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착한 아내는 오늘부터 그만둡니다: Chapter 51 - Chapter 60

108 Chapters

제51화

시유는 카드를 한 번 내려다본 뒤 받아 들었다.여준이 마음대로 쓰라고 내민 이상, 시유가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앞으로는 여준의 비위를 맞추겠다고 굳이 자기 돈을 쓰던 어리석은 여자로 살지 않을 생각이었다.여준은 몸을 숙여 시유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달래듯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먼저 자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여준은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흐트러진 걸음은 급했고, 발소리는 점점 멀어졌다.안방에는 숨 막힐 만큼 깊은 정적만 남았다.시유는 욕실로 들어가 손끝으로 목덜미를 미친 듯 긁었다. 여준이 방금 남긴 키스마크를 덮어 보려는 듯, 붉은 흔적을 하나둘 만들어 냈다.이어 샤워기를 틀어 온몸을 씻어 냈다.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혐오감에 시유는 몇 번이나 헛구역질을 했다.이곳에 단 1초라도 더 머물면 숨이 막힐 것 같았다.찢어진 셔츠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뒤, 시유는 옷장 안에 미처 가져가지 못한 낡은 옷 한 벌을 찾아 갈아입었다.시유는 더는 지체하지 않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민자가 허둥지둥 방에서 뛰어나왔다. 시유를 본 유민자의 눈에 안타까움이 번졌다.“사모님, 집에서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대표님 곧 돌아오실 겁니다.”시유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 집에는 더는 한시도 있고 싶지 않아요.”시유는 빠르게 그림빌 집의 대문을 나섰다. 유민자는 문가에 서서 멀어지는 시유의 뒷모습을 착잡하게 바라보다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대표님과 사모님, 전에는 분명 괜찮았는데.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시유는 차를 가지러 갈 생각이었다.길가에 한참 서 있던 시유는 가까스로 택시 한 대를 잡았다.택시에 막 올라타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하려던 때였다.새나에게서 도발적인 메시지가 도착했다.[내가 조금만 불쌍한 척해도 언니가 그토록 아끼는 남편은 물불 안 가리고 나한테 달려오네.]시유는 재빨리 캡처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새나도 영리해졌다. 메시지는 바로 삭제됐다.새나가 다시 몇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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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화

여준은 거의 뛰다시피 새나 앞에 도착했다.새나는 코끝이 붉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몸까지 덜덜 떠는 새나를 보자, 여준은 반사적으로 양복 재킷을 벗어 어깨에 둘러 주었다.새나는 그 틈을 타 여준의 품으로 파고들려 했다. 여준은 본능적으로 피하려 했지만, 새나는 단단히 붙잡고 놓지 않았다.새나는 심하게 몸을 떨었다. 얼어 죽기 직전의 길고양이처럼 보였다.여준은 마음이 약해져서 결국 새나를 밀어내지 못했다.“오빠...”새나는 여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리듯 말했다.“와 줘서 고마워. 역시 나한테는 오빠가 제일이야.”여준은 한숨을 쉬었다.“무슨 일이야? 설마 영우까지... 우리를 의심해?”새나는 눈물범벅이 된 채 고개를 끄덕였다.“응. 그 글을 보고 나한테 물었어. 예전에 자기를 속인 거냐고.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 자기가 아니라 오빠였던 거 아니냐고.”“솔직히 말하래. 결혼의 시작이 거짓이면, 아무리 정략결혼이라도 같이 살 이유가 없다고 했어.”새나가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하자 여준은 가슴이 아팠다.“내가 직접 영우에게 설명할게. 영우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아니야.”새나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오빠, 영우 씨가 나랑 이혼하자고 하면 어떡해? 나... 리오를 낳은 지 얼마 안 됐어. 리오를 한부모 가정 아이로 만들고 싶지 않아.”“왜 세상 사람들이 다 우리 사이를 오해하는 거야? 우리는 그냥 사이좋은 남매 같은 사이잖아. 그런데 왜 언니는 우리를 그렇게 더럽게 몰아가는 거야, 흐...”새나의 말투는 절망적이었다. 숨이 넘어갈 듯 울던 새나는 금세 쓰러질 듯 휘청였다.여준은 어쩔 수 없이 새나의 몸을 단단히 받쳐 세웠다. 쓰러지지 않도록 자기 몸으로 지탱하며 달랬다.“떳떳하면 두려워할 것 없어. 울지 마. 내가 있잖아. 가자, 나랑 돌아가자. 내가 직접 강씨 집안까지 데려다줄게. 아무 생각 말고 전부 나한테 맡겨.”새나는 젖은 눈으로 여준을 올려다보았다.“오빠, 이런 소문 때문에 앞으로 나를 멀리할 거야?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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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화

여준은 새나가 심상치 않은 것을 알아채고 황급히 새나의 어깨를 붙잡았다.“새나, 왜 그래? 내가 말했잖아. 어릴 때 심장 수술했으니까 감정이 격해지면 안 된다고... 빨리, 깊게 숨 쉬어!”새나는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몸에서 힘이 빠져 여준의 품으로 무너졌다.여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부적절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밀어내려 했지만, 고통으로 일그러진 새나의 표정을 보자 끝내 밀어낼 수 없었다.새나는 여준의 허리를 꼭 끌어안은 채 떨었다.“오빠, 나 정말 다시는 오빠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 지난 5년 동안 해외에서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오빠는 몰라.”“이제야 알겠어. 세상에서 나한테 제일 잘 해 주는 사람은 오빠뿐이야. 오빠가 없었다면 임신하고 아이 낳는 시간을 어떻게 버텼을지 나도 모르겠어.”여준은 가슴이 아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직도 새나가 이모인 진지원에게 보육원에서 입양되어 왔던 날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작고 가냘픈 새나의 모습이 너무도 안쓰러웠다.새나는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심장에 문제가 있었다. 친부모는 새나를 길에 버렸고, 새나는 보육원에 맡겨졌다.진지원은 보육원에 봉사를 갔다가 생명이 위태롭던 새나를 보고 마음이 움직여 입양했다. 수술도 받게 해 주었다.하지만 새나가 건강을 회복한 뒤, 진지원 부부의 사이는 극도로 나빠졌다. 긴 냉전, 다툼, 심할 때는 서로 손찌검까지 이어졌다. 나중에는 여준이 그 속에서 지내는 새나가 너무 불쌍해 진명화에게 부탁했고, 새나는 여준의 집에서 자라게 되었다.새나가 왔을 때는 몸이 너무 말랐고, 얼굴은 여준의 손바닥보다 작았다.여준이 숟가락을 들고 한입씩 먹이며 천천히 살을 붙였다.그 뒤 숫자를 가르치고, 글자를 가르치고, 밖으로 데려가 새 친구를 만들게 한 것도 여준이었다. 약한 아이를 지금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여자로 키워 낸 사람도 여준이었다.여준은 마음 깊이 새나를 여동생처럼 여겼고, 평생 지키고 보호하겠다고 맹세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하늘에 맹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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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화

여준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새나의 불쌍하고 외로운 성장 과정에 대한 연민, 예전에 했던 약속이 밀물처럼 가슴을 덮쳤다.목 끝까지 올라왔던 단호한 말들은 억지로 삼켜졌다.그러나 망설임 사이로 시유와 어린 딸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새나가 가장 힘든 시기라면, 시유에게도 가장 힘든 시기일 것이다.여준은 삼촌으로서는 괜찮았을지 몰랐다. 하지만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는 너무 많은 것을 놓쳤다.모든 일이 정리된 뒤에는 시유와 딸에게 제대로 보상해야 했다.인생은 때때로 이렇게 야속했다. 두 여자의 임신과 출산이 하필 그렇게 겹쳤다.여준은 새나를 그림빌로 들여 두 아이를 함께 돌볼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데 시유가 새나를 눈엣가시로 여기게 될 줄은 몰랐다. 더는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없었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시유가 보낸 이혼합의서와 요즘의 차갑기만 한 태도가 떠올랐다.여준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눈에는 가라앉은 물처럼 무거운 정적이 깔렸다. 목소리는 더 낮고 단단해졌다.“새나야, 그동안 내가 네 뜻을 많이 받아 준 건... 네가 특별한 시기를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이제 리오도 생후 한 달이 지났고, 내 삶도 제자리로 돌아가야지.”여준은 잠시 멈췄다. 일부러 새나의 눈을 피하며 한 걸음 물러나 두 사람 사이에 거리를 만들었다.“앞으로는 시유와 내 딸을 제대로 돌볼 거야. 시유와 딸이 내가 평생 책임질 사람들이야.”새나의 가슴이 움츠러들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반걸음 물러난 새나의 목소리가 떨렸다.“오빠, 언니랑 아이가 오빠의 평생 책임이면... 나는 아니야? 오빠... 이제 나를 버리겠다는 거야?”여준은 새나를 바라보았다. 예전의 다정한 눈빛은 사라졌고, 이성적인 차가움만 남아 있었다.“너에게는 영우가 있고, 강씨 집안이 있고, 네 친정도 있어. 정말 돌보기 힘들면 우리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해도 되고, 내가 시터를 더 붙여 줄 수도 있어.”“너는 모든 걸 나한테 기대면 안 돼. 독립하는 법을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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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화

“악! 놔! 누구야! 뭐 하는 거야!”새나는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상대는 새나를 단단히 짓눌렀다.상대는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남자였다. 검은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다.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달빛 아래 드러난 눈빛은 서늘했고, 사람의 심장을 얼게 만드는 흉흉함이 서려 있었다.새나가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남자는 갑자기 힘을 주었다. 새나를 거칠게 끌고 출렁이는 파도 쪽으로 한 걸음씩 걸어갔다.“안 돼... 하지 마! 살려줘! 여준 오빠!”새나는 두 다리를 힘껏 버둥거렸다. 하이힐은 어디론가 날아갔고, 손톱은 모래사장 위에 어지러운 흔적을 남겼다.차가운 바닷물이 발목을 덮고, 무릎까지 올라왔다.“꼬르륵... 꼬르륵...”새나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남자가 강하게 밀어붙였다. 새나의 몸이 새까맣고 차가운 바닷물 속으로 깊게 처박혔다.“콜록, 콜록...”새나는 짜고 쓰린 바닷물을 몇 모금 들이켰다. 폐가 불에 타는 듯 아팠다.그리고 죽을힘을 다해 버둥거렸고, 두 손은 물속에서 허공을 갈랐다.남자는 쉽게 끝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새나의 머리를 눌러 몇 번이고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충분히 마셨나?”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새나의 귓가에 내려앉았다.“충분히 마셨으면 앞으로는 몸 좀 낮추며 살아. 그딴 힘만 믿고 사람 괴롭히지 말고.”새나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새나를 완전히 무너뜨렸다.“흐으... 흐...”남자는 새나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혹독하게 벌을 준 뒤, 진흙덩어리처럼 새나를 들어 인적 없는 얕은 물가에 내던졌다.새나는 공포에 질려 고개를 들었다. 악마 같은 남자의 얼굴을 보려 했다.하지만 남자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남자는 위에서 새나를 한 번 내려다봤다. 눈빛에는 혐오와 경고가 가득했다. 이어 곧바로 돌아서서 넓은 밤 속으로 사라졌다....여준은 가장 빠른 속도로 집에 돌아왔지만, 시유는 이미 떠난 뒤였다.유민자는 인기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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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화

마리는 여준에게 한바탕 쏟아낼 말을 다 쏟아낸 뒤 쾅 하고 문을 닫았다. 문틀까지 슬며시 떨릴 정도였다.여준의 표정은 서리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마리가 분노 섞어 던진 말들에는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 있었다. 여준은 한동안 받아들일 수 없었다.‘시유에게 돈과 힘이 더 있는 남자가 생겼다고?’‘그 사람이 우리 딸에게 고급 주택까지 줬다고?’‘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지.’여준이 기억하는 시유는 결혼 후 늘 강도 높은 업무에 매달렸다. 생활 반경은 투명하다고 해도 될 만큼 단순했다.여준은 시유가 어떤 이성과 가깝게 지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연호를 빼면.연호가 얼마 전 의미심장하게 했던 말이 떠오르자, 여준의 가슴에 매우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설마 연호가 시유를...?’두 사람은 중고등학교 동창이었다. 학창 시절부터 관계가 특별했다.연호는 여준 앞에서 시유 이야기를 여러 번 했다. 자기 인생에서 본 여자 중 가장 꾸밈없고 독립적인 여자라고 칭찬했다.여준은 차로 돌아가 굳은 손가락으로 연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지난번 두 사람이 다툰 뒤, 여준이 먼저 연락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전화벨이 오래 울린 끝에 연호가 받았다. 목소리는 얼음장 하나를 사이에 둔 것처럼 담담했다.[무슨 일이야?]그 거리감이 여준의 가슴을 불편하게 했다. 여준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시유 어디 있어? 네가 숨긴 거야?”연호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형의 아내잖아. 내가 왜 숨겨?]여준은 말문이 막혔다.그렇다. 시유는 여준의 아내였다. 하지만 최근 여준은 시유가 완전히 자기 통제에서 벗어난 것처럼 느꼈다. 애초에 한 번도 자기 사람인 적 없었던 것처럼.여준은 목소리를 조금 낮추며 상대의 입에서 무언가를 끌어내려 했다.“마리가 그러는데 누군가가 시유에게 집을 사 줬대. 정말 너 아니야?”[내가 왜 남의 아내한테 집을 사 줘?]연호의 반문은 차가웠다.여준은 다시 말문이 막혔다.전화기 너머로 한동안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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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화

상상도 못 할 결제 금액을 보자 여준은 완전히 멍해졌다.시유는 전에 이렇게 돈을 마구 쓴 적이 없었다.여준이 돈 좀 쓰라고 할 때마다 시유는 웃으며 살림은 아낄 수 있을 때 아껴야 한다고, 앞으로 살아갈 날이 길다고 했다.여준은 검소하고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 가는 좋은 아내를 얻었다고 자주 안도했다.새나는 달랐다. 돈을 물 쓰듯 했고, 영우가 주는 생활비가 부족하면 늘 여준이 도와줘야 했다.여준이 시유에게 카드를 주며 뭐든 사고 싶은 대로 사라고 큰소리친 건 시유의 성격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써 봐야 얼마 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하지만 지금 시유는 손이 너무 컸다. 여준의 카드를 건넨 지 하루도 안 되어 이미 수십억 원이 빠져나갔다.이러다가는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버티기 어려웠다.여준은 당황한 채 은행 담당 매니저에게 바로 전화해 가족카드를 즉시 정지하라고 지시했다....영우가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 새나는 젖은 몸으로 모래 위에 누워 있었다. 온몸에 힘이 빠져 있었고, 숨만 겨우 붙어 있는 듯했다.그 모습을 본 영우는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눈빛에는 조금의 당황도 없었다.“소동도 정도껏 해야지. 멀쩡하다가 왜 이렇게 된 거야?”새나는 몸을 떨며 억울하게 입술을 깨물었다.“아니... 내가 그런 게 아니야. 방금 어떤 남자가 날 바다로 밀어 넣고, 바닷물을 억지로 먹였어. 여보, 나... 너무 힘들어.”영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바닷가는 텅 비어 있었고, 모래사장은 넓었다. 파도가 몇 번이나 쓸고 지나간 탓에, 영우가 걸어오며 남긴 긴 발자국 외에는 다른 흔적이 없었다.영우는 지친 듯 미간을 문지르고 새나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눈빛은 멀고 차가웠다.“이런 식으로 불쌍한 척하는 수법, A국에서도 이미 여러 번 썼잖아.”“난 그런 방식 안 통한다고 했어. 결혼할 때 조건도 분명히 말했지. 우리 결혼은 서로 필요한 걸 얻기 위한 비즈니스 결합이야. 넌 독립적으로 살아야 하고, 나한테 기대려고 하면 안 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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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화

시유가 퇴사한다는 소식은 날개라도 단 듯 업계 전체로 퍼져 나갔다.여준이 회사로 차를 몰고 가는 동안 핸드폰이 끊임없이 울렸다. 업계 사람들, 협력사, 경쟁사에서 차례로 전화를 걸어 여준을 떠보았다.여준은 모두 무음으로 돌렸다. 화면이 켜졌다가 꺼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셔츠는 식은땀으로 젖어 갔다.이제야 여준은 뒤늦게 실감했다. 자기 아내 시유는 이름뿐인 아내가 아니었다. 그녀는 부강그룹 설계본부를 이끌어 온 총괄이자, 세오름타워 프로젝트의 중심축이었다.세오름타워는 부강그룹이 앞으로 5년을 걸고 추진하는 핵심 개발 사업이었다. 새 도시권의 랜드마크로 세우겠다는 목표 아래, 그룹 내부에서도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로 분류돼 있었다.그런데 그 프로젝트의 총괄 설계자인 시유가 퇴사를 선언했고, 핵심 인력들까지 줄줄이 사직서를 내겠다고 나섰다. 시설 설계 도안도 아직 최종 확정 전이고, 착공 일정은 코앞이었다.하룻밤 사이에 세오름타워 프로젝트 전체가 멈춰 설 위기에 몰렸다.여준은 계속 켜지는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사회 추궁, 협력사의 의심, 경쟁사의 대놓고 던지는 떠보기까지 이어졌다.여준은 쓴웃음을 삼키며 전부 무시했다.전용 주차 구역에 차를 세우자 찬훈이 이미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찬훈은 곧장 문을 열며 초조하게 말했다.“대표님, 업계에 임시유 이사님이 이끄는 설계팀이 단체로 빠져나간다는 소문이 이미 파다합니다.”“방금 한서캐피탈 이 대표가 연락해서, 긴급 자금 투입을 받아 외부 인력으로 설계팀을 다시 꾸릴 생각이 있느냐고 떠봤습니다.”“이건 도와주겠다는 게 아니라, 지금 상황을 틈타 부강그룹의 약점을 파고들겠다는 뜻입니다.”여준은 차갑게 웃었다. 눈빛은 음산했다.“굶주린 늑대들이지. 부강그룹이 흔들리기만 기다렸다가 바닥에서 주워 담으려는 거야.”찬훈은 고개를 끄덕이다 조심스레 덧붙였다.“대표님, 반드시 사모님을 잘 설득하셔야 합니다. 이런 시점에 정말 나가시면 부강그룹의 중심이 완전히 무너집니다.”여준은 마음이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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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화

유란은 곧장 여준 앞에 섰다. 고개를 들어 동생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퇴사는 개인 의사야. 본인이 나가겠다는데 승인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여준은 숨이 막혔다.“누나, 지금 뭐 하는지 알아? 시유는 단순한 직원이 아니라...”유란이 차갑게 말을 끊었다.“네 아내라고? 지난 5년 동안 너는 회사에서 늘 공정하게 대하고 특혜는 없다고 떠들었잖아. 내가 보기엔 올케를 네 아내로 별로 우대한 적도 없던데, 아니야?”여준은 대답하지 못했다.시유의 퇴사에 맨 먼저 공개적으로 힘을 실어 준 사람이 평소 시유에게 가장 엄격했던 큰누나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시유도 살짝 멈칫했다. 뜻밖이라는 눈으로 큰시누이를 바라보았다.이 지경까지 온 마당에 부씨 집안 누군가가 진심으로 시유를 도와줄 거라고 순진하게 믿을 수는 없었다.어쩌면 유란은 시유가 빨리 떠나 새나에게 자리를 내주길 바라는 걸지도 몰랐다.그동안 시유는 새나와 부씨 집안의 관계를 깊이 조사했다.새나는 여준의 이모 진지원이 입양했지만, 어릴 때부터 사실상 여준의 집에서 자랐다. 여준의 세 누나도 새나를 꽤 아꼈다.시유는 유란의 의도를 더 캐묻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유란이 자기편에 서 있다면, 그 흐름을 이용하면 됐다.시유는 곧바로 입을 열어 자신과 팀의 권리를 최대한 확보하려 했다.“부여준 대표님, 제가 제출한 퇴사 절차는 완전히 합법적입니다. 회사가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게다가 회사 규정상 저는 세오름타워 프로젝트 총괄 책임자이고, 제 손에 있는 핵심 데이터와 설계 철학은 제 개인의 지적 자산입니다.”“제가 이끄는 설계팀 전체도 제 설계 철학을 중심으로 꾸려졌습니다. 이 자료와 팀은 제가 데려갈 수 있습니다.”여준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뭐라고? 세오름타워는 부강그룹 프로젝트야. 어떻게 네 개인 지식재산이 돼? 팀도 회사 조직인데, 네가 데려간다는 게 말이 돼?”유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말투는 단호했다.“임 이사는 부강그룹에서 5년 동안 비주류 취급을 받던 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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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화

‘설마... 날 불쌍하게 여기는 건가?’‘그럴 리 없을 것 같은데...’유란은 업계에서 ‘얼음 여왕’으로 통했다. 업무 스타일은 여준보다 더 강경했고, 독단적이며 냉정했다.유란은 연애나 결혼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비혼주의를 고집하는 데다 일 처리까지 냉정하기로 유명해, 건축업계에서는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까지 따라다녔다.부강그룹에서 일한 5년 동안, 시유는 유란에게 차가운 얼굴로 트집 잡히고 면전에서 호되게 혼난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한때 유란이야말로 부씨 집안에서 자신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늘 냉혈한처럼 보였던 유란이, 시유가 여준과 갈라서려는 이때 뜻밖에도 사람다운 온기를 보였다.시유는 유란의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섣불리 대꾸하지 않고 침묵을 택했다.그런데 유란이 뜻밖에도 시유 앞으로 걸어와 먼저 말했다.“퇴사하고 싶으면 퇴사해. 이혼하고 싶으면 이혼하고. 여자로 살면서 남자 하나에 목매고 죽는 어리석은 짓 하지 마. 임 이사는 지난 5년 동안 너무 답답하게 살았어. 요즘처럼 버티고 치고 나가는 모습이 훨씬 사람다워.”시유는 멍해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유란은 시유에 대한 호의적 발언들을 이어 갔다.“그래서 퇴사는 내가 특별 승인했어. 부강그룹 공동대표로서 그 권한은 있어. 앞으로 쉬고 싶으면 쉬고, 아이 돌보고 싶으면 돌봐. 외로워서 남자가 필요하면 날 찾아와. 내가 소개해 줄게.”이쯤 되자 시유도 더 할 말이 없었다.“알겠습니다. 그럼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퇴사 과정에서 여준과 줄다리기해야 할 거로 생각했다. 마음의 준비도 충분히 해 두었다.그런데 중간에 유란이라는 뜻밖의 거물이 나타나 몇 마디 말만으로 급한 불을 꺼 주었다.시유는 가슴이 뚫리는 듯했다. 더 말하지 않고 사무실에서 쓰던 물건들을 담은 상자를 안은 채 돌아섰다.하지만 두 걸음도 못 가 뒤에서 급한 발소리가 들렸다.곧이어 여준이 시유의 팔을 붙잡았다. 모두가 보는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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