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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불륜해드립니다.: Chapter 51 - Chapter 60

116 Chapters

51. 빈도

연락은 아주 사소한 이유로 시작됐다.태성은 회의가 끝난 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가 무심코 메시지 창을 열었다.어제 밤 저장한 이름이 생각보다 위에 있었다.민지.그 이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확인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오늘도 오시나요?보내고 나서 태성은 잠시 화면을 내려다보았다.너무 빠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치듯 지나갔지만, 그 생각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빠르다는 건 대개 핑계다.잠시 후 답장이 왔다.-오늘은 조금 늦을 것 같아요.-그래도 괜찮으면요.괜찮다는 말이 그를 안심시켰다.상대가 속도를 정하는 것처럼 보이면자기 선택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그럼 천천히 와요.그는 그렇게 답장을 보냈다.‘기다린다’는 표현 대신 ‘천천히’라는 말을 고른 건 의식적인 선택이었다.그날 이후 연락은 끊기지 않았다.아침에 한 번, 점심이 지나 한 번,퇴근 무렵에 또 한 번. 내용은 대단하지 않았다.날씨, 일정, 별 의미 없는 사진 한 장.그러나 의미 없는 대화가 사람을 가장 깊게 묶는다.서윤은 그 변화를 말보다 먼저 몸으로 느꼈다.태성의 귀가 시간은 불규칙해졌고, 집에 있어도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화장실에 갈 때도, 샤워를 할 때도 화면을 엎어두는 습관이 생겼다.그 습관은 너무 익숙했다.이전에 이미 몇 번이나 보았던 방식이었다.서윤은 미용실 거울 앞에 앉아 자기 얼굴을 바라보았다.눈 밑이 조금 어두워져 있었고, 입술은 평소보다 말라 보였다.“요즘,”이수가 조용히 말했다.“집에 있는 시간이 더 불편해졌죠.”서윤은 부정하지 않았다.부정할 이유가 없었다.“말을 안 해요.”그녀가 말했다.“묻지 않으면 아무 말도 안 하고.”“묻는 순간,”“제가 예민해지는 것 같아서.”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이건 너무 전형적인 단계였다.“연락은,”그녀가 물었다.“늘고 있어요.”서윤의 손이 무릎 위에서 천천히 움직였다.“확실해요?”“네.”이수는 짧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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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각인의 문장

연락은 이제 질문이 아니라 습관이 되어 있었다.태성은 회의 중에도 휴대폰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화면이 켜질 때마다 시선이 먼저 반응했고, 그 반응을 숨기는 데 이전보다 시간이 걸렸다.민지는 그 변화를 재촉하지 않았다.오히려 조금 늦게 답했고, 먼저 묻지 않았으며, 필요한 말만 남겼다.그 태도가 태성을 더 깊이 끌어당겼다.-오늘은 조금 바빴어요.-그래도 생각났어요.생각났다는 말은 책임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존재를 각인시키는 단어였다.태성은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나도.그는 그렇게 답장을 보냈다.불필요하게 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이제 숨기지 않는 감정이 들어 있었다.그날 저녁,서윤은 집에 혼자 있었다.저녁을 차려두었지만 태성은 돌아오지 않았다. 연락도 없었다.이전 같았으면 불안해했을 시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은 달랐다.불안 대신 차분함이 먼저 왔다.서윤은 식탁에 앉아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이수에게서 온 메시지가 아직 남아 있었다.-지금은 보지 않는 게 더 정확해요.그 말의 의미를 서윤은 이제 이해하고 있었다.보고 싶을 때가 아니라, 보면 끝이 날 순간에 확인해야 한다는 뜻이라는 걸.태성은 그날도 바에 갔다.이제는 굳이 같은 자리여야 할 필요도 없었고, 같은 시간일 필요도 없었다.중요한 건 민지가 있다는 사실뿐이었다.“오늘은,”민지가 말했다.“조금 늦으셨네요.”“집에,”태성은 말을 고르다 결국 솔직하게 말했다. ‘“가기 싫었어요.”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태성은 자기 자신에게도 조금 놀랐다.민지는 그를 바라보며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침묵은 동정도, 놀람도 아니었다.그저 받아들이는 침묵이었다.“그럴 때,”민지가 말했다.“여기 오면 되잖아요.”태성은 그 말에 가슴 한쪽이 이상하게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이 공간이 도피처가 되는 순간이었다.“민지,”그가 말했다.“넌… 나한테 뭘 바래요?”질문은 갑작스러웠지만, 이미 오래 품고 있던 것이었다.민지는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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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침투

태성은 아침 일정표를 보다가 잠시 시선을 멈췄다.회의, 미팅, 보고. 빈틈없이 정리된 하루였다.그 틈 사이에 늘 같은 이름들이 반복되고 있었다.익숙하고, 안전한 이름들.그런데 그날은 그 이름들 사이가 유난히 비어 보였다.‘저녁.’태성은 그 단어 위에 펜 끝을 얹었다가 천천히 내려놓았다.저녁은 늘 집으로 이어져야 했고, 그래서 가장 통제하기 쉬운 시간이었다.그러나 요즘은 그 시간대가 자꾸만 다른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민지.이름을 떠올리는 데 이제 망설임은 없었다.오히려 떠올리지 않으려 할 때 더 선명해졌다.태성은 결국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오늘 저녁, 시간 괜찮아요?보내는 손끝에 아주 미세한 망설임이 섞였지만,이미 되돌릴 단계는 아니었다.잠시 후 답장이 왔다.-회의 끝나면 가능해요.-대신… 조금 늦을 수도 있어요.태성은 그 문장을 읽으며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일정이 밀린다는 말이 불편하지 않았다.오히려 자기 일상 안으로 민지가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기다릴게요.그는 그렇게 답장을 보냈다.‘기다린다’는 말을 이제는 숨기지 않았다.서윤은 그날 저녁,식탁에 앉아 태성의 귀가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계산은 기대가 아니라 확인이었다.시계는 이미 평소보다 한참을 넘기고 있었고,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서윤은 이제 그 침묵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그녀는 천천히 외투를 입었다.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도, 도망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그저 확인해야 할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바는 이제 태성에게 낯설지 않은 공간이었다.문을 열고 들어설 때 주저함이 없었고, 민지를 찾는 시선도 자연스러웠다.민지는 조금 늦게 도착했다.회사에서 바로 온 듯 재킷을 벗으며 자리에 앉았다.“미안해요.”그녀가 말했다.“회의가 길어져서.”“괜찮아요.”태성은 정말로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예전 같았으면 시간이 밀리는 것 자체가 짜증이 났을 텐데,지금은 기다렸다는 사실이 오히려 만족스러웠다.“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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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버티는 시간

태성은 이제 바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다.기억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그에게 중요한 건 장소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사람,아니, 사람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였다.민지는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같은 시간대, 같은 표정. 그 반복이 태성을 안심시켰다.변하지 않는다는 건 통제할 수 있다는 뜻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오늘은,”그가 재킷을 벗으며 말했다.“좀 늦었어요.”“알아요.”민지는 웃으며 답했다.“그럴 줄 알았어요.”‘그럴 줄 알았다’는 말은 기다렸다는 뜻이 아니라, 예상했다는 뜻이었다.태성은 그 말이 좋았다.자기 삶이 누군가의 예측 안에 있다는 감각은 이상하게 편안했다.“여긴,”그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이제 꽤 익숙해졌네요.”“그럼,”민지가 잔을 밀어주며 말했다.“여기가 편해졌다는 거네요.”태성은 그 말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편하다는 말은 너무 많은 걸 인정해야 하는 단어였다.대신 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 마셨다.“여기 오면,”그가 천천히 말했다.“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느낌이 들어요.”그 말은 민지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그 공간 전체를 향한 말이었다.민지는 그걸 알아차렸고, 그래서 더 말을 아꼈다.“집에서는,”태성이 말을 이었다.“늘 뭔가를 설명해야 하거든요.”“설명,”민지가 조용히 되물었다.“왜 늦었는지,”“왜 피곤한지,”“왜 말이 없는지.”그는 한숨처럼 말을 흘렸다.그 말들은 불만이 아니라 변명이었다.“여기선,”그가 덧붙였다.“그럴 필요가 없잖아요.”민지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대신 고개를 끄덕였다.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을 유지하는 게 자기 역할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태도였다.그날 밤, 서윤은 집에 혼자 있었다.불은 켜지 않았고, 소파에 앉은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시계는 이미 밤 열 시를 넘기고 있었지만, 귀가 알림은 오지 않았다.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서윤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전화도, 메시지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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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반복

태성은 그날도 같은 길로 걸어왔다.발걸음이 망설임 없이 골목을 꺾었고, 간판의 불빛을 확인하는 눈은 이미 익숙한 순서로 움직였다.어디를 지나쳤는지, 어떤 소리를 들었는지까지 기억하지는 못했지만문 앞에 섰을 때의 감각만은 또렷했다.여기는 늘 같은 온도로 그를 받아들였다.문을 열자, 민지는 고개를 들었다.놀라지 않는 표정이었다.놀라지 않는다는 건 준비하고 있었다는 뜻도, 기다렸다는 뜻도 아니었다.그저 오늘도 올 거라는 가벼운 확신. 그 확신이 태성을 편하게 했다.“오늘도.”그가 말했고, 그 말은 인사가 아니라 확인에 가까웠다.“네.”민지는 잔을 꺼내며 짧게 답했다.말이 길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좋았다.이곳에서는 이유를 묻지 않아도 되었고,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았다.설명하지 않는 삶이 얼마나 달콤한지, 태성은 이 공간에서 배웠다.그는 늘 같은 자리에 앉았다.벽과 조금 떨어진 자리, 출입문이 보이되 시선이 직접 닿지 않는 위치.누군가를 피하려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스스로를 숨기기에는 충분했다.숨기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조차 태성은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잔이 앞에 놓였다.민지는 그가 마시기 시작할 때까지 기다렸다.기다림에는 계산이 없었고, 그래서 더 오래 갔다.“오늘은 집에 안 가요?”그녀가 묻지 않은 질문이 공기 중에 떠 있었다.태성은 그 질문이 좋았다.질문이 없다는 사실이 이미 대답이 되어주고 있었으니까.“조금 있다가.”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조금’의 기준은 이미 흐려진 지 오래였다.시간은 이곳에 들어오는 순간 자기 속도를 잃었고, 태성은 그 느려짐에 기댔다.잔을 비울 때마다 같은 음악이 반복됐고, 같은 웃음소리가 들렸고, 같은 냄새가 공기에 남았다.그 반복은 그의 하루를 정리해주는 의식처럼 느껴졌다.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이곳에 머무르는 것이 하루를 마무리하는 방식이 되어가고 있었다.장미 미용실에서는 그날의 마지막 손님이 나가고 불이 하나씩 꺼지고 있었다.이수는 계산대 앞에 앉아 노트를 펼쳐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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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습관

태성은 그날도 같은 시간에 움직였다.회사의 불이 꺼지는 시각과 거의 겹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하루를 끝냈다는 안도보다,이제 어디로 갈지 이미 정해져 있다는 확신이 더 가까웠다.주차장을 빠져나와 차에 오르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어제와 비슷한 리듬으로 이어졌다.태성은 채널을 바꾸지 않았다.바꾸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늘어날수록 사람은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착각에 기대게 된다.그는 내비게이션을 켜지 않았다.경로를 입력하는 행위 자체가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대신 몸이 먼저 움직였다.익숙한 신호에서 속도를 줄이고, 익숙한 골목 앞에서 방향을 틀었다.머리는 판단하지 않았고, 몸만이 길을 기억하고 있었다.장미 미용실의 문은 닫혀 있었지만, 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이수는 창가 쪽 의자에 앉아 태블릿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지도 위에는 점들이 찍혀 있었고, 점과 점을 잇는 선은 점점 단순해지고 있었다.“여기서 여기.”하빈이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그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방향은 어제와 거의 같았다.“출근, 회사, 바.”“그리고 끝.”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끝’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무거웠다.끝난 하루의 끝이 아니라, 되돌아가지 않는 선택의 끝처럼 들렸기 때문이다.“집이 빠졌네.”하빈이 말했다.“의도적이야.”이수는 펜을 들어 동선 아래에 작은 표시를 남겼다.집이 빠진 자리는 빈칸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가장 또렷한 증거였다.“이제는 ‘왜’가 아니라 ‘얼마나’의 문제야.”“얼마나 자주.”“얼마나 오래.”이수의 말은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확신이 들어 있었다.이건 유혹의 단계가 아니었다.이미 유혹은 끝났고, 남은 건 습관의 증명뿐이었다.서윤은 노트를 덮었다.날짜가 세 줄 연속으로 이어져 있었고, 시간은 점점 늦어지고 있었다.같은 이유, 같은 문장, 같은 필체.처음에는 손이 떨렸고, 두 번째에는 숨이 막혔지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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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부재

서윤은 그날 저녁, 식탁 위에 놓인 접시를 그대로 두었다.차려진 건 아니었고, 치울 것도 없었지만그 자리에 접시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오늘이 하루였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사람이 없는 집은 이상하게 물건의 존재를 또렷하게 만든다.시계는 아홉 시를 넘기고 있었고, 윤서윤은 그 시간을 정확히 보지 않았다.보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이제는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어진 상태였다.확인하지 않아도 어느 쪽으로 흐르고 있는지 이미 몸이 알고 있었다.휴대폰을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버릇처럼 반복되는 동작이었지만, 그 끝은 늘 같았다.누르지 않는 선택. 그 선택이 점점 쉬워지는 게 오히려 두려웠다.노트를 펼쳤다.날짜를 적고, 시간을 적었다.이유는 쓰지 않았다.이유는 늘 비슷했고, 비슷한 이유는 기록으로서의 힘을 잃는다.대신 빈칸을 남겼다.빈칸은 언젠가 가장 분명한 문장이 될 거라는 걸 윤서윤은 이제 알고 있었다.태성은 바 안에서 자기 이름을 한 번도 듣지 않았다.민지는 늘 그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고, 그 점이 태성을 더 안심시켰다.이름을 부르지 않는 관계는 정체를 요구하지 않는 관계처럼 느껴졌다.그는 잔을 내려놓으며 주변을 둘러봤다.낯선 얼굴들이 있었지만, 그 얼굴들 역시 서로에게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았다.이 공간에서는 누구도 누군가의 삶을 묻지 않았다.“오늘은.”태성이 말을 꺼냈다가 멈췄다.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말을 멈춘 채 잔을 들어 올렸고, 민지는 그 멈춤을 굳이 채우지 않았다.“괜찮으세요?”그녀의 질문은 상태를 묻는 게 아니라 대화를 이어가기 위한 장치처럼 들렸다.태성은 그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알아차릴 필요도 없다고 느꼈다.“괜찮죠.”그가 웃으며 말했다.그 웃음은 집에서 짓는 웃음과 달랐다.설명도, 방어도 없는 웃음. 그게 이 공간을 자꾸 찾게 만드는 이유였다.장미 미용실에서는 이수가 파일을 하나 더 추가하고 있었다.날짜 옆에 ‘부재’라는 단어를 적었다가 다시 지웠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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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사실의 설득

서윤은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노트를 펼쳤다.습관이 된 행동이었고, 그 습관이 생겼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날짜를 적고, 전날의 시간을 떠올렸다.떠올리는 데는 이제 오래 걸리지 않았다.23:48 귀가 없음.그 문장은 감정이 빠진 상태로 적혔고, 그래서 더 단단해 보였다.분노도, 서운함도, 기대도 없이 그저 사실만 남겨진 문장.윤서윤은 그 줄을 한참 바라보다가 노트를 덮었다.그녀는 그 문장이 누군가를 고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자기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문장이라는 걸 점점 더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이건 배신을 입증하는 일이 아니라,자기가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인정하는 과정이었다.태성은 그날도 같은 시간에 바에 들어왔다.문을 여는 동작조차 이제는 생각이 필요 없을 만큼 익숙했다.민지는 고개를 들었고, 아무 일도 없다는 얼굴로 잔을 준비했다.“오늘은 조금 늦으셨네요.”그 말은 지적이 아니었다.시계를 보고 말한 것도 아니었다.그저 흐름을 확인하는 문장이었다.“그랬나요.”태성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늦었다는 말이 이미 그의 삶에서 의미를 잃은 상태였다.무엇에 비해 늦은지, 누구에게 늦은지 그는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잔이 채워지고, 의자가 몸에 맞게 밀렸다.그가 늘 앉는 자리였다.늘 같은 자리는 늘 같은 사람이 있다는 뜻처럼 느껴졌고, 그 안정감이 태성을 더 깊게 묶었다.“여긴.”그가 말하다가 멈췄다.‘집 같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직전이었다.그 말이 어떤 선을 넘는지 그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민지는 그 멈춤을 그대로 두었다.그녀는 말을 이어주지 않았다.이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태성에게는 허락처럼 느껴졌다.이곳에서는 말을 끝내지 않아도 괜찮았다.미용실에서는 이수와 하빈이 나란히 앉아 정리된 자료를 보고 있었다.사진은 없었다.녹음도, 메시지도 없었다.그러나 그 빈자리가 이번 에피소드의 핵심이었다.“증거가 없다고 생각하겠지.”하빈이 말했다.“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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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제출

아침 공기는 생각보다 차가웠다.서윤은 외투를 입은 채 현관 앞에 서 있었다.신발을 신지도, 벗지도 않은 애매한 자세로 집 안은 조용했고, 그 조용함이 이제는 낯설지 않았다.낯설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테이블 위에는 노트가 놓여 있었다.구겨진 페이지도, 찢어진 흔적도 없었다.그 노트는 늘 그 자리에 있었고, 그녀는 늘 같은 방식으로 그것을 덮었다.오늘은 조금 달랐다.덮는 대신, 가방 안에 넣었다.서윤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이건 결심이라기보다 수용에 가까웠다.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사실을 이제는 더 이상 미루지 않겠다는 선택.장미 미용실의 불은 아직 켜지지 않았다.이수는 문을 열고 들어와 커튼을 걷지도 않은 채 안쪽 의자에 앉았다.오늘은 손님을 받을 날이 아니었다.머리를 자르거나, 염색을 하거나,그런 종류의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잠시 후, 서윤이 들어왔다.두 사람은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인사가 필요 없는 날이 있다는 걸 서로 알고 있었다.이수는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윤서윤은 말없이 가방을 열고 노트를 꺼냈다.그 노트는 어떤 서류보다도 단단해 보였다.“여기까지예요.”이수가 낮게 말했다.설명도, 위로도 없었다.그 말은 ‘이제 충분하다’는 뜻이기도 했고,‘이제부터는 당신의 선택’이라는 뜻이기도 했다.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노트를 밀어놓는 손이 떨리지 않았다.그게 그녀에게는 가장 놀라운 변화였다.“이건.”이수가 말을 이었다.“불륜을 증명하는 자료가 아니에요.”서윤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하지만.”“이혼을 설득하는 기록이에요.”이수의 말은 단정했다.감정을 배제한 문장이었다.감정이 빠졌기 때문에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었다.“사진도 없고, 메시지도 없고, 확실한 장면도 없어요.”이수는 노트를 한 장 넘기며 말했다.“그런데도 법은 이걸 봅니다.”하루, 이틀, 연속된 귀가 부재. 반복된 동선. 설명되지 않는 시간.“이건 실수가 아니라 생활이에요.”그 말이 서윤의 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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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가장 공정한 벌

집 안의 공기는 변하지 않았다.가구의 위치도, 벽에 걸린 액자의 각도도 그대로였는데 태성은 그 사실이 불편했다.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 오히려 자기만 바뀌어 버린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서윤은 부엌에 서 있었다.물을 끓이지도, 무언가를 자르지도 않은 채 그저 창가를 향해 서 있는 모습이었다.태성은 말을 걸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어떤 말이 필요한지 알지 못했다.설명은 늘 준비돼 있었지만, 지금은 그 설명들이 모두 늦은 것처럼 보였다.“오늘은…”그가 입을 열었지만 서윤은 돌아보지 않았다.돌아보지 않는다는 사실이 태성에게는 대답보다 더 분명한 거절이었다.“그만해.”윤서윤이 말했다.목소리는 높지 않았고,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그래서 더 단단했다.“이제 설명 안 들어.”그 말은 화해를 거부하는 문장이 아니라, 정리를 선언하는 문장이었다.태성은 그제야 자기에게 남은 선택지가 얼마나 적은지 깨달았다.“내가 뭘 잘못했는지는…”“알고 있잖아.”서윤이 말을 끊었다.그녀는 돌아서서 태성을 똑바로 바라봤다.그 시선에는 분노도, 연민도 없었다.오직 피로만 남아 있었다.“몰랐다는 말은 이제 못 해.”그 말이 태성의 가슴 안쪽을 조용히 찔렀다.몰랐다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가장 괴롭혔다.장미 미용실은 그날 하루 종일 조용했다.손님이 없어서가 아니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이수는 의자를 정리하고 바닥을 한 번 더 쓸었다.청소는 필요 이상으로 꼼꼼했지만, 그 동작이 마음을 정리해주지는 않았다.하빈은 창가에 앉아 전화 몇 통을 마치고 있었다.일이 끝났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끝났다는 말이 이수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서윤 씨는?”이수가 먼저 물었다.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시선은 바닥에 머물러 있었다.“잘 버텨.”하빈이 짧게 답했다.위로처럼 들리지 않게, 사실처럼.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 대답이면 충분했다.이번 에피소드에서 자기가 할 일은 이미 끝났으니까.“태성은.”“혼란스러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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