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Chapter 131 - Chapter 140

145 Chapters

131. 요리는 때로 나를 드러내는 고백이 된다

유리는 아침부터 마음이 바빴다.날씨는 흐렸고, 그 흐린 기운이 창문 너머로 부엌까지 스며들 듯공기마저 무겁게 가라앉은 날이었다.그럴수록 그녀는 국물이 끓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자잘한 거품이 올라오는 냄비의 울림,국자에 담긴 온기를 입김처럼 불어 식히는 동작,그 모든 것이 하루를 제자리로 되돌려줄 것 같았다.오늘 유리는 찌개를 만들기로 했다.그녀가 서울에서 자주 끓이던, 된장과 고추장이 반씩 섞인 얼큰한 찌개.파리의 식탁 위엔 흔치 않은 매운맛이지만가끔은 그 낯섦을 스스로 채워야 할 때가 있었다.문제는 재료였다.마트에선 두부를 구할 수 없었고,한국식 애호박 대신 초록 줄무늬의 단단한 스쿼시만이 있었다.멸치 대신 쓸 육수도 마땅치 않았고,고추장은 다 떨어졌다는 걸 양념을 풀고 나서야 알아차렸다.그녀는 잠시 멈췄다가 ‘그래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찌개를 이어갔다.된장만으로 농도를 잡고, 버터에 볶은 양파를 살짝 풀고, 프랑스산 햄을 어설프게 손질해 넣었다.익숙한 방식이 아닌, 익숙하지 않은 감각으로 끓인 찌개.하지만 그 냄비 속에서 익어가는 건찌개가 아니라 유리의 불안과 조심스러움, 그리고 깊은 그리움이었다.이현은 잠시 후 집에 들어섰다.부엌 안으로 들어온 순간 낯선 냄새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뭐 만들었어요?”그가 물었다.유리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찌개 뚜껑을 열었다.그리고 한 국자를 떠서 이현의 앞에 조심스럽게 내밀었다.이현은 천천히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었다.표정이 굳지는 않았지만,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이상하죠?”유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된장도, 재료도… 다 어정쩡해서. 그냥 실패예요.”이현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실패라기보단… 좀 낯선 맛이에요.”“근데, 그 낯섦이 꼭 나쁘진 않아요. 마치 오늘 하루의 기분 같달까.”그 말에 유리는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오늘 하루… 나 좀 무너졌어요.”“생각보다 내가 이곳에서 잘 버티고 있다고 믿었는데재료 하나에 흔들리는 내 모습을 보고 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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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달콤함과 매운맛 사이

유리는 오늘, 오랜만에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부엌에 섰다.파리 11구의 작은 쿠킹 아틀리에.오전 햇살이 기울어진 유리창 너머로 들어와 바닐라 파우더와 설탕 입자 위를 은은히 밝히는 곳.그녀는 크림을 휘젓는 손끝으로 조금 낯선 긴장을 느꼈다.한국에서라면 직접 레시피를 짜고 그날의 식재료를 선택하던 자신이지금은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소량의 계량컵을 조심스럽게 채우고,달걀의 온도까지 기입된 레시피를 따라 한 입 크기의 휘낭시에를 만드는 중이었다.바닐라 익는 냄새가 천천히 부엌을 감쌌다.계피, 카라멜, 버터, 그리고 설탕. 그 향은 마치 누군가의 어릴 적 추억을 차분히 녹여내는 것처럼,참 다정하고, 너무 부드러웠다.하지만 유리는 어쩐지 그 향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그녀의 요리는 항상 ‘단맛’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된장, 고추장, 들기름, 간장, 청양고추.온화한 향보다는 조금 강하고 선명한 풍미. 몸속을 데우는 맛.기억을 밀어 올리는 맛.때로는 너무 익숙해서 멀리하고 싶어진 가정의 냄새 같은 것들.그러나 이곳은 손끝에 전해지는 온도마저 달랐다.버터를 만지는 감각은 마치 누군가의 이마에 입 맞추는 것처럼 조심스러웠고, 설탕은 한 스푼이 아니라 한 감정을 부드럽게 감싸는 포옹처럼 녹아들었다.그 부엌에서 유리는, 자신이 ‘지닌 것’이 아니라 ‘지니지 못한 것들’을 더 선명히 느꼈다.부드러움. 가볍게 웃는 여유. 한 모금의 달콤함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감성.수업이 끝난 후, 유리는 조심스럽게 포장한 디저트 상자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이현은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그녀가 문을 열자 그는 고개를 들어 웃었다.“수업 어땠어요?”“달콤했어요. 향도, 색도, 손끝도 다.”그녀는 조심스럽게 디저트 상자를 식탁에 올려놓았다.“맛볼래요? 제가 만든 거예요.”이현은 기대 어린 표정으로 하나를 골라 집어 들었다.작고 동그란 타르트. 겉은 단단하게 구워졌고 안엔 라즈베리 잼이 조심스럽게 숨겨져 있었다.“음… 맛있는데,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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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온기를 식힐 줄 아는 사랑

파리의 어느 오후, 하늘은 유난히 무채색에 가까웠다.햇살도 그림자도 없이, 하얀 종이에 연필을 누르다 지운 듯 모든 것이 흐릿하고 조용한 날.유리는 부엌 창가에 앉아 있었다.식탁도 아니고, 소파도 아닌 작은 창턱 옆의 좁은 의자.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고,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아무런 소리도 없이 부엌 안으로 시간이 천천히 흘러들었다.가스레인지 위의 주전자조차 오늘만큼은 물을 끓이지 않았다.그녀는 전날 밤 디저트를 앞에 두고 이현과 주고받은 말들을 떠올렸다.'심심하다'는 말. '매운 게 좋다'는 말.'당신은 따뜻함을 찾는다'는 말.그 말들엔 크게 다툴 이유도, 무너질 만큼의 상처도 없었지만어딘가 깊숙한 곳에서 작은 미세한 금이 일었다.마치 찻잔에 생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균열처럼.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언젠가는 그 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새어 나올 것 같은 불안.창밖을 바라보던 유리는 문득 자신이 요리를 처음 시작했던 순간을 떠올렸다.그건 어떤 거창한 계기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었다.열일곱 살. 늦은 밤, 아버지가 출장을 다녀오신 날이었다.동생은 잠들었고, 엄마는 감기로 누워 있었다.부엌엔 어설픈 냉동 만두와 조용히 끓고 있는 라면 국물뿐.그날 그녀는 그저 식탁이 비어 있는 걸 보기 싫었다.누군가의 하루가 ‘먹는 일’로라도 정리되길 바랐고,그 정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는 위로’이길 바랐다.그게 그녀의 첫 요리였다.말 대신 국물로 누군가를 안아주는 일.그때부터였던 것 같다.요리는 그녀에게 항상 사람을 지키는 방식이었다는 걸.그 기억이 다녀간 후, 유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창문을 열어 바람을 불러들였다.찬 공기가 부엌 안을 스쳤고,그 바람은 그녀의 감정 사이를 조용히 지나가듯 부드럽게 스며들었다.그리고 그 순간, 문이 열렸다.이현이었다.그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섰고 유리를 바라보며 잠시 멈췄다.“추웠어요?”그가 물었다.유리는 고개를 저었다.“아뇨.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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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손끝이 말하는 언어

아직 해가 완전히 떠오르기 전, 집 안은 무채색의 정적 속에 잠들어 있었다.창문 너머로 새어 들어오는 회색빛 아침 공기 속에서,이현은 처음으로 유리보다 먼저 부엌에 나와 있었다.그는 부엌 한가운데 멈춰 섰다.바닥은 살짝 차가웠고, 공기엔 아직 커피 한 잔의 온기도 국물의 향기도 없었다.모든 것이 요리라는 말로 시작되기 전의 시간. 그는 아주 천천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냉장고를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쳤고,그 안엔 유리가 전날 다듬어 놓은 채소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파 한 뿌리, 두부 반 모, 잘게 썬 애호박 한 줌,그리고 소량의 멸치 육수 팩.그는 잠시 멈춰 그 채소들을 바라보다가 마치 악보를 읽듯 하나씩 꺼내 들었다.요리를 시작한다는 건 누군가가 남겨둔 조용한 노트를 따라 감정을 짚어가는 일 같았다.그는 물을 끓이고, 멸치 육수를 우리고, 다듬은 채소를 넣으며 천천히, 자신의 속도를 찾기 시작했다.익숙하지 않은 동작,서툰 손끝, 그러나 그 속엔 말보다 정확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계란을 풀어 부드럽게 찌개 옆에 곁들일 계란찜을 만들기로 했다.그는 유리가 했던 걸 떠올리며 계란을 젓고, 체에 한번 걸러 조심스럽게 냄비에 부었다.‘중약불에서 5분은 뚜껑 열지 말고, 그다음 불을 끄고 잔열로 익히기.’그녀의 말투, 리듬, 움직임이 그의 손끝에 녹아들기 시작했다.그는 몰랐다. 자신이 누군가를 위해 이렇게 정성스레 식탁을 준비한 적이 있었던가.식사는 늘 무언가를 끝내기 위한 도구였고,식탁은 일상이라는 루틴의 일부였으며,요리는 오랜 시간 누군가에게 받기만 했던 것.오늘 이현은 처음으로 내어주는 쪽이 되어 있었다.모든 음식이 차려졌을 때, 아직 창밖은 어스름했고 집 안은 따뜻한 국물의 향으로 채워졌다.이현은 조용히 유리를 깨우러 방으로 향했다.“유리 씨.”그가 낮게 불렀다.“음… 왜요…”유리는 눈을 비비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밥… 제가 했어요.”그 말에 유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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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식탁과 음악 사이

늦은 오후, 창가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은 모든 사물을 조금 더 유연하게 감쌌다.흰색 테이블보에 가닿은 빛은 따뜻한 크림색으로 바뀌었고,부엌 타일 위를 스치는 공기는 미지근한 온기로 피어올랐다.유리는 그날 따라 조용히 라디오를 켰다.불어로 속삭이듯 흐르던 멘트가 지나가고곧, 피아노가 물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작고 선명한 음을 하나씩 튕겨냈다.이현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슬며시 부엌으로 들어섰다.그의 발소리조차 음악과 함께 공기 속에서 아주 천천히 녹아들었다."오늘은 특별히 뭘 해요?"이현의 목소리는 나른했고, 유리는 살짝 고개만 돌려 대답했다."아니요. 그냥… 요즘 당신이 좋아하는 그 가지볶음 하고 있어요. 두부도 살짝 구우려고요."“그거면 충분하죠.”그는 웃으며 대답했다.말이 많지 않은 저녁이었다.하지만 그 적막은 불편하지 않았다.작은 조각들로 이루어진 평화로운 시간이었다.끓는 냄비 뚜껑에서 흘러나오는 증기,프라이팬 위에서 기름이 작게 튀는 소리,그리고 그 사이를 흐르듯 감싸는 음악.어디서부터가 소리이고 어디까지가 마음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공간이 따뜻해지고 있었다.식탁 위에는 두세 가지 반찬과 간단한 국, 그리고 향이 은은한 차가 준비되었다.유리는 접시를 나란히 정리하며 이현을 바라보았다."잘 어울리죠? 음식도, 음악도."그 말에 이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응. 오늘은 모든 게 리듬을 맞춘 듯한 날이에요."그들은 숟가락을 들고 같은 속도로 밥을 먹었다.말없이 먹는 시간이 그 누구에게도 미안하지 않고,오히려 그 침묵 안에서 감정이 편안히 숨 쉴 수 있는 저녁이었다.유리는 젓가락을 잠시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가끔 이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이렇게 오래도록 한 식탁에 앉아 있으면 어느 순간,대화도 없이 마음이 맞춰질 수 있을까 하고.”“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이현이 조용히 말했다.“오히려 말보단 이런 순간들이 우릴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서요. 음악처럼.”“어떤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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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사람이 걱정해주는 맛

유리는 한동안 그런 엄마의 말들이 정이 없는 표현인 줄 알았다.그러나 지금, 그녀는 그 말들이 얼마나 조심스럽고, 다정한 방식으로 자식을 끌어안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그날 저녁, 유리는 메모지 맨 위에 적힌 된장깻잎무침을 만들기로 했다.깻잎을 한 장 한 장 씻어 물기를 털고, 된장을 젓가락 끝에 묻혀 메모에 적힌 대로 물에 풀었다.양념이 바닥에 가라앉지 않도록 손가락으로 살살 저으며 그녀는 그 문장을 마음속으로 읊조렸다.'센 불은 안 돼. 깻잎은 부드러워서 숨이 죽는 순간 맛이 달라지거든.'엄마의 말투가 떠오르고, 그 말투는 어느새 그녀의 손끝으로 이어졌다.그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정확히 시간을 보고,간을 맞추고, 온도를 세심히 가늠하는 사랑의 방식이었다.식탁 위엔 된장깻잎무침과 감자채볶음, 그리고 흰쌀밥이 놓였다.이현은 돌아오자마자 그 식탁을 바라보며 멈췄다.“…이거, 유리 씨 엄마가 해주던 거예요?”그가 조용히 물었다.유리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메모가 있었어요. 오래전에 받은 건데, 잊고 있었어요.”“근데 오늘, 그 글씨를 보니까 손이 먼저 움직이더라고요.”이현은 조용히 한 입 떠서 먹었다.“맛있어요.”그는 아주 단정하게 말했다.“정말… 따뜻해요. 뭐랄까, 사람이 걱정해주는 맛?”유리는 그 말을 듣고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맞아요. 그거… 엄마가 제일 자주 해주던 맛이었어요.”그날 밤, 유리는 종이 한 장을 꺼내 그 메모지의 뒷면에 자신의 글씨를 천천히 적었다.‘된장 1, 국간장 0.5, 물은 종이컵 반, 깻잎은 너무 오래 숨 죽이면 안 된다.’그건 누군가에게 전하는 요리법이자, 자신을 위한 작은 다짐이었다.그리고 종이 아래 작게 이렇게 덧붙였다.“이 맛을, 당신에게도 기억하게 하고 싶어서.”그날의 일기를, 유리는 이렇게 마무리했다.‘엄마의 손글씨는 나를 지금 이곳까지 데려왔고,그 손끝의 기억은 오늘의 나를 다시 일으킨다.’‘사랑은 어쩌면, 남긴 반찬보다 오래 남는 메모지 위의 문장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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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요리로 말하는 사람

그날 저녁, 식탁은 조용했다.두 사람 사이엔 음식보다 먼저 놓인 사진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하지만 그 여운이 무겁게만 흐르지는 않았다.유리는 식사를 마치고 나서 그 상자에서 사진 한 장을 골라냈다.그건 그녀가 주방 창가에 기대 국자에 된장을 푸는 순간의 사진이었다.왼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이 사진… 예쁘게 나왔네요.”그녀가 말했다.“전 몰랐어요. 내가 요리하면서 이렇게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이현은 웃으며 말했다.“당신의 요리는 늘 마음을 담고 있었으니까요.”“그게 보였나 봐요.”유리는 사진을 조심스럽게 유리 액자에 넣었다.“이건 부엌에 둘게요. 내가 가끔 잊을 때, 내가 뭘 위해 요리하는 사람이었는지 기억나게.”그날 밤, 유리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사람은 누구나 누군가의 렌즈에 의해 기억된다.’‘나는 몰랐지만, 그 사람이 바라본 나의 하루는 이렇게 따뜻한 기록이었다.’‘이제 나도 그의 하루를, 그의 손끝을 조용히 담아주고 싶다.’파리의 아침은 언제나 느리게 깨어난다.가로수 너머로 햇살이 비스듬히 흘러내릴 즈음에야거리엔 커피잔을 손에 든 사람들, 자전거의 바퀴가 만든 얇은 바람,그리고 고요를 깨우는 상점의 문 여는 소리가 조심스럽게 깃든다.그날 유리는, 혼자 바구니를 들고 근처 작은 시장으로 향했다.이현은 아침 일찍 회의가 있어 먼저 나갔고,오랜만의 혼자 걷는 길은 어쩐지 낯설면서도 익숙했다.낯설다는 건 언어와 거리 때문이었고,익숙하다는 건 무언가를 사서 식탁 위에 올리는 그 감정이 같았기 때문이었다.시장은 동그란 돌바닥 위에 천천히 펼쳐진 정물화 같았다.붉은 토마토와 주황색 당근, 광택이 은은한 가지,바스락거리는 양상추 잎,그리고 여름이 다 간 계절에도 아직 단단함을 간직한 감자들.유리는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냄새가 참 다정하다.’시장의 공기에는 사람의 온기가 있었다.“봉쥬르.”“메르시.”서툴고 짧은 불어를 주고받으며 그녀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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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즉흥은 가장 오래 남는 약속

말이 많지 않아도, 그날의 바람, 시장의 공기, 손끝의 매운맛 모두가 식탁 위에서 전해졌다.유리는 조심스럽게 감자조림을 한 조각 잘라 이현의 접시에 옮겨줬다.“이건… 내가 오늘 바람을 맞으며 들고 온 맛이야.”“바람 맛이면 좀 짭짤하겠네요.”“아니. 그 바람은, 생각보다 아주 다정했어.”그날 밤, 유리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익숙하지 않은 언어 속에서도 나는 오늘,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함을 느꼈다.’‘요리는 늘, 재료보다 먼저 마음을 담는 일이다.’‘바람 같은 사람, 손끝의 리듬, 그리고 그걸 이해해주는 식탁 우리는 그 위에서 하루를 소중히 익혀간다.’파리는 예고 없이 비를 내렸다.그날 오후, 햇살이 잠시 고개를 내밀었던 건 거짓말이었나 싶을 만큼, 구름은 빠르게 밀려와 도시 전체를 회색빛으로 덮었다.창밖의 거리엔 우산이 없는 사람들이 가게 처마 아래에 모여들었고, 노천 카페의 의자들은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유리는 손에 우산을 들고, 현관 앞에 멈춰 서 있었다.외식을 하러 나가려던 참이었다.이현은 셔츠 위에 재킷을 걸치고 가방을 들고 나오는 길이었다.“나갈 수 있을까?”이현이 물었고, 유리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아무래도 아니겠는데.”창밖은 이미 어두워졌고, 차가운 빗방울 소리가 창문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둘은 조용히 신발을 벗고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외식은 취소, 그 대신 즉흥의 식탁이 시작되었다.유리는 냉장고를 열어 있는 재료들을 훑어보았다.양파, 마늘, 가지, 애호박, 달걀 몇 개. 그리고 남은 밥 한 공기.“뭐 해먹지?”유리가 혼잣말처럼 말했다.“가지로 뭐 만들 수 있어요?”이현이 다가와 물었다.“음… 구워서 된장소스에 버무릴 수도 있고, 볶아서 비빔밥처럼 만들어도 되고.”“비빔밥, 좋아요.”이현은 씩 웃었다.“그럼 제가 계란 프라이 할게요.”유리는 그 말에 웃었다.“노른자 터트리지 마요.”“노력해볼게요. 보장하진 않지만.”그들의 부엌은 그렇게 갑작스러운 비의 리듬에 맞춰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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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우리라는 이름으로 불린 날

이른 아침, 파리의 하늘은 희뿌연 수채화처럼 붓자국을 남긴 듯 흩어져 있었다.햇살은 아직 창틀을 넘지 못했지만, 거리의 공기는 어제보다 덜 차가웠고,그 속엔 무언가 ‘익숙해진다는 감각’이 조용히 섞여 있었다.유리는 바구니를 들고 늘 가던 작은 시장으로 향했다.이젠 길을 잃을 걱정도, 표정 읽기를 두려워하지도 않는 조금은 능숙해진 발걸음이었다.거리의 상점들은 하나둘씩 셔터를 올리며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고,그 사이사이로 익숙한 인사들이 스며들기 시작했다.“봉쥬르, 마담.”“봉쥬르.”“코레앙!”언젠가부터 시장의 채소가게 아주머니는 유리를 보자마자 그렇게 불렀다.“코레앙 부부, 오늘도 오네?”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그녀는 유리를 반갑게 맞이했다.유리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오늘은 저 혼자 왔어요. 남편은 일 갔어요.”“아이구, 부지런하네.”아주머니는 유리가 들고 온 빈 바구니를 바라보며자기 가게 앞에 놓인 갓 들어온 감자 꾸러미를 가리켰다.“이거, 오늘 아침에 들어온 거야. 네가 좋아하는 그 조림용 감자야.”그녀의 말투는 물건을 파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딸을 챙기듯소소한 취향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의 따뜻함이었다.유리는 바구니에 감자와 양파, 싱싱한 애호박을 담고 소량의 적색 고추를 덧얹었다.“오늘 저녁, 감자조림에 넣으려고요.”“그 남편, 입 짧은 거 같은데 너 요리하면 깨끗이 비운다 했지?”“네. 요즘은 계란찜도 잘 만들어요.”“아이고, 잘 만났네 잘 만났어.”그날의 시장은 언어보다 표정이 먼저였고, 판매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곳이었다.유리는 그 마음을 그대로 바구니에 담아 천천히 집으로 돌아왔다.그날 저녁, 식탁 위엔 간장 감자조림, 양파소스 계란찜, 그리고 새로 산 고추를 넣은 된장국이 올랐다.이현은 시장 이야기를 듣고 웃으며 말했다.“이제 완전히 동네 사람들이랑 친구네요.”“그러게요. 이젠 나도 모르게 인사도 하고, 농담도 주고받아요.”“코레앙 부부라… 뭔가 귀엽지 않아요?”“응. 어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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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첫 번째 손님

오전 내내 부엌에는 얇은 칼질 소리와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번갈아 흐르고 있었다.오늘은 이현의 직장 동료인 클레망스가 저녁 식사에 초대되기로 한 날이었다.“그냥 간단하게 준비해요.”이현은 아침부터 여러 번 말했지만 유리는 그럴 수 없었다.‘처음 오는 손님’이라는 말은 언제나 손끝을 긴장하게 만든다. 특히 그 손님이 외국인이라면, 더욱 그렇다.유리는 프랑스어로 된 작은 노트를 펴 재료 이름을 한 번씩 되뇌었다.달걀은 ‘우프(œuf)’, 애호박은 ‘꾸르제트(courgette)’,그리고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요리 감자전과 된장 찜국을 중심으로한식과 현지식의 중간쯤 되는 메뉴를 떠올렸다.해가 저물 무렵, 현관문 벨이 울렸다.“봉쥬르.”클레망스는 부드러운 미소로 들어섰고, 다크 초콜릿 상자를 선물처럼 내밀었다.“기분 좋은 냄새가 집 안 가득하네요. 아, 유리 씨가 요리하신 거죠?”유리는 짧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조금 소박한 음식들이에요.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맛이라는 건 마음에서 나오는 거니까요. 소박한 요리가 제일 기억에 남죠.”그녀의 말투는 부드럽고 정중했고,무엇보다도 식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유리는 그 말에 조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식탁 위에는 노릇하게 부친 감자전,새우와 애호박을 넣은 간장볶음, 된장국,그리고 간단한 계란찜이 놓였다.향신료를 줄이고, 간은 다소 순하게 맞췄지만 그 속에는 유리의 정성과 시간,그리고 다소간의 긴장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클레망스는 숟가락을 들기 전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말했다.“이렇게 좋은 저녁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사실 이현이 늘 도시락을 너무 맛있게 먹는 걸 보고 속으로 궁금했거든요.”이현은 머쓱한 듯 웃으며 유리를 힐끗 바라보았다.“제가 만든 건 아니고요. 매일 유리가 싸준 도시락이었어요.”그 말에 유리는 젓가락을 잠시 멈췄다.누구 앞에서든 그가 그렇게 말해준 건 처음이었다.그 순간, 그녀의 이름이 누군가의 말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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