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일요일 정오.
제주도의 바다는 오늘도 잔인하리만치 푸르고 눈부셨다.
창밖으로 밀려드는 파도 소리가 거실의 적막을 기분 좋게 채우고 있었지만, 해물을 곁들인 식탁 위로 흐르는 공기는 눅진하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차진철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앞에 앉은 고미주와 차진아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제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은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이 비현실적인 평화가 사실은 너무나 달콤하여 그는 몇 분째 그저 입술만 지그시 깨물었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그가 평생 맛보지 못한 여유이자, 죄 많은 인생에 허락된 과분한 위로였다.
고미주가 정성껏 차려내는 따뜻한 아침밥과 차진아의 순수한 애교는 그가 한동안 모른 척 잊고 살았던 ‘가정’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새삼 일깨워주었다.
하지만 이 배부른 일상이 사실은 젊은 날의 업보가 던지는 유예이자 응징이라는 예감이
“신 비서, 어떻게 여기를!”놀란 차진철이 나를 마치 유령이라도 보듯 넋이 나간 눈으로 바라보았다.“신 비서. 이렇게 직접 오다니······.”“······신 비서 언니. 지금 한창 바쁘실 텐데······.”고미주와 차진아 역시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나는 이미 이 가문의 일원이 되었건만, 저들의 입에서 나오는 내 이름은 여전히 ‘신 비서’라는 딱딱한 직함에 머물러 있었다.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회장님, 고 여사님, 안녕하세요. 그리고 진아 양도 잘 지냈나요.”내 입에서도 끝내 아버님, 어머님, 진아 아가씨라는 단어는 흘러나오지 않았다.심지어 남편이 된 차준호에게조차 여전히 ‘대표님’이라는 호칭이 익숙한 나였다.내 마음속에서조차 이 사람들은 감싸 안아야 할 편안한 가족이라기보다, 끊임없이 넘어서야 할 버거운 벽이자 극복해야 할 존재임이 분명했다.차준호는 냉정하면서도 결연한 눈빛으로 차진철을 가만히 응시했다.“날이 좋은 주말인데, 제주도에 좀 올 수도 있죠.”차준호가 느긋한 어조로 응수하며 카페 안을 천천히 훑었다. 차진철은 두 주먹을 꽉 쥔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를 노려보았다.그 눈빛 깊은 곳에 서려 있는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아무리 차준호가 신혼여행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어도, 저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런 축하도, 어떤 반응도 건네지
일요일 정오.제주도의 바다는 오늘도 잔인하리만치 푸르고 눈부셨다.창밖으로 밀려드는 파도 소리가 거실의 적막을 기분 좋게 채우고 있었지만, 해물을 곁들인 식탁 위로 흐르는 공기는 눅진하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차진철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앞에 앉은 고미주와 차진아를 가만히 응시했다.이제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은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이 비현실적인 평화가 사실은 너무나 달콤하여 그는 몇 분째 그저 입술만 지그시 깨물었다.이곳에서의 시간은 그가 평생 맛보지 못한 여유이자, 죄 많은 인생에 허락된 과분한 위로였다.고미주가 정성껏 차려내는 따뜻한 아침밥과 차진아의 순수한 애교는 그가 한동안 모른 척 잊고 살았던 ‘가정’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새삼 일깨워주었다.하지만 이 배부른 일상이 사실은 젊은 날의 업보가 던지는 유예이자 응징이라는 예감이 들었다.세월은 너무나 비정하게 흘러갔고, 차준호가 어렸을 때나 차진아가 태어났을 때 그 곁을 지켰어야 했다는 뒤늦은 후회만이 뼈아프게 가슴을 파고들었다.이제 결심을 실행에 옮길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열린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알싸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정갈하게 차려진 해물찌개와 두부전을 가만히 바라보던 차진철이 무겁게 입을 뗐다.“고 여사, 그리고 진아야.”낮게 가라앉은 그의 음성에 고미주의 숟가락이 멈칫했다. 차진철은 수평선 너머 허공에 시선을 둔 채 말을 이었다.“그때 준호에게 준 음식엔 아무 문제 없었다. 그저······ 그놈 몸이 견뎌내질 못한 거야. 내가 쌓아온 업보가 인연을 괄시한 대가로 돌아온 거지. 벌은 내가 받아야 해. 미안하다.”“회
간밤의 새벽, 뼈마디를 파고드는 서늘한 오한과 함께 온몸을 짓누르는 묵직한 몸살 기운이 나를 덮쳤다.지칠 대로 지쳐버린 몸도 문제였지만, 차준호를 둘러싼 가혹한 운명의 무게에 알게 모르게 짓눌려 온 극심한 스트레스가 결국 몸을 부러뜨린 까닭이었다.차준호는 잠결에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심상치 않은 열감을 느끼고는 나를 황급히 병원으로 데려왔다.CC그룹이 소유하고 직접 운영하는 대한종합병원이었기에 환자의 개인정보는 철통같이 보안이 유지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이 나라에서 가장 뜨거운 조명을 받는 인물이 된 탓에, 나는 졸지에 병원 전체의 시선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나는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담당 간호사의 손을 붙잡고 내 임신 사실만큼은 절대 의료진 외에 함구해 달라고 몇 번이고 사정했다. 특히, 차준호에게는 입을 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임신 초기라 함부로 소염제나 약을 삼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병원으로 달려오는 것 외엔 대안이 없기도 했었다.극도의 피로로 탈진한 몸에 차가운 영양주사가 들어가기 시작하자, 가라앉았던 기력이 조금씩 맴돌기 시작했다.간밤 사이에 한층 더 핼쑥해진 내 얼굴을 내려다보는 차준호의 눈빛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신하늘은 건강해야지. 좋은 세상, 오래 보려면.”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는 아련함과 짙은 우려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차준호는 차가운 내 손을 제 손으로 따스하게 감싸 쥐며 제 체온을 어떻게든 밀어 넣으려 애썼다.자신의 속은 잿더미처럼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으면서도, 내가 조금만 아파도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굴며 태산 같은 걱정을 안겨주는 이 남자가 참으로 야속하고도 애달팠다.그때, 정적을 깨고 응급실 커튼이 젖혀지며 뜻밖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
차준호의 주치의인 강진욱 박사의 문자라면 분명 급한 일일 터였다.“뭐야? 이 시각에.”나는 옆에 차준호가 밀착해 있었음에도 망설임 없이 화면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 너머로 얇은 진동음이 거실의 정적을 깨고 울려 퍼졌다.차준호의 미간이 단번에 찌푸려졌다.“강 박사님이어서요.”내 대답에 차준호의 눈빛이 순간 서늘하게 식어버렸다. 어둠 속에서 낮게 가라앉은 그의 음성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또 무슨 수작을 부린 건가.”“전혀요. 수작은 통화 끝나는 거 보고 부려보려고요.”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는 그를 향해 거의 애원하듯 간절한 눈빛을 보낸 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박사님, 늦은 시각에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신하늘 씨, 방금 뇌사자 장기이식센터 응급 콜을 받고 병원에 출근했다가 차 대표 생각이 나서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스피커 너머로 들려온 단어에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뇌사자 장기이식이요?”하긴,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전혀 예상치 못했던 단어에 손끝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강 박사의 차분한 설명이 이어졌다.[오늘 장기 이식팀 의료진들과 비상 회의를 하다 보니, 차 대표처럼 대기 등록조차 거부하는 환자들의 골든타임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오늘 당장 차 대표에게 해드릴 수 있다는 뜻은 아니지만, 제발 대기 명단이라도 올려놓으시길 권유드립니다.]공여받는 절차와 차준호의 건강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 대기 순위는 높게 매겨질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이 한밤중에 주치의가 응급 출근길에 직접 전화를 걸어올 정도로 긴박하고도 진심 어린 제안이었다. 오죽하면 이 새벽에
밤 12시를 훌쩍 넘긴 시각.시끌벅적했던 선거사무실을 뒤로하고 세종동 집으로 돌아와서야, 우리는 비로소 치열했던 금요일을 마감하고 토요일의 고요를 맞이하게 되었다.드디어 선거 직전의 마지막 주말.다른 후보들이 밤을 잊은 채 야시장과 편의점을 전전하며 사력을 다하고 있을 텐데.하지만 나와 차준호가 머무는 밤은 정적에 가까울 만큼 조용했다.나의 체력과 그의 위태로운 몸 상태를 고려해, 현장 유세 대신 SNS로 지지자들과 소통하며 온라인에서의 활동만 나직하게 이어 나갔다.나를 위해 자발적으로 밈을 제작하고 챌린지를 이어가는 이들과 나의 선거 공약을 깊이 있게 분석해 준 인플루언서들의 글을 찾아다니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으로 성의를 다했다.나와 차준호는 거실 한가운데 놓인 오래된 소파에 서로의 몸을 깊숙이 끌어안은 채, 그가 배송받은 다과를 펼치며 소소한 담소를 주고받았다.빛바랜 벽지, 조금은 꺼진 소파 스펀지, 보풀이 듬성듬성 일어난 무릎 담요, 그리고 오래된 텔레비전.명색이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신혼부부의 신접살림이라고 하기엔 최소한의 예의조차 갖추지 못한 고즈넉하고 적막한 공간이었다.“평소엔 텔레비전 따위 보지도 않는데, 신하늘을 만나고부터는 밤낮으로 뉴스만 보게 되는군.”차준호는 특유의 능글맞은 어조로 굴며 텔레비전 채널을 뉴스 화면에 고정하더니, 예쁘게 깎인 과일을 내 입가에 내밀었다. 화면 속 세상은 거실의 정적과 달리 온통 뜨거운 열기로 요동치고 있었다.뉴스 채널마다 온통 ‘신하늘 밈’을 다루느라 여념이 없었고, 실시간 숏폼과 SNS 동영상은 그야말로 폭발적인 속도로 전 세계를 향해 퍼져 나가고 있었다.“저도 마찬가지예요. 평생 볼 뉴스를 올해 다 몰아서 보는 기분이에요.”난
금요일 밤.퇴근 시간이지만 CH-컴퍼니 사무실은 이미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조금 전 저녁 먹으러 나간 김에 세종동 선거 유세를 보고 온 직원들은 삼각김밥과 샌드위치만 사들고 회사로 들어와도 배가 부른 표정이었다.“한 과장님! 봤어요? 한국 정치판이 이렇게 힙할 일인가요?”나정아는 도무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게임 성공 분석 기사를 내기 위해 자료를 받으러 온 한은숙에게 바람처럼 달려갔다.“나 과장, 봤지. 대표님께서 외조하는 모습도 내가 사진 찍었잖아. 내일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날 거야.”이번 3월에 파격적으로 승진을 한 나정아와 한은숙은 그저 회사에 요즘 모였다 하면 신하늘과 차준호 이야기뿐이라 그저 입꼬리가 사정없이 올라가고만 있었다.“두 분 4월 1일 혼인신고도 정말 충격받았잖아요. 이거 하나씩 드세요. 세종동 붕어빵 이것까지 요즘 유명해졌더라고요.”한규련 대리가 오면서 모두에게 붕어빵 하나씩 돌리고 있었다.“하도 유세를 안 하니까 우리 신 과장님이 유세를 한다고 공지를 하면 잡상인들도 미리 판을 벌린다면서요?”나정아는 휴대전화를 띄워 실시간 SNS 핫트렌드 창에서 시선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김강무나 다른 CH-컴퍼니 직원들도 너도나도 릴스 영상을 감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우리 회사가 선거 운동 마케팅 대행사로 업종 변경해야 하는 거 아니야? 주가는 천장을 뚫었어요. 하하!”그때 지나가던 최기범도 훈훈하게 웃으며 붕어빵 봉지를 흔들었다.“이거, 차준호가 나 퇴사했는데도 불러들인 이유가 있었군요. 모두 일을 안 하고 이러고 있으니 말입니다.”“최 실장님, 오신 김에 숏폼 챌린지나 참여하고 가세요. 신 과장님
이아준은 통화 도중,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신하늘과 도국과의 옛 기억 속에 깊게 잠겼다.화려한 마천루가 즐비한 강남의 이면, 세종동 서쪽 끝자락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빈민가가 있었다. 그곳에 위치한 ‘하늘 보육원’은 세 사람의 유년이 뿌리내린 곳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나이도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유일한 세계이자 가족이었다.이아준은 태어나자마자 차가운 보육원 앞마당에 버려진 신세였다. 그러나 운명은 잔인하고도 변덕스러웠다. 뒤늦게 그가 국내 최고 재벌가인 L그룹의 잃어버린 혈통임이 드러났고, 하루아침에
[1월 1일, 재벌가 차준호와 톱여배우 강소희! 둘만의 밀월여행이었나· 강원도에서 추락 사고!][CC그룹 후계자 차준호·한류스타 강소희! 과연 현재 상태는?][사고 직후 불거진 비밀 연애 의혹· 관계자들은 어떤 입장을···][과연 차준호와 강소희 사고에 관한 진실은 무엇인가!]새해의 태양이 채 떠오르기도 전, 대한민국은 단 하나의 소식으로 들끓었다. 차준호는 강소희를 자신의 세단에 태운 채 1월 1일 새벽 강원도 산길을 달리던 중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십여 미터 아래 낭떠러지로 추락했다.단순한 교통사고인지, 범죄와 연관된
‘이 나쁜 자식!’지난 3년간 내게 보인 그 모든 다정함은 한낱 유희였을까? 차준호에 대한 배신감에 속이 문드러져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부서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자존심을 끌어모아,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며 도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대표님은 그동안 절 어찌 보셨는데요?”나는 유리창 너머로 썰물처럼 번지는 화려한 야경을 사납게 응시하며, 심장에 박힐 날 선 말을 뱉어냈다.“네 주변에 남자가 들끓어 보였거든.”뻔질나게 전화를 걸어오는 남사친 둘을 두고 한 오해였을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동안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정적을 깨우는 밤 11시 반 무렵.창밖으로는 하얀 눈꽃이 송이송이 흩날리며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고 있었지만, 강남 C 호텔 25층 로열 스위트룸 내부는 숨 막힐 듯 팽팽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도를 최대한 낮춘 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차준호라는 거대한 포식자에게 온전히 잠식당한 채, 밤을 녹여내는 은밀하고도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다.내 몸의 지도를 그보다 더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었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그의 뜨겁고도 습한 숨결이 예민한 목덜미를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