머리야…" 촬영장으로 향하는 차 안. 지희는 창문에 이마를 댄 채 신음하고 있었다. 속은 울렁거렸고, 머릿속에는 어젯밤의 파편들이 날카로운 얼음 조각처럼 콕콕 박혀 왔다. 조수석의 독고춘은 어제 지희가 사 준 말끔한 수트 차림으로 명상이라도 하듯 눈을 감고 있었다. "아우, 속 쓰려." 지희가 계속 괴로워하자 독고춘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무심하게 핀잔을 던졌다.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술을 마시는 건 미련~한 짓 아닌가?" "미련? 아니, 하… 아악, 열받아!" 빽 소리를 질렀지만 욱신거리는 두통에 금세 다시 고개가 떨어졌다. 뭐라 반박하고 싶어도 업혀 들어온 쪽은 자신이었다. 지희는 입술만 삐죽거리며 분을 삭였다. 그때 독고춘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번졌다. 평소의 돌부처 같은 얼굴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노래는 잘하더군." "노… 노래?" 지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설마, 설마 했던 기억의 조각이 현실로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그대 이름은~ 미련~한~" 독고춘은 어젯밤 등 뒤에서 들려오던 그 노래의 가락을 낮게 흥얼거렸다. "아아악! 하지 마요! 제발! 진짜 하지 마요!" 지희가 귀를 막고 좌석에서 발버둥을 쳤다. 얼굴은 이미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희가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칠수록 독고춘의 미소는 조금씩 짙어졌다. 누군가를 골려 주는 것이 이토록 즐거운 일인 줄, 그도 처음 알아 가는 중이었다. 운전석에서 두 사람을 살피던 지아의 입가에도 묘한 미소가 걸렸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둘이 언제 이렇게 달달해졌지?' 둘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예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언니, 오빠. 촬영장 거의 다 왔어요." 지아의 말에 지희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독고춘은 그런 지희를 돌아보다가 다시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아랫배 안쪽. 늘 불안하게 꿈틀대던 검은 연기는 옅어지고, 그 자리에 고요한 푸른 불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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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재벌가의 밤을 재현한 대형 세트장은 눈부신 조명으로 가득했다. 긴 테이블 위에는 고급 와인병과 디저트가 장식처럼 놓여 있었고, 드레스와 정장을 차려입은 엑스트라들이 잔을 든 채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의 마지막 촬영은 극 중 재벌가의 파티 장면이었다. 지희는 계단 위쪽에서 상대 배우와 대사를 주고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 아래 홀 한쪽에는 분위기를 채워 줄 엑스트라들이 배치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단정한 네이비 수트를 입은 독고춘이 어색한 자세로 서 있었다. "지희 씨 매니저님.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감독이 모니터를 보며 손짓했다. "그냥 배우분이랑 나란히 서 계시면 됩니다. 대사도 없고 움직임도 없어요. 자연스럽게 파티를 즐기는 느낌만 내면 돼요." 독고춘은 못 미더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옆에 선 배우는 단아한 노란색 드레스를 입은 서가연이었다. 가연은 독고춘을 힐끗 올려다보더니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안녕하세요~ 그때는 정말 고마웠어요. 저 기억하시죠?" 조명이 떨어지던 날 그가 밀쳐 냈던 배우였다. 독고춘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랜만입니다." 멀찍이 계단 위에서 대기하던 지희는 두 사람이 웃으며 인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괜히 심기가 불편해졌다. 하필이면 가연이었다. 저 사람이 웃는 얼굴을 처음 본 것도 가연 앞에서였다. '하… 또 헤벌레 하고 있네.' "모두 준비해 주세요! 갑니다!" 카메라가 레일 위에 오르고 조명이 한 번 더 조정됐다. 배우들이 자리를 잡고 음악이 깔리자 파티장의 분위기가 단숨에 살아났다. 지희는 계단 위에서 상대 배우와 시선을 맞추며 타이밍을 기다렸다. 하지만 신경은 자꾸만 아래쪽 홀로 향했다. 독고춘은 지시받은 대로 가연 옆에 나란히 서 있었다. 딱 거기까지였다면 지희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촬영이 시작되자마자 가연이 자연스럽게 웃으며 독고춘의 팔에 두 손을 감아 올렸다. 돌발적인 행동에 독고춘의 눈썹이 미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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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따뜻한 조명이 식탁 위를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 정갈하게 차려진 한식 코스와 은은한 와인 향, 잔잔하게 흐르는 클래식 음악까지, 겉으로 보기에는 고급 레스토랑 못지않은 저녁 식사 자리였다. 하지만 지희에게 이 자리는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드라마 끝나면 자리를 만들겠다더니...' 며칠 전 전화에서 엄마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굳이 혼자 오라던 까닭이 바로 이것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박도윤이 젓가락을 들 때마다,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지을 때마다 아랫배 안쪽이 서늘하게 뒤틀렸다. 뱃속의 사랑이가 그의 존재를 온몸으로 밀어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지희는 애써 고통을 참으며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식사를 이어 가고 있었다. "오늘 촬영은 어땠니?" 혜련이 온화한 미소로 입을 열었다. "…그냥 늘 하던 대로야." "늘 하던 대로라기엔 피곤해 보이네. 얼굴도 상했고." "엄마가 갑자기 부르지만 않았어도 집에서 쉬고 있었겠지." 지희가 퉁명스럽게 받아치자 혜련의 눈썹이 가늘게 치켜 올라갔다. 그러나 곧 우아한 미소가 되돌아왔다. "도윤 씨 앞에서 왜 그렇게 날이 서 있니. 손님 모셔 놓고 그게 할 소리야?" 도윤이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지희 씨다운 솔직함이 오히려 좋군요. 다시 봬도 역시 지희 씨는 실물이 훨씬 아름답습니다." "…아, 네." "다음 작품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혹시 시간이 되시면 제가 투자하는 영화 쪽 이야기도—" "…일 얘기는 회사 통해서 하세요." 말을 자르듯 내뱉은 지희가 젓가락을 내려놓자 식탁 위의 공기가 순간 싸늘하게 식었다. "강지희." 낮지만 날카로운 경고에도 지희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할 여유가 없었다. 속이 뒤집힐 듯 아파 오고 있었고, 식은땀이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때 도윤이 여유롭게 웃으며 분위기를 수습했다. "대표님, 괜찮습니다. 제가 아직 지희 씨와 친해질 시간이 부족했던 건 사실이니까요." "도윤 씨가 이해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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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으음…" 어둠 속으로 가라앉던 의식의 끝에서 지희는 익숙한 체온을 느꼈다. 단단하면서도 이상하게 편안한 온기였다. 코끝을 간질이는 은은한 향과, 심장을 가라앉히는 묵직한 안정감.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흔들리는 차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바로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깼나." 낮고 담담한 목소리의 주인은 독고춘이었다. 지희는 멍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서야 자신이 지금 무엇을 베고 있는지 깨달았다. 독고춘의 허벅지였다. 뒷좌석에 길게 누운 채, 늘 조수석에 앉던 남자의 허벅지를 베고 있었다. "뭐,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화들짝 놀란 지희가 벌떡 일어나려 하자 독고춘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 "…누워 있어." 짧고 무심한 한마디였지만 이상하게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지희는 괜히 입술만 달싹이다가 다시 얌전히 누웠다. 심장은 아까보다 더 요란하게 뛰고 있었다. 운전석에서 룸미러로 뒤를 살피던 지아가 반색하며 소리쳤다. "언니! 깼어요? 괜찮아요?" "지아야, 어떻게 된 거야? 둘이 집에 안 갔어?" "원래 가고 있었죠! 거의 중간까지 갔는데—" 지아는 신이 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갑자기 오빠가 완전 무섭게 '지희가 너무 걱정돼서 안 되겠어! 빨리 차 돌려!'라고 하는 거 있죠? 그래서 저 바로 불법 유턴했잖아요!" "…하아…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지?" "가다가 차를 돌렸다고?" 지희가 눈을 크게 뜨자 지아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빠 표정이 평소랑 다르게 진짜 싸늘해서 저도 순간 뭔 일 났구나 싶었어요." 지희의 시선이 천천히 독고춘에게 향했다. 그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한숨을 쉬며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한 말은 차를 돌리라는 한마디가 전부였다. 대문 너머에서 번지던 그 지독한 악취를 맡고도 그녀를 그대로 들여보낸 것이, 달리는 내내 그의 마음에 걸려 있었다. "박도윤은?" 지아가 기다렸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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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그러니까… 박도윤이 사랑이 아빠라고요?" 질문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지희의 목소리에는 이미 반쯤 확신이 섞여 있었다. 식탁 위의 공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숟가락을 든 채 굳어 버린 지아는 입만 벌리고 있었다. 독고춘은 잠시 지희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이의 원한(怨恨)이 그 남자에게 향하고 있으니 틀림없겠지." 무너질 만큼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등줄기를 타고 기분 나쁜 소름이 쫙 돋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머릿속을 스쳐 가는 잔상에 지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눈 내리던 날 한옥에서 정신을 잃었을 때 사랑이가 꿈속에서 보여 주었던 지독한 풍경. 좁은 방에서 울던 임신한 여자와, 그 여자에게 아이를 없애라며 욕설을 내뱉던 남자. 얼굴은 흐릿했지만 목소리만은 또렷했던 남자였다. 그 차갑던 목소리 위로 어젯밤 식탁에서 들은 매끄러운 목소리가 겹쳐졌다. 흐릿하던 얼굴 위에도 박도윤의 얼굴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아…" 지희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왜 그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숨이 막혔는지. 왜 사랑이가 제 배를 찢어 놓을 듯 울부짖었는지.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뒤늦게 맞춰지기 시작했다. 사랑이를 원귀로 만든 장본인이 하필 박도윤이라니. 엄마가 가을에 약혼식을 올리자던 그 남자라니. "하… 참나. 세상 참 좁다더니 이런 식으로 엮이네." 지희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의자 뒤로 몸을 깊숙이 기댔다. 그러고는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기가 막히고 허탈했다. 이 골치 아픈 상황을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그때 가라앉은 정적을 깨고 지희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엄마'였다. 지희는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 여보세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 했지만 끝이 아주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오늘 스케줄 다 취소했다. 지금 네 남자친구 데리고 사무실로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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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H금융 부사장실. 따사로운 햇볕이 짙게 깔린 사무실에서 도윤은 셔츠 소매를 신경질적으로 걷어붙였다. 창가에 선 그는 제 팔목에 남은 기괴한 피멍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밤사이 검붉게 번진 손자국이었다. 독고춘이 남긴 상처는 여전히 욱신거렸지만, 그는 그 통증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 생소한 감각이 무미건조한 일상에 기분 좋은 자극을 주고 있었다. 도윤에게 세상은 거대한 장난감 상자였다. 돈과 권력으로 사람을 사고,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하나씩 빼앗으며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그것이 그가 유일하게 살아 있음을 느끼는 '취미'였다. "…강지희." 그는 입 안에서 지희의 이름을 천천히 굴려 보았다.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 고결하고 오만한 그 여자가 공포에 질려 눈물을 흘리고, 끝내 자신에게 무릎 꿇으며 망가지는 순간. 그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그는 오랫동안 KG그룹과의 친분을 유지했고, 매너 좋은 신랑감 연기를 기꺼이 수행해 왔다. 그때 집무실 문이 열리고 여비서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부사장님, 요청하신 서류입니다. 그리고 오후 2시에 투자팀 회의가 있습니다." 도윤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입가에는 언제나처럼 눈부시게 다정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서류를 든 채 서 있는 비서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여비서가 멈칫하며 고개를 숙이자, 도윤은 아주 부드럽고 매너 있게 그녀의 어깨 근처로 손을 뻗었다. "아, 잠시만요. 정 비서님." "네? 아, 네… 부사장님." 도윤은 비서의 어깨에 내려앉은 작은 먼지를 떼어 내듯 손끝으로 톡톡 털어 주었다. 그러고는 소중한 보석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삐져나온 머리카락 한 가닥을 귀 뒤로 정성스럽게 넘겨 주었다. "오늘 옷차림이 참 단정하고 보기 좋네요. 늘 세심하게 신경 써 줘서 고맙습니다." "아… 아닙니다. 과찬이십니다, 부사장님." 여비서의 볼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다정한 목소리와 은은한 향수 냄새에 홀린 듯, 그녀는 멍하니 도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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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이른 아침의 나른한 햇살이 거실 깊숙이 스며들었지만, 지희의 기분은 그 햇살과는 정반대로 눅눅했다. 어제 룸미러 속에서 마주쳤던 독고춘의 웃는 얼굴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아 밤잠을 설친 탓이었다. 거울 속 퀭한 눈 밑을 보며 지희는 애꿎은 세면대만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그 인간이 뭐라고 잠을 설쳐, 진짜 짜증 나게!" 부스스한 머리로 거실에 나서자마자 현관 도어록 소리와 함께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깔끔한 수트 차림의 독고춘과 눈이 마주친 순간, 깜짝 놀란 지희는 후다닥 화장실로 되돌아가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 정말! 노크 좀 하고 들어오든가!" "…?" 화장실로 도망치듯 들어온 지희는 거울 앞에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부스스하게 뻗친 머리에 퀭한 눈가라니. 대한민국 톱배우 강지희 인생에 이런 굴욕적인 비주얼을 보여 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독고춘에게. 지희는 찬물로 얼굴을 헹궈 내고는 화장대 앞에 앉아 고도의 '꾸안꾸' 기술을 시전했다. 톤업 크림을 얇게 펴 발라 다크서클을 감쪽같이 가리고, 입술에는 혈색만 살짝 도는 립밤을 발랐다. 머리카락은 방금 일어난 듯 자연스럽게 헝클어뜨린 뒤 고무줄로 대충 묶었다. 사실은 목선이 가장 예뻐 보이는 각도를 치밀하게 계산한 결과였다. 거울 속 모습이 '막 자고 일어났는데도 빛이 나는 톱배우'의 형상을 갖추자, 지희는 그제야 만족스럽게 턱을 치켜들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 거실에는 독고춘이 소파 옆에 꼿꼿이 서 있었다. 아침 햇살을 등진 그의 수트 차림에는 어제의 그 묘한 웃음기가 흔적도 없었다. 다시금 날 선 검처럼 딱딱하고 무거웠다. "크흠, 왔어요?" "…?" "좀 기다려요. 옷 갈아입고 올 테니까." 지희가 도도하게 돌아서 옷장으로 향할 때, 지아가 태블릿 PC를 양손에 움켜쥔 채 비명을 지르며 방에서 뛰쳐나왔다. "언니! 언니! 큰일 났어요! 비상! 초비상!" 지아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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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폭풍이 몰아치기 전의 고요함이란 이런 것일까. 밤새 포털 사이트를 뒤덮은 가짜 열애설로 세상은 떠들썩했지만, 지희의 집 안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지희는 거울 앞에 서서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은은하게 빛나는 은빛 시폰 드레스였다. 달빛이 내려앉은 듯 부드럽게 반짝이는 드레스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볍게 찰랑거리며 지희의 유려한 몸매를 한층 돋보이게 했다. 거기에 심플하면서도 세련된 화이트 골드 목걸이, 손목에 감기는 슬림한 은빛 뱅글, 작은 다이아가 촘촘히 박힌 귀걸이까지 걸치고 나니 톱스타다운 아우라가 완벽하게 완성되었다. "언니,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닐까요? 사모님한테 한소리 들을 것 같은데…" 밤새 한숨도 못 잤는지, 지아는 퀭한 눈으로 태블릿을 두드리며 안절부절못했다. "정작 필요할 때 전화 안 받은 게 누군데?" 지희는 무심하게 대꾸하며 입술에 붉은색을 한 번 더 덧칠했다. "너답지 않게 왜 쫄고 그래? 얼른 가자." ─── 지하 주차장에서 밴에 오르는 과정은 신속하고 조용했다. 차 문이 닫히고 묵직한 엔진음이 실내를 채우자, 조수석에 먼저 타 있던 독고춘이 룸미러로 지희를 바라보았다. 은빛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그녀의 모습에 그의 눈동자가 아주 잠시 흔들렸다. 혹시라도 눈이 마주칠까 봐 그는 얼른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한동안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차는 무리 없이 기자회견장에 도착했다. 안전벨트를 푸는 독고춘에게 지희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꼬춘 씨, 그저께 사무실에서 엄마랑 나눈 대화 기억나요?" 독고춘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대답했다. "…물론." "그거… 진심이었어요?" 감당할 수 있겠냐는 엄마의 물음에 그는 망설임 없이 괜찮다고 했었다. 하지만 오늘 그가 감당해야 할 시선은 그날 대표실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터였다. 그는 대답 대신 단호하고 깊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은 어떤 화려한 말보다 묵직한 확신이 되어 지희에게 전해졌다. "좋아요. 그럼 가죠." 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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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지희의 폭탄 발언이 떨어지자 회견장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찰나의 정적 뒤, 여기저기서 하얀 섬광이 눈부시게 터졌다. 수십 대의 카메라 셔터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고, 그 엄청난 번쩍임 속에서도 지희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톱스타다운 면모를 보여 주었다. 팔에 매달린 그녀의 온기를 느끼며 독고춘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어제부터 다시 피어오르던 검은 연기가 거짓말처럼 걷혀 있었다. 그 자리에서 푸른 불꽃이 환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정면만 응시하던 그가 지희의 귓가로 낮게 얼굴을 가져갔다. 남들 눈에는 연인의 은밀한 속삭임이었지만, 지희의 귓가에 꽂힌 목소리는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지희는 카메라를 향한 완벽한 미소를 유지한 채 입술만 달싹여 대답했다. "감당할 수 있다면서요? 할 거면 제대로 하고, 도망치고 싶으면 지금 말해요. 기회 줄 테니까." 도발에 독고춘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아까 차 안에서 그녀가 넌지시 던진 질문 위로, 그저께 혜련이 했던 말이 단단히 들어와 박혔다. '너 말고, 고춘 씨가 감당할 수 있겠냐는 말이야.'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뱉었던 자신의 대답. '…괜찮습니다.' 설마 그 감당의 시작이 이런 전 국민적 스캔들일 줄 누가 알았을까. 그는 찌푸린 미간을 풀지 않은 채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망치기엔… 이미 늦은 것 같은데." 지희는 그 말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고는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속삭였다. "그럼 웃어요, 꼬춘 씨. 지금 찍히는 사진이 메인이니까." "…하아… 못 당하겠군." 딱딱하게 굳어 있던 독고춘이 드디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그 어설픈 표정은 오히려 기자들에게 '톱스타 여친 앞에서 쩔쩔매며 수줍어하는 남친'이라는 완벽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포토타임이 끝나자 기자들의 질문이 폭발하듯 쏟아졌다. "지금 공식적으로 연인 관계라는 말씀이십니까!" "언제부터 사귀신 겁니까!" "결혼 전제로 만나고 계신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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