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Chapter 111 - Chapter 120

145 Chapters

111. 오늘 누군가가 내 문장으로 한 끼를 끓이기로 했다

“네. 누군가가 나를 모르는 상태로 이 책을 들춰볼 수도 있다는 거, 조금… 신기하잖아요.”동네 서점. 평일 오후라 사람은 많지 않았다.유리와 이현은 입구 옆 테이블에 진열된 신간 코너 앞에 멈춰 섰다.'한 끼의 온도'다섯 권이 정갈히 놓여 있었다.무채색의 표지, 작은 수저 일러스트, 그리고 뒷면에 적힌 한 문장.“한 끼를 나누는 일은 기억을 건네는 일이다.”이현이 말했다.“당신이 만든 문장이 이제는 내가 아닌 누군가의 하루에 스며들기 시작했어요.”유리는 책 한 권을 조심히 꺼내 들고 표지를 천천히 쓰다듬었다.“…신기하네요. 이건 내가 썼지만, 이젠 내 거 아닌 것 같아요.”“맞아요. 당신이 견뎌낸 시간의 기록이 누군가의 시간 속에 자리 잡게 되는 거예요.”그들은 책을 사지 않았다.대신 그 자리에 서서 조용히 잠시 머물렀다.유리는 어느새 진열된 책 앞 작은 메모지에 짧게 한 줄을 적었다.“오늘 이 책을 펼친 당신, 오늘 한 끼는 꼭 따뜻하게 드세요.”책방을 나서며 이현이 물었다.“이제 실감 나요?”유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 아직은 그냥 좋은 냄비 하나 산 기분이에요.”“무슨 말이에요?”“어떤 음식을 끓이게 될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릇 하나는 준비해놓은 거니까.”이현은 웃었다.“그럼 다음 국은 뭔가요?”유리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그건 오늘 저녁에 당신 얼굴 보고 정할게요.”저녁에 유리는 양파를 볶고, 감자를 깍둑 썰고, 국간장을 한 숟갈 넣으며 말했다.“오늘은 맑은 감자국으로 해요.”“조금 맵고, 조금 짭조름한 맛. 그리고 하루를 씻어내는 듯한 국물.”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숟가락을 들었다.“이 국도 언젠가 책에 나올까요?”유리는 웃었다.“모르죠. 근데 이 국을 같이 먹은 날은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아요.”그날 밤, 유리는 일기장에 적었다.“책은 나왔고, 나는 여전히 국을 끓이고 있다.”“어쩌면 이 삶은 내 이름이 세상에 적히는 순간보다 오늘 먹인 국 한 그릇에 더 가깝다.”“나는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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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다시 조용히 밀려오는 것들

월요일 아침, 이현은 출근길에 유리보다 한참 먼저 나섰다.식탁 위엔 손편지처럼 접힌 메모지 하나.“오늘도 잘 다녀올게요. 당신 밥은 내가 다시 챙길게요.”유리는 미소 지으며 그 메모지를 책갈피처럼 다이어리 안에 끼웠다.평소와 다름없는 하루 같았지만, 무언가 흐름이 달라진다는 감각이 서서히 그녀의 감각 너머에 스며들고 있었다.그날 오후, 이현은 본사 전략회의실에서 예고되지 않은 사람을 마주쳤다.서이우. 이현의 형, 그리고 S그룹 공식적인 2인자.“시간 좀 되냐.”이우는 묻지 않고 통보하듯 말했다.이현은 잠시 주저하다 조용한 접견실로 따라갔다.“아버지가 말하더라.”“생각보다 네 움직임이 ‘안정적’이라고.”“그리고 이번 분기 회의, 네가 정리해서 대표직에 동행하라는 쪽으로 넘어가는 중이다.”이현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말없이 책상 위의 물잔에 손끝을 얹었다.“이번엔 다르다. 기회를 줬고, 너도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그러니까 지금 본격적으로 움직이라는 신호야.”이우는 끝까지 단정적인 어조였다.“…유리는.”이현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지금의 삶은 내가 만들어온 관계이기도 해.”“내가 감당할 수 없는 시간에 누군가를 묶고 싶지 않아.”이우는 잠시 멈칫했다가 말했다.“그 여자, 책 냈더라. 좋은 사람이겠지.”“하지만 너는 좋은 사람 옆에서만 살 수 있는 위치가 아니야.”그 말은 칼날이 아니었지만, 이현에겐 무거운 울음처럼 들렸다.그날 저녁, 이현은 평소보다 두 시간 늦게 집에 들어왔다.유리는 식사를 마친 채 조용히 차를 끓이고 있었다.“많이 늦었네요.”“회의가 길어졌어요.”이현의 대답은 짧았다.“밥은 데우면 돼요.”그 말 이후, 두 사람은 그날 하루에 대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유리는 이현의 어깨에 걸쳐 있는 익숙한 코트의 주름을 바라보다 느꼈다.‘지금 이현 씨는 내게 말을 하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아직 스스로 말할 준비가 안 된 거구나.’그래서 유리는 묻지 않았다.다그치지도 기다린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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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서로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

“그 약속 공식 일정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는데요.”“그래야 해요. 우리가 어떤 자리에서 살아도, 누군가의 곁에서 살아가려면.”“당신이 변해가는 걸 나는 지켜볼 수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당신 자신을 잃어가는 건 같이 겪고 싶지 않아요.”이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그 눈빛 안에는 말보다 더 깊은 울림이 있었다.“…이 말 하려고 며칠을 망설였어요.”“그런데 이상하게 지금 말하고 나니까 더 이상 두렵진 않네요.”“당신이 들어줄 줄 안다는 걸 믿고 있었던 것 같아요.”유리는 조용히 말했다.“나는 당신을 이해하려는 게 아니라,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 당신의 온도가 흔들리지 않길 바랄 뿐이에요.”“그리고, 그걸 지켜볼 수 있는 거라면 나는 이 삶을 충분히 계속할 수 있어요.”그날 밤, 이현은 유리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잠시 눈을 감았다.유리는 그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마지막으로 속삭였다.“…나는 당신을 지지해요. 하지만, 더는 당신 혼자 책임지지 않기를 바라요.”“우리는 이미 같이 살아가는 삶을 선택했잖아요.”그날 밤, 이현은 자신의 노트에 처음으로 이런 문장을 남겼다.“누군가의 동생, 누군가의 아들이기 전에 나는 조유리의 사람이 되기로 했다.”“그리고 그 선택은 단 한 번도 틀리지 않았다.”공식 보도자료는 그날 아침 9시에 배포되었다.『S그룹 전략실, 서이현 이사 공식 복귀 및 주요 계열 대표단 동행』이현은 그것이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수순’이라는 식의 어투로 정리되어 있는 것을 말없이 읽고 있었다.기사의 말투는 조심스럽지만 결국 이현의 현재를 예전으로 되돌리는 언어들이었다.하지만 이번엔 그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단지,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잃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었다.그날부터 이현의 하루는 전보다 더 빨라졌다.회의는 오전 8시에 시작됐고, 퇴근은 대부분 밤 10시를 넘겼다.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대부분 유리는 잠든 뒤였고,가끔은 식탁 위에 덮여 있는 국 냄비가 그녀의 하루를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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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떨어져 있어도, 같이 먹는 마음

금요일 오후. 이현은 사무실 회의가 끝나자마자메신저에 들어온 한 줄 메시지를 읽고 잠시 말없이 앉아 있었다.“이사님, 다음 주 화요일 출국 일정 확정되었습니다.”출장지: 프랑스 파리기간: 미정최소 10일, 최장 3주업무 사유는 ‘현지 투자자 미팅과 사업 확장 검토’.그 어떤 회의보다도 ‘명확한 결과’를 내고 돌아와야 할 자리.그는 손끝으로 모니터 옆의 달력을 짚었다.그리고 아주 작은 조심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그날 저녁, 이현은 유리에게 식사를 제안했다.모처럼 조금 단정하게 입고 나타났고 유리는 그 분위기를 조심스럽게 읽었다.“우리… 밖에서 밥 먹을까요?”유리는 눈을 깜빡였다.“당신이 먼저 그렇게 말하는 거 되게 오랜만이에요.”이현은 웃었다.“오늘은 식탁이 아닌 데서 당신이랑 밥을 먹고 싶었어요. 할 얘기가 있어서.”작은 이탤리언 식당. 두 사람은 창가 자리에 앉아 파스타와 와인을 주문했다.식전빵을 찢으며, 이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출장 잡혔어요.”“해외?”“파리. 다음 주 화요일 출국이고, 최소 열흘 정도는 잡혀 있어요.”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표정은 조급하지 않았고, 그 말이 이미 도착할 거라는 걸 조금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조용했다.“그래요. 이제 그런 자리니까요.”“근데 나도 조금 준비가 필요할 것 같아요.”이현이 놀란 듯 그녀를 바라봤다.“어떤 준비?”유리는 웃었다.“당신 없는 집에서 너무 조용해지지 않게 라디오를 켜둘까, 아니면 메모지를 벽에 붙여볼까.”“아침에 끓일 국이 혼자 먹는 걸로 바뀌면 그 리듬이 조금 흔들릴 테니까요.”“그래서, 그걸 나답게 버티는 방법을 지금 생각 중이에요.”이현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다가 작게 말했다.“…내가 없어도 당신 하루가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기쁘면서도 좀 서운해요.”유리는 고개를 저었다.“당신 없는 하루가 무너지지 않는 건 내가 강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나를 잘 세워놨기 때문이에요.”“내가 그걸 기억하고 있는 이상, 당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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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떨어진 자리에서 같은 마음을 품는 일

이현은 그 글씨를 따라가듯 손끝으로 문장을 천천히 짚었다.그 순간만큼은 비록 이곳은 프랑스,그곳은 서울이지만 어딘가 같은 시간대 안에 있는 것 같았다.그날 오후, 유리는 수업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오며 서점에 잠깐 들렀다.그녀의 책 '한 끼의 온도'는 조용히 여전히 팔리고 있었다.책장 앞에 선 그녀는 한 모르는 여성이 책을 펼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한 장면, 한 페이지, 그리고 책갈피처럼 꽂아둔 작은 유리색 메모지.“이 문장은 누군가를 먹여본 사람의 언어다.”유리는 멀찍이서 그 광경을 바라보다 가슴이 저릿해졌다.이현도 그랬겠지. 자신이 없는 집에서 이현은 매일 ‘국’을 끓인다고는 하지 않았겠지만,그는 분명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그걸 의심하지 않는 감정. 그것이 지금의 사랑이었다.밤에 이현은 호텔방에서 이불을 덮은 채 노트북에 메일을 하나 남겼다.“오늘도 당신 국은 아마 따뜻했을 거라 믿어요.”“내 커피는 좀 썼지만, 당신 생각하니까 마지막엔 부드러웠어요.”“서로의 입에 남는 맛이 다르더라도,당신과 나는 오늘 같은 식사를 한 거라고 믿고 잘게요.”그 메일은 유리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확인한 메시지였다.유리는 미소 지으며 작은 메모지에 짧게 적었다.“오늘 저녁엔 당신 없는 자리에도 두 사람분 국을 끓이겠어요.”“당신 몫은 따로 덜어두고 나중에 데워줄게요. 우린 지금 국도, 온도도 나누는 중이니까.”그날 저녁, 유리는 혼자 식사를 마친 뒤 빈 그릇 옆에 국을 조금 남겨두었다.그 자리는 ‘그가 없는 자리’가 아니라, ‘그가 돌아올 자리를 기억하는 마음’이었다.밤이 오는 시간, 유리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사랑은 같은 자리에 함께 있는 것보다 떨어진 자리에서 같은 마음을 품는 일일지도 모른다.”“오늘도 우리는 하루에 한 끼를 같이 먹었다.”비행기는 예정보다 두 시간 늦게 도착했다.이현은 도착 게이트를 빠져나오며 주머니 속 핸드폰을 꺼내지 않았다.그는 알고 있었다. 유리가 공항에 나오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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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국을 짓기 전의 시간들

서울의 봄은 기다린 적도 없는데 어느새 와 있었다.살짝 열린 베란다 창 너머로 부는 바람은 아직 겨울의 미련을 품고 있었지만,그 속에 섞인 햇살 냄새가 무언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듯했다.유리는 창가 쪽에 나란히 놓은 허브 화분에 물을 주던 손을 잠시 멈추고,식탁에 놓인 메모지 위에 시선을 얹었다.그곳엔 전날 밤, 이현이 남긴 짧은 글씨가 조용한 체온처럼 눌어 있었다.“내일 아침, 국은 내가 끓일게요.”그 메모를 보며 유리는 아주 작게 웃었다.그 말은 당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 나는 당신의 하루를 먼저 준비하겠다는 뜻이었다.그리고 그런 말 한 줄이 이 집에서 하루의 시작을 얼마나 다정하게 만들어주는지 그들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날 아침, 국은 이현이 끓이지 못했다.“당분간… 프랑스 지사 쪽 업무를 총괄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어요.”조심스러운 말투였지만, 그의 말은 확정된 사실처럼 느껴졌다.한참을 말없이 듣고 있던 유리는 아직 뜨겁지도 않은 커피 잔을 두 손으로 감싸쥐며 물었다.“‘당분간’이… 어느 정도예요?”“초기엔 6개월 정도 보고 있지만, 잘 되면 1년 이상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해요.”이현은 유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그의 시선은 유리의 손끝, 그녀가 습관처럼 만지작거리던 컵의 손잡이 근처에 멈춰 있었다.“혼자 가요?”유리는 그 질문을 하면서도 자신이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마음을 감추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건 단순히 ‘따라갈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같이 있는 일상이 끝나도 괜찮은가’를 확인하는 말이었다.이현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아니요. 당신이 같이 가준다면, 나는 그것만으로 그곳에서도 하루를 살 수 있을 것 같아요.”그 말은 달콤하지 않았다. 그건 ‘함께 떠나자’는 청유보다,‘떨어지지 말아달라’는 조용한 부탁에 가까운 말투였다.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끄덕였고,그 고개 끄덕임엔 아직 준비되지 않은 수많은 생각과천천히 정리해야 할 감정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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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향이 오래가는 걸 먼저 고르고 싶어서

“어디부터 갈까요?”이현이 물었을 때, 유리는 가만히 시장 입구 쪽 골목을 바라보다 천천히 대답했다.“파부터요. 오늘은 단단한 쪽보다 향이 오래가는 걸 먼저 고르고 싶어요.”그 말은 장을 보기 위한 문장이었지만,이현은 왠지 그 안에 작은 이별의 은유가 들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러니까, 무언가를 채우기보다 향이 남는 걸 먼저 기억해두고 싶다는 뜻.그들은 익숙한 재래시장의 가장자리 골목,노점상 할머니의 파란 비닐 박스를 향해 걸어갔다.파는 다소곳이 줄지어 눕혀져 있었고,유리는 그중에서도 무늬가 가장 얇고,단면이 고르게 말라 있는 파를 천천히 고르기 시작했다.“이건요?”이현이 들이민 파는 줄기가 조금 갈라져 있었다.“음… 맛은 괜찮을 텐데 국 끓이면 금방 숨 죽을 거예요. 지금은 안 돼요.”“왜요? 오늘 쓸 거잖아요.”“오늘이긴 하지만, 내일도 생각해서 끓여야죠.국은 늘 다음 날도 먹을 수 있어야 해요.”이현은 그 말을 듣고 조용히 웃었다.“맞아요. 우리도 그렇게 살았던 것 같아요. 오늘만으로는 안 되는 마음으로.”채소를 사고, 두부를 고르고,국간장을 사러 노포 쪽 가게로 이동하는 내내유리의 걸음은 조용했지만 결코 느릿하지 않았다.그녀는 하나하나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물건을 고르는 사람처럼파와 마늘, 무와 미역, 다시마와 북어를 차례로 천천히 바구니에 담아갔다.이현은 그 뒷모습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유리는 지금, 서울을 한 그릇 안에 넣으려는 중이구나.’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도 다르지 않았다.누군가는 짐가방에 카디건을 넣고,누군가는 USB를 챙기고, 누군가는 전압을 고민하겠지만그들에겐 된장과 무, 국간장이 더 간절했다.왜냐하면 그건 타지에서도 자신을 지켜줄 맛이었으니까.장을 다 보고 나서, 둘은 시장 끝 어귀의 국밥집 앞에 잠시 멈춰 섰다.점심시간이 지난 국밥집은 조용했고, 안에서 퍼지는 고기와 깍두기 냄새가 묘하게 따뜻하게 느껴졌다.“여기, 한 번도 같이 안 왔네요.”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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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당신의 온도를 기억할 거예요

짐가방 바퀴 소리가 복도 타일 위를 똑똑 두드리며 지나갔다.작은 바퀴들이 바닥에 남긴 먼지의 선이 유리의 발끝에 가 닿았을 때,그녀는 아주 조용히 고개를 돌려 방 안을 마지막으로 훑었다.식탁 위엔 비워진 된장국 그릇이 조용히 놓여 있었고,창문을 반쯤 열어둔 거실 안엔 아직 아침 공기가 머물고 있었다.가습기 물을 비우고, 냉장고 문을 한 번 더 열어본 뒤 유리는 천천히 현관문을 닫았다.현관 너머로 선 이현은 여느 때와 같은 셔츠 차림에 왼손에 작은 메모지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이거, 비행기에서 읽어봐요.”그는 건넸다.유리는 메모지를 받았지만 펼치지 않았다.지금은 무슨 말도 눈을 젖게 할 것 같았으니까.공항으로 가는 택시 안, 둘은 나란히 앉아 있었지만등받이에 기대는 방식도, 창밖을 보는 시선도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처음엔 라디오가 흘렀다.FM 음악방송에서 부드러운 피아노 곡이 나왔고,그 다음은 아나운서의 낮은 목소리.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현은 라디오를 껐다.정적이 돌아왔고, 그 정적은 불편하지도, 편안하지도 않은 온도로 차 안을 채웠다.“이현 씨.”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네.”“파리엔 무가 없죠?”“…있긴 해요. 근데 우리가 아는 맛은 아니에요.”“그래요. 그럼, 무는 나중에 가서 보내달라고 할까요? 엄마가 시골에서 재배한 거 조금씩 넣어보면 향이 다를까 해서.”그 말은 된장국의 향기를 걱정하는 말이었지만,이현은 그 안에 ‘우리가 어디에 있어도 같은 온도로 살아갈 수 있을까’ 라는 마음이 숨어 있음을 느꼈다.“그거 좋아요. 무 보내주세요. 당신 무는 파리 공기보다 훨씬 따뜻하니까.”그 대답에 유리는 아주 작게 웃었다.입술 끝이 떨릴 정도로 작게, 그러나 분명히.공항에 도착한 뒤, 수속을 마치고 보딩 게이트로 향하는 길목.시간이 멈춘 듯 둘은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여기서 보낼까요?”이현이 물었다.“네.”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당신, 거기 가면 처음에 길 잃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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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파리, 낯선 부엌 앞에 서다

낯선 도시의 오후 햇살은 서울의 그것보다 조금 더 흩어져 있었고,창가로 들어오는 빛은 더 길고 느렸다.그늘이 길게 늘어지면 어느 계절인지 헷갈리는 온도로 방을 채운다.유리는 창가에 선 채 발끝으로 바닥을 살짝 눌렀다.생소한 나무결, 미세하게 기울어진 경사, 익숙한 감각이 아닌 바닥의 탄성.짐은 아직 절반도 풀지 않았지만 그녀는 일단 부엌으로 향했다.주방은 생각보다 작고 상판은 지나치게 반들거렸다.싱크대 수도꼭지는 묘하게 높았고,가스레인지 대신 자리 잡은 인덕션 위엔 사용법을 설명하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이현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다.“부엌… 좀 낯설죠?”유리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응. 모든 게, 그냥 조용해요. 음식 냄새도 없고, 소리도 없고…시간이 덜 살아 있는 느낌.”“그럼, 이제 살게 만들면 되겠네요.”이현은 그렇게 말하고 짐가방에서 작은 종이 가방을 꺼냈다.비행기에서 조심스럽게 싸온 된장, 고추장, 다시마, 그리고 말린 파 몇 줄기.종이 가방 속에서 퍼지는 냄새는 이 부엌엔 없는 서울의 시간들이었다.유리는 된장병을 꺼내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마치 처음 문을 여는 장소에 자신이 속해도 괜찮다는 허락을 받는 것처럼.“냄비는?”“이건 임대가구에 있던 거예요.”이현이 씻어놓은 중간 크기의 냄비를 내밀었다.손잡이가 얇고, 바닥은 조금 울퉁불퉁했지만 유리는 말없이 물을 채웠다.물은 부엌 수전에선 차가웠고 냉장고엔 얼음도 없었다.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처음 끓이는 국이었다. 낯선 도시에서 낯선 냄비에, 낯선 물로 끓이는 첫 번째 된장국.재료는 적었다. 말린 다시마 조금,대파는 없어서 대신 쪽파, 그리고 두어 조각 남겨온 말린 무.유리는 숨을 천천히 고르며 국을 저었다.서울에선 하루 두 번도 끓이던 국이었지만 오늘의 국은 조심스러웠다.국물이 끓기 시작한 순간, 이현이 조용히 말했다.“냄새가, 생각보다 빨리 퍼지네요.”“그치.”유리는 작게 웃었다.“된장은 공기랑 온도랑 닿으면 자기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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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말은 안 통해도 향이 말해주는 것들

파리에서의 아침은 서울보다 조용했다.출근길 차량 소음도 덜했고, 가게 셔터를 여는 소리도 낮았다.그 대신 어딘가에서 오븐을 열고 닫는 듯한 철제 문장의 기척이 공기 사이를 타고 퍼졌다.유리는 조용히 부엌의 커튼을 젖혔다.창밖엔 은빛 하늘 아래,붉은 벽돌과 베이지색 외벽이 규칙 없이 겹쳐져 있었고 그 틈으로 오래된 시계탑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이현은 아직 자고 있었다.서울에서보다 늦은 기상, 낯선 침대에 적응하려는 몸이 여전히 짙은 이불 속에서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유리는 가볍게 카디건을 걸치고 장바구니를 들었다.파리를 떠올리면 흔히 그려지는 화려한 루브르 박물관이나 카페 거리가 아닌,이곳의 평범한 동네 마르셰로 그녀는 오늘 처음 나가는 길이었다.시장은 기대보다 훨씬 더 분주하고 복잡했다.골목마다 파라솔이 뻗어 있었고,어깨가 부딪힐 만큼 좁은 골목 안엔 싱싱한 야채와 바게트,해산물과 치즈가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Bonjour…”작게 중얼이며 고개를 숙였지만,그 인사는 종종 너무 늦었고 때로는 너무 작았다.유리는 상인들의 말투에 반응을 늦추기 일쑤였고, 값을 묻는 손짓도 어딘가 어설펐다.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는 천천히 채소들의 색과 표면을 관찰하고 있었다. 손으로 무게를 느끼고,향을 맡고, 파인 흔적 하나 없는 당근을 꺼내 들었을 때 한 중년 여인이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다 작게 웃었다.“Première fois, madame?”처음이냐고, 조금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묻는 듯했다.유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손바닥 위의 당근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고른 또 다른 당근을 건넸다.이게 더 맛있을 거라는 뜻이겠지.유리는 받았다. 고맙다는 말 대신두 손을 모아 짧게 인사했고, 그녀는 눈웃음으로 답했다.그날 유리가 고른 것은 잘 말린 샬롯 몇 개,덜 익은 토마토, 손바닥만 한 호박 한 조각,그리고 파를 닮았지만 향이 더 센 긴 잎줄기 하나였다.가격을 묻는 말 대신 손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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