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Chapter 121 - Chapter 130

145 Chapters

121. 말이 없는 사람에게서 받은 허락

파리의 오전은 조금 늦게 시작된다.해는 떠 있었지만 거리는 조용했고, 건물들 사이에 쌓인 새벽의 찬 공기가아직은 완전히 빠져나가지 않은 듯 길모퉁이를 맴돌고 있었다.유리는 두 번째 시장 방문이었다.하루 전, 어설픈 불어와 손짓으로 채소 몇 가지를 샀고,그 재료들로 끓인 국은 이현의 입에서 “이상하게 익숙하다”는 말로 완성되었다.오늘은 특별히 사야 할 것이 있는 건 아니었다.다만 이 도시의 아침 냄새를 다시 걷고 싶었고,그 냄새 속에 조금은 익숙해진 자신의 호흡을 한 번 확인하고 싶었던 것뿐이다.마르셰 입구를 지나 어제 갔던 과일 가판대를 지나 유리는 무심히 골목 안쪽을 향해 걸었다.그때, 가장자리에 놓인 오래된 천막 아래 낡은 수레 앞에 앉아 있는 한 할머니가 시야에 들어왔다.그녀는 마치 시장에 ‘팔 물건이 없는데도 앉아 있는 사람’처럼 장사보다는 자리를 지키는 존재처럼 느껴졌다.수레엔 조금 시든 바질과 반쯤 마른 라벤더 다발,그리고 누렇게 빛바랜 감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유리는 그대로 그녀 앞에 멈췄다.무슨 말도 하지 않았고, 할머니 역시 고개만 아주 약간 들었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하지만 그 순간, 유리는 이상하게 편안해졌다.언어가 오가지 않는데도 불편하지 않았고, 눈을 마주치지 않았는데도 시선이 닿은 것 같았다.그녀는 작은 감자 두 개를 골랐다.묵직한 손에 하나를 올려 부드럽게 눌러보았다.살짝 물기가 있었지만 아직 익기엔 부족하지 않았다.유리는 동전 몇 개를 내밀었고,할머니는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인 뒤 그대로 손으로 감자를 담아주었다.“Merci.”유리는 낮게 말했다. 정확한 발음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그 순간 할머니가 입꼬리를 아주 조용히 올렸다.웃었다고 하기엔 미묘하고, 인정이라고 하기엔 부드러운 표정.그건 말을 주고받는 사이라기보다 숨결이 한 번 오고 간 사이 같은 것이었다.그날 저녁, 유리는 감자국을 끓였다.된장은 넣지 않았다. 대신 마늘을 볶고 버터를 한 조각 넣은 물에 감자를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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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두 번째 시장, 두 번째 감자

파리의 공기는 전날과 비슷했지만 오늘의 아침은 어딘가 조금 더 가벼웠다.창가에 매달린 커튼이 흐르듯 흔들렸고, 유리는 그 흐름을 따라가듯 한참을 천천히 눈을 떴다.이현은 이미 출근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서울에서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그의 모습이 이 도시에서는 조금 더 부드러워 보였다.유리는 침대맡에 걸터앉아 말없이 그의 등을 바라보다 조용히 물었다.“오늘 저녁엔 파스타 어때요?”“좋아요. 당신이 만들면 된장국이어도 파스타가 될 것 같아요.”그건 농담이었지만, 말 끝의 웃음엔 서로를 오래 바라본 사람들만의 작은 신뢰가 있었다.이현이 나간 후, 유리는 주방에서 텀블러에 차를 채우고 전날 남겨둔 감자 하나를 천천히 만졌다.어디에 쓸지도 모르고 남겨둔 감자.그것이 오늘 다시 그녀를 시장으로 이끌었다.걸음은 어제보다 가벼웠고, 한 손에 들린 천 가방은 오히려 그 움직임에 균형을 실어주고 있었다.시장은 여전히 분주했다. 그러나 유리의 시선은 곧장 어제의 그 구석으로 향했다.거기엔 어김없이 그 할머니가 있었다.여전히 수레 옆에 앉아 있었고, 눈앞엔 바질과 말린 꽃잎 몇 다발,그리고 새로 들어온 듯한 작은 붉은 감자 몇 알이 올려져 있었다.유리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할머니와 눈을 마주쳤다.그 순간, 어제의 미소가 다시 그려졌다.크지 않았지만 분명 어제와 같은 선. 거기엔 반가움도, 기억도 조용한 인사도 들어 있었다.유리는 말없이 감자 하나를 골랐다.그리고 그 옆에 놓인 다소곳한 은색 스푼에 시선을 멈췄다.그건 판매 물품이라기보다오래된 개인 물건처럼 보였다.조금 닳았고, 가장자리는 둥글게 부드러워져 있었으며 손잡이 끝에는 작은 꽃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유리는 스푼을 집으려다 다시 손을 멈췄다.그 순간 할머니가 그 손짓을 읽었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말도 없고, 값도 없고, 포장도 없이 그녀는 그 스푼을 유리의 손 위에 그냥 얹어주었다.유리는 놀랐고, 조금 미안했고, 그보다 더 이유 없이 뭉클해졌다.“…Merci.”그 말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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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기억 속에 남는 조용한 향기

“나, 사람들을 초대해도 될까?”이현이 말했다.그날은 금요일 저녁, 비가 예보되어 있었지만하늘은 아직 잔잔했고, 두 사람은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유리는 컵 안에서 둥둥 떠오르다 서서히 가라앉는 레몬 슬라이스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몇 명이에요?”“셋 정도. 부서 팀장이랑, 내가 여기 와서 처음 함께 일하게 된 분들이에요.”“…식사는 어때요?”“집밥이 그립다고 했었어.”그 말에 유리는 아주 천천히 웃었다.그 웃음은 준비되지 않았지만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와조용히 긴장을 품은 동의의 표시였다.그날 밤, 유리는 노트를 펼쳤다. 레시피를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식탁의 구성을 떠올리기 위해서.된장국을 내야 할까?아니면 비빔국수처럼 조금은 더 다가가기 쉬운 것을?프랑스인들이 대체로 당근의 단맛엔 호감을 보인다는 것을며칠 전 마르셰의 장수에게 들었고, 그 말이 오늘은 조금 특별한 힌트처럼 느껴졌다.그녀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숙주, 당근, 감자, 들기름, 간장, 마른 김…그리고 전날 그 파리 할머니에게 받은 스푼이 작은 그릇에 조용히 꽂혀 있었다.그걸 보며 유리는 작게 중얼거렸다.“당신이 오늘 식탁 위에 오를 수 있다면 그건 음식보다 더 좋은 설명일지도 모르겠네요.”토요일 아침, 유리는 시장으로 향했다.손에는 평소보다 넉넉한 바구니가 들려 있었고,머릿속엔 음식 이름보다 식탁 위에 펼쳐질 ‘냄새의 조화’가 먼저 떠올랐다.오늘 그녀가 사야 할 것은 신선한 계란과 연두빛 상추,그리고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을 첫 한 숟가락의 국물.그녀는 미리 끓여둔 멸치 육수를 베이스로간장과 들기름을 조합한 묽은 조림 국물 안에 작게 썬 감자와 양파, 그리고 얇게 저민 우엉을 넣었다.아주 익숙하면서도 결코 단순하지 않은 맛.메인은 따뜻한 계란말이, 곁들임은 손으로 찢은 닭고기와 상추무침,디저트로는 백설기를 응용해 만든 ‘라이스 무스 케이크’진한 쌀의 향과 매끄러운 텍스처가 입안을 감싸도록.이 모든 구성을 유리는 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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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일요일의 식사, 두 사람만의 아침

해가 뜨기도 전, 창밖에서 비둘기 날개짓 소리가 느릿하게 울렸다.세상은 아직 잠든 듯했고, 벽시계 바늘은 이른 아침의 시간을 그림자도 없이 밀고 있었다.유리는 베개에 뺨을 비스듬히 대고 누운 채,부엌 쪽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움직임에 작은 기척처럼 눈을 떴다.누군가 컵을 놓는 소리, 물줄기가 유리잔 벽을 타고 흐르는 미세한 고동음.이현이었다.그는 주방등도 켜지 않고, 아직 반쯤 어둑한 부엌에서조용히 물을 마시고 있었다. 마치 소리를 만들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잠든 공간을 깨우지 않으려는 걸음이었다.유리는 한동안 누운 채 그 모습만을 조용히 바라보다,이불을 걷었다. 그리고 부엌으로 향하며 아주 작게 말했다.“…아직 어둡네요.”이현은 놀라지 않았다.그는 고개를 천천히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당신이 깨지 않게 움직인다고 했는데… 이미 깼네요.”유리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괜찮아요. 이런 아침은 깨어 있는 게 더 고요하니까요.”창가 커튼을 반쯤 걷자, 창틀 너머로 아침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다.파리의 일요일은 서울보다 훨씬 느리고, 심지어 공기조차 숨을 들이쉬는 속도까지 천천히인 듯했다.그들은 아무런 약속도 없었고, 장도 보지 않았고,국을 끓일 재료도 정해놓지 않았지만 오늘이야말로 두 사람의 식탁을 진짜로 여는 날 같았다.“오늘 아침엔 국 끓이지 말래요.”유리가 말했다.“왜요?”이현이 되물었다.“국물 없는 하루도 가끔은 괜찮잖아요. 대신 서로를 데우는 속도로만 움직이면요.”그 말은 단지 오늘 아침 식사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그건 삶의 리듬에 대한 이야기,두 사람이 부엌에서 어떤 온도로 살아갈지를 다짐 없이 나누는 마음의 속도였다.유리는 토스트를 구웠다.기계 없이 팬에 굽는 방식으로, 가볍게 버터를 녹이고빵을 눌러 굽는 동안 그 사이사이로 서울의 부엌에서 자주 듣던 ‘치직’ 소리가 낯선 공간을 익숙하게 만들었다.이현은 작은 블루 치즈를 꺼내 접시에 얹고, 전날 남은 토마토를 얇게 썰었다.다듬는 손끝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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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사랑을 번역하는 보폭

파리의 오후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도시의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이 거리에는 관광객들의 웃음도, 차량의 경적도,누군가의 급한 걸음도 들리지 않았다.그 대신 고요한 햇빛이 건물 벽면을 따라 물처럼 흘렀다.이현과 유리는 그 햇빛의 가장자리쯤을 걷고 있었다.말없이 나란히. 이정표도 없이 목적지도 정하지 않은 채,오로지 걷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산책이었다.바람은 오후의 온도를 아주 부드럽게 밀어냈고,그 바람을 타고 지나가는 꽃가루와 먼지,창문 사이로 새어 나온 라디오 음악이 둘 사이의 침묵을 더 따뜻하게 감싸주고 있었다.처음엔 유리가 오른쪽에 섰다.그 다음엔 이현이 잠시 왼편으로 자리를 옮겼다.골목이 좁아질 때마다 서로의 위치는 조금씩 달라졌지만 걸음의 속도는 한 번도 어긋나지 않았다.그건 특별히 맞추려 한 것도, 계산된 움직임도 아니었다.그저 두 사람이 이미 오래전부터 기억하고 있던 하나의 보폭,하나의 호흡, 그리고 하나의 거리였다.“여긴 공기 냄새가 다르죠.”유리가 조용히 말했다.“응. 공기가 약간… 부드럽게 굴러가는 느낌.”이현이 대답했다.“나는 처음엔, 이 공기가 나를 밀어낼까 봐 무서웠어요. 내가 가진 냄새랑 너무 달라서.”이현은 유리를 바라봤다.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이젠 어때요?”유리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고개를 들었다.“지금은… 조금씩 이 공기 안에 내 목소리도 섞이는 것 같아요.”“아직 크진 않지만,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이 거리도 조금은 느끼고 있겠죠.”그 말에 이현은 조용히 웃었다.그 웃음은 그녀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의 웃음이었다.둘은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았다.바로 앞엔 작고 오래된 분수가 있었고,분수에서 뿜어져 나온 물은 오후의 빛에 닿아 투명한 무지개를 그렸다.유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말했다.“이현 씨.”“응.”“우리… 서울에선 이런 산책 얼마나 자주 했었죠?”“글쎄요. 거긴 너무 익숙해서 걸을 필요조차 못 느꼈던 것 같아요.”“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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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내가 고른 맛이니까

파리는 그날도 맑았다. 어딘가 바람은 차가웠지만,햇살은 손등에 내려앉는 대로 따뜻했고 그 온도차가 유리의 기분을 묘하게 가볍게 만들었다.조금 늦은 오전, 유리는 장바구니를 들고 마르셰로 향했다.오늘은 특별한 요리 계획이 없었다.그냥 하루의 감정대로 재료를 고르고, 그 감정으로 식탁 하나를 만들어내고 싶었다.시장 안은 여느 때처럼 익숙한 낯섦으로 가득했다.프랑스어로 빠르게 주고받는 상인들의 말,포장을 뜯는 손끝 소리, 귤껍질이 터지는 즙의 향기,사람들 옷깃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그 사이, 유리는 어느 야채 상자 위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재료 하나를 발견했다.길쭉하고 창백한 잎, 미세하게 말라가는 끝자락,그러나 뿌리 부분은 다부지고 탱탱했다.이름도 모르고, 향도 익숙하지 않았지만 유리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조심스럽게 골라 바구니에 담았다.‘이 재료로는 무엇을 해야 할까.’그 물음은 마치 ‘이 도시에서 나는 누구로 살아야 할까’ 라는 질문과도 닮아 있었다.집에 돌아온 유리는 그 낯선 채소를 조심스럽게 씻었다.물에 닿은 잎은 더 부드러워졌고, 칼끝에 닿을 때마다 살짝 풀잎처럼 쏘는 향이 올라왔다.마늘이나 파의 톡 쏘는 향과는 다르게, 이건 뭔가 기억 저편에서 훑고 간 사람의 향 같았다.잔잔하고, 오래 남고, 익숙하진 않지만 멀지 않은 어딘가의 향기.유리는 냄비를 꺼냈다. 기름을 두르고, 잎을 아주 약한 불에 볶았다.소리 없이 숨이 죽고, 그 위에 물을 붓자 향은 비로소 이 공간의 중심이 되었다.무엇이든 처음은 두렵지만 그 안에 귀를 기울이면 언젠가의 내 속도를 닮은 감각이 분명히 숨어 있었다.국물은 맑고도 흐렸고, 맛은… 아주 미세하게 쌉싸름했다.그러나 유리는 그 씁쓸함 속에서 자신의 오늘을 본 듯했다.“익숙하지 않아도 내가 고른 맛이니까.”그건 단순히 국을 평하는 말이 아니었다.그건 자신의 선택을 존중하는 가장 다정한 태도였다.저녁 무렵, 이현이 돌아왔다.“오늘은 무슨 국이에요?”그는 냄비 뚜껑을 살짝 열며 물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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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국물의 이름을 잃은 날

이른 아침, 창문 밖에는 안개가 얇게 내려앉아 있었다.무언가를 가리고 있는 듯하면서도 완전히 숨기진 못한 풍경들이 부드럽게 번져 있었다.유리는 전날 밤 작은 병에 덜어둔 국물을 조심스럽게 덥히고 있었다.스푼 하나, 물 한 컵, 그리고 나무젓가락 끝에 남아 있는 어제의 기억.그 국물은 익숙하지도 않았고, 이름도 없었지만조용히 다시 데워진 순간 그녀의 하루가 천천히 눈을 떴다.이현은 그 향에 먼저 깨어났다.베개에 반쯤 얼굴을 묻은 채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이름은 없지만, 어제보다 더 따뜻하네요.”유리는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그 말은 어쩌면 국이 아니라 그녀에게 한 말 같았다.그날은 일요일 오후, 두 사람은 식사 후 나란히 밖으로 나섰다.손엔 아무것도 들지 않았고, 주머니 안엔 계획조차 없었다.그저 낯선 도시의 길목을 익숙하게 걸어보기 위한 외출.그리고 어제의 국물처럼,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들을 함께 데우기 위한 시간이었다.걷다가 이현이 말했다.“나는 가끔, 이 도시가 무언가를 일부러 감추고 있는 것 같아요.”“예를 들면?”“길의 끝을 말하지 않는 방식. 표지판이 애매하게 돌아있는 모퉁이.또는, 가게 유리창에 쓰인 문장 하나가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들릴 수 있는 그런 것들.”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그래서 더… 이 도시가 조용히 묻는 것 같아요.‘당신은 이 거리에서 무엇을 기억하고 싶은가요?’ 하고.”“이름이 아니라, 기억의 모양으로 하루가 남는 느낌.”그 말에 이현은 다시 천천히 말했다.“국도 그렇겠네요. 어제 국도.”“맞아요. 그 국은… 이름이 없어서 오히려 더 오래 남을 것 같아요.”“그 맛이 ‘그날의 기분’이었으니까.”그날의 국은, 조금 맑았고 약간 씁쓸했으며 은근히 단맛이 뒤따랐다.그건 아마도 ‘유리가 느꼈던 불안과 안도, 낯섦과 익숙함이 뒤섞인 하루’의 국이었다.공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작은 벤치에 앉았다.그늘 아래 놓인 벤치는 햇빛이 한 뼘씩 밀려드는 오후의 속도만큼이나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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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국 대신 편지를 끓이다

이른 오후, 빛이 부엌 창으로 사선으로 스며들고 있었다.나무 바닥에 닿은 햇살은 마치 투명한 잉크처럼 공간 전체를 조용히 물들였다.유리는 싱크대 앞에서 방울토마토를 자르고 있었다.토마토의 껍질은 얇고 투명해서 칼끝만 스쳐도 살짝 터졌고,그 안에서 뽀얀 속살과 맑은 즙이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듯 천천히 흘러나왔다.그 과즙은 어쩐지 그녀의 마음 어딘가 깊은 곳을 닮아 있었다.쥐지 않았는데 서서히 흘러나오는 감정.말하지 않았지만 이미 안에서부터 번지고 있는 그리움.그 순간, 유리는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엄마.”이름 하나만 불렀을 뿐인데 그 말 안에는 수십 번의 부엌,수천 번의 국물, 그리고 셀 수 없는 그릇의 온기가 담겨 있었다.그날, 유리는 요리 대신 편지를 쓰기로 했다.식탁 한쪽에 노트를 펼쳐두고 그 옆에 찻잔 하나와 반쯤 썬 토마토 한 알을 놓았다.볼펜을 쥔 손이 생각보다 천천히 움직였다.처음은 늘 조심스럽다."엄마, 잘 지내요?"그 한 줄을 쓰는 데에도 세 번쯤 숨을 고르고 네 번째 줄에 겨우 적었다.그다음 문장은 아예 한참을 멈췄다가마치 마음에서 먼저 뜸을 들이는 것처럼 조용히 따라 나왔다."여긴 매일 햇살이 조금씩 다르고, 공기 맛도 자꾸 변해요.""처음엔 불편하고 낯설었는데, 지금은 그 변화가 조금은 위로가 돼요."그리고 그녀는 다음 줄에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적었다."오늘은 국 대신 편지를 끓이고 있어요."그 말은 오히려 자신에게 가장 솔직한 고백처럼 들렸다.이현은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고, 유리는 식탁에 앉아 펜촉을 천천히 움직였다.두 사람 사이엔 말이 없었지만,공기는 서로의 생각을 조용히 옮겨다주는 부드러운 메신저 같았다.“편지 써요?”이현이 물었다.“응. 엄마한테.”“언제 마지막으로 썼어요?”유리는 고개를 숙였다.“아마… 중학교 때였던 것 같아요. 생일 때, 편지 쓰면 치킨 사준다고 해서.”이현은 작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속엔 가볍지 않은 애정이 묻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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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프랑스식 시장, 한국식 기억

이른 아침, 부엌 창밖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촉촉하고, 조용하고, 어디에 닿아도 소리를 내지 않는 부드러운 비였다.유리는 테이블 위에 놓인 봉투 한 장을 조심스럽게 들었다.어젯밤, 그녀가 쓴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그 안에는 요리로 다 전하지 못한 그리움과 사랑이 작은 글씨로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그걸 바라보던 이현은, 유리가 방으로 들어간 사이 자신도 모르게 손끝으로 봉투의 결을 따라 문질렀다.그 한 장의 종이에서 그는 오래전, 자신의 기억 속 부엌을 떠올렸다.작고 따뜻한 주방. 두 평 남짓한 공간이었지만 항상 국물이 끓고 있었던 곳.어머니는 말수가 적었다.하지만 국이 끓는 냄비 앞에서는 언제나 뭔가를 설명하고 있었던 것 같다.“이현아, 된장은 너무 세게 풀지 말고 천천히, 물에 말듯 풀어야 짠맛이 안 남아.”그 목소리는 이젠 거의 희미했지만, 향은 여전히 뚜렷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된장국, 멸치 다시, 감자 반 개, 그리고 마지막에 넣는 애호박 한 줌. 어머니가 만든 국은 어떤 날엔 눈물이었고,어떤 날엔 혼잣말이었으며 또 어떤 날엔 그냥 아무 말 없이 ‘괜찮다’는 위로였다.“유리 씨.”이현이 조용히 말했다.“오늘 저녁엔 내가 요리를 해도 될까요?”유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요리요?”“…엄마 국이요.”그 말에 유리는 잠시 놀란 듯했지만 곧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 미소는 언뜻 슬픈 빛이 스쳐 지나갔다.“같이 만들래요?”유리가 말했다.“기억 속 요리는 혼자 끓이면 더 외로워지니까.”두 사람은 오후 늦게 마르셰로 나갔다.오늘 장보기에 특별한 건 없었다.멸치, 무, 감자, 호박, 두부 전부 익숙하고 서울의 냄새가 깃든 재료들.하지만 그 속엔 익숙해서 더 조심스러운 감정이 숨어 있었다.감자를 고를 때, 이현은 멈칫했다.작은 상처가 난 감자 하나를 고르려다 유리가 부드럽게 말했다.“그거, 그대로 써요. 상처 있는 재료가 국물 속에선 더 맛있어지는 경우도 있어요.”그 말은 그 자체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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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걷는 동안 마음이 익는다

해 질 무렵, 유리와 이현은 함께 문을 나섰다.오늘은 장을 보러 가는 것도, 식사를 하러 나서는 것도 아닌,그냥 걷는 일이 목적이었다.그들의 걸음은 목적지를 묻지 않았다.그저 저녁의 빛을 따라 자연스럽게 방향이 정해졌고,낮게 드리운 햇살과 서늘해진 공기가 두 사람의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파리의 거리는 하루 중 이 시간이 가장 아름다웠다.노을이 건물 벽면을 부드럽게 덮고,창문마다 켜지는 작은 전등들이 마치 오랜 기억을 하나씩 밝혀주는 것 같았다.걷다 보면 익숙한 것도 새롭게 보인다.전날 지나쳤던 꽃집의 진열대,기억나지 않는 이름의 골목, 그리고 그 너머로 퍼지는 방금 구운 크루아상의 따뜻한 향기. 유리는 그 냄새에 고개를 돌렸다.“저 빵 냄새… 어릴 적 겨울밤 같아요.”“겨울밤이요?”이현이 되물었다.“응. 길거리 붕어빵 굽는 냄새 있잖아요. 달콤한 팥 냄새보다 반죽이 익는 그 고소한 냄새.”“그 냄새 맡으면 항상 뭔가 기다리던 기분이 나요.엄마가 오는 길목이었나… 아니면 내가 누군가를 기다렸던 시간인지.”이현은 유리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향은 기억보다 오래 남는 것 같아요.”“맞아요. 그리고 향은 사람을 더 천천히 데려가죠.시간을 훅 넘기기보단 그때 그 순간을 스르륵 꺼내 보여주니까.”카페 앞을 지나칠 때, 어떤 음악이 들려왔다.재즈였고, 피아노와 콘트라베이스가 느리게 얽히는 곡이었다.유리는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섰다.문득 발걸음을 멈추는 순간들이 있었다.말보다 음악이 더 많은 걸 전해주는 순간. 소리보다 쉼이 마음에 닿는 순간.“이 곡, 이국적인데 어쩐지 익숙하죠.”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익숙하지 않은 악기인데 우리 안에 이미 있었던 감정 같아요.”“그런 음악처럼, 우리의 이 파리 생활도 조금씩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그 말에 이현은 유리의 손을 잡았다.“이미 그래지고 있는 중이잖아요.”해는 점점 더 낮아졌고, 두 사람은 작은 제과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유리는 진열대 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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