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치명적인 거짓말(The Dearest Lie): Chapter 261 - Chapter 270

287 Chapters

#260. 위기가 기회가 된 골든 타임

간밤의 새벽, 뼈마디를 파고드는 서늘한 오한과 함께 온몸을 짓누르는 묵직한 몸살 기운이 나를 덮쳤다.지칠 대로 지쳐버린 몸도 문제였지만, 차준호를 둘러싼 가혹한 운명의 무게에 알게 모르게 짓눌려 온 극심한 스트레스가 결국 몸을 부러뜨린 까닭이었다.차준호는 잠결에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심상치 않은 열감을 느끼고는 나를 황급히 병원으로 데려왔다. CC그룹이 소유하고 직접 운영하는 대한종합병원이었기에 환자의 개인정보는 철통같이 보안이 유지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이 나라에서 가장 뜨거운 조명을 받는 인물이 된 탓에, 나는 졸지에 병원 전체의 시선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나는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담당 간호사의 손을 붙잡고 내 임신 사실만큼은 절대 의료진 외에 함구해 달라고 몇 번이고 사정했다. 특히, 차준호에게는 입을 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임신 초기라 함부로 소염제나 약을 삼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병원으로 달려오는 것 외엔 대안이 없기도 했었다. 극도의 피로로 탈진한 몸에 차가운 영양주사가 들어가기 시작하자, 가라앉았던 기력이 조금씩 맴돌기 시작했다.간밤 사이에 한층 더 핼쑥해진 내 얼굴을 내려다보는 차준호의 눈빛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신하늘은 건강해야지. 좋은 세상, 오래 보려면.”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는 아련함과 짙은 우려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차준호는 차가운 내 손을 제 손으로 따스하게 감싸 쥐며 제 체온을 어떻게든 밀어 넣으려 애썼다. 자신의 속은 잿더미처럼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으면서도, 내가 조금만 아파도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굴며 태산 같은 걱정을 안겨주는 이 남자가 참으로 야속하고도 애달팠다.그때, 정적을 깨고 응급실 커튼이 젖혀지며 뜻밖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
Read more

#261. 운명의 승부수를 띄운 우리

일요일 정오.제주도의 바다는 오늘도 잔인하리만치 푸르고 눈부셨다.창밖으로 밀려드는 파도 소리가 거실의 적막을 기분 좋게 채우고 있었지만, 해물을 곁들인 식탁 위로 흐르는 공기는 눅진하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차진철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앞에 앉은 고미주와 차진아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제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은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이 비현실적인 평화가 사실은 너무나 달콤하여 그는 몇 분째 그저 입술만 지그시 깨물었다.이곳에서의 시간은 그가 평생 맛보지 못한 여유이자, 죄 많은 인생에 허락된 과분한 위로였다. 고미주가 정성껏 차려내는 따뜻한 아침밥과 차진아의 순수한 애교는 그가 한동안 모른 척 잊고 살았던 ‘가정’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새삼 일깨워주었다.하지만 이 배부른 일상이 사실은 젊은 날의 업보가 던지는 유예이자 응징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세월은 너무나 비정하게 흘러갔고, 차준호가 어렸을 때나 차진아가 태어났을 때 그 곁을 지켰어야 했다는 뒤늦은 후회만이 뼈아프게 가슴을 파고들었다.이제 결심을 실행에 옮길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열린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알싸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정갈하게 차려진 해물찌개와 두부전을 가만히 바라보던 차진철이 무겁게 입을 뗐다.“고 여사, 그리고 진아야.”낮게 가라앉은 그의 음성에 고미주의 숟가락이 멈칫했다. 차진철은 수평선 너머 허공에 시선을 둔 채 말을 이었다.“그때 준호에게 준 음식엔 아무 문제 없었다. 그저······ 그놈 몸이 견뎌내질 못한 거야. 내가 쌓아온 업보가 인연을 괄시한 대가로 돌아온 거지. 벌은 내가 받아야 해. 미안하다.”“회
Read more

#262. 여자 말을 들어서 나쁠 것 없잖아?

“신 비서, 어떻게 여기를!”놀란 차진철이 나를 마치 유령이라도 보듯 넋이 나간 눈으로 바라보았다.“신 비서. 이렇게 직접 오다니······.”“······신 비서 언니. 지금 한창 바쁘실 텐데······.”고미주와 차진아 역시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나는 이미 이 가문의 일원이 되었건만, 저들의 입에서 나오는 내 이름은 여전히 ‘신 비서’라는 딱딱한 직함에 머물러 있었다.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회장님, 고 여사님, 안녕하세요. 그리고 진아 양도 잘 지냈나요.”내 입에서도 끝내 아버님, 어머님, 진아 아가씨라는 단어는 흘러나오지 않았다.심지어 남편이 된 차준호에게조차 여전히 ‘대표님’이라는 호칭이 익숙한 나였다. 내 마음속에서조차 이 사람들은 감싸 안아야 할 편안한 가족이라기보다, 끊임없이 넘어서야 할 버거운 벽이자 극복해야 할 존재임이 분명했다.차준호는 냉정하면서도 결연한 눈빛으로 차진철을 가만히 응시했다.“날이 좋은 주말인데, 제주도에 좀 올 수도 있죠.”차준호가 느긋한 어조로 응수하며 카페 안을 천천히 훑었다. 차진철은 두 주먹을 꽉 쥔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를 노려보았다.그 눈빛 깊은 곳에 서려 있는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아무리 차준호가 신혼여행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어도, 저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런 축하도, 어떤 반응도 건네지
Read more

#263. 지독하게 찬란하게, 그 첫 걸음

차준호는 무심한 표정으로 내 앞접시에 노릇한 해물전을 놓아주며, 단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냉정한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좋은 식사 시간이잖아? 이런 대화는 그만.”다시 테이블 위로 묵직한 정적이 가라앉았고, 차진철 회장의 눈가에는 억누르지 못한 원망과 애통함이 그렁그렁 차올랐다.상대의 영혼을 단번에 베어내는 얼음 칼날 같은 서늘함이었다. 지켜보는 내 어깨가 절로 굳어질 만큼 완벽한 거절이었다.차가운 차준호의 반응에 차진아는 당황한 듯 떨리는 눈동자로 말을 덧붙였다.“예전에 저한테 피부 이식도 해주었잖아요. 전 그저 그때의 은혜를 보답하고 싶을 뿐이에요.”그때 차준호가 시선을 들어 차진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차진아에게 닿는 순간, 공기는 숨이 막힐 듯 무겁게 가라앉았다.“나중에 아버지에게나 효도해. 그게 네가 할 보답이야.”단칼에 대화를 끊어낸 그는 미련조차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의 냉정함은 흔적도 없이 지워내고, 오직 자신의 궤도 안에 존재하는 유일한 행성이 나라는 듯 지독하고도 뜨거운 갈망만이 서린 눈길이었다.“우리 어서 먹고 해안가 산책이나 다시 하러 갈까?”나는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차진철의 초조함과 고미주의 당혹감이 기묘하게 뒤섞인 카페의 공기를 읽어냈다. 창밖으로는 일요일의 평화로움을 닮은 파도가 여전히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고, 내 마음 역시 정해진 운명을 향해 다시금 위태로운 항해를 시작했다.***대한민국의 시선이 서울 세종동으로 쏠려 있어야 할 일요일 저녁. 확성기 너머로 고함을
Read more

#264. 환호 속 대세의 등장

일요일 깊은 밤.하네다 공항을 출발해 마침내 김포 공항에 도착한 세나는 들뜨고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발걸음마저 경쾌하게 흩트렸다.이번 기습 입국은 전적으로 대세 중의 대세인 도국과의 화보 촬영 때문이었다.아무래도 도국이 신하늘 편에 서서 기특하게 일해 준 자신을 위해 잡은 스케줄이 아닐까 지레 짐작하기도 했다.“언니,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작은 기내용 캐리어를 끌며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세나가 옆에 있는 새로 배정된 매니저에게 인사를 건넸다. 입국 수속을 끝내고 잠시 한숨을 돌리고 있자, 청점퍼 차림에 숏컷 머리를 한 20대 후반의 매니저 김연정이 세나에게 미소로 응답햇다.“나야말로 잘 부탁해. 대세 여가수 세나의 담당 매니저라니, 영광이야.”두 사람은 기분 좋게 웃음을 주고받았고, 경호원 두 명의 호위를 받으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과 가볍게 손인사를 하며 대화는 이어졌다.“나 사실 그동안 JW엔터테인먼트에서 코디 담당으로 일했었거든. 대우는 좋지 않았어도 연예인 보는 재미가 쏠쏠해서 이 바닥을 도저히 떠날 수가 없더라고.”JW라는 단어에 놀란 세나는 순간 마른침을 삼켰다.“언니, 그럼 오늘 저랑 촬영하는 도국 오빠, 그때도 보셨겠네요?”김연정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잔잔한 탄성을 내뱉더니 활짝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완벽한 남자지. 빈틈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얼굴에, 능력도 인성도 진짜 최고야. 나도 팬클럽 ‘댄저러스’ 가입했거든.”세나는 밀려드는 뿌듯함에 베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세나는 살짝 상기된 볼을 감싸 쥐며 수줍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저도
Read more

#265. 은밀하게 궤도 이탈을 꿈꾸다

그 시각, 고요하다 못해 침묵이 서늘하게 가라앉은 한남동 자택의 거실.수심이 깊게 패인 차진철 회장의 곁에 서서 텔레비전 화면을 주시하던 고미주는, 김포공항에 도착한 신하늘과 차준호의 모습이 붉은 헤드라인과 함께 송출되는 순간 가슴이 내려앉아 턱 숨을 집어삼켰다.화면 속 신하늘과 차준호의 얼굴은 당장 영양제라도 맞고 쉬어야 할 만큼 위태로워 보였지만, 언론은 그저 두 사람이 여느 평범한 부부처럼 세종동 자택으로 향하고 있다는 속보만을 연이어 띄워 보낼 뿐이었다.“고 여사, 진아야. 밤이 늦었으니 그만 들어가서 쉬어.”차진철의 낮고 퍼석한 목소리가 거실에 무겁게 울려 퍼졌다. 고미주는 쭈뼛거리며 그를 향해 조심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실상 이 집의 문턱을 다시 넘어섰을 때, 그녀를 맞이한 고용인들의 태도는 예상과 너무나 달랐다.자신을 향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모님, 오셨습니까." 하고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차진아를 향해서도 "진아 아가씨, 피곤하실 테니 옷부터 편하게 갈아입으세요."라며 세심하게 챙겨주는 모습에 당황스러움마저 들 정도였다.슬그머니 둘러본 집 안 곳곳에는 자신과 차진아가 황급히 떠나며 남겨둔 흔적들이 손때 하나 타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진아 방도 그대로고······ 제 물건들도 전부 예전 모습 그대로 놔두셨네요.”“당연한 것을 가지고.”차진철은 무심한 척 툭 던지듯 중얼거렸지만, 텔레비전 화면에서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핏기 없는 그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고미주는 불안한 눈빛으로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 속에서 신하늘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가던 차준호가, 아주 찰나의 순간 미간을 찌푸리며
Read more

#266. 이 남자의 철벽을 부셔 버리고 싶은데

월요일 아침, 서울 성수동 스튜디오.잡지 화보와 글로벌 명품 브랜드 협찬이 동시에 진행되는 스튜디오는 수많은 취재진과 스태프들이 내뿜는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메이크업을 마친 세나는 가운을 벗어 던지고 나타난 도국을 보는 순간, 그 모습이 너무 근사해 숨이 막혀 왔다. “세나야, 왔어?”그래도 오랜만의 재회가 어색하면 어쩌나 안절부절못했던 마음이 무색하게, 자신을 편하게 대하는 그의 눈빛에 세나의 가슴속 깊은 곳은 다른 의미로 속이 타들어 갔다.‘한때 키스도 나누고, 계약일지언정 몸과 마음을 다 건네며 연인으로 지냈던 사이인데······.’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도 아깝지 않은 남자였다. 그를 완전히 소유하고 싶었지만, 차갑게 선을 그으며 관계의 종말을 선언한 것 역시 도국이었다.“오빠. 더 근사해지셨네요.”“세나 너도 일본에서 인기가 대단하다며.”인기라는 말을 듣자 갑자기 민망했던 어젯밤 공항의 해프닝이 떠올라 화제를 돌렸다.“전 아직 멀었어요. 어제 김포공항에 도착했는데 설마 제 팬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신하늘 후보님 지지자들인 거 있죠?”그 말에 도국이 눈매를 가늘게 접으며 풋, 하고 낮고 감미로운 탄성을 흘렸다.“녀석의 인기는 지금 말 그대로 하늘을 찌르고 있지.”신하늘의 이름만으로도 눈부시게 풀어지는 그 미소에 세나의 가슴 한구석이 짓뭉개지듯 아려 왔다. 자신을 떠올릴 때도 저런 눈빛을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도국이 신하늘을 향해 품은 감정은 단순한 짝사랑은 아니었다. 그녀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음에도 괴로워하기는커녕, 진심으로 그녀의 행복을
Read more

#267. 예측불가능, 주사위가 던져졌다

문 앞에 서서 차준호를 떠올린 나는 다시 거울 속으로 시선을 돌렸다.그곳에 비친 내 모습은 조만간 대한민국 정치인이 되어 거대한 권력을 포상받는 선택받은 자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생명을 제물로 바쳐서라도 남편을 살리려는 비정한 마녀의 형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과연 무엇이 정답일까. 인생에서 오답을 낸다면 그 대가는 신에게서 받는 벌이 될까.그 오만하고 완벽한 남자가 화마로 얼룩진 몸을 회복시키느라 병원 신세를 진 차진아의 일상을 다시 훼손해 생명을 연장하는 상황을 견딜 리가 없었다. 수술 후유증이 차진아에게 발생한다면 지독한 낙인이자 저주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난 이미 벌을 받고 있는 것 같은데, 빨리 이 지옥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두 주먹을 꽉 쥐던 그때였다.-그래도 전 대표님의 이식 수술을 권하고 싶습니다.강진욱의 냉혹한 설명이 내 폐부를 짓눌렀다.이를 어쩌나. 다시 스트레스를 받아서일까. 아랫배가 살살 아파 오기 시작했다.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다잡으며 말을 이었다.“저 역시 대표님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박사님, 신에게 의지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네요.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연락드리겠습니다.”전화를 끊고 거울 속의 또 다른 나와 마주했다.그리고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제 플랜 B로 넘어가야 할 시점이 온 것 같았다.***그 시각, 잠실 L그룹 본사 세미나실 옆 VIP 대기실.회장 대리라는 무거운 직함을 짊어지고 임원진과 전 본사 직원이 운집한 대형 행사를 무사히 치러 낸 이아준은 무대 뒤로 걸어 나오자마자 긴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오늘따라 이왕춘은 왜 부재중인 것인지. 마냥 기뻐야 하지만, 어깨 위를 짓눌러 오는 수천 개의 시선이 안겨 준 중압감
Read more

#268. 지옥에서 천국을 엿본 순간

월요일 밤이 깊어 갈수록, 대한민국 언론과 정치권은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거대한 폭풍 속으로 완전히 파묻혀 갔다.[속보! L그룹 회장실 전격 압수수색······ 총선 단 2일 전, 정재계 매머드급 파장][이왕춘 회장 돌연 쓰러져······ 실권 쥐었던 거물의 행방에 검찰 총력전][L그룹 파문의 진실은? 자택까지 수사관 급파, L그룹은 이아준 회장 대리의 비상 체제 가동]TV 앵커들의 격앙된 목소리와 포털 사이트를 도배하는 광풍 속에서도, 이아준은 냉철하게 중심을 잡았다. 쏟아지는 언론의 문의를 차단하고 임원진을 긴급 소집하며 L그룹 내부를 견고하게 다잡고 나서야 VIP 휴게실로 돌아온 그였다.도국은 미리 와서 기다렸다가 이아준이 등장하자 어깨를 다독였다.“수고했다.”“어휴, 진짜 정신없네. 할아버지가 대체 어디서 무슨 죄라도 지으신 건가?”“글쎄.”도국은 지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어하는 이아준을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달콤한 음료나 술 대신 얼음처럼 차갑고 시원한 생수병을 건넸다. 아무리 여야가 운명을 걸고 사생결단을 벌이는 정쟁의 계절이라지만, 총선을 불과 이틀 앞둔 시점에 이토록 무자비한 칼날이 정면으로 들어올 줄은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바로 그때, 도국의 슈트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가 나지막하게 진동을 울렸다.화면에 찍힌 이름을 확인한 도국의 눈매가 미세하게 찡그려졌다. 평소라면 결코 이 시간에 올 리 없는 연락이었다. 그가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누르며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대자, 짧은 정적 끝에 익숙하면서도
Read more

#269. 지금이 천국이라는 불꽃 같은 거짓말

선거를 단 하루 앞둔 화요일, 세종동의 공기는 폭염에 대지가 들끓는 한여름처럼 숨이 턱 막힐 듯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오늘 밤 12시까지입니다! 단 한 표, 단 한 사람의 마음이라도 더 잡아야 합니다!”선거대책위원장을 맡은 이승은의 날카롭고 명확한 음성이 캠프 전체의 정적을 깨부쉈다. 그녀의 지휘 아래 선우현과 허기찬이 유세 원고를 최종 점검했고, 수많은 자원봉사자는 차량의 마이크와 음향 장비를 풀가동하며 동선을 체크했다. 오늘 밤까지 남은 시간은 이미 가혹한 카운트다운에 돌입해 있었다. 법적으로 허용된 시간이 종료되기 전까지 단 1분 1초도 허투루 흘려보낼 수 없는, 사생결단의 마지막 스퍼트가 시작된 것이다.유세차 상단에 올라선 나는 공약을 하나하나 토해냈고, 목이 터져라 응원하는 유권자들은 미친 듯이 내 이름을 연호했다. 휴가까지 내고 달려온 20, 30대의 젊은 [스카이 블루] 지지자들은 나의 매 걸음을 구름처럼 따라다녔다. 허기찬은 거리를 메운 인파 사이를 누비며 대열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손바닥이 짓무르도록 신호봉을 휘두르며 안전을 확보했다. 이승은의 치밀한 지휘 하에 나는 세종동 전역을 샅샅이 훑으며 폭풍처럼 질주했다.그리고 그 정중앙에는 나를 버티게 해주는 차준호가 있었다.지독한 통증이 이미 시작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비틀거리지 않았다. 태양 아래 당당히 서 있는 남자는 나약한 환자가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권력을 내 손에 쥐여주기 위해 판을 흔드는, 오만한 군주 그 자체였다.그는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자세로 나를 위해 선거 점퍼를 입고 외조하는 남편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를 대신해 마이크를 잡고, 나를 위해 목청껏 내 이름을 세상에 외쳤다. 그리고 언제나 내 손을 꼭 잡
Read more
PREV
1
...
242526272829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