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15화

Author: 쌍춘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17 13:45:03

촬영을 마친 밤,

아파트 안에는 은은한 조명이 켜져 있었다.

창밖엔 도시의 불빛이 깜빡이며 비쳤다.

부엌에서는 식용유가 부드럽게 튀는 소리가 났고,

냄비에서는 된장찌개의 구수한 향이 퍼지고 있었다.

독고춘은 조용히 양파를 썰고 있었다.

소파 위에는 지아가 잡지를 들고 누워 있었다.

눈은 반쯤 감긴 채, 나직이 말했다.

“아… 오늘은 진짜 체력 바닥이에요. 손가락 하나 까딱할수 없을것 같은 그런 나약한 기분?”

“...뭘했다고.”

독고춘이 짧게 중얼거렸다.

지아가 피식 웃으며 몸을 뒤척였다.

“오빠는 참 대단하단 말이야...안 피곤해요?”

"...별로."

그때, 욕실 문이 열리며 따뜻한 수증기와 함께 지희가 나왔다.

머리는 반쯤 젖은 채, 하얀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피곤함과 그 속엔 아직 풀리지 않은 무언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아야, 오늘은 푹 쉬자. 내일 스케줄 없지?”

“네, 언니.”

지아가 하품을 하며 팔을 베고 누웠다.

지희는 곧바로 부엌으로 향했다.

“저녁 준비해요? 피곤할텐데 그냥 배달 시켜먹지?”

“...딱히.”

“꼬춘씨가 저녁 해주면 좋지, 뭐.”

지희는 식탁 위에 팔꿈치를 괴고 앉아 조용히 물었다.

“가연이 좋아해요?”

독고춘은 칼질을 멈췄다.

칼끝이 도마 위에서 딱 하고 멈추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갑자기 그게 뭔...”

지희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가연이 귀엽잖아요. 그런 귀여운 타입 좋아할거 같은데 아니에요?”

독고춘은 대답디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지희를 바라보았다.

"아님 말고. 그럼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꼬춘씨는 좋아하는 타입 있어요?"

독고춘은 잠시 골똘히 생각하는척 하더니 곧 작게 중얼거렸다.

“...명옥님 같은 사람.”

그 순간, 지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명옥님? 그 할머니 같은 타입이 좋다고요? 진심으로?”

지희의 물음에 독고춘은 더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도마위의 칼질 소리가 시작되었고, 지희는 어안이벙벙한 표정이 되었다.

“그랜드 마마보이?”

그녀는 한참을 믿을수 없다는 표정으로 독고춘의 됫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자세를 바로 고치며 독고춘에게 말했다.

"내일 스케줄 없는데 명옥님 뵈러 갈래요?"

그 말에 독고춘은 지희를 보며 처음으로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지."

처음 보는 독고춘의 낯선 미소.

지희는 그 표정을 보고 잠시동안 얼음이 되었다.

---

이른 아침, 공기는 유난히 맑고 차가웠다.

도심의 회색빛을 벗어나면서부터 풀내음이 서서히 차 안으로 스며들었다.

차창 밖으로는 연무처럼 피어오른 산 안개가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운전석엔 지아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운전하고 있었다.

“푹 쉬어야 할 타이밍에 산에 올라야 한다는게 사실인가요?”

“미안, 지아야. 산 입구까지만 부탁할께. 나랑 꼬춘씨만 다녀올테니 차안에서 쉬고 있어."

지희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지아는 백미러로 지희를 보며 언제 그랬냐는듯 씩씩하게 말했다.

"아니요! 언니가 가는데 저도 당연히 가야죠! 이참에 맑은 공기 마시며 자아, 신나게 달~려보자!"

지희는 가볍게 웃어 넘기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근데, 그날 이후로 명옥님하고 연락 한 번도 안 했잖아요. 우리 이렇게 갑자기 찾아가도 돼요?”

조수석에 앉아 있던 독고춘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행동에 지희가 약간 심통이 나서 따지듯이 말했다.

“저기요, 꼬춘씨? 계속 고개만 까딱까딱 할꺼야? 사람이 말을 하면 쳐다보면서 얘기하면 안돼요?”

"...주의하지."

지희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포기한듯 했다.

---

봄이 막 자리 잡은 산속은 생기로 가득했다.

벚나무 가지마다 연분홍 꽃이 피었고,

그 사이를 흐르는 바람에는 흙냄새와 진달래의 단내가 섞여 있었다.

길가에는 갓 피어난 제비꽃이 흔들리고,

멀리선 계곡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은 말없이 주변 풍경을 감상하며 산길을 걸었고, 어느새 낡은 한옥의 대문 앞에 도착했다.

독고춘이 대문을 밀자, 오래된 나무 향이 먼저 밀려왔다.

산새가 지저귀고, 작은 종소리가 은은히 울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의 소리였다.

“이 냄새…참 좋다. 도심에서는 절대 못 맡는 냄새. 폐가 건강해지는 기분?”

지아가 코끝을 간질이며 말했다.

독고춘이 고개를 들었다.

기왓장 위로 아침 햇살이 번져 있었고,

그 아래 마루에 명옥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늘 그렇듯, 고요하고 깊은 눈으로 세 사람을 바라봤다.

“왔구나.”

그 한마디에 세 사람의 어깨가 자연스레 풀렸다.

지희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할머니, 갑작스럽게 와서 죄송해요. 그냥… 오랜만에 뵙고 싶어서요.”

“그래, 그런 날도 있지. 사람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오는 건 나쁜 게 아니란다.”

명옥은 살짝 눈을 가늘게 뜨더니, 지희의 배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잠시 공기가 고요하게 멎었다.

지희는 그 시선을 느끼며 잠시 숨이 막혔다.

“…왜 그러세요, 할머니?”

“….쯧쯧.”

명옥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 말에 지희와 지아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모두 안으로 들어 오거라.”

명옥은 그렇게 말하고 마루 위로 올라섰다.

세 사람은 긴장한듯 조용히 명옥을 따라 마루 위로  올라갔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도깨비의 아이   66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무너져 있던 주미의 얼굴엔 어느새 날 선 경계심이 떠올라 있었다. 가늘게 떨리는 손끝이 무릎 위에서 움켜쥐어졌다. “...은정이를...본 적 있어요?” 그 물음에 독고춘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본 것 같군.” 그 순간, 지희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아랫배 깊은 곳에서 낯익은 감각이 스치듯 지나갔다. ‘...갑자기 뭐지?’ 지희는 무심코 배를 한 번 쓸어내렸다. 그 묘한 감각이 채 가시기도 전에 주미의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방금 봤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에요? 그 애는...이미 죽었는다고요...” 끝내 말을 잇지 못한 그녀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지희는 당황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급히 끼어들었다. “아니, 그러니까...너무 놀라지 말아요. 이 사람이 원래 좀... 그런 걸 봐요. 귀신 같은 거? 저도 처음엔 믿기지 않았는데...하, 내가 지금 뭐라는 거야.” 말을 하던 지희가 괜히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작게 흘렸다. 그 사이 독고춘은 여전히 말없이 주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긴 검은 머리카락 사이, 그녀 어깨 위를 짙게 감싼 검은 기운이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채 일렁이고 있었다. 주미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독고춘을 노려보았다. “...귀신을 본다고요? 하!” 주미의 입술 사이로 허탈한 실소가 터져 나왔다. ​대낮에 공원 벤치에서 귀신 타령이라니. 평소 같았으면 미친 사람들을 만났다며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터였다. 하지만 지희의 횡설수설하는 변명에도 주미는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저 놀리는 거죠?” 그 말에 지희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런 거 절대 아니에요! 저도 처음엔 안 믿었어요. 근데... 고은정씨가 누구에요?” 지희의 물음에 독고춘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박도윤과 깊게 얽혀 있던 것 같더군.” 순간 주미의 호흡이 거칠게 흔들렸다

  • 도깨비의 아이   65화

    주미는 호텔 로비를 빠져나온 뒤에도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겉으로 보기엔 흐트러짐 없는 상류층 여자의 걸음이었다.고개는 곧게 세워져 있었고, 어깨선도 흐트러짐 없이 단정했다.하지만 그 모습에선 살아 있는 사람 특유의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마치 오래전부터 몸에 밴 습관만으로 움직이는 사람처럼.햇살이 비치는 호텔 정문을 지나 바깥 공기 속으로 걸어 나가는 순간에도 그녀의 표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눈 밑엔 여전히 짙은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고, 초점이 흐릿한 눈동자는 자꾸만 허공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지희는 선글라스를 코끝까지 슬쩍 끌어내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저 여자, 병원부터 데려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괜히 따라 나온 건가 싶다가도, 저 위태로운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그냥 지나칠수 없었다.독고춘은 대답 대신 묵묵히 주미를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시선은 주미의 외견에 닿아 있지 않았다.정확히는, 그녀의 어깨와 목덜미를 감싸듯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에 머물러 있었다.실오라기처럼 가늘게 흩날리던 아지랑이는 점점 더 짙게 피어 올랐다.그 안엔 사람 하나를 집어삼킬 만큼 무거운 한이 엉겨 붙어 있었다.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주미의 발걸음이 횡단보도 앞에서 멈췄다.주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신호등을 올려다보며 걸음을 멈췄지만, 이상하게 그녀만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붉은 신호등이 선명하게 켜진 채였는데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본 채 천천히 앞을 향해 나아가려고 했다.뒤쫓아가던 지희는 화들짝 놀라 크게 소리쳤다.“뭐하는 거에요! 빨간불인데!”휙—그 순간, 독고춘의 몸이 재빠르게 움직였다.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그는 차도로 발을 내딛으려던 박주미의 손목을 거칠게 낚아챘다.“읏—!”균형을 잃은 주미는 그대로 독고춘의 품에 안겼다.부우우우웅—!그와 동시에, 눈앞을 검은 승용차 한 대가 거칠게 스쳐 지나갔다.바람이 옷자락을 세게 흔들었고, 옆에 서 있던 사람이 놀란 얼굴로 욕설을 내뱉었다.“아니, 빨간불인

  • 도깨비의 아이   64화

    지희는 선글라스를 손끝으로 슬쩍 내리며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가까이서 보니 여자의 상태는 생각보다 더 좋지 않았다. 화장은 흐트러짐 하나 없이 말끔했지만, 그 아래 숨겨진 피로까지 감추진 못한 얼굴. 지희는 괜히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특유의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크흠, 저기요~” 그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짙은 다크서클 아래, 날카롭지만 지친 눈동자, 경계심이 먼저 스친 얼굴이었다. “누구세요?” 지희는 한 번 숨을 고른 뒤, 천천히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맞은편 의자를 슬쩍 가리켰다. “잠깐 앉아도 돼요?” 햇빛 아래 드러난 지희의 얼굴을 확인한 여자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분명 놀란 기색은 있었지만, 그것도 찰나였다. 곧바로 피곤과 경계가 뒤섞인 눈빛이 다시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그러세요.” 지희는 허락이 떨어지자 자연스럽게 맞은편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 옆에는 독고춘이 말없이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그래서 절 찾아오신 이유가 뭐죠?"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정작 다가오긴 했는데, 막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네? 아, 그게 그러니까..." 그쪽 몸에 귀신이 붙어 있다고 할 수도 없고, 미치고 환장하겠네. 진짜. 지희가 입술을 달싹이던 순간, 여자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와 독고춘 사이를 오갔다. 정확히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과 분위기를 훑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둘이 빨리 헤어지는 게 좋을 거예요.” “네?” 그 말에 지희의 눈썹이 움찔 올라갔다. 박주미는 피곤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안 그러면...우리 오빠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그 말은 이상할 만큼 서늘했다. 마치 경고 같기도, 체념 같기도 한 목소리. 지희가 무언가 되묻기도 전에, 여자가 먼저 말했다. “아, 제 소개를 안 했네요.” 여자는 테이블 위에 얹은 손을 만지작거리다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박주미예요. 그쪽...

  • 도깨비의 아이   63화

    “하, 열받아 죽겠네.”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독고춘을 노려보던 지희가 작게 중얼거렸다.분명 어젯밤.남의 볼에 입술이나 찍어 놓고, 아침이 되자마자 하는 소리가 뭐?"그럴 리가 없지? 하, 참나."생각할수록 얄미웠다.속이 부글부글 끓는 지희와 달리 독고춘은 오늘도 지나치게 평온한 얼굴이었다.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심지어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이, 태연하게 엘리베이터 층수만 바라보고 있었다.그 뻔뻔한 태도에 지희의 속이 다시 한번 뒤집혔다.“꼬춘씨, 진짜 기억 안 나요? 어젯밤에 술 취해서—”“...그렇다고 해두지.”“하아?”덤덤한 그의 대답에 지희의 눈썹이 홱 치켜 올라갔다.“뭐라구요? 그렇다고 해둬?”독고춘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아주 희미하게 움직였다.그 모습이 더 얄미웠다.바로 그때,띵—엘리베이터가 9층에서 멈춰 섰다.문이 열리고, 한 젊은 여자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길게 내려오는 검은 생머리.절제된 화려함이 느껴지는 트위드 재킷과 눈에 익은 명품 백.누가 봐도 상류층 자제라는 게 고스란히 드러나는 화려한 차림새였다.지희는 혹시라도 자신을 알아볼까 싶어 재빨리 주머니 속 선글라스를 꺼내 슬쩍 얼굴 위로 걸쳤다.그녀는 지희를 힐끗 보는가 싶더니, 별다른 관심 없이 조용히 한쪽에 섰다.분명 그녀의 얼굴은 눈길이 갈 만큼 아름다웠다.하지만 눈 밑엔 희미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창백한 안색 때문인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마치 오랫동안 제대로 잠들지 못한 사람처럼.그 순간, 말없이 서 있던 독고춘의 시선이 천천히 가라앉았다.여자의 어깨와 목덜미 주변.보통 사람 눈엔 보이지 않을 검은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실오라기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그리고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1층에 가까워질 무렵, 지희의 표정이 갑자기 일그러졌다.“읏...”아랫배 깊숙한 곳에서 낯익은 고통이 스멀스멀 치고 올라왔다.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이 아랫배를 움켜쥐었다.방금 전까지 씩씩대며 독고춘에

  • 도깨비의 아이   62화

    30분 후,과실주가 남긴 붉은 열기가 독고춘의 뺨을 따라 천천히 타고 올라갔다.​언제나 단단히 잠겨 있던 돌부처의 입꼬리가, 지희의 눈앞에서 서서히 헐겁게 풀리기 시작했다.​“...푸, 푸후후.”​독고춘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평소의 그 무뚝뚝하고 날 선 기색은 어디 가고, 눈까지 반쯤 감은 채 헤실헤실 웃는 얼굴.처음 보는 그의 무방비한 모습에 지희는 순간 멍하니 멈춰 섰다.​‘됐다! 드디어 취했네, 이 곰탱이!’​속으로는 저번에 동요 주정으로 자신을 놀려댔던 독고춘에게 완벽하게 한 방 먹였다며 쾌재를 불렀다.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붉어진 얼굴로 바보처럼 생글생글 웃고 있는 독고춘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지희의 심장이 묘하게 간지러워졌다.​수트를 입었을 때의 그 치명적인 아우라는 어디 가고, 대책 없이 순해진 얼굴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하, 이 와중에도 귀여우시겠다?’​지희가 혼자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삐죽이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툭.​“...꼬춘씨?”​독고춘의 고개가 힘없이 앞으로 꺾이더니, 그대로 테이블 위로 쓰러져 버렸다.완전히 필름이 끊긴 모양이었다.​“아우, 진짜! 꼬춘씨, 침대 가서 누워요!”​지희는 비틀거리는 독고춘의 거대한 몸을 제 어깨 위로 간신히 걸쳐 멨다.온천과 마사지를 받아 나른해진 몸체에 가뜩이나 무거운 남자의 몸뚱이가 더해지니,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발에 힘 좀 줘 봐요! 와, 나 진짜 허리 부러지겠네!”​가까스로 침대 가장자리에 도착한 지희는 독고춘을 매트리스 위로 툭 쓰러뜨렸다.​“헉, 헉. 됐다.”​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찰나였다.​휙—!​“어... 앗!”​순식간에 시야가 한 바퀴 빙글 돌더니, 몸이 붕 떴다.​독고춘의 큼지막한 두 팔이 지희의 허리를 밧줄처럼 감싸 안은 채, 그대로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지희의 얼굴이 독고춘의 단단한 가슴팍에 코가 닿을 정도로 바짝 밀착됐다.

  • 도깨비의 아이   61화

    뜨끈한 온천물 위로 하얀 김이 은은하게 피어올랐다.독고춘은 눈을 감은 채 묵묵히 물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곳에 익숙했던 사람처럼, 지나치게 평온했다.눈 감고 있는 얼굴.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태연한 표정.지희는 저 혼자만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아 조금 얄미울 정도였다.그녀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손끝으로 물을 툭 건드렸다.찰박.“...”독고춘 얼굴에 물방울이 조금 튀었지만 별 반응은 없었다.설마 못 느꼈나?지희는 괜히 입꼬리를 올리며 이번엔 조금 더 세게 물을 튕겼다.촤악.얼굴에 제법 물을 맞은 독고춘의 눈꺼풀이 그제야 천천히 열렸다.“...뭐 하는 거지?”“풉. 아니, 여기 벌레가 있어서요.”지희는 들킨 아이처럼 웃음을 참으며 딴청을 피웠다.독고춘의 시선이 잠시 그녀 얼굴에 머물렀다.그러더니 아주 태연하게 손으로 물을 한 움큼 떠올려 지희 얼굴에 뿌렸다.촤아악.“꺄악! 아, 진짜! 뭐 하는 거예요?”“...모기가 있군.”"한겨울에 무슨 모기에요? 말이 되는 소리를..."촤아악."아씨, 지금 해보자는 거죠?"둘이 서로 물을 뿌려대고 있을 때였다."크, 크흠."등 뒤에서 들려온 아주 정중하고도 민망한 헛기침 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홱 돌아갔다.“실례하겠습니다. 고객님, 아로마 케어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이제 마사지 베드로 이동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아, 네..."지희는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은 심정으로 얼굴을 붉히며 탕에서 벌떡 일어났다.독고춘은 젖은 머리를 한번 쓸어넘기곤,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남긴 채 천천히 그녀 뒤를 따랐다.직원이 안내한 곳에는 나란히 놓인 두 개의 마사지 베드가 있었다.“두 분, 편하게 누워 계시면 바로 시작하겠습니다.”아로마 향이 은은하게 번지는 가운데, 지희는 어느새 베드에 누워 눈을 감았다.---“손님, 끝났습니다.”"...음? 아, 수고하셨어요."지희가 마사지 베드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는 어느새 어둑한 저녁이 내려앉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