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착한 아내는 오늘부터 그만둡니다: Chapter 31 - Chapter 40

108 Chapters

제31화

“좋습니다. 바로 처리하겠습니다.”시유는 그제야 녹음 파일 두 개를 떠올리고 무심코 시계를 확인했다. 진명화에게 보낸 최후통첩 이후 벌써 5분이 지나 있었다.“그리고 이 녹음 두 개를 바로 온라인에 바이럴 되게 뿌려 주세요. 부여준과 소새나의 관계를 다룰 폭로성 글도 제일 큰 인플루언서에게 맡기고요. 부여준과 소새나 일이 해온시 바닥을 뒤집게 만들어 주세요.”시유는 녹음 파일과 오래전부터 정리해 둔 자료를 전부 변항에게 넘겼다.고작 200억 원. 시유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깝지도 않았다.지금 시유가 원하는 건 소새나와 여준의 가면을 완전히 찢어 벗겨내고, 두 사람이 누리던 안락한 삶에 커다란 균열을 내는 것뿐이었다....변항은 지시를 빠르게 처리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시유가 직접 서명한 이혼합의서와 사직서가 진찬훈의 손을 거쳐 여준의 사무실로 전달됐다.여준은 먼저 ‘사직’이라는 글자를 보고 서류를 집어 들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었다.“또 새로운 수를 쓰네. 이제는 사직서로 날 협박하겠다는 건가. 가소롭긴.”이어 아래 놓인 이혼합의서를 확인한 여준의 표정이 굳어졌다.합의서의 마지막 문장까지 읽고 난 뒤, 여준의 안색은 차갑게 가라앉았다.여준은 주먹으로 책상을 세게 내리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망설임 없이 시유에게 전화를 걸었다.“어디야?”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낮게 억눌린 여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여준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몇 번이고 꾹 눌렀지만 이미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내가 어디 있든 당신이랑 상관없어. 서류는 받았어?]시유의 목소리는 담담했다.여준의 말투가 한층 서늘해졌다.“임시유, 이런 중요한 때에 장난쳐? 세오름타워 프로젝트가 곧 착수되는데, 세부 설계 전부 당신 손으로 만든 거잖아. 이 타이밍에 사직서를 내?”“서운하면 서운했다고 말해. 툭하면 이혼을 들먹이는 짓 같은 건 하지 말고. 난 당신이 결혼을 그런 식으로 대하는 태도가 정말 싫어.”그때 시유는 전망 좋은 테라스의 라운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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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마리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자 시유는 여준의 전화를 그대로 끊어버렸다.마리가 다급하게 물었다.[시유야! 어디야? 아까 집에 갔는데 아무도 없던데?]시유가 답했다.“지금 천산캐슬에 있어. 여긴 조용하고, 아무도 귀찮게 하지 않아.”마리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뭐?][언제부터 천산캐슬 같은 데 살았어? 거긴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부자들만 사는 곳이잖아! 자기야, 나 놀리는 거 아니지?]시유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전화기 너머로 조용히 타일렀다.“목소리 낮춰.”시유는 낮은 목소리로 사실대로 말했다.“내가 아는 ‘그분’이 마련해 주신 곳이야. 나중에 시간 되면 데리고 갈게.”마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나중에? 자기야, 너는 이제 날 안 사랑하지? 좋은 집에 들어가 놓고 나를 안 데려가?]시유는 어이없어 웃었다.“아니야. 갑자기 이사하느라 말할 틈이 없었어.”시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리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그리고 실시간 이슈 터졌어! 누가 엄청 자극적인 폭로성 글을 올렸는데, 딱 봐도 부여준이랑 소새나 이야기야!”[이것도 나 몰래 네가 벌인 큰일이지? 너 요즘 움직이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내가 따라갈 수가 없어. 흑흑...]시유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포털 메인 화면을 눌렀다.역시 변항의 실행력은 대단했다. 이렇게 빨리 실시간 이슈 상단에 올라갈 줄은 몰랐다.관련된 사진과 녹음 파일은 아직 공개하기도 전인데 이미 이슈가 되어 바이럴 되고 있었다. 제목도 강렬했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여준과 새나 사이의 묘한 기류를 단번에 알아차릴 만했다.시유가 말했다.“사람 시켜서 올렸어. 마리야, 나 이제는 더 참고 살지 않기로 결심했어. 전부 정면 돌파할 거야.”마리의 목소리는 더 들떴다.[바로 그거지. 그게 내가 아는 내 친구 임시유의 참모습이야!][난 네 편이야. 200억 원 같은 거 필요 없어. 너 이제 돈 아쉬운 사람도 아니잖아! 벌집을 제대로 건드려서 그 인간들 밑바닥을 끝까지 까발려야지! 오예!]핸드폰을 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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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여준은 전화를 끊고 창밖의 잿빛 하늘을 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H시의 하늘은 딸의 백 일 이후부터 지금까지 맑게 갠 적이 없었다. 원래도 답답했던 여준의 마음은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여준은 다시 시유에게 전화를 걸었다. 번호를 여러 개 바꿔 가며 걸었지만 돌아온 건 전부 수신 차단 안내 음성이었다.전화를 끊은 여준은 자동차 키를 집어 들고 서재를 빠져나갔다.시유가 전화받기 싫다면 태양파크로 직접 찾아가면 될 일이었다.여준은 시유에게 직접 묻고 싶었다. 자신과 새나의 평판을 이렇게 망가뜨리는 게 시유가 원하는 결과인지.예전의 시유는 신중하고 빈틈없었다. 이렇게 큰 판을 생각 없이 흔드는 사람은 아니었다.‘임시유! 대체 이번에는 무엇을 하려는 걸까?’...같은 시각, 그림빌.시유는 유민자가 보낸 메시지를 받고 새나가 아들을 데리고 그림빌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곧장 차를 돌려 그림빌로 향했다.거실에 들어서자 새나와 진명화가 나란히 소파에 앉아 대책을 의논하고 있었다.두 사람은 현관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이야기에 빠져 시유가 들어온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새나가 낮게 흐느꼈다.“이모, 어떡해요? 시댁에서 예전에도 저랑 오빠 사이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잖아요. 이제 그 글까지 보고는 진짜 무슨 일이 있었던 걸로 의심해요.”“시어머니가 전화로는 별말 안 하고 내일 점심에 본가로 오라고만 했는데... 저 너무 무서워요.”진명화는 분을 참지 못해 가슴을 움켜쥐었다.“속이 뒤집힌다. 임시유 저것은 세상이 조용한 꼴을 못 보는구나. 설마 진짜로 이런 짓까지 할 줄은 몰랐다.”“저랑 오빠는 정말 아무 일 없어요. 제가 어릴 때 철없이 오빠를 좋아했던 건 맞아요. 하지만... 그건 아주 오래전 일이잖아요. 지금은 다 지나간 일인데, 저는...”새나는 억울함에 눈물을 쏟았다. 숨이 막힐 만큼 괴로워 보였다.“이모, 저랑 영우 씨 결혼이 흔들리면 부강그룹과 강씨 집안 협력에도 영향이 갈 거예요. 이모가 언니를 어떻게든 꼭 막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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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

진명화는 화가 지나쳐 말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더니 급히 말을 바꿨다.“네 엄마가 저지른 더러운 일이 한두 가지였니? 내가 어느 일을 말하는지 어떻게 알아. 다만 H시에서 네 엄마 평판이 얼마나 바닥이었는지는 너도 모르지 않을 텐데.”시유는 진명화의 옷깃을 놓지 않았다.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방금 분명 ‘우리’라고 하셨어요. 그 말은 그때 일에 사모님도 관여했다는 뜻이에요.”“우리 엄마가 그해 정확히 무슨 일을 겪었는지 저는 아직 몰라요. 하지만 전부 조사할 겁니다. 한 번이라도 엄마를 해친 일에 관여한 사람은 누구도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진명화가 무심코 내뱉은 말은 시유 마음속 낡은 흉터를 뜯어냈다.그해 일이 터졌을 때, 시유는 겨우 5살이었다.하지만 시유는 그날을 절대 잊지 못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강도처럼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물건을 빼앗고 난장판을 만든 끝에, 사람들은 시유의 엄마를 안방 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그날 안방 안에서 엄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시유는 몰랐다.시유가 기억하는 건 방문이 다시 열렸을 때의 모습뿐이었다. 엄마는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고, 눈은 초점을 잃었으며,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했다.그 뒤로 집안은 급격히 추락했다. 아버지와 오빠는 시유의 생활에서 완전히 사라졌고, 시유와 엄마는 넓은 집을 떠나 낡은 동네의 작은 집으로 옮겨야 했다.그 뒤에는 학교가 끝나고 돌아올 때마다 엄마의 얼굴과 몸에 멍이 들어 있었다. 어떤 날에는 입가에 피가 묻어 있기도 했다.그때의 시유는 너무 어렸다. 많은 기억이 흐릿했다. 기억이 또렷해질 즈음, 엄마는 다시 화려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그럼에도 시유는 알았다. 그해 아버지가 오빠를 데리고 떠난 일 말고도 분명 큰일이 있었다.진명화가 콧방귀를 뀌었다.“말은 거창하구나, 임시유. 큰소리칠 때 치더라도 네 처지를 봐 가면서 쳐야지.”“지난 몇 년 여준이가 너를 아내로 들이고 보호하지 않았다면, 너와 네 엄마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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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새나는 말문이 막혔다.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가슴이 답답해졌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진명화는 거실을 앞뒤로 오가며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소리를 지르며 여준에게 전화했다.“기어오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완전히 제멋대로야!”“여준아, 당장 그림빌로 와. 네가 들인 여자가 대체 어떤 인간인지 네 두 눈으로 똑똑히 봐!”그때 여준은 태양파크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뒤였다.시유가 대체 어디로 간 건지 의아해하던 차에 진명화의 전화를 받은 것이다. 시유가 그림빌에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여준은 급히 차를 돌렸다.그림빌로 향하는 내내 여준의 머릿속은 웅웅 울렸다.늘 높은 자리에 서서 모든 일을 손안에 두는 데 익숙했던 여준은 처음으로 통제 불능의 두려움을 느꼈다.지금 여준은 온몸이 얼음 속에 갇힌 듯 차가웠다.여준은 시유와 차분히 마주 앉아 제대로 이야기해야 했다.이대로 시유가 멋대로 여기저기 불을 지르고 다니게 두면 모든 것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질 것이다.여준은 운전기사에게 최대한 빨리 가라고 지시했다.분노를 풀 곳이 없었다. 늘 하얗고 차분하던 여준의 얼굴에는 보기 드물게 뾰루지가 올라왔다. 속에서 열이 오른 탓이었다.하지만 여준은 이해할 수 없었다. 친구의 부탁으로 친구의 아내와 아이를 돌봐 준 것뿐이었다. 사람을 해치거나, 불을 지른 것도 아니었다.시유가 화날 수는 있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사직, 이혼, 폭로. 하나씩 이어지는 수는 여준에게 숨 쉴 틈조차 주지 않았다.‘임시유, 본인이 이렇게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나중에 용서를 구하면 내가 받아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드나?’차 안의 공기는 끝까지 무거웠다.여준은 넥타이를 몇 번이나 잡아당겼지만 가슴의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겨우 그림빌에 도착하자 거의 뛰듯이 차에서 내려 정원으로 들어섰다.새나는 이미 시유에게 쫓겨난 뒤였다. 진명화도 화를 다 삭이지 못한 채 차를 타고 먼저 떠났다.시유는 대단한 기세로, 손에는 상대의 약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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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시유가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자, 여준의 깊고 어두운 눈과 마주쳤다.검은 정장을 입은 여준은 한층 더 엄숙하고 무거워 보였다.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미간을 찌푸린 모습, 몸짓마다 배어 나오는 단정하고 성숙한 분위기는 시유가 한때 우러르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시유가 입술을 달싹였다.“왜 자꾸 강영우 대표를 핑계로 삼아? 그냥 당신이 소새나랑 같이 살고 싶다고 말하면 되잖아. 뭘 그렇게 돌려 말해?”여준의 표정이 숯처럼 굳었다.“당신 눈에는 내가 그렇게 선도 모르는 남자로 보여?”시유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자기 객관화는 잘하네. 딱 맞는 표현이야.”여준은 말문이 막혔다. 가슴을 움켜쥐고 몇 초를 가라앉힌 뒤 곧장 시유 앞으로 걸어왔다. 키가 작은 시유를 내려다보며 여준은 과거를 떠올렸다.대학 강당에서 처음 만났던 날, 시유는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그때의 시유는 발랄한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앙증맞은 턱선과 동그란 큰 눈이 유난히 또렷했다.화장기 없는 얼굴은 정교했고, 오히려 더 생기 있었다. 깊은 숲에서 문득 모습을 드러낸 어린 사슴처럼 시유는 조용히 여준을 바라보았다. 겁먹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다가오지도 않았다. 온몸에서 맑은 기운이 흘러나와 절로 애틋한 마음이 들게 했다.여준이 시유에게 아무 호감도 없었던 건 아니었다.술김에 실수했다는 말은 핑계였다. 술기운을 빌려 원하던 일을 했을 뿐이었다.여준이 시유를 깊이 사랑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한때의 가벼운 충동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연민도 있었고, 시유가 온 마음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느낌을 즐긴 것도 사실이었다.그런데 여준도 알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딸이 생긴 뒤부터 많은 것이 낯설게 변했다.지금의 시유는 온몸에 가시를 바짝 세운 고슴도치 같았다. 여준이 가까이 가면 시유는 곧장 가시를 세웠다. 도무지 차분히 이야기가 되지 않았다.여준은 터지려는 화를 억지로 눌렀다. 애써 미소를 짜내며 손에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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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여준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유의 웃음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차가운 웃음이었다.시유는 여준의 손을 세게 뿌리쳤다.“화 안 참아도 돼. 나를 괴롭히고 싶으면 괴롭혀.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다 해도 돼!”“어차피 진흙탕 싸움이잖아? 내가 이혼을 결심한 이상 하나도 겁 안 나. 여준, 해 볼 테면 해 봐. 서로 바닥을 봐야 끝나지.”여준의 눈빛이 조금씩 가라앉았다.“정말 그래?”“지금 당신에게 기회를 주는 거야. 붙잡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해.”시유는 허리를 곧게 세웠다. 눈빛에는 거친 자존심이 드러났다.“그런 기회는 필요 없어. 내가 원하는 건 이혼이야. 후회하지 않아. 왜냐하면 나는 이제 부여준을 사랑하지 않으니까.”마지막 말은 이를 악문 채 목 깊은 곳에서 한 글자씩 밀어낸 듯했다.시유의 목소리에는 틈이 없었다. 하지만 마음은 맨손으로 찢긴 것처럼 아팠다.‘부여준’이라는 세 글자는 한때 시유가 마음에 한 획 한 획 새겨 넣은 이름이었다.이제 그 이름을 마음에서 한 획씩 지워야 했다. 말 한마디로 될 일이 아니었다.머리는 잊으라고 하는데, 마음은 뼈가 녹는 것처럼 아팠다.시유의 눈빛이 어두워지고 코끝이 시큰해졌다. 눈물이 떨어지기 전에 시유는 그림빌을 황급히 빠져나갔다. 여준에게 남긴 건 단호한 뒷모습뿐이었다.여준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는 자리에 서서 그대로 시유의 모습이 사라지는 걸 멍하니 바라보았다.복잡한 감정이 가슴속에서 올라왔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실망인지, 우습다는 마음인지 스스로 구분할 수 없었다.다만 한 가지는 확신했다.여준은 세상에서 귀신이 있는 것은 믿어도, 시유가 진짜로 사직과 이혼을 할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세오름타워 설계안에 시유가 쏟은 정성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렵게 완성한 그 설계안은 시유에게 또 하나의 자식이나 다름없었다. 수많은 난관을 지나 겨우 형태를 갖췄고, 이제 막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여준이 아는 시유라면 이런 시점에 그것을 버릴 리 없었다.결혼도 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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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여준이 찬훈에게 지시했다.“예전에 내가 시유에게 준 카드 확인해. 잔액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아봐.”찬훈이 답했다.[대표님께서 사모님께 주신 그 카드는 계속 큰 사모님 손에 있었습니다. 사모님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 돈을 쓰신 적이 없습니다. 사용은 전부 큰 사모님께서 하셨습니다.]여준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뭐라고? 지난 5년 동안 시유가 단 한 푼도 쓰지 않았다고? 그럼 시유는 5년 동안...”여준의 마음에는 충격이 가득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지난 5년 동안 그림빌 생활비, 여준의 옷과 소품, 시유가 여준에게 준 값비싼 선물까지 따지면 꽤 큰 돈이 들어갔다. 시유가 회사에서 받는 월급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여준은 카드를 넘겨준 날 이후로 그 일을 따로 묻지 않았다. 당연히 시유가 그 카드로 돈을 썼을 거로 생각했고, 그래서 새나의 과한 지출에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다.찬훈이 조심스레 말했다.[아닙니다. 큰 사모님께서 사모님을 엄격하게 보셔서 대표님 돈은 한 푼도 쓰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사모님도 자존심이 있으셔서 정말 단 한 푼도 쓰지 않으셨고요. 저한테도 대표님께 말씀드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대표님과 큰 사모님 사이가 상할까 걱정된다고...]여준의 마음에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예전의 시유는 그렇게 속 깊고, 늘 여준 입장을 먼저 생각하던 여자였다.그 큰 억울함을 겪고도 여준에게 기대려 하지 않았다. 여준과 어머니 사이가 나빠질까 봐 조용히 참았다.‘지난 5년 동안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마련해서 집안 살림과 선물 비용을 채웠을까?’‘설마 고건우가 했던 말이 전부 사실이었어?’‘정말 부강그룹에서 일하는 것 외에도 밤마다 여러 일을 맡아 돈을 벌었던 건가?’여준의 가슴에 설명하기 힘든 쓰라림이 번졌다. 목소리도 저절로 누그러졌다.“시유가 요즘 이렇게까지 나오는 데는 이유가 있었나 보네. 내가... 그동안 너무 소홀했어.”찬훈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드릴 말씀이 하나 있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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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100억 원으로 시유의 이혼을 끝내고, 빛나와 부씨 집안의 인연을 끊겠다고 했다. 직접 듣지 않았다면 시유는 자신이 21세기에 살고 있다는 사실조차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딸은 자식이 아닌가?부씨 집안이 왕위라도 물려줄 것도 아니지 않은가?시유는 웃었다. 분해서 나온 웃음이었다. 온몸이 떨렸고, 가슴이 답답해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시유보다 더 참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주걱을 쥔 채 문밖에서 엿듣고 있던 마리였다.마리는 집에서 점심으로 먹을 닭갈비를 볶고 있었다. 시유와 같이 간단히 먹으려던 참이었다.밖에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리자 이상함을 느낀 마리는 주걱을 들고 시유의 집 앞까지 뛰어나왔다.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마리는 곧장 뛰어들지는 않았지만 안에서 오가는 말은 또렷하게 들었다.더는 참지 못한 마리가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고춧가루가 아직 묻어 있는 주걱을 쥔 채 진명화 쪽으로 성큼 다가갔다.“아이고, 이 독한 노인네야!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마음이 썩은 할머니가 다 있어!”“핏줄로 따지면 빛나 몸에도 할머니 피가 흐르잖아. 태어난 뒤로 한 번 보고 고개 돌리고 가던 건 그렇다 치자. 그런데 돈으로 손녀와 인연을 끊겠다고? 그 말을 입에 담고도 부끄럽지 않아?”“집안에 자손이 귀하다더니 다 이유가 있었네. 이런 여자가 집안을 망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할 수 있으면 방금 한 말 다시 해 봐.”“내가 녹음해서 인터넷에 올릴게. 세상 사람들이 딸이라고 사람 취급 안 하는 그 낯짝을 보게 만들어 줄 테니까!”마리는 분노로 몸을 떨며 주걱을 휘둘렀다. 욕하면서 진명화에게 가까이 다가가 몰아붙였다.진명화는 이런 상황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겁에 질린 채 머리를 감싸고 이리저리 피했다. 그 와중에 주걱에 붙어 있던 고춧가루 조각이 진명화의 눈에 들어갔다.“아악...!”진명화는 눈이 타는 듯한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눈이 매워서 계속 눈물이 흐르는 눈을 움켜쥔 진명화는 반격할 겨를도 없이 사람들을 데리고 시유의 집에서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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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마리가 만든 매운 닭갈비는 향부터 끝내줬다.시유가 아직 수유 중이라는 걸 생각해 마리는 따로 간장 닭갈비도 만들었다.두 사람은 접시를 끌어안고 맛있게 먹으며 웃고 떠들었다.시유는 이렇게 마음껏 웃어 본 게 언제였는지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반면 차 안으로 쫓겨난 진명화는 도저히 웃을 수 없었다.고춧가루 조각이 눈에서 빠지지 않았다. 왼쪽 눈은 달군 쇠로 지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진명화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왼쪽 눈을 감싸 쥐고 비명을 질렀다.“아파! 아파 죽겠어! 내 눈! 내 눈이 멀 것 같아!”“빨리! 빨리 불어 봐! 빨리 빼 내!”진명화는 울부짖으며 옆에 있던 운전기사를 붙잡아 흔들었다. 빼 달라는 뜻이었다.하지만 고춧가루 조각은 진명화가 몇 번 비빈 탓에 각막 쪽에 달라붙어 있었다. 운전기사는 의사가 아니어서 감히 손댈 수 없었다.“사모님, 제가... 일단 병원 응급실로 모시겠습니다. 전문의에게 맡기시는 게 좋겠습니다.”운전기사는 통증 때문에 거의 무너진 진명화를 보며 급히 제안했다.진명화는 곧 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의사의 도움으로 왼쪽 눈에 붙어 있던 고춧가루 조각은 무사히 제거됐지만, 왼쪽 눈은 이미 붓고 충혈돼 있었다. 의사는 안약을 넣고 연고를 바른 뒤 거즈와 붕대로 임시 고정을 해 주었다.진명화가 응급실을 나왔을 때, 온 얼굴은 먹구름처럼 어두웠다.고개를 든 진명화는 복도에 서 있는 여준을 보았다. 짙은 남색 셔츠를 입은 여준의 표정도 무겁고 엄했다. 얼굴에는 불쾌감이 묻어 있었다.여준은 이미 진명화의 운전기사에게서 전후 사정을 전부 들었다.진명화가 한 일에 여준은 화가 났고 실망했다.“어머니, 시유는 제 아내이고 빛나는 제 딸입니다. 어떻게 100억 원으로 인연을 끊자는 그런 매정한 말을 하실 수 있습니까? 저와 상의도 없이 이런 일을 벌이신 건 정말 실망스럽습니다.”진명화는 아픈 왼쪽 눈을 감싸 쥔 채 억울함에 목소리를 높였다.“임시유가 일을 이렇게 키웠잖니? 새나와 너까지 밖에서 손가락질받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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