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Chapter 101 - Chapter 110

145 Chapters

101. 이름보다 중심에 가까운 사람

주말이 지나고, 유리는 부엌 식탁에 앉아 된장국 육수를 다시 끓였다.냄비에서 피어나는 익숙한 향은 며칠 전 어머니의 집에서 끓였던 국과 어딘가 닮아 있었지만, 완전히 같진 않았다.“예전엔 이 맛을 흉내 내는 게 엄마를 기억하는 방식이었는데”유리는 중얼거리듯 말했다.“지금은 내가 나로 사는 방식이 됐어요.”그 말에 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가끔은 기억을 지키는 것보다 지금의 나를 만드는 게 더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유리는 국을 한 숟갈 떠서 조심스럽게 맛봤다.“…근데 이젠, 어렵지 않아졌어요.”“엄마가 내 이름을 부를 때 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이젠 너무 자세히 기억하지 않아도 돼요.”“대신 지금 내가 내 이름을 어떻게 불러주는지가 더 중요해졌어요.”이현은 그 말에 작게 웃었다.“그럼 오늘 저녁은 ‘조유리표 현재 버전 된장국’이네요?”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당신 앞에서 먹일 수 있는 맛이라면, 이젠 그게 내 기준이 됐어요.”저녁 무렵,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식탁을 정리하고 있었다.식사 후, 유리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엄마가 당신을 보면서 그런 말 했죠. 괜찮은 사람 만났구나.”“그 말이 그날 이후 계속 맴돌았어요.”이현은 고개를 들었다.“좋았어요?”“…생각보다 더, 안도했어요.”“예전엔 그 말 듣고 싶어서 애쓰기도 했는데, 막상 들으니까 ‘이제 안 들어도 괜찮겠구나’ 싶더라고요.”그 말은 관계의 축이 과거에서 현재로, 외부에서 내부로 온전히 옮겨졌다는 뜻이었다.이현은 조용히 유리의 손을 잡았다.“나는 당신이 누구에게 보이느냐보다 당신이 오늘 하루 자기답게 살았는지가 훨씬 중요해요.”“당신이 중심이면 그 주변에 있는 나는 언제든 제자리에 있을 수 있어요.”유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내가 지금 여기 있어요.”“누구의 딸도, 누구의 동생도, 누구의 아내도 아닌 그냥 조유리로.”이현은 그 말을 조용히 되뇌었다.“조유리.”“네.”“그 이름은 이젠 내 하루의 시작이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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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내가 선택해서 하는 일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유리는 조용히 말했다.“우리 당장 무언가를 정하지 않아도, 가끔은 이렇게 내일을 말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계획보다 기분이 먼저 움직이는 사람처럼.”이현은 우산을 기울이며 그녀 쪽으로 한 발 다가섰다.“그럼 오늘은 ‘함께 비를 맞았던 사람’으로 기억되겠네요.”유리는 웃었다.“그리고 내일은, 같이 비 피할 우산 고르러 가는 사람.”그들 사이엔 정해진 미래는 없었지만,서로를 향해 상상하는 감정이 가장 확실한 약속이 되고 있었다.화창한 월요일 아침. 유리는 평소보다 일찍 커피를 내리고 가장자리부터 테이블보를 정리했다.이현은 셔츠 단추를 잠그며 말했다.“오늘 뭐 있어요?”유리는 머그잔을 그에게 건네며 살짝 미소 지었다.“점심쯤, 예전에 함께 일했던 셰프한테 연락이 왔어요. 출장 케이터링 하나 함께 해볼 수 있겠냐고.”“오.”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정식으로?”“네. 한 번 한 적 있는 기업 쪽인데 그 팀에서 내 음식 기억하고 있다더라고요.”유리는 그 말이 무척 조심스럽고, 동시에 약간 설레는 듯 말했다.“그런데 같이 하자는 그 셰프가…”유리는 말을 맺지 않고, 잠시 이현의 표정을 살폈다.“예전에 내 일 그만두게 만든 대표 셰프 밑에서 일했던 사람이야.그 사람은 잘못 없었지만, 그때 이후론 연락 안 했었거든.”이현은 잔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서 망설여져요?”“조금.”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이번엔 ‘내가 선택해서 하는 일’이라는 게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요.”“그 사람이 날 어떻게 보는지보다, 지금 내가 어떤 마음으로 요리하는지가 더 중요해졌어요.”이현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해요. 당신이 중심이라면 누가 옆에 있어도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유리는 그 말에 웃었다.“…나, 당신이 나를 그렇게 믿어주는 게 제일 큰 힘인 것 같아요.”그날 오후, 유리는 셰프와 만났다.오랜만에 보는 얼굴은 여전히 바빴고, 말투는 깔끔했다.“기억나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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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결과보다 존재로 남은 하루

그 말은 이유도 조건도 없는 가장 단순하고 순한 평가였다.유리는 천천히 한숨을 쉬고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나, 내가 만들던 맛이 누군가한테 필요해졌다는 말이 이렇게 위로가 될 줄 몰랐어요.”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당신 요리는 맛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걸 기다리는 사람한테서 더 단단해져요.”“이번 케이터링, 기억에 남게 하려고 하지 말고 그 자리에 어울리는 당신으로 해봐요.”유리는 그 말을 들은 뒤 조용히 눈을 감았다.이튿날, 유리는 메뉴에서 ‘상을 위한 장식 요리’ 한 가지를 뺐다.대신 소박하지만 따뜻한 국물 요리를 하나 넣었다.“이 요리는 기억을 자극하지 않지만 자리를 오래 지켜주는 역할을 할 거예요.”그 문장을그녀는 오늘 자신의 레시피 노트에 처음으로 덧붙였다.그날 밤, 이현이 말없이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유리 씨.”“네.”“나는, 당신이 완벽하려 할 때보다 지금처럼 조율하려는 모습을 볼 때 훨씬 더 믿음이 생겨요.”유리는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지금 이 조율의 시간이 예전의 집착보다 훨씬 오래 가는 것 같아요.”“그리고 그 안에 당신이 있어서 다행이에요.”그날 밤, 그녀는 주방 불을 끄고 작게 중얼거렸다.“이번엔, 내가 만든 온도가 누구에게 강요되지 않기를.”그리고, 그 온도가 자신의 중심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행사 시작 한 시간 전, 유리는 준비된 키친 스테이션 앞에서 칼끝을 조율하고 있었다.손의 움직임은 매끄러웠고, 그 어떤 긴장감도 겉으론 보이지 않았지만이현은 무대 뒤편에서 그녀의 눈빛이 조금 더 또렷해졌다는 걸 알아챘다.예전과 다른 건 그 눈빛이 더 이상 누구를 이기기 위해 날이 서 있지 않았다는 것.이제 유리는 그 자리에 ‘자기 자신’으로 서 있었다.첫 접시는 무말랭이와 묵은지를 곁들인 된장 베이스의 소고기죽.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시작의 따뜻함’이 그 자리에 조용히 퍼졌다.둘째 접시는 바삭한 곡물크럼을 얹은 두부스테이크,그리고 마지막은 감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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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시간

화요일 저녁, 이현은 평소보다 30분 정도 늦게 들어왔다.그의 손엔 작은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고,표정은 무던해 보였지만 유리는 그 안에 깔린 어딘가 ‘응답하지 않는 침묵’을 느꼈다.“오늘은 내가 뭐 안 물어볼게요.” 유리는 그렇게 말했다.“그 대신, 당신이 먼저 말하고 싶어질 때까진 그냥 옆에서 뭐라도 만들게요.”이현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춰 섰다.“…유리 씨.”“네.”“그 말, 생각보다 큰 위로네요.”그날 밤, 유리는 손두부와 애호박을 썰고 있었다.칼질 소리는 조용하고 일정했으며, 이현은 그 소리를 들으며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어깨를 약간 숙인 자세, 손끝은 아무것도 잡지 않고,그저 무릎 위에서 가만히 얹혀 있는 채. 유리는 등을 돌린 채 말없이 요리를 이어갔다.그러다 문득, 국물이 끓는 냄비 앞에서 혼잣말처럼 말했다.“…가끔은 내가 잘해도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어요.”“그럴 땐 무얼 해도 뒷목이 당기고, 눈앞에 있는 사람마저 흐릿해졌거든요.”“그래서 그 느낌이 어떤 건지 알아요.”이현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지금 내가 딱 그 상태예요.”그 말은 처음 꺼낸 고백이었다.이현은 그제야 자신의 고요한 방어가 어떻게든 유리에게 전해졌다는 걸 깨달았다.식사가 끝난 후, 유리는 이현에게 커피를 내어주며 짧게 물었다.“…내가 지금 당신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요?”이현은 잔을 받으며 조용히 말했다.“내가 말 꺼내기 전까지 당신이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거요.”“괜찮다고 말하지 않아도, 말하지 않는 내가 당신에게 멀어지지 않게 해주는 거.”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그럼 오늘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 대신 당신 손 한번만 잡을게요.”그녀는 조용히 이현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말도, 눈물도, 설명도 없었다.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가까이 있었다. 그날 밤, 유리는 이현이 먼저 잠든 뒤 조용히 그의 머리맡에 짧은 쪽지를 두었다.“말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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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달라진 리듬 안에서 다시 우리

이현의 복귀 첫 주, 유리의 아침은 30분 빨라졌다.그는 늘 조용히 준비했지만 유리는 그가 내리는 커피 냄새와욕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로 자연스럽게 깨어나곤 했다.“나 먼저 나가요.”현관 앞에서 그는 그렇게 말했고, 유리는 작은 도시락 가방을 건넸다.“차 안에서라도 먹어요. 요즘 말투가 자꾸 텅 비는 느낌이야.”이현은 그 말을 듣고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나중에, 당신 말로 다시 채울게요.”유리는 다시 자신만의 낮을 살아갔다.요리 클래스는 계속됐고, 간헐적인 외부 의뢰도 유지했지만,이현이 집을 비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식탁 위의 공백도 조용히 길어졌다.어느 저녁, 유리는 혼자 식사를 마친 뒤 남은 국을 덮으며 중얼거렸다.“이현 씨 몫의 국이 식는 게 요즘은 제일 싫어.”그 주말, 이현은 오전 내내 회의 일정으로 바빴다.유리는 혼자 마트를 다녀오고, 텃밭에서 바질 화분을 손질했다.저녁 무렵, 이현이 현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땐 유리는 여전히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반죽을 하고 있었다.“나, 당신 없는 토요일이 아직도 서툴러요.”그 말에 이현은 조용히 다가와 그녀의 등 뒤에 섰다.“나도 그래요. 당신 없는 오후는 계속 시계만 보게 돼요.”유리는 반죽 위에 손을 얹은 채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지금처럼 살기로 했던 게 잘못된 선택은 아니죠?”이현은 그녀의 손등을 덮으며 말했다.“아니요. 우린 지금 바뀐 시간에 적응 중일 뿐이에요.사랑의 모양이 바뀐 게 아니라 흐르는 리듬이 달라졌을 뿐이니까.”그날 밤, 두 사람은 작은 식탁에 앉아 손으로 만든 라비올리를 함께 삶아 먹었다.이현은 반쯤 삶아진 반죽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이건 당신이 혼자 만든 맛이지만, 당신이 나랑 나눠 먹을 생각으로 만든 맛이에요.”유리는 웃었다.“그걸 어떻게 알아요?”“내가 당신 없는 주방은 이제 상상도 안 되니까요.”그날 밤, 유리는 조용히 일기를 적었다.“우린 여전히 함께 살고 있다. 다만 그 ‘함께’가 같은 시간,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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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조심스럽지만 나로 나아가는 선택

“우리, 조금씩 조정하면서 계속 같이 가는 거예요.”“당신 혼자도 아니고, 나 혼자도 아닌 걸로.”그날 유리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익숙해진다는 건 서로를 놓치는 시작이 되기도 한다.”“하지만 우리는 그 익숙함 위에서 다시 서로를 불러낼 줄 아는 사람들이다.”“이번 주말, 하루 비워둘 수 있어요.”이현이 말했다.유리는 잠시 멈추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가까운 데라도 다녀올까요?”“멀리 안 가도 좋아요. 당신이랑 같이만 있다면.”그 말에 유리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럼, 아무것도 정하지 않고 떠나봐요. 그냥 걸음 닿는 데로.”토요일 아침. 두 사람은 도시락 가방 하나와 책 두 권,그리고 낡은 카메라 하나를 들고 지하철에 올랐다.열차 안엔 어린아이들 소란한 웃음과 주말 아침 특유의 느슨한 공기가 섞여 있었다.이현은 창밖을 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이렇게 한가하게 앉아있는 게 참 오랜만이네요.”유리는 그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이게 원래 우리가 잘하던 거였죠. 그냥 같이 있는 거.”그들이 도착한 곳은 도시 외곽의 작은 식물원이었다.유리는 늘 그렇듯 초록 앞에 서면 목소리가 낮아졌다.“이렇게 숨 쉬는 공기를 당신과 같이 마시는 순간이요즘은 제일 사치 같아요.”이현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그럼 오늘은 조금 사치스럽게 있어볼까요.”그들은 나무 벤치에 앉아 조용히 도시락을 나눴다.유리의 손에서 꺼낸 유부초밥은 형태가 조금 삐뚤었지만그걸 바라보는 이현의 눈빛은 오히려 더 부드러웠다.“이런 모양 좋아해요.”“왜요?”“딱 손으로 만들었다는 게 보여서 정확하지 않은 게 더 정직하잖아요.”그 말에 유리는 웃으며 말했다.“당신도 요즘은 딱 그렇게 느껴져요. 딱딱하지 않고 정확하지 않아도 진짜인 사람.”이현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신 옆에 있으니까 내가 점점 그렇게 변하는 것 같아요.”오후엔 근처 헌책방 골목을 함께 걸었다.유리는 한 권의 시집을 집어 들고 이현에게 펼쳐 보였다.“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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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이번엔 천천히, 조용히, 그러나 나로서

그날 밤, 유리는 오래된 앞치마를 꺼내 손질하며 이현에게 물었다.“당신은 내가 지금 ‘세상으로 가는 중’이라고 느껴져요?”이현은 대답 대신 앞치마 끈을 천천히 매주며 말했다.“나는 당신이 어디에 있든 늘 나로 있는 중인 사람이길 바라요.”“그게 세상과 연결되는 거라면 나는 그걸 응원할 수 있어요.”유리는 그날 밤, 자신의 이름이 붙은 작은 블로그에 이 한 줄을 적었다.“조유리, 다시 세상에 인사드립니다. 이번엔 천천히, 조용히, 그러나 나로서.”작은 스튜디오, 햇빛이 스며드는 유리 벽 앞에 유리가 앉아 있었다.촬영 조명은 그리 강하지 않았고, 스태프들의 말투도 조심스러웠다.“편하게 말씀 주시면 돼요. 우리는 그 말의 온도를 듣고 싶은 거라서.”인터뷰어가 말했다.유리는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첫 질문은 간단했다.“처음 요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처음엔 생계였어요. 누군가를 먹여 살려야 했고, 무언가를 익히는 게 내가 나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죠.”“그런데… 살면서 언젠가부터 그 증명이 나를 망가뜨리는 언어가 되더라고요.”“어떤 의미일까요?”“내가 잘해야, 내가 완벽해야, 내가 더 빨라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어요.”“그때는 요리를 하면서도 내가 만들어낸 음식을 내가 먹지 않았어요.”그 말에 스태프들이 조용히 숨을 멈췄다.유리는 한 번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다시 떴다.“…근데 지금은 내가 만든 된장국을 가장 먼저 내가 맛봐요.”“그리고, 그걸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은 내 옆에 있는 사람이죠.”촬영 끝 무렵, 인터뷰어가 마지막으로 물었다.“조유리 씨에게 ‘맛있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요?”유리는 한참을 생각하다 말했다.“예전엔 평가였고, 지금은 응원이죠.”“누군가가 ‘맛있다’고 말해주는 그 순간, 그 사람은 내 하루를 조금 더 오래 기억해준다는 뜻이니까.”그 말에 인터뷰어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촬영이 끝나고, 이현이 입구에 서 있었다.유리는 조용히 다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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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앞으로 나아가되, 작게 그리고 분명하게

일요일 아침. 유리는 커피를 내리며 한 손으로 태블릿 화면을 넘겼다.‘출간 제안서 초안’ ‘요리 콘텐츠 정규화 미팅 일정’‘로컬 푸드 콜라보 브랜드’각기 다른 언어로 도착한 제안들은 모두 “더 보여주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더 많은 레시피, 더 넓은 영향력, 더 분명한 이름.유리는 스크롤을 멈추고 화면을 천천히 꺼버렸다.그다음, 텅 빈 부엌에 앉아 창문 너머의 바람 소리를 들었다.“요즘은 말이 많아질수록 내가 줄어드는 기분이야.”이현은 그날 오전 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왔다.손엔 바질 모종이 하나 들려 있었다.“이거, 당신이 말한 ‘어디든 잘 자라는 품종’이라는데요?”유리는 작게 웃었다.“그래요? 그럼… 우리도 그렇게 자랄 수 있을까요?”이현은 바질 화분을 식탁 위에 올리며 말했다.“자라기보다 잘 버티는 게 먼저일 수도 있죠. 그다음에 어느 날 자라 있는 거예요.”점심 식사 후, 유리는 오랜만에 이현과 함께 자신의 노트를 펼쳤다.종이에 큼직하게 세 글자를 적었다.“다음 선택”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무엇이 고민돼요?”유리는 펜을 돌리며 말했다.“…모두 좋은 제안이에요. 하지만 ‘좋다’는 게 곧 ‘맞다’는 건 아니니까.”“지금 내 삶은 적당한 불완전함이 있는 상태예요. 클래스 시간도, 식사도, 함께 걷는 산책도 계획보다 감각이 먼저 움직여요.”“그런데 제안들은 그 모든 걸 구조화하고 싶어 해요.”이현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문제는 그 구조가 내 일상의 리듬을 빼앗을 수도 있다는 거죠.”“…그게, 지금은 두려워요.”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 말 안에 이미 당신의 기준이 있는 것 같아요.”“당신은 확장보다 유지라는 단어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니까.”유리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맞아요. 나는 커지기보다 명확해지고 싶어요.”“더 많이 알려지는 사람보다 더 오래 기억되는 사람이 되고 싶고요.”“그래서 생각했어요. 책을 내더라도, 단 한 끼에 대한 이야기만 써보자고.”이현은 눈을 반짝이며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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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내가 나를 다시 돌아보는 방식

원고 작업이 다섯 번째 장에 접어들 무렵,유리는 부엌 한쪽에 놓아둔 작은 노트 하나를 꺼냈다.그건 오래전, 처음 요리 학원에 다니던 시절 짧게 적어둔 ‘맛 기록장’이었다.첫 페이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된장을 너무 오래 끓이면 쓴맛이 올라온다. 그걸 안 뒤로 엄마의 국이 왜 그랬는지 조금 이해하게 됐다.”유리는 그 문장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그 문장을 적던 시절의 자신은 엄마의 국을 비판하고 있었고, 지금은 그 국을 조심스럽게 다시 끓이고 있었다.‘쓴맛이 올라오던 국도, 그 나름의 삶이었을 테니까.’그날 오후, 유리는 이현과 함께 시장을 다녀왔다.비닐봉투 안에는 국거리 소고기와 갓 절인 무 한 단, 그리고 말없이 집어든 황태포 한 마리.“이건 특별한 날 끓이려고요?”이현이 물었다.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예전엔 엄마가 내가 입맛 없을 때만 황태국 끓여줬거든요.그게 싫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그 냄새가 그리워요.”“그 국 안엔 말 못 하고 눌러뒀던 위로가 숨어 있었던 거겠죠.”저녁, 황태를 불리면서 유리는 노트북을 켰다.다음 장의 제목은'위로하지 않던 사람에게도 위로가 있었을까'그 제목 아래, 유리는 엄마에 대해 처음으로 ‘정리’라는 단어 없이 자유롭게 풀기 시작했다.“엄마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정한 손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하지만 그 손으로 된장을 풀고, 황태를 볶고, 국을 데웠다.”“그 국물은 맛있지 않았지만, 이제 와서 보면 그건 온기였다.”이현은 책상 너머에서 조용히 물었다.“엄마 이야기예요?”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사랑받지 못했다’는 증명을 위해 엄마를 자꾸 지우려 했던 것 같아요.”“그런데 이젠, 그 사람도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 안에서 나를 생각하긴 했을 거라고 조심스럽게 인정할 수 있어요.”이현은 유리의 손을 가볍게 쥐며 말했다.“그 인정은 그 사람을 위한 게 아니라 당신을 위한 거예요.”“지금 당신이 더 이상 과거에 매이지 않고 있다는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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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우리가 고른 마지막 문장

늦은 저녁, 이현과 유리는 식탁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평소처럼 조명이 부드럽게 내려오고, 따뜻한 국물 냄새가 잔잔히 남아 있는 공간.하지만 오늘은 식사가 끝난 뒤에도 식탁 위에 노트북과 인쇄물 몇 장이 놓여 있었다.유리의 책, 『한 끼의 온도』. 최종 교정 파일.그리고 마지막 페이지 아래, 아직 비워둔 칸 하나.“이 페이지가, 책장을 덮기 전에 가장 오래 머무는 문장이 될 거예요.”유리가 말했다.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이 책을 쓴 이유가 결국 이 한 줄에 닿아야 할 테니까요.”유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첫 번째 초안은 그녀가 며칠 전 적어둔 것이었다.“맛있게 살아가는 법은 결국 혼자 먹는 시간을 견디고, 누군가와 나누는 식탁을 지켜내는 일이다.”이현은 그 문장을 읽고 잠시 말을 멈췄다.“예쁘고… 정리된 말이에요. 근데, 그 말 안에 ‘당신’이 조금 빠져 있는 느낌.”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그랬어요.그 문장은 누가 대신 쓴 것 같았어요.내가 아니라 내 이야기를 옆에서 구경하던 누군가.”그들은 함께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다 다시 커서를 맨 아래로 옮겼다.빈칸. 하얗고 조용한 공백. 이현이 먼저 물었다.“당신이 책에서 가장 오래 머문 순간은 언제였어요?”유리는 생각했다. 엄마의 국을 다시 끓였던 날.언니와 밥을 먹은 오후. 클래스가 끝난 뒤, 남은 국을 혼자 먹던 날.“정해진 하나는 없어요. 근데 공통점은 있었어요.”“그건, 다 그 순간들이 ‘같이 먹고 싶은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는 거예요.”이현은 그녀를 바라봤다.조용한 눈빛. 말보다 더 정확한 감정.“그럼, 그 마지막 문장도 그런 마음이면 좋겠네요.”“먹는 것, 사는 것, 기다리는 것 그 모든 걸 당신이 같이 해온 사람이 있다는 걸 담는 말.”유리는 펜을 집었다.긴 시간 동안 꺼내지 않았던 한 줄이 자연스럽게 그녀 안에서 떠올랐다.“나는 이제, 누구와 나누고 싶은지를 먼저 떠올린 다음 한 끼를 끓인다.”이현은 그 문장을 읽고 오래도록 아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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