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그래도 서명해야 했다.”
그 말이 꽃집 안에 떨어졌다.
서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울고 있었던 눈물조차 멈춰 있었다. 울음은 슬픔이 있을 때 나는 것이라는 걸, 서윤은 그제야 알았다.
지금 그녀 안에 남은 건 슬픔이 아니었다.
차갑게 굳어 가는 무언가였다.
“왜.”
입술 사이로 겨우 한 글자가 나왔다.
수화기 너머에서 한기석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때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TV 뉴스 소리가 희미하게 섞여 들렸다.
사람이 죽어 가던 날을 말하는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아버지는 평온했다.
“회사가 무너지기 직전이었어. 네 엄마 병원비도, 직원들 월급도, 채권자들도 전부 내 목을 조르고 있었다.”
“미회수.”그 단어가 꽃집 안에 오래 남았다.서윤은 태오의 휴대폰을 보지 않았다.대신 작업대 위에 놓인 문서를 바라봤다.미회수.누군가는 엄마의 목소리를 가져가지 못했다.그 사실이 희망인지, 더 큰 함정인지 알 수 없었다.태오가 변호사에게 물었다.“기록 장치 정보는.”“첨부 목록에 있습니다. 7년 전 태경메디컬재단 본관 대외면담실 B. 당시 보안 녹음기에서 생성된 원본으로 표시돼 있습니다.”서윤의 손끝이 굳었다.대외면담실 B.엄마가 태오를 만났다고 적힌 그날의 장소.“그 방.”서윤이 낮게 말했다.“아직 있어요?”태오는 잠시 망설였다.“재단 본관은 증축됐습니다. 하지만 면담실 구역 자체는 남아 있을 겁니다.”“가요.”태오가 그녀를 보았다.“지금요?”“제 엄마 목소리잖아요.”서윤은 가방을 들었다.“누군가 또 없애기 전에 찾아야 해요.”태오는 더 말리지 않았다.그는 변호사에게 짧게 지시했다.“재단 서버와 녹음장비 이동 기록 확인해. 외부로 알리지 말고.”“본부장님, 회장님 쪽에서 알게 되면—”“알게 되면 그때 막아.”전화를 끊은 태오가 서윤을 향해 말했다.“직원 출입은 최소화하겠습니다.”“차태오 씨.&rdquo
차태오 본부장과의 혼인 계약 추진.서윤은 문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엄마의 병원비.아버지의 채무.태경메디컬재단의 자료 회수.그리고 자신.한서윤.누군가에게는 딸도, 아내도 아니었다.처리해야 할 리스크였다.“서윤 씨.”태오가 낮게 불렀다.“말하지 마세요.”그의 입이 다물렸다.미안하다는 말일 것이다. 몰랐다는 말일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어느 쪽도 듣고 싶지 않았다.서윤은 문서 끝을 눌러 폈다. 구겨진 종이 위로 ‘처리 방안’이라는 글자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당신도 몰랐을 수 있어요.”태오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하지만 저는 달라요.”서윤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당신 이름이 이용당한 거라면, 나는 내 인생이 이용당했어요.”태오의 얼굴이 굳었다.“당신도 차명환 회장한테 속았을 수 있겠죠. 그런데 당신은 적어도 몰랐다는 말을 할 수 있어요.”목이 잠겼다. 그래도 끝까지 말했다.“저는 몰랐다는 말조차 못 해요. 그 결혼 안에서 살았으니까.”꽃집 안이 조용해졌다.태오는 한참 뒤에야 고개를 숙였다.“맞습니다.”변명 없는 대답이었다.“나는 당신과 같은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서윤의 손끝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그래도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하겠습니다. 당신이 정한 방식으로.”서윤은 가만히 작업
네 결혼은 대가가 아니라, 입막음이었다.서윤은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입막음.그 단어는 이상하게 조용했다.소리를 지르는 말도 아니었고, 누군가의 멱살을 잡는 말도 아니었다.그런데 그 어떤 말보다 잔인하게 서윤의 삶을 설명하고 있었다.태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역시 문서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서윤은 천천히 다음 장을 넘겼다.마른 종이가 손끝에서 바스락거렸다.태경메디컬재단 희귀질환 지원사업 관련 내부 제보.환자 동의서 위조 정황.지원금 유용 의혹.외부 감사 회피를 위한 자료 회수 지시.글자는 건조했다.그래서 더 끔찍했다.사람의 병과 죽음이, 종이 위에서는 정리된 항목이 되어 있었다.서윤은 목 안쪽이 바짝 마르는 걸 느꼈다.“엄마가…”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이걸 알고 있었던 거예요?”태오는 조심스럽게 문서 하단을 가리켰다.“이건 내부 제보 양식입니다.”서윤의 시선이 그곳으로 내려갔다.문서 번호.작성 일자.보안 등급.그리고 담당 부서.태경메디컬재단 전략지원팀.그 아래 작은 글씨가 있었다.실무 담당: 강유라.서윤의 손끝이 차가워졌다.강유라.그 이름은 빠지는 곳이 없었다.회의실에서 서윤을 리스크라 부르던 여자.녹취 파일을 잠가 두었던 여자.그리고 엄마가 쥐고 있던 제보서 속 담당자.처음부터 그녀는 알고 있었다.태오는 낮게 숨을 내쉬었
그날 한미정 씨가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한기석이 아닙니다.서윤은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오래된 병원 CCTV 캡처.날짜는 엄마가 쓰러진 날.화면 속 엄마는 병원 출입구 앞에 서 있었다. 얇은 카디건을 걸친 어깨가 유난히 작아 보였다.그리고 그 옆에 남자가 있었다.지금보다 조금 젊은 얼굴.하지만 틀림없었다.차명환.태경그룹 회장.서윤은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줬다.“왜…”입술 사이로 마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왜 회장님이 엄마랑 같이 있어요?”태오는 대답하지 못했다.그 역시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서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알고 있었어요?”태오의 눈이 그녀에게 향했다.“아니요.”짧은 대답이었다.이번에는 변명처럼 들리지 않았다.태오의 얼굴은 이미 답을 잃은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이 사진이 사실이라면.”그가 낮게 말했다.“아버지는 한미정 씨를 직접 알고 있었습니다.”서윤은 웃고 싶었다.그런데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병원비.채무.계약 결혼.아버지의 서명.윤재헌의 침묵.그 모든 것 뒤에 차명환이 있었다.처음부터.서윤은 휴대폰을 가슴 가까이 끌어당겼다.“이거, 먼저 저장할게요.”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네.”&ldq
“그래도 서명해야 했다.”그 말이 꽃집 안에 떨어졌다.서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방금 전까지 울고 있었던 눈물조차 멈춰 있었다. 울음은 슬픔이 있을 때 나는 것이라는 걸, 서윤은 그제야 알았다.지금 그녀 안에 남은 건 슬픔이 아니었다.차갑게 굳어 가는 무언가였다.“왜.”입술 사이로 겨우 한 글자가 나왔다.수화기 너머에서 한기석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그때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TV 뉴스 소리가 희미하게 섞여 들렸다.사람이 죽어 가던 날을 말하는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아버지는 평온했다.“회사가 무너지기 직전이었어. 네 엄마 병원비도, 직원들 월급도, 채권자들도 전부 내 목을 조르고 있었다.”서윤은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서 있었다.“그래서 엄마를 버렸어?”“버린 게 아니다.”한기석의 목소리가 낮아졌다.“가족을 살리려고 한 거야.”서윤은 웃었다.소리는 나지 않았다.가족.그 단어가 이렇게 더러울 수 있다는 걸, 서윤은 처음 알았다.“그날 아빠가 살린 건 가족이 아니야.”서윤의 목소리는 이상할 만큼 차분했다.“아빠 자신이었지.”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태오는 뒤돌아선 채 서 있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윤은 알고 있었다. 조금 전부터 그의 휴대폰도 녹음 중이라는 것을.그가 대신 말하지 않아도, 이 통화가 사라지지 않게 붙잡고 있다는 것을.
윤재헌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대답이었다.서윤은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았다.화가 나야 했다.소리를 질러야 했다.왜 그랬냐고, 왜 엄마를 그렇게 만들었냐고, 왜 내 인생을 돈과 서류 사이에 끼워 넣었냐고 물어야 했다.그런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말보다 먼저, 몸이 그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경찰이 봉투를 증거 봉투에 넣었다.녹음기와 메모도 촬영됐다. 서윤의 휴대폰에 남은 녹음 파일도 확인됐다.“한서윤 씨, 이후 진술이 필요합니다. 지금 바로 어려우시면 보호자나 변호인과 함께 출석하셔도 됩니다.”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윤재헌은 경찰에게 둘러싸인 채 꽃집 문 쪽으로 걸어갔다.나가기 직전, 그는 서윤을 돌아보았다.“한서윤 대표님.”서윤은 녹음기를 품에 안은 채 그를 보았다.윤재헌은 여전히 공손했다.“저는 경고했습니다.”서윤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그 경고도 녹음됐어요.”윤재헌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온기가 사라졌다.딸랑.그가 나가자 낡은 문종이 울렸다.곧 경찰의 발소리도, 무전기 소리도, 젖은 구두 소리도 멀어졌다.꽃집 안에는 서윤과 태오만 남았다.오래된 먼지 냄새.마른 꽃잎 냄새.그리고 녹음기 안에서 멈춘 엄마의 목소리.서윤은 그제야 손끝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녹음기를 상자 안에 다시 넣으려 했지만,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작
서윤은 한동안 봉투를 열지 못했다.젖은 종이봉투는 작업대 위에 놓여 있었다. 가장자리가 빗물에 젖어 조금 울어 있었고, 안쪽의 서류들이 봉투 모양을 따라 두툼하게 부풀어 있었다.아버지는 떠났다.카메라를 든 사람도 사라졌다.하지만 스튜디오 안에는 아직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남아 있었다.네 엄마 병원비도 그 돈에서 나왔어.서윤은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손끝이 떨리고 있었다.아버지의 빚.태경의 지원.계약 결혼.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다.그런데 거기에 엄마의 이름까지 얽혀 있었다.서윤은 천천히 봉투 입구를 열었
스튜디오 유리문 너머로 아버지가 서 있었다.한기석.서윤은 그 이름을 속으로 천천히 불렀다.아버지라고 부르면, 또 무너질 것 같아서.그는 비에 젖은 코트 차림이었다. 한 손에는 두툼한 봉투를 들고 있었고, 다른 손으로는 유리문 손잡이를 붙잡고 있었다.문은 잠겨 있었다.한기석이 손잡이를 한 번 더 잡아당겼다.딸랑.문 위의 작은 종이 흔들렸다.“서윤아.”유리문 너머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문 열어. 아빠랑 얘기 좀 하자.”서윤은 움직이지 않았다.작업대 위에는 아직 쓰다 만 공식 입장문이 떠 있었다.저는 제
당신 아버지입니다.서윤은 화면 위의 문장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처음에는 글자가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아버지. 너무 익숙한 단어라서, 오히려 낯설었다. 어릴 때 자신을 업어 주던 사람.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학교 앞에 서 있던 사람. 서윤이 플라워 스튜디오를 처음 열었을 때, 작은 화분 하나를 들고 와 어색하게 웃던 사람.그 사람이.자신의 결혼 계약서를.기자에게 넘겼다고.서윤의 손끝에서 힘이 빠졌다.휴대폰이 테이블 위로 툭 떨어졌다.강유라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서윤을 보았다.
“나만 몰랐던 건가요?”수화기 너머로 서윤의 목소리가 떨어졌다.낮고, 조용하고, 차가웠다.태오는 대답하지 못했다.말해야 했다.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말해야 했다. 그러나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3년 동안 숨겨 온 진실은 한 문장으로 꺼내기엔 너무 무거웠다.그 침묵이 답이었다.서윤은 웃었다.아주 작고 짧은 웃음이었다.“그렇구나.”“서윤 씨.”“대답 안 해도 알겠어요.”“듣고 설명하겠습니다.”“설명?”그녀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차태오 씨는 늘 그래요. 말하지 않고 숨겨 놓고, 일이 터진 뒤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