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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반격

문을 열었을 때, 서윤은 이미 안쪽으로 들어와 있었다.현관 불을 켜지도 못한 채,벽에 등을 붙이고 서 있었다.숨이 가빠 보였고, 코트 단추는 채워지지 않은 상태였다.“문 앞에 있었어요.”서윤이 말했다.“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그냥. 그 단어가 얼마나 많은 상황을 지우는지 이수는 알고 있었다.“지금은,”이수가 낮게 말했다.“여기 있어요.”하빈은 아무 말 없이 현관문을 잠갔다.쇠가 맞물리는 소리가 분명하게 울렸다.그 소리에 서윤의 어깨가 조금 내려앉았다.“전화는?”하빈이 물었다.“받지 않았어요.”서윤이 고개를 저었다.“받으면… 다시 설명해야 할 것 같아서.”설명. 설명은 늘 폭력의 예고였다.이수는 서윤을 안쪽 방으로 안내했다.소파에 앉히고 물을 내왔다.손이 떨리는 걸 서윤 스스로도 느끼는지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그때였다.현관 쪽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노크도, 초인종도 아니었다.문 손잡이를 한 번 눌러본 소리. 하빈이 바로 일어섰다.이수도 느꼈다. 이건 확인이었다.안에 있는지, 없는지.두 번째로 손잡이가 움직였다.이번엔 더 확실했다.“그 사람이야.”하빈이 낮게 말했다.서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열지 마요.”그녀가 속삭였다.“지금은… 아니에요.”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열 생각이 없었다.문을 여는 순간, 설계는 무너진다.그러나 태성은 문이 열릴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문 너머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서윤아.”이름을 부르는 방식이 너무 정확했다.화가 난 사람의 소리가 아니었다.통제에 실패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쓰는 톤이었다.“문 열어.”“잠깐이면 돼.”잠깐. 늘 그 말로 시작했다.이수는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하빈이 눈으로 말렸다.그러나 이수는 멈추지 않았다.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른 뒤 문을 열지 않은 채 말했다.“지금은 안 됩니다.”태성의 목소리가 잠깐 멈췄다.“…누구세요?”그 질문에는 이미 답이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안에 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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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균형

밤은 길게 늘어졌고, 집 안의 공기는 잠들 줄을 몰랐다.불은 하나만 켜져 있었고, 그 아래에서 이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물병을 몇 번이나 옮겼다 놓았다.움직임은 필요 없었지만, 정지하는 건 더 불안했다.윤서윤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문 너머로 들려오는 숨소리만으로 그녀가 잠들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잠들지 못하는 밤은 기억을 깨운다.깨워진 기억은 다시 사람을 붙잡는다.하빈은 창가에 서 있었다.커튼 사이로 바깥을 살피는 자세가 자연스러웠다.이수는 그 모습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너무 익숙했기 때문이다.“이제,”이수가 말했다.“내가 뭘 해야 할지 알아.”하빈은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알아서 문제야.”그 말에는 걱정이 섞여 있었다.걱정은 상대를 말리기보다 더 단단하게 만든다.“균형을 맞출 거야.”이수가 말을 이었다.“태성이 움직이면, 나도 움직여야 해.”하빈이 고개를 돌렸다.눈빛이 낮아졌다.“균형이라는 말,”그가 말했다.“네가 쓸 때마다 항상 다쳐.”이수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부정하면 자기 자신까지 속이게 될까봐.“그래도,”이수가 말했다.“지금은 그 균형이 필요해.”이수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사진이 있는 폴더를 열고,그 아래에 새 폴더를 하나 더 만들었다.라벨을 달지 않았다.라벨은 사람을 안심시킨다.“뭘 할 생각이야.”하빈이 물었다.“태성 그 사람,”이수는 천천히 말했다.“이걸 숨기려 할수록 밖으로 끌어내렿 할거야.”“어떻게.”“사람을 써서.”“그 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방식으로.”하빈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회사 쪽?”“아니.”“사람.”“그 사람들.”태성은 체면으로 버티는 인간이었다.체면은 가장 많은 눈이 있을 때 가장 쉽게 찢어진다.이수는 하빈을 보며 덧붙였다.“내가 나서지 않아도,”“사람들이 먼저 말하게 만들 거야.”하빈은 그 말의 끝을 이미 이해했다.“그럼,”“네 이름도 같이 오르내릴 거야.”“알아.”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알면서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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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균열의 밤

밖으로 나온 뒤에도 이수는 바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건물 유리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잠시 바라봤다.빛이 많을수록 얼굴은 또렷해지지 않고 오히려 분해됐다.이 얼굴로 얼디까지 갈 수 있을지, 그 질문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차에 올라타자 문을 닫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이수는 시동을 걸지 않은 채 핸들 위에 손을 얹었다.손바닥에 남은 긴장이 아직 빠지지 않았다.태성과 마주 앉아 있던 시간은 짧았지만, 몸은 오래 머물렀다.휴대폰이 다시 울렸다.하빈이었다.“어디야.”“차 안.”이수는 사실만 말했다.사실만 말하는 게 지금은 가장 안전했다.“움직이지 마.”하빈의 목소리가 낮았다.“태성, 지금 분위기 안 좋아.”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보이지 않아도 그는 느낄 것이다.“이미,”이수가 말했다.“안 좋았어.”하빈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집으로 바로 오지 말고, 우회해서 와.”“미용실 쪽도 피하고.”이수는 그 말의 무게를 알았다.장미 미용실은 이제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다.누군가에게는 이미 표적이 되어 있었다.차를 움직이는 동안 이수는 라디오를 켜지 않았다.소음은 생각을 흐린다.지금은 모든 생각이 선명해야 했다.신호등 앞에 멈췄을 때, 옆 차선에서 검은 세단이 같은 속도로 섰다.이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확인하는 순간, 불안은 확신이 된다.초록불이 켜지고 차들이 움직였다.검은 세단은 곧 다른 방향으로 빠졌다.이수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짧고, 얕은 숨이었다.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 하빈은 이미 와 있었다.차에서 내리자 그가 바로 다가왔다.말 없이 이수의 손목을 잡았다.잡는 힘이 세지 않았다.확인에 가까운 접촉이었다.“괜찮아?”이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아직은.”아직이라는 말이 둘 사이에 남았다.집 안으로 들어오자 서윤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무릎을 끌어안고, TV는 꺼진 상태였다.화면 없는 화면을 보고 있는 얼굴이었다.“어땠어요?”서윤의 질문은 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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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균열의 방향

빛이 방 안으로 들어온 뒤에도 아침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시간은 흐르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여전히 밤에 머물러 있었다.이수는 그 정체를 의도적으로 받아들였다.지금은 서두를수록 방향을 잃는 시간이었다.서윤은 테이블 끝에 앉아 있었다.두 손을 모아 쥔 채, 손가락을 풀지 않았다.풀면 무너질 것 같아서였다.“회사에서,”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남편 얘기가 한 번 더 나왔어요.”한 번 더. 그 말은 이미 여러 번 있었다는 뜻이었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있다는 표시만 남겼다.“이번엔,”윤서윤이 말을 이었다.“제가 먼저 설명하래요.”설명. 태성이 가장 즐겨 쓰는 무기였다.상황을 설명하게 만들면, 사람은 스스로를 변명하게 된다.“하지 마요.”이수의 목소리는 낮았다.“설명은 상대의 프레임으로 들어가는 거예요.”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그 말이 이해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잘 이해돼서였다.하빈은 노트북을 열어 화면을 이수 쪽으로 돌렸다.메일 캡처, 사내 메신저 로그, 익명 게시판 글.“태성이,”하빈이 말했다.“이제는 방어가 아니라 공격으로 바꿨어.”공격. 그 단어는 한계를 넘었다는 뜻이었다.“나를,”이수가 말했다.“의도적으로 끌어들이고 있어.”“맞아.”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중심이 되면, 서윤 씨는 ‘영향받은 사람’이 돼.”영향. 책임을 전가하는 가장 부드러운 표현.이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테이블 위에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잠금 화면에는 태성의 이름이 떠 있었다.차단하지 않은 선택이 이제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이제,”이수가 말했다.“균열의 방향을 바꿔야 해.”하빈이 눈을 들었다.“어디로.”“태성 그 사람에게로.”이수는 망설이지 않았다.“사람들이 나를 보게 두지 말고, 그 사람을 보게 해야 해.”하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설계였다.다시, 이수의 영역이었다.“그럼,”하빈이 말했다.“공개적인 장면이 필요해.”공개. 사람들이 보고 공감할 수 있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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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역류

집 안은 조용했다.조용하다는 건, 아무 일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아직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의미에 더 가까웠다.서윤은 소파 끝에 앉아 있었다.쿠션을 끌어안고 있었지만 몸은 기대지 않았다.언제든 일어날 수 있도록,언제든 도망칠 수 있도록.이수는 창가에 서 있었다.커튼을 완전히 열지 않았다.밖을 보기엔 아직 이르다고 판단했다.보이는 순간, 사람은 대비를 멈춘다.하빈은 주방 쪽에 서서 전화를 붙잡고 있었다.통화는 길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낮아져 있었다.“네.”“지금은 곤란합니다.”“그 부분은 제가 답할 사안이 아닙니다.”전화를 끊은 하빈은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정리할 말이 많은 사람의 자세였다.“회사 쪽이야.”그가 말했다.이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이미 짐작하고 있었다.“태성이 직접은 아니고.”“법무팀에서.”법무팀. 태성다운 선택이었다.자기 손은 더럽히지 않되, 상대는 불편하게 만드는 방식.“뭐래.”이수가 물었다.“윤서윤 씨가 외부 인물에게 영향을 받고 있다는 식이야.”“그 외부 인물이… 너고.”서윤의 손이 쿠션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이수는 그 반응을 말없이 받아들였다.“예상보다 빨라.”이수가 말했다.“균열을 느꼈다는 거지.”하빈이 답했다.“그래서 흐름을 되돌리려고 하는 거고.”역류. 태성은 이미 자기가 밀리고 있다는 걸인정한 셈이었다.“회사에서는,”하빈이 말을 이었다.“윤서윤 씨에게 정리할 시간을 주겠대.”정리. 폭력 이후에 늘 등장하는 단어.“정리하면,”이수가 낮게 말했다.“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이 되는 거죠.”하빈은 대답하지 않았다.대답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 말이 정확해서였다.서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그럼… 제가 잘못한 게 되는 건가요.”이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위로하지 않았다.위로는 판단을 흐린다.“아니요.”“당신은 문제가 생긴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가리기 좋은 사람이에요.”서윤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그러나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다.이미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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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무대

행사장은 익숙한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사람들이 웃고, 인사를 나누고, 자기 이름이 불리는 순간에만 조금 더 크게 고개를 들었다.태성에게 이런 자리는 늘 비슷했다.통제할 수 있고, 예측 가능한 공간.자신이 중심에 서 있다는 사실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장소.그래서 처음엔 그 여자를 보았을 때도 즉각 반응하지 않았다.서이수.미용실에서 몇 번 마주쳤던 여자.서윤의 곁에 조용히 서 있던 얼굴.말수가 적고, 눈을 오래 마주치지 않던 사람.자기 집 안에서, 자기 이름이 나오지 않아야 할 순간마다이상하게 끼어 있던 존재.그 여자가 이 자리에 있었다.태성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멈추는 건 인정이기 때문이다.대신 시선만 아주 짧게, 그러나 정확하게 주었다.초대받은 사람처럼 서 있었다.어색하지 않았고, 과하게 튀지도 않았다.이 자리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얼굴. 그 점이 가장 불쾌했다.‘여기까지 들어왔다고?’그는 속으로 생각했지만, 표정은 흐트러지지 않았다.주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동선을 옮겼다.그러나 시야 한편에는 계속해서 이수가 걸려 있었다.이수는 태성을 보지 않았다.그게 태성을 더 자극했다.자기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피하지 않는 태도.피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계산이 끝났다는 뜻이다.“상무님.”누군가 태성을 불렀고, 그는 반사적으로 웃었다.웃음은 자동이었다.그러나 그 웃음 뒤에서 머리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미용실.윤서윤. 그리고 이 자리.연결되지 말아야 할 선들이 하나의 장면 안에 모여 있었다.태성은 결국 방향을 틀었다.사람들 사이를 가르며 이수 쪽으로 다가갔다.주변에서 누군가가 그의 움직임을 의식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이런 데서 뵙네요.”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공식적인 미소가 걸려 있었다.그러나 그 말에는 명확한 뜻이 숨어 있었다.-왜 여기 있지.이수는 잠시 늦게 고개를 들었다.놀라지 않았다.기다렸다는 표정도 아니었다.그저, 이 순간이 올 걸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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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확인

태성은 아침이 왔다는 걸 창밖의 밝기로 먼저 느꼈다.잠들지 못한 밤이었지만 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대신, 머릿속이 이상하리만큼 또렷했다.그는 샤워를 하지 않았다.옷만 갈아입고 그대로 사무실을 나섰다.이런 날은 몸을 정리하는 것보다 상황을 먼저 정리해야 한다.회사에 도착했을 때 경비실에서 연락이 와 있었다.그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통화를 받았다.“말씀하신 건,”상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확실히 특이하긴 합니다.”“어느 쪽이.”“서이수 쪽이요.”태성은 대답하지 않았다.침묵은 보고를 재촉하는 방식이기도 했다.“미용실에서 일하는 건 맞습니다.”“공식적으로는요.”“그런데”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태성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통화를 이어갔다.“그런데요.”“영업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단골도 많지 않고, 홍보도 없고, 예약도 거의 없는 편인데 이상하게 고정적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태성의 발걸음이 아주 잠깐 늦춰졌다.“어떤 사람들인데.”“대부분 여성이고,”“연령대는 제각각인데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뭡니까.”“전부 이혼을 했거나, 이혼 소송 중이거나, 막 정리된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태성은 사무실 문을 열며 통화를 끊지 않았다.문이 닫히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확실해?”“명확하다고 하긴 어렵습니다.”상대는 단서를 붙였다.“증거라고 부르기엔 너무 깨끗합니다.”깨끗하다. 그 말이 태성의 신경을 건드렸다.“깨끗하다는 건,”그가 말했다.“지워졌다는 뜻이지.”상대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그럴 수도 있습니다”라고 답했다.통화를 끊은 뒤 태성은 의자에 앉지 않았다.대신 창가로 걸어가 도시를 내려다보았다.서이수.그 여자는 자기를 속이려 들지 않았다.그게 가장 위험했다.대놓고 숨기지 않는 사람은 대개 이미 다른 층위에서 움직이고 있다.그는 서윤을 떠올렸다.아내는 요즘 지나치게 조용했다.말이 줄었고, 표정이 얌전해졌고, 불만도, 요구도 없었다.예전 같았으면 이미 한두 번은 언성을 높였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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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보호

태성은 서윤에게 전화를 걸기 전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전화를 거는 일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문제는 어떤 말로 시작하느냐였다.사람은 첫 문장으로 자기 의도를 숨긴다.“오늘은,”그가 말했다.“차로 데려다줄게.”서윤은 잠시 말이 없었다.그 짧은 침묵이 태성의 신경을 건드렸다.“괜찮아요.”그녀가 말했다.“혼자 갈 수 있어요.”혼자.그 단어가 태성의 머릿속에서 한 번 더 울렸다.“요즘,”그는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밖이 좀 복잡하잖아.”“괜히 걱정돼서 그래.”걱정. 보호. 늘 이 두 단어는 통제의 앞에 붙는다.“미용실,”태성이 말을 이었다.“거기 말이야.”“사람들 많이 드나들더라.”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이번엔 조금 길었다.“서윤.”그가 이름을 불렀다.“그냥,”서윤이 말했다.“동네 미용실이에요.”“그래도,”태성은 웃음을 섞었다.“이상한 사람도 있잖아.”“너한테 괜히 접근한다거나.”그 말은 자연스럽게 서이수를 향해 있었다.그러나 이름은 꺼내지 않았다.이름을 말하는 순간, 의심이 확정되니까.“그 사람,”서윤이 조용히 말했다.“이상하지 않아요.”그 한 문장이 태성의 속을 뒤집었다.“네가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 정확했으면,”그는 낮게 말했다.“우리가 이렇게까지 오진 않았겠지.”말을 하고 나서 태성은 자기가 선을 넘었다는 걸 알았다.그러나 이미 늦었다.서윤은 전화를 끊지 않았다.대신 아주 차분하게 말했다.“그래서,”“이제는 제 눈으로 보려고요.”통화가 끝났을 때 태성의 손은 휴대폰을 너무 세게 쥐고 있었다.이수는 장미 미용실 문을 닫아놓고 윤서윤과 마주 앉아 있었다.오늘은 머리를 하지 않는 날이었다.이 공간은 말을 하기 위한 곳이었다.“이제,”이수가 말했다.“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어요.”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의 표정에는 이미 예상했다는 기색이 있었다.“차로 데려다주겠대요.”“누굴 만나는지도 묻고.”“미용실 얘기도 했어요.”“이건,”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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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되돌릴 수 없는 경계

바의 조명은 낮았고, 잔 위에 맺힌 물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태성은 그 물방울을 보며 자기가 왜 이 자리에 앉아 있는지 다시 떠올리려 했다.혼자 마시겠다고 결정한 건 우연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목적이 분명한 것도 아니었다.그는 그저,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같은 거 드세요?”옆자리에서 여자가 말을 걸었을 때, 태성은 바로 고개를 들지 않았다.목소리가 먼저 귀에 닿았고, 그 다음에야 사람의 형상이 따라왔다.차분한 톤. 과하지 않은 거리.술집에서 말을 거는 사람 치고는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네.”그가 짧게 대답했지만, 거절은 아니었다.거절할 생각이었다면 아예 고개를 돌렸을 것이다.여자는 바텐더에게 주문을 하고 그제야 태성을 바라보았다.시선은 오래 머물지 않았고, 웃음도 필요 이상으로 길지 않았다.“이런 데 자주 오세요?”“아니요.”“그럼 오늘은,”여자가 말했다.“좀 특별한 날인가 보네요.”특별하다는 말이 태성의 마음을 자극했다.사람은 자기 하루가 특별하다고 불러질 때 이상하게 안심한다.“그냥,”그는 잔을 기울이며 말했다.“조용히 있고 싶어서요.”“그럴 때 있죠.”여자는 더 묻지 않았다.묻지 않는 태도는 대개 상대를 편하게 만든다.태성은 그 편안함이 의외라는 사실을 느꼈다.잠시 침묵이 흘렀고, 그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잔 부딪히는 소리와 낮은 음악이 대화를 대신하고 있었다.“전,”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사람들이 많은 데가 싫어요.”태성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이상하게도 설명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 그 한 문장에 들어 있었다.“왜요.”“다들,”여자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자기 얘기만 하잖아요.”“듣는 척하면서.”태성은 잠깐 웃었다.짧았지만 진심이 섞여 있었다.“맞아요.”“듣는다는 건,”“생각보다 힘들죠.”여자는 그 말을 곱씹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그녀가 말했다.“이런 데가 좋아요.”“누가 뭘 숨기고 있는지 굳이 알 필요가 없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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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선택

태성은 전날 밤의 장면을 아침이 되어서야 다시 떠올렸다.바의 조명이 낮았고, 음악은 기억나지 않았으며, 여자의 얼굴도 정확히 재현되지는 않았다.그럼에도 분명하게 남아 있는 감각이 하나 있었다.편했다는 것.설명하지 않아도 되었고, 지키지 않아도 되었고, 무언가를 증명할 필요도 없었다.그 감각이 오히려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태성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연락처는 저장하지 않았고, 번호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건 의도였다.의도하지 않은 관계는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그러나 통제하지 못하는 감각이 자꾸만 떠올랐다.“오늘,”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괜히 신경 쓰이네.”그날 오후, 서윤은 평소보다 일찍 미용실에 들렀다.예약도 없었고, 머리를 할 계획도 없었다.그저 그 공간에 들어가고 싶었다.“오늘은,”이수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얼굴이 좀 다르네요.”“그런가요.”“생각이 많아 보일 때 이마에 먼저 티가 나요.”이수는 가위를 들지 않은 채 서윤의 앞에 앉았다.이 자리는 머리를 자르는 자리라기보다는 결정을 확인하는 자리였다.“어제,”윤서윤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그 사람이 집에 늦게 들어왔어요.”이수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반응을 보이지 않는 건 상대가 더 말하게 만드는 방식이다.“이유를 묻지 않았어요.”“묻는 순간,”“제가 이상해질 것 같아서.”이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잘했어요.”“지금은 묻지 않는 게 맞아요.”“그럼,”윤서윤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이제 어떻게 하죠.”이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서랍에서 작은 봉투 하나를 꺼냈다.아무 표시도 없는 평범한 봉투였다.“이건,”그녀가 말했다.“아직 열지 마세요.”“뭔데요.”“선택지예요.”“그 사람이 어느 쪽을 고를지에 따라 필요해질 수도 있고, 필요 없을 수도 있어요.” 서윤은 봉투를 받았지만 열지 않았다.그 행동이 이수에게는 충분한 신호였다.“오늘부터,”이수가 말을 이었다.“동선을 조금만 바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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