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Chapter 91 - Chapter 100

145 Chapters

91. 마음이 기우는 저녁

그날 오후, 햇빛은 평소보다 더 따뜻했고,두 사람은 말없이도 기억될 첫 번째 ‘우리 날’을 조용히 만들어내고 있었다.저녁에 유리는 조용히 일기장을 꺼내 작게 적었다.“가족은 우리가 서로를 조금 더 이해했을 때 시작되고, 사랑은 그걸 기억하려 할 때 완성된다.”그리고 그 아래, 작게 날짜를 적었다.“우리의 첫 번째 기억일. 155일째 함께한 날.”창밖으로 봄비가 내렸다. 가늘고 조용히, 마치 오래된 음악처럼 기억을 건드리는 리듬으로.유리는 커튼을 젖히고 창가에 앉았다.베란다의 바질 화분은 여전히 초록을 머금고 있었고,그 옆에 이현이 놓아두었던 작은 메모 집게는 변색되지 않은 채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그 메모엔 작은 글씨로 이현의 손글씨가 적혀 있었다.“오늘은 기억일.”그날의 점심, 그 조용하고 따뜻했던 시간은 벌써 몇 달 전이 되었지만 유리는 여전히 그날의 공기를 선명히 기억했다.“유리 씨.”이현의 목소리가 거실 안으로 부드럽게 들어왔다.그는 우산을 접으며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오늘, 혹시 무슨 날인지 알아요?”유리는 그를 바라보다 조용히 고개를 기울였다.“기념일도 아니고, 생일도 아니고…”“…기억일.”이현이 웃으며 대답했다.“155일째, 우리가 아무 날도 아닌 날을 처음 기억하기로 했던 그 날.”유리는 잠시 멈췄다가, 작게 웃었다.“…기억하고 있었구나.”“그날, 내가 만든 파스타 조금 짰다고 당신이 말했었죠.”“근데 난 그날이 이상하게 계속 생각나더라고요.”이현은 그 말에 웃었다.“그날의 짠맛이 그다음부터는 우리 입맛이 된 것 같아요.”“지금은 그만큼 익숙해졌고, 그만큼 더 좋아졌고.”저녁 식탁. 그날처럼 이현은 조용히 상을 차렸다.간단한 감자전, 된장소스, 그리고 평범한 흰 밥.하지만 식탁 한가운데 하얀 종이 하나가 놓여 있었다.유리는 그 종이를 펴보며 작게 읽었다.“오늘도 우리는 아무 날도 아닌 날을 기억하기로 합니다.”“내가 다시 이 말을 적는 건, 우리 사이엔 누가 정해주는 기념
Read more

92. 상자 속에 담긴 시간

“지금, 이 집에서 우리는 어디까지 같이 갈 수 있을까.”그 말은 걱정이 아니라 마음을 정리하는 시작이었다.그날 밤, 유리는 조용히 물었다.“…서울로 돌아갈 거예요?”이현은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였다.“그럴 가능성이 있어요.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나랑 얘기 안 한 건 일부러였어요?”그의 눈빛이 흔들렸다.“아니. 그냥… 당신이 이 공간에 너무 익숙해진 게 보여서.”“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고요한 시간들이 어긋날까 봐 겁났어요.”유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다 조용히 말했다.“…당신이 나 없이 혼자서 무언가 결정하면 나는 내가 당신 옆에 덜 필요한 사람인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그 말은 책망이 아니라 조용한 확인이었다.이현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당신은 지금도 내가 하루를 정리하는 이유예요.”“그리고 어디에 있든 내가 먼저 얘기해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고.”유리는 그 말에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그럼, 서울로 간다면 나랑 같이 가는 거죠?”그 말에 이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혼자 가는 계획은 애초에 없었어요.”“하지만 당신이 이 집을 더 원한다면 나도 이곳에 남는 걸 고민할 수 있어요.”유리는 그 말에 조용히 미소 지었다.“…그렇게 같이 고민해주는 게 내가 원한 방식이에요.”그날 밤, 이현은 오래간만에 유리에게 다가가 먼저 말했다.“우리가 어디서 살든 중요한 건 같은 공간보다 같은 속도인 것 같아요.”유리는 그 말에 천천히 말했다.“…우리, 그 속도를 맞추기 위해 또 조금씩 배워야겠죠.”“네. 그리고 그게 살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해요.”그 밤에 두 사람은 아무런 확답도 없는 미래 앞에서 함께 망설이는 법을 다시 익히고 있었다.그리고 그 망설임마저도 둘이 함께여서 덜 두려웠다.이현의 복귀는 공식 메일로 도착했다.“서울 본사 전략기획실 발령. 발령일: 익월 1일부.”그날 저녁, 이현은 퇴근 후 평소보다 무거운 얼굴로 식탁에 앉았다.유리는 그를 위해 국을 데우며 말
Read more

93. 낯선 공간 속의 익숙한 이름

“이사 갈 집 주방에 기억을 위한 서랍 하나 만들까요?”“자주 쓰진 않지만, 없으면 안 되는 것들만 모아두는 서랍.”그 말에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우리 사이에도 그런 서랍이 하나 있는 것 같아요.”“꺼내지 않지만 알고 있는 것. 자주 말하지 않지만 서로 잊지 않는 감정.”이현은 그녀를 바라보다 천천히 말했다.“그 서랍에 난 아직 당신이 떠날까 봐 무서워했던 마음도 하나쯤은 담겨 있어요.”“근데 이제는, 그 감정까지도 같이 들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유리는 그 말에 손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같이 들고 간다는 말 생각보다 깊네요.”“짐 정리는 놓고 갈 것과 가지고 갈 것을 나누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당신은 마음도 그렇게 정리하네요.”이현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우리는 어쩌면 가볍게 살아가는 게 아니라 무거운 걸 같이 드는 연습을 조금씩 해온 거 같아요.”이삿짐을 싣는 날, 두 사람은 마당 끝에 놓인 작은 의자에 앉았다.바질은 이미 화분째 조심스럽게 포장되어 있었고,거실 벽엔 마지막까지 남겨둔 손글씨 메모 한 장이 붙어 있었다.“당신과의 평범한 하루가 나에게는 가장 기억될 하루였어요.”유리는 그 메모를 떼어내며 말했다.“이거 새 집에도 붙여둘까요?”이현은 그녀의 손끝을 잡으며 말했다.“붙이자. 우리의 기억은 장소보다 먼저 가 있으니까.”서울 도착 첫날, 아직 정리되지 않은 박스들 사이에서 두 사람은 바닥에 나란히 앉았다.이현이 전자렌지에 데운 밥과 국,유리가 손으로 자른 김치 한 접시.이사 첫날 치곤 무척 단출했지만, 그 식탁엔 오랜 관계의 온기가 차곡히 담겨 있었다.“이현 씨.”유리가 말했다.“우린 참… 많이 변했네요.”“예전 같았으면 짐 정리하다 싸우고, 삐지고, 혼자 남았을지도 몰라요.”이현은 그 말에 웃었다.“지금은 같이 정리하다 지쳐도 그냥 옆에 눕고 말죠.”“그리고, 내일 정리하면 되지 하면서.”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젠 삶도 그렇게 살고 싶어요.
Read more

94. 낯선 도시, 익숙한 마음

저녁에 두 사람은 조용히 동네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서울 하늘은 제주보다 훨씬 낮고,별도 덜 보였지만, 그 옆에 있는 사람이 같다는 사실만으로 이현은 충분했다.“가끔은 우리 그냥 제주로 다시 가요, 할까 봐요.”유리의 말에 이현은 고개를 돌렸다.“…정말요?”“네. 물론 지금은 안 가겠지만, 그 말이 입에 맴돈다는 건 그때 우리가 참 좋았다는 뜻이니까.” 이현은 유리의 손을 조용히 잡았다.“지금도 괜찮아요. 지금의 우리도, 이렇게 서로 보려는 마음이 있으니까.”그 말에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낯선 곳에서 익숙한 마음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거 그게 우리가 계속 사랑할 수 있는 이유인 것 같아요.”그날 밤, 서울의 창밖 소음 속에서도 두 사람의 대화는 고요했다.조금씩 흔들려도 끝내 무너지지 않는 마음.익숙했던 것을 그리워하면서도 지금의 서로를 선택하는 마음.그들은 다시 그 마음을 한 문장처럼 되새기고 있었다.“우리는 어디에 있어도 결국 서로를 찾아낼 사람들이니까.”그날, 이현은 예정보다 훨씬 늦게 퇴근했다.유리는 식탁 위에 덮어둔 국을 데우지도 않은 채 소파에 조용히 기대 앉아 있었다.오후 9시, 10시, 11시.도착한 메시지는 단 하나.“오늘 좀 늦을 것 같아요. 들어가서 얘기할게요.”‘들어가서 얘기할게요.’ 그 문장은 불안이라는 단어 없이도 충분히 무거웠다.문이 열렸을 때, 이현의 얼굴은 흔히 보던 그 단단하고 평온한 얼굴이 아니었다.흐트러지지 않은 옷차림과 말끔한 외모와는 달리,그의 눈동자는 복잡하게 얽힌 무언가로 젖어 있었다.“샤워 좀 하고 나올게요.”그는 짧게 말하고 방으로 향했다.유리는 아무 말 없이 전자렌지를 켰다.20분 후, 이현은 젖은 머리로 거실로 나왔다.유리는 식탁에 따뜻한 국과 밥을 놓아두고 자리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말없이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들지도 못한 채 손끝을 식탁 위에 얹고 있었다.“…무슨 일이에요.”유리가 물었다.이현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천천히 말했
Read more

95. 당신과 다시 걷는 나의 풍경

일요일 오전, 이현은 유리에게 말없이 작은 메모 한 장을 건넸다.“오늘은 내가 길잡이 할게요. 따라만 와줘요.”유리는 그 메모를 보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날, 두 사람은 한적한 4호선 열차에 올라 서울 북쪽 끝 작은 역에 내렸다.유리는 조심스레 물었다.“…여기, 당신이 살던 동네예요?”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요.”“그 이후로 아버지가 더 큰 집으로 옮기자고 했는데 나는 한동안 이 골목이 자꾸 생각났어요.”유리는 그의 말에 묵묵히 그의 걸음을 따라 걸었다.첫 번째로 멈춘 곳은 작은 문구점이었다.“여기서 엄마랑 연필 자주 샀어요.”“기억나요. 내가 처음으로 ‘연필은 비싸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니까 엄마가 나한테 웃었거든요.”“지금 생각해보면 그 웃음이 내가 가진 엄마의 마지막 얼굴이었어요.”유리는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그 말, 들려줘서 고마워요.”그 말은 ‘안타깝다’도, ‘힘들었겠다’도 아닌 오롯이 이현의 기억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문장이었다.다음에 향한 곳은 버려진 놀이터였다.그네는 녹슬어 있었고, 미끄럼틀 아래엔 작은 잡초가 자라 있었다.이현은 한참 그 앞에 서 있다 말했다.“여기서 엄마랑 마지막으로 앉았어요. 그날 이후 형이랑만 놀았고, 이 동네에도 다시 오지 않았어요.”유리는 그의 옆에 조용히 섰다.“…그럼, 오늘은 내가 그네 한 번 밀어줄까요?”이현은 그 말에 웃었다.“조금 어색하지만… 좋네요.”유리는 오래된 그네에 앉은 이현의 등을 조심스럽게 밀었다.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앞뒤로 흔들릴 때,그 안에 담긴 오랜 결핍이 조금씩 흔들리며 풀려가는 것 같았다.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낡은 단독주택. 이현이 어릴 적 살던 집이었다.지금은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담장은 새로 칠해졌으며, 창문은 바뀌어 있었다.“여기였어요. 작았지만, 처음으로 ‘집’이라고 느꼈던 곳.”“엄마가 돌아가신 뒤 이 집은 너무 조용했어요.”“그 조용함이 시간이 지나면서 나를 만들었죠. 말
Read more

96. 가장 다정한 이름으로

이현은 그 말을 꺼낸 그녀를 안아주지 않았다.대신 그 손을 더 단단히 감쌌다.‘지금 여기 있다’는 걸 확신처럼 전하기 위해.“…그래서 가끔, 당신이 ‘유리 씨’라고 부를 때 그게 너무 따뜻해서 가슴이 울컥해져요.”유리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그 말엔 기대도, 책임도 없이 그냥 내가 있는 것 같아서.”이현은 그제야 조용히 말했다.“그럼, 앞으로도 그렇게 부를게요. 그냥 당신이 당신일 수 있는 이름으로.”유리는 이마를 그의 어깨에 기대며 낮게 속삭였다.“…고마워요.”“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 처음이에요.”그날 밤, 두 사람은 말없이 등을 맞댄 채 누워 있었다.이현은 잠들기 전 작게 중얼거렸다.“…나는 당신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이제는 당신이 나한테도 기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유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오늘부터 그래볼게요. 당신 옆에서 나를 조금씩 풀어보는 연습.”그 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처음 꺼내는 감정의 서랍을 열었다.그 안에는 상처도 있었고, 기억도 있었고, 말하지 못했던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받아주는 사람이 바로 곁에 있었다.일요일 아침, 이현은 조용히 부엌에서 국을 끓이고 있었다.유리는 여느 날처럼 창가에서 바질을 살피다 그 냄새에 이끌려 조용히 다가왔다.“된장국이네요?”“네. 당신이 며칠 전에 어릴 땐 이런 국이 밥이었다고 했잖아요.”유리는 작게 웃었다.“기억했구나.”이현은 국을 뜨며 말했다.“요즘은 이런 소리 하나하나가 당신의 가족 같아서 기억하게 돼요.”그 말에 유리는 손을 멈추었다.“…가족이요?”“네.”이현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당신이 내 가족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요즘 하루에 몇 번씩 들어요.”그 말은 청혼도, 선언도 아니었지만그 안에는 가장 깊고 무거운 감정이 담겨 있었다.유리는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들지 않고 이현을 바라봤다.“…나, 가족이라는 단어 한동안 입에 올리지 않았어요.”“너무
Read more

97. 세상 앞에 당신을 내 사람이라 말하는 일

“유리 씨. 이번 주 금요일 저녁, 괜찮아요?”이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유리는 그 말에 숟가락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왜요?”“우리 회사 연말 네트워킹 행사 있어요. 격식 있는 자리는 아니고,그냥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이는 식사 자리예요.”“…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이는 데 내가 가도 돼요?”유리의 말엔 아직 조심스러운 결이 남아 있었다.하지만 이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당신이 가야 그 자리가 더 가까워져요. 내가 누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를 처음으로 말하고 싶은 자리니까요.”유리는 그 말을 듣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작게 웃었다.“…좋아요. 한 번 나가볼게요.”행사 당일, 유리는 거울 앞에서 자신의 셔츠 소매를 몇 번이고 고쳐 입었다.머리 모양도, 립스틱 색도 어딘가 자꾸 낯설게 느껴졌다.“이현 씨는 늘 이런 자리에 이렇게 익숙했겠지.”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현관에서 기다리던 이현은 그녀를 보자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잘 어울려요. 무슨 색을 입든 당신은 늘 나한텐 익숙한 사람이에요.”그 말에 유리는 작게 숨을 내쉬고 이현의 팔에 손을 얹었다.“가요. 떨리지만.”“나도 떨려요. 내 사람을 처음으로 소개하러 가는 자리니까.”행사장은 조용하고 단정했다.직원들 몇 명이 가족이나 연인을 데리고 와 있었고,편안한 음악과 작은 테이블, 와인 잔과 웃음소리가 흘렀다.이현은 유리의 등을 살짝 감싸며 사람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그리고 가장 먼저 부서 팀장 앞에 멈췄다.“팀장님. 소개할게요. 제 아내, 조유리입니다.”그 말은 자연스럽고 단호했다.유리는 놀란 눈으로 이현을 바라봤지만 그는 태연히 웃고 있었다.“아내라는 말, 이 자리에서 처음 꺼내네요.”유리는 그제야 웃었다.“그러면 나도 따라야겠네요. 안녕하세요. 이현 씨 아내, 유리예요.”그날, 그들은 처음으로 우리 안에서의 관계를 세상 앞에서의 관계로 꺼내 들었다.누군가는 조용히 인사했고, 누군가는 ‘그분이셨군요’ 하며 반겼다.유리는 그 안
Read more

98. 나눌 수 있는 온도를 만들다

“당신은 늘 스스로 서 있는 사람이었어요.”“누구의 뒤에 서 있는 사람도 아니고, 내가 앞에 세워야 하는 존재도 아니에요.”“그날 내가 ‘아내’라고 말한 건, 내가 당신 옆에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어서였지, 당신이 누군가의 소유처럼 보이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어요.”유리는 그 말을 오래 곱씹다 작게 웃었다.“…그 말, 조금은 듣고 싶었던 말이에요.”“내가 혼자만 내 자리를 다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근데, 그 자리를 같이 지켜줄 사람이 있다는 게 이렇게 위로가 될 줄 몰랐어요.”그날 밤, 유리는 오랜만에 노트를 펴고 레시피를 적었다.예전 가게에서 혼자 써두었던 요리 노트의 마지막 페이지.그 위에, 처음으로 이렇게 썼다.“조유리. 누군가의 아내이기 전에 요리하는 사람, 살아가는 사람.”그리고 그 아래, 이현이 조용히 덧붙였다.“…그리고,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유리는 그 글을 보고 눈을 감았다.가족이라는 이름도, 연인이라는 이름도결국 ‘나’라는 사람 안에서 진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걸 이제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조용한 오후, 유리는 근처 커뮤니티 센터에서 열리는 작은 팝업 행사 공지를 바라보았다.“로컬 마켓 x 음식 클래스 콜라보 참여자 모집”손가락이 문구 위를 천천히 지나갔다.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 이름을 적었다.조유리.그날 저녁, 식탁 맞은편에서 이현이 물었다.“뭐 하나 결심한 표정인데요?”유리는 밥을 한 숟갈 뜨며 무심한 듯 말했다.“…작은 클래스 하나 해보려고요. 근처 센터에서 하는 로컬 행사인데, 그냥 하루짜리 체험 강사 같은 거예요.”“큰일은 아니고, 그냥 내 이름으로 한 번 다시 밥상 차려보는 일.”이현은 그 말에 숟가락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럼, 이름은 크게 쓰는 게 어울리겠네요.”유리는 웃었다.“아직은 작게 쓰고 싶어요. 조금만 보여줄게요.처음엔 나도, 내 요리와 삶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지 조심스럽거든요.”“천천히 하면 돼요.”이현은 말했다.“
Read more

99. 같이 있으면서도, 각자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

토요일 오전. 이현이 부엌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을 때, 유리는 노트북 앞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네, 강남 쪽 문화센터요? 다음 달 초라면 일정 맞춰볼 수 있을 것 같아요.”그녀의 목소리는 또렷했고, 귀에 걸린 펜은 자연스럽게 바빠진 일상을 말해주고 있었다.이현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 미소 안에는 어디선가 익숙했던 ‘조금의 거리감’이 함께 떠올랐다.요즘 유리의 일정은 달라졌다.기존 클래스 외에 온라인 강의 요청이 들어오고,작은 공방에서 ‘조유리식 푸드 스타일링’ 특강까지 열리게 되었다.그녀는 바쁘고, 이현은 조용히 그 곁을 지켜보았다.어느 저녁, 유리가 늦게 들어왔다.“많이 기다렸죠?”“괜찮아요. 밥 먼저 먹었어요.”식탁에는 이현이 혼자 덮어놓은 국과, 유리의 그릇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유리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국을 뜨며 말했다.“…예전엔 당신이 이런 얼굴 하면 내가 많이 미안해했을 거예요.”“근데 지금은, 이게 우리가 같이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받아들이고 싶어요.”이현은 그 말에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유리 씨.”“네.”“요즘 당신이 바빠지는 게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내가 조금씩 멀어지는 것 같아 보여서 그게 서운했어요.”그 말은 책망이 아니라 그저 마음을 내놓는 진심이었다.유리는 국을 한 숟갈 떠 먹고,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 해줘서 고마워요. 나, 사실 바쁜 게 좋으면서도 당신 눈치도 조금씩 보고 있었거든요.”“우리, 이럴 때 그냥 쌓아두지 말고 말해요.”“그럼 그만큼 서운한 대신 가까워질 수 있을 테니까.”이현은 그 말을 듣고 웃었다.“좋아요. 당신이 바빠도, 내가 혼자 밥을 먹게 돼도 우린 서로한테 말할 수 있으면 괜찮아요.”그날 밤, 두 사람은 각자의 방을 정리하다가 작은 테이블 하나를 공유하기로 했다.‘일이 끝난 후 서로의 하루를 보고하는 자리.’조명이 부드럽게 내려오는 테이블 위엔 유리의 플래너와 이현의 메모지,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마실 작은 찻잔 두
Read more

100. 혼자 가지 않아도 된다는 뜻

유리는 그 말을 듣고 천천히 그를 바라보았다.“…그래도 괜찮을까요?”“당신이 괜찮다면 나는 언제든 괜찮아요.”“같이 가서 말 안 해도 돼요. 그냥 옆에 있을게요.”그 말은 위로도, 강요도 아니었다.그저 유리가 혼자 서 있지 않게 하기 위한 다정한 제안이었다.잠시 후, 유리는 작은 여행 가방을 꺼냈다.“우리… 1박만 하고 와요.”“알겠어요.”“그리고 나는 설명하지 않을 거예요. 내가 지금 어떤 사람인지 그냥 보여줄게요.”“좋아요.”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옆에 조용히 섰다.그날 밤, 유리는 머리맡에 휴대폰을 두고 짧게 속삭였다.“…이번엔 내가 도망치지 않고 가보려고요.”이현은 불을 끄며 말했다.“나는 그 길 옆에 조용히 걸어갈게요. 당신이 힘들지 않게.”유리는 그 말에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혼자 갈 수 있지만, 혼자 가지 않아도 된다는 건 이제 내게도 선택지가 있다는 뜻이니까.’서울에서의 아침은 흐렸다.회색빛 하늘 아래, 유리와 이현은 조용히 트렁크를 열고 작은 여행 가방을 실었다.이현은 특별히 묻지 않았다.그저 유리의 손끝이 어느 정도의 떨림을 안고 있는지만 조용히 살폈다.“준비 다 됐어요.”유리가 말하자, 이현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조금만 들렀다가 저녁 전에 돌아와요.”그 말엔 ‘오래 머물지 않아도 돼요’라는 이현의 배려가 담겨 있었다.유리의 어머니가 사는 집 앞,현관문은 오래된 철문 특유의 묵직한 소리와 함께 열렸다.“왔니.”어머니는 그렇게 말했다.표정은 반가움도, 무뚝뚝함도 아닌 어딘가 지친 기색이었다.유리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들어갈게요.”이현은 옆에서 인사했다.“처음 뵙겠습니다.유리 씨와 함께 지내고 있는 서이현입니다.”어머니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앉아.”거실엔 묵은 먼지 냄새와 익숙한 된장국 냄새가 함께 머물렀다.유리는 가방을 내려놓고 부엌 쪽으로 향했다.“내가 끓일게요.”그녀가 말했다.어머니는 대꾸하지 않았다.그러나 그
Read more
PREV
1
...
89101112
...
15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