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공항 문을 열고 들어서자 타국의 여름 열기와 함께 묵직한 오렌지빛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미리 전용 탑승 게이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짙은 검은색 명품 세단에 올라타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대한민국을 벗어나 도쿄에 발을 디뎠다는 실감이 피어올랐다.가죽 시트의 묵직한 향과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섞여 드는 차 안은 한없이 밀폐되어 있었다. 도쿄 외곽을 벗어나는 동안 창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은 어딘가 우리나라의 여름 시골길을 닮아 있었다. 낮게 깔린 지붕들, 나지막한 목조 건물, 너른 들판 너머 완만하게 뻗은 산 능선까지.그러나 도심 한복판에 접어들자 분위기는 180도 바뀌었다. 마천루가 빽빽하게 하늘을 가리고, 낯선 가타카나 네온사인들이 아찔하게 반짝였으며, 반대편으로 숨 가쁘게 달리는 도로 위의 차들이 어지러운 열기를 뿜어냈다.차준호는 내 옆자리에 깊숙이 기대앉은 채, 순간순간 짙고 아득한 눈빛으로 내 옆모습을 모조리 담아내고 있었다. 그 집요한 시선에 숨이 막혀, 나 역시 그의 안색을 살피는 척하며 가만히 눈길을 돌렸다.무심하게 접어 올린 셔츠 소매 아래, 단단하고 매끈한 팔목 근처로 나도 모르게 시선이 자꾸만 떨어졌다.걱정과 의구심을 품은 채 뚫어져라 바라보다, 끝내 그가 고개를 돌려 나와 시선을 마주치고 말았다.“신하늘,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낮게 가라앉은 그의 음성이 밀폐된 차 안을 간지럽히며 울렸다. 뭐라 둘러댈까 찰나의 고민을 하다, 나는 조금 솔직한 속내를 에둘러 건넸다.“대표님 팔목에 주삿바늘 자국이 보여서요. 혹시 어디 아프셨던 건가 해서 그렇습니다.”그러자 차준호가 나른하게 입꼬리를 접어 올리며, 시트 위로 몸을 기울여 내 쪽으로 거리를 바짝 좁혀왔다. 그가 다가오는 순간, 특유의 고급스럽고 시원한 향수 향과 함께 은밀한 체온이 살끝에 소름처럼
인천국제공항 출국장은 평일 낮 시간임에도 수많은 여행객과 기내용 캐리어들이 부딪히는 소음으로 아득하게 북적이고 있었다.비행기들이 하늘 위를 가로지르는 유리창을 배경으로 내 앞에 나타난 차준호는 단연 주변 사람들이 눈에 안 들어올 정도로 독보적인 자태를 뽐냈다.“대표님, 오랜만에 뵙습니다.”성큼 다가서며 건넨 내 인사에, 차준호가 캐리어 손잡이를 잡고 있던 긴 손가락을 살짝 풀어내며 눈꼬리를 아찔하게 접어 올렸다.단정한 흰색 면바지에 네이비색 셔츠 소매를 무심하게 툭툭 접어 올려 단단한 팔뚝과 굵직한 탄성으로 얽힌 선명한 핏줄이 남성적으로 도드라져 보였다.“신하늘은 오늘도 예쁘네.”낮게 깔리는 그의 음성이 공항의 분주한 소음을 뚫고 귓가를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차준호는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느릿하고 집요하게 훑어내리더니, 나른하게 입매를 말아 올렸다.핏이 딱 떨어지는 하늘색 티셔츠와 보디라인을 부드럽게 감싸는 화이트 진은 미적 감각이 없는 내가 봐도 세련된 스포티룩이었다.“대표님, 선물해 주신 옷 감사합니다.”“어울릴 것 같았어. 표정은 더 어른스러워졌군.”“대표님을 상대하려면 변해야죠.”내 은근한 도발에 그가 나직하게 실소를 터뜨리며 내게 한 걸음 바짝 다가섰다. 순간, 남성적이고 고급스러운 그만의 시원한 향이 밀물처럼 코끝을 단숨에 덮쳐왔다.“그래, 날 감당할 각오를 하다니, 패기가 기특하군.”그 말과 동시에 그가 내 손목을 부드럽게 쥐어잡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큼지막한 마디가 손목을 지그시 감싸 쥐는 순간, 스치는 온기에 가슴이 순식간에 내려앉았다.한
나는 벤치에 가만히 서 있는 차준호를 황당하게 올려다보았다.“여기 왜 오셨어요?”“신하늘이 불렀잖아.”내가 그를 불렀다고? 언제?하지만 이내 낮에 추모공원에서 그의 번호를 잠시 눌렀다가 황급히 끊어버린 기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그래서 저를 찾아 여기까지 오셨어요?”“그런 셈이지.”정말이지 상식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들어오는 남자였다.게다가 지금의 그는 아침에 칼같이 떨어지던 오만한 슈트 차림이 아니었다. 지난번 대학 축제 때처럼 편안하고 감각적인 캐주얼 차림을 한 상태였다.비서인 내가 모르는 다른 일정이 있었나.“혹시 대표님도 오늘 오후 휴가셨어요?”“왜?”나는 발끝으로 모래바닥을 작게 긁적이며 그를 슬쩍 응시했다.“젊어 보이게 입으셔서요.”내 말에 그가 참지 못하고 쿡쿡 기분 좋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늘진 밤빛 사이로 그의 깊은 눈매가 아찔하게 호를 그렸다.“아직 내가 스물아홉이라는 사실을 신 비서에게 안 알려준 건 아니겠지?”나는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며 살짝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을 물었다.“저한테 대표님은 빚도 단숨에 갚게 해주신, 까마득하게 올려다봐야 하는 키다리 아저씨 같아서요. 그저 세상을 다 아는 어른으로 여겨지네요.”내 솔직한 자조에 차준호가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더니, 낮게 깔린 음성으로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그러게. 나도 신하늘이 엄연히 다 자란 어른 여자인데, 왜 자꾸 보살펴주고 싶은지 모르겠네. 아, 해가 떨어져도 덥군.”차준호의 눈에
나는 차준호의 이름을 한참을 들여다 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가 즉시 종료 버튼을 눌러버렸다.내가 미쳤지. 물론 궁금한 것 투성이기는 하지만, 지금 연락해서 대체 뭐라 말한단 말인가.왜 입사 전부터 초콜릿을 나만 사줬냐고, 왜 나에게만 취향 따져가며 좋은 옷을 입혔냐고, 다정하게 군 이유가 뭐냐고 따져 물은 들, 달라질 게 무엇이겠는가.복잡하게 일렁이는 파문을 외면한 채, 은행 문을 나서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택시 승강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찌는 듯한 날씨 탓인지, 아니면 차준호라는 남자의 이름 세 글자가 온몸의 혈관을 흔들어놓은 탓인지, 옷 속 피부 구석구석으로 덥습하고 끈적한 열기가 은밀하게 고여들었다.오늘만큼은 버스에 시달리는 대신, 나를 가득 채운 이 아찔한 열기를 식혀줄 근사한 호사를 스스로에게 선물하고 싶었다.“손님, 어디로 모실까요?”“성남 헤븐즈 힐 추모공원이요.”부모님이 계신 곳. 그 안식처로 어서 달아나 자랑하고 싶었다.열심히 잘 살았다고. 이제부터 차곡차곡 모으는 돈이 전부 진짜 ‘내 돈’이 된다니.늘 내 영혼과 몸을 짓눌러온 빚이라는 서글픈 굴레에서 벗어나 마침내 내 미래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는 가슴 벅찬 감격이 밀려왔다.게다가 차준호라는 남자와의 만남은 내 인생에 커다란 변곡점이 되었기에 이 흔들림 역시도 부모님께 알리고 싶어졌다. 이토록 감정이 묘한 날에는 부모님을 뵙는 것만이 어지러운 마음을 잠재울 유일한 해답 같았다.***늘 주머니 사정이 팍팍해 부모님을 찾아뵐 때마다 서글픈 국화 두 송이만 딸랑 사 들곤 했는데, 오늘은 알록달록 어여쁜 국화 한 다발을 품 가득 묵직하게 안았다.찌는 듯한 7월의 폭염 속에서 추모관 계단을 올라가는
내가 세종동에 산다는 사실이 그토록 거창한 비밀이라도 되는 걸까.좋은 옷을 입고 세종동의 주상복합 단지에 산다고 잘 사는 줄 오해를 한 건지, 아니면 서쪽 동네에 살면서 제법 용됐다고 여긴 건지 알 길이 없었다.복잡한 마음에 차진철의 눈치를 살피던 체스 승부는 결국 1 대 1 무승부라는 아쉬우면서도 훈훈한 결과로 끝이 났다.차진철이 떠나고 난 뒤, 대표실에는 오롯이 나와 차준호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은은한 우디 향이 밀폐된 공기 사이로 아찔하게 감돌았다. 우리는 커다란 대리석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조용히 서류를 들여다보았다.나는 각 부서에서 올라온 신규 사업 제안서들을 하나씩 검토하며 서머리 노트를 작성했고, 차준호는 가볍게 분류된 결재 서류에 묵묵히 서명을 해나갔다.서류를 읽던 나는 슬쩍 눈길을 올려 서류를 집중하고 있는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깎아지른 듯 단정한 턱선과 깃이 잘 세워진 셔츠 차림의 남자는, 여직원들이 왜 그토록 그를 신처럼 동경하는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치명적이었다. 대한민국 손꼽히는 성골 재벌가라면서도 내게는 한없이 다정하고 은밀하게 대해주니 자꾸 바라보게 되는 수밖에.‘하지만······ 선을 지켜야 해.’화장실에서 들었던 여직원들의 대화와, 얼마 전 찾아왔던 화려한 상대 강소희의 모습이 잔상처럼 스쳐 지나갔다.게다가 그의 아버지 차진철 회장을 직접 직면하고 나니, 그가 나와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는 현실이 뼈아프게 와닿았다.혼자 김칫국을 마시고 북 치고 장구 치고 해봤자, 우리는 그저 대표와 비서 사이일 뿐이었다. 연애 경험이라고는 전무한 내가, TV 속 연예인을 동경하듯 차준호라는 독보적인 사람에게 잠시 마음을 뺏겼던 거라
월요일 아침 8시, 회사에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해 보니 이런 거대한 이벤트가 터져 있을 줄이야.들어선 대표실에는 텔레비전 뉴스 속에서만 접하던 거대한 재벌가의 총수, 차진철 회장이 앉아 있었다.차준호와 꼭 닮아 한눈에 알아볼 만큼 수려한 미중년의 외모였지만, 대단한 풍채와 더불어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는 범접할 수 없는 거물의 아우라가 서려 있었다.“어제 준호랑 통화하던 그 비서로군. 체스 좋아하나, 신 비서?”그냥 체스는 전혀 둘 줄 모른다고 적당히 거짓말을 하고 조용히 물러서면 될 일이었다.“저 체스 좋아합니다.”하지만 내가 미쳤지.사람을 은근히 시험하려는 듯한 차진철 회장의 묵직한 시선에 괜히 꼬리를 내리기 싫은 내 오기와 승부욕이 쓸데없이 터져 나왔다.그러자 차진철 회장의 얼굴이 단번에 환하게 밝아지더니, 맞은편 소파를 툭툭 내리치며 가벼운 손짓으로 자리를 권했다. 아예 나를 상대로 제대로 판을 깔 기세였다.“잘됐군! 어서 앉게. 이 녀석이 안 놀아줘서 심심하던 참이었거든.”진짜 이 월요일 아침부터 나를 고용한 대표의 아버지와 체스 판을 벌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단순히 예의상 물어본 것에 그치지 않고, 진짜 실력을 확인해 보려는 것이 확실했다.황당함이 밀려와 나도 모르게 차준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차준호는 내 눈빛을 슬쩍 피하며 입꼬리를 나른하게 올렸다.“신하늘, 오늘 내 스타일이 아닌 옷을 입고 왔으니, 벌칙을 좀 받도록 해. 아버지를 즐겁게 해줘야 할 거야.”이 남자가 진짜······.내 속도 모르고 차진철 회장은 더욱 화통하게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
기자를 상대하는 동안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카메라 앞에서 당당해지고, 브리핑하거나 질문에 응답하는 순간에도 능숙 능란해져 있었다.차분한 척, 완벽한 듯, 긴장감이 첫날보다는 옅어졌다. 사람은 역시 학습의 동물이라고 무슨 아나운서가 된 양 나는 그리 기자들을 상대했다. -차준호 대표님이 대화가 가능하다던데. 확실히 강소희와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 확인하셨습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차준호 대표님께서는 일체 사생활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사 측에서도 이번 사건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언제 CH에서는 공식
종일 정신 없다가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았다.커피에 의지해온 탓일까. 카페인의 날카로운 자극이 현기증을 부추겼다.그가 왜 하필 기억을 잃은 걸까.3년치 기억만 사라지다니. 비극 같으면서도 우습게 느껴졌다.빌어먹게도 나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카메라 군단이 다시 몰려들었다. 간신히 버티던 나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답변했다.그런데 병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고미주와 강진욱의 대화에 일순 어깨가 흠칫거려졌다.[강 박사님, 차 대표는 언제 일반 병동으로 이동하나요?][네, 최종 검사가 끝나는 대로 오늘
이아준은 통화 도중,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신하늘과 도국과의 옛 기억 속에 깊게 잠겼다.화려한 마천루가 즐비한 강남의 이면, 세종동 서쪽 끝자락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빈민가가 있었다. 그곳에 위치한 ‘하늘 보육원’은 세 사람의 유년이 뿌리내린 곳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나이도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유일한 세계이자 가족이었다.이아준은 태어나자마자 차가운 보육원 앞마당에 버려진 신세였다. 그러나 운명은 잔인하고도 변덕스러웠다. 뒤늦게 그가 국내 최고 재벌가인 L그룹의 잃어버린 혈통임이 드러났고, 하루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