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Chapter 271 - Chapter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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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 국 한 그릇으로 살아졌습니다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촉촉한 빗방울이 천천히 유리창을 타고 흘렀고,식당 안 조명은 그 흐림을 받아 조금 더 따뜻하게 번져나갔다.유리는 된장국을 약하게 불에 올려두고, 오늘 남은 반찬을 천천히 정리하고 있었다.조용한 날이었다.그 조용함이 좋았고, 비가 식당 안을 조금 더 좁혀주는 기분이 들어 더욱 좋았다.문이 조용히 열렸다.우산을 접은 젊은 여성이 살짝 젖은 바지를 털며 들어왔다.주위를 둘러보는 그 시선엔 약간의 망설임과 조용한 기대가 섞여 있었다.“혼밥 괜찮을까요?”그녀가 물었다.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혼자 드시는 분이 더 많아요. 자연스럽게 앉으시면 됩니다.”여성은 창가에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앉았다.밖의 빗소리가 가장 잘 들리는 자리.“오늘 국은 된장이에요. 표고랑 감자, 들깨 조금 넣었고요.”“국 많이 주세요. 뜨겁게요.”그녀는 주문을 하며 작게 웃었다.유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주방 안으로 돌아왔다.국을 데우며 문득 그 손님의 표정을 떠올렸다.짧은 말 속에 무엇이 묻혀 있었던 것 같은, 그런 표정.식사가 나가고 여성은 아무 말 없이 국부터 떠넣었다.한 입, 두 입.그 움직임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고, 딱 오늘처럼비와 함께였다.잠시 후,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숟가락을 잠깐 내려놓았다.그리고 작게, 숨을 내쉬었다.식당 안은 조용했고, 유리는 일부러 말을 걸지 않았다.그녀는 언제나 손님이 말을 먼저 꺼낼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이었다.그리고 오늘은 그 기다림이 오래 가지 않았다.“사실… 오늘 이 근처 장례식장에 다녀왔어요.”그녀가 갑자기 말했다.유리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마음이… 그냥 뭔가 따뜻한 국물 같은 게 필요했어요. 누군가 살아 있는 온도 같은.”그녀의 눈은 붉었지만 울지 않고 있었다.“이 국이, 지금 그 역할을 해줬어요.”유리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작게 물었다.“혹시… 국 더 드릴까요?”“아뇨, 괜찮아요. 배는 부른데, 마음이 차오르네요.”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물컵을 가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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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 밥을 짓지 않는 날

“이번 주는 하루쯤 식당 문 닫고 떠나요.”이현이 그 말을 꺼낸 건 비가 그친 다음 날 아침이었다.유리는 대답 대신 한참을 그를 바라보았다.“식당 문을 닫는 날도 밥은 지어야 하는데…”“오늘은, 밥 말고 걷는 하루요. 당신 국물 말고, 기차 타고 마시는 바람.”유리는 살짝 망설였지만 고개를 끄덕였다.그 고개 끄덕임 하나로 그날의 모든 풍경이 준비되었다.작은 간이역. 서울 외곽의 오래된 기차역은 기억보다도 더 조용했다.전광판이 없고, 표 자동 발권기도 없는 이 역에서 그들은 두 손에 커피 한 잔씩 들고 작은 나무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이런 데, 이제는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풍경이네요.”유리가 말했다.“그러니까 여길 데려오고 싶었어요. 당신이 만든 음식처럼, 빠르지 않은 곳.”기차가 들어오기까지 20분의 여유가 있었다.그 시간 동안 둘은 별다른 말 없이 잔을 들었다가 내려놓고, 햇빛을 올려다봤다.그 여백이 참 좋았다.기차는 느릿하게 움직였고, 차창 밖 풍경은 논과 강, 마을, 그리고 이따금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이었다.이현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당신과 처음 걸었던 그 파리 골목도, 이렇게 느렸죠.”“그땐, 내가 처음으로 누군가의 속도에 맞춰 걷는다는 걸 배웠어요.”“지금은 어때요?”“지금은… 서로의 속도를 기억해서 조금씩 서로를 기다릴 줄 아는 것 같아요.”작은 역에서 내려 그들은 근처 장터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이현은 손에 들고 있던 백팩에서 종이봉투 하나를 꺼냈다.“당신 가게 앞 그 화분, 요즘 시들하던데요. 새 화분 사줄래요?”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장터 한쪽, 화분을 파는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작은 로즈마리 화분 하나를 고르고, 그 옆의 라벤더도 하나 더 고른 뒤 유리는 조용히 말했다.“이거… 국에 넣진 않겠지만, 주방 옆에 놓고 싶어요. 식당 공기 속에 향기가 섞이게.”“당신은 항상 요리하는 것 같아요. 공기조차.”장터를 다 돌아본 후근처 작은 계곡으로 자리를 옮겼다.물이 흐르는 소리,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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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 기억을 기억하는 맛

그날 아침, 식당 안엔 기온보다 조금 이른 가을빛이 내려앉았다.주방 창을 열자 바람이 가볍게 스며들었고, 들깨를 볶는 냄새가 바닥을 타고 퍼졌다.유리는 조리대 앞에 섰고, 청년은 냄비를 꺼내며 가볍게 인사했다.“오늘은… 어제 남은 묵은지로 국 끓이시는 거죠?”“응. 묵은 건 묵은 대로 써야 맛이 깊어요. 새 김치로는 안 나오는 국물.”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런데… 제가 한번 다르게 끓여봐도 괜찮을까요?”유리는 손을 멈췄다.“다르게?”“묵은지를 들기름에 볶지 않고, 그대로 육수에 넣어서요. 조금 더 맑게.”유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건 자신이 하지 않던 방식이었다.그녀는 국물을 걸러내듯늘 기름의 깊이부터 먼저 입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제안은 어딘가 조심스러우면서도 진심이었다.“…그래요. 오늘 저녁 국은 그 방식으로 해봐요.”점심시간이 시작되고, 손님들로 식당이 조금씩 차기 시작했다.유리는 평소대로 반찬을 내고, 청년은 물을 채우고 그릇을 닦았다.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온 중년 부부 손님이 메뉴를 고르지 않은 채 자리에 앉더니 무언가 기다리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청년은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다.“안녕하세요. 혹시 드시고 싶은 메뉴 있으신가요?”그들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우린 사장님이 권하는 걸로 먹을게요.”청년은 그 말을 듣고 바로 주방으로 돌아와 유리에게 말했다.“두 분 묵은지 국으로 나가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오늘처럼 조금은 맑게.”유리는 고개를 저었다.“저 손님들은 기억해요. 된장국 좋아하시는 분들이에요. 묵은지 국, 낯설 거예요.”청년은 당황한 듯 물었다.“근데… 권하신다기에.”“그건 내가 어떤 음식을 내올지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에요.”그 말은 조용하지만 단단했다.청년은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식사는 무리 없이 흘러갔고, 그 중년 부부는 된장국을 바닥까지 비웠다.계산을 마치며 그들은 말했다.“그 맛, 오늘도 그대로네요.”그 말이 청년의 귓가를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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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날

가을이 조금 더 깊어진 어느 평일 오후. 식당 안은 유난히 조용했다.창밖에선 키 작은 은행나무가 바람에 잎을 떨구고 있었고,유리는 된장국을 약한 불에 데우며 천천히 주걱을 돌리고 있었다.청년은 창가에 앉아 장부 정리를 하던 중, 조용히 식당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그 자리에 들어선 사람은 여든이 넘어 보이는 노인이었다.작고 얇은 몸, 보풀 일어난 베이지색 스웨터,걸음은 아주 느렸지만 동작은 또렷했다.청년은 얼른 일어나 자리를 안내했다.“여기 따뜻한 자리 앉으세요.”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냥 국 한 그릇만 주시오. 밥은 반만.”청년은 주방 쪽으로 돌아오며 그 노인의 뒷모습을 유심히 보았다.무언가… 말을 아끼는 사람. 하지만 마음 안에 오래된 이야기가 고인 사람.유리는 국을 조심스럽게 덜었다.묵은지 조금, 감자채 약간, 된장은 맑게 풀어 자극적이지 않게 끓였다.그 국이 나가고, 노인은 천천히 숟가락을 들었다.식당 안은 여전히 조용했고, 청년은 계산대 근처에서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노인은 국을 마신 후 물 한 모금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그러다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이런 국을 내 아내가 참 좋아했지…”그 목소리는 누구를 향한 것도,누가 듣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지만, 청년의 마음을 멈춰 세우기에 충분했다.노인은 조용히 계산을 마치고 식당을 나섰다.그가 완전히 골목 끝으로 사라지기 전까지, 청년은 문가에 서서 그 등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주방으로 돌아와 유리에게 말했다.“방금 다녀간 노인분, 아내 얘기하셨어요. 국이 좋아서, 아내가 좋아했다면서요.”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가끔 그런 분들이 오세요. 국물에 기억을 풀러 오는 분들.”청년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내일… 그분 오실 것 같아요. 그냥, 느낌이 그래요. 내가 국 한 그릇 미리 끓여도 될까요?”유리는 그 말을 듣고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오늘 그분 등을 보고 당신도 국물을 배웠나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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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 우리가 어떤 마음인지가 중요해지는 순간

토요일 오전. 식당 문엔 ‘오늘은 쉽니다’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고,가게 안엔 햇살이 조용히 누워 있었다.유리는 주방 불도 켜지 않은 채 찻잔을 손에 쥐고 창가에 앉아 있었다.그 옆엔 이현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말도 없고, 움직임도 거의 없었지만 두 사람 사이엔 이상하리만치 부드러운 공기가 흘렀다.“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는 토요일… 처음이죠?”이현이 웃으며 말했다.“그러게요. 불 켜지 않고, 국도 안 끓이고.”“밥 대신 바람 마시는 거, 오늘 한 번 해봐요.”그 말에 유리는 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강변 산책로.강물은 느리게 흘렀고, 바람은 긴 머리칼을 가볍게 스치며 귓가에 속삭이듯 지나갔다.두 사람은 천천히 걸었다.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서로의 걸음은 일정했고, 속도는 꼭 맞았다.“내가 요리할 때 당신이 주방 옆에 앉아 있는 거, 그게 사실 나한텐… 거의 대화처럼 느껴졌어요.”유리가 말했다.“말없이, 냄비 속을 같이 들여다보는 대화요.”이현은 그녀 쪽을 바라봤다.“그래서 나는 항상 그 국물에 초대받는 기분이었어요.한 숟갈 먹을 때마다, ‘나도 당신 하루에 초대받았구나’ 싶었죠.”유리는 잠시 고개를 떨구었다.그 말은 어느 로맨틱한 고백보다 마음속을 데우는 온도였다.강변 옆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가까운 나무 위에 새가 울었고,물비늘 위엔 햇살이 부서졌다.이현은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작은 종이 상자를 꺼냈다.“이게 뭔데요?”유리가 묻자 그는 조용히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손수 접은 작은 카드 하나와 작고 투명한 병 하나가 들어 있었다.카드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당신이 없는 주방도 상상해봤어요. 하지만, 당신이 있는 하루는 주방이 없어도 괜찮더라고요.”유리는 입을 가만히 다물었다.“그 병은 뭐예요?”“당신이 매일 끓이는 국, 그 냄새 중 제일 좋아하는 향. 오늘 아침, 묵은지 볶을 때 조금 남겨봤어요.”“국물 향을 병에 담았어요?”“응. 당신이 바쁘거나 지칠 때 이 향을 맡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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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 당신이 좋아하는 온도로

“오늘 저녁, 식사 예약해놨어요.”이현은 조용히 말했다.유리는 그 말을 듣고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또 어디에요? 저번처럼 산속에 있는 정적 깊은 곳인가요?”“아니요. 오늘은… 당신이 처음 국을 끓인 바로 그 자리예요.”유리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거기… 벌써 몇 년 전이에요.”“그러니까 더 늦기 전에, 기억을 꺼내놔야죠.”오래 전, 유리가 처음 식당을 시작했을 때 첫 메뉴로 끓였던 국은 ‘된장감자국’이었다.가장 단순하고, 가장 익숙한 재료.하지만 그 안에 유리의 긴장, 설렘, 두려움, 그리고 다짐이 몽글몽글 퍼져 있었다.그때는 몰랐지만,그 국을 먹고 처음 인사를 건넨 손님이 바로 이현이었다.“그 국, 솔직히 간이 약했어요. 그런데… 그 해 가을, 제일 기억에 남는 맛이었죠.”“왜죠?”“당신 손끝이 그 안에 그대로 담겨 있었으니까요.”식사 장소는 현재 식당의 뒷마당,예전 창고를 개조한 작은 공간이었다.이현은 며칠 전부터 직접 페인트칠을 하고,작은 테이블을 하나 들여놓고, 식탁보와 조명까지 준비해두었다.“조금 어색하죠?”그가 물었고,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 조명, 내가 첫날 붙잡고 있던 그 불빛이랑 비슷해요.”테이블 위엔 그날 유리가 썼던 것과 똑같은 작은 흰 그릇에 된장감자국이 담겨 있었다.“이 국은 내가 끓였어요. 당신 레시피 흉내 내서.”유리는 조용히 숟가락을 들어 한 입 떠넣었다.잠시 뒤, 입가에 천천히 웃음이 번졌다.“이현 씨는 정말 묘한 사람이에요.”“왜요?”“요리는 익숙하지 않으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은 잘 끓여내요.”국을 다 마신 후, 두 사람은 마주 앉은 채 긴 말 없이 시간을 공유했다.조명 아래, 유리의 손이 천천히 이현의 손 위에 얹어졌다.“내가 처음 국을 끓였을 땐 내가 뭘 담고 있는지도 몰랐어요. 그저 밥값을 해야 한다는 마음 하나로…”“그리고 지금은요?”“지금은… 당신이 내 국에 기대고 있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매번, 좀 더 진심으로 끓이게 돼요.”이현은 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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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 우리 식탁이라는 이름의 하루

“오늘은, 내가 먼저 끓일게요.”이현이 그렇게 말한 건 금요일 아침, 유리가 머리를 묶으며 주방 창을 열던 순간이었다.유리는 놀란 듯 고개를 돌렸다.“정말요?”“응. 이번엔 내 차례니까.”그 말이 어딘가 귀여워서, 어딘가 믿음직해서, 유리는 잠시 웃음을 삼켰다.이현의 요리 방식은 조금 서툴고, 아주 조심스러웠다.된장을 푸는 손목의 각도도, 감자를 써는 속도도, 모든 게 조심조심.하지만 그 동작 하나하나가 ‘잘하려고 한다’가 아니라‘당신한테 다치지 않게 하고 싶다’라는 마음으로 보였다.그걸 유리는 알아봤다.“파는 맨 마지막에 넣어야 해요.”“응. 지금 넣으면 향이 다 날아간다면서요?”“맞아요. 요즘엔 당신, 진짜 내 말 잘 기억하네요.”이현은 작게 웃었다.“그게 다, 내가 당신을 잘 기억하고 싶어서 그래요.”그 말에 유리는 숟가락을 멈췄다.식탁은 늘 그렇듯 단정했고, 국 그릇은 오늘도 같은 자리에 놓였다.이현이 국을 내오고, 유리가 밥을 푸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그리고 같은 타이밍에 숟가락을 들었다.그 일치감이 마치 오래 연습한 연주처럼 느껴졌다.“요즘엔 말이죠.”이현이 조용히 말했다.“국을 끓이면서 당신 생각을 해요. 내가 오늘 당신에게 어떤 하루를 줄 수 있을까,당신이 어제 좀 피곤했으니까 조금 더 부드러운 맛이 좋지 않을까…”유리는 숟가락을 들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요즘엔 그래요. 국을 끓일 때, 이 사람이 오늘 이걸 먹고 웃었으면 좋겠다 그 생각 하나로 불 조절해요.”두 사람은 웃었다.그리고 동시에 국을 한 입 떠넣었다.식사를 마친 후, 이현이 조용히 설거지를 마쳤다.그 뒤에서 유리는 작은 찬장을 열고 하얀 손수건을 꺼냈다.그 손수건엔 지난번 자신이 이현을 위해 끓였던 미역국의 레시피가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이거…”이현이 놀란 듯 바라보자 유리는 말했다.“우리의 첫 국, 기억하자는 의미로 써봤어요. 앞으로 언제든 다시 끓일 수 있도록.”그 글씨는 깔끔했고, 곳곳에 하트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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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 첫날의 식탁

그날 아침, 식당은 잠시 쉬는 날이었다.이현이 커피 두 잔을 들고 유리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문을 연 유리는 이미 앞치마를 두른 채였다.“아직 식당 쉬는 날인데요?”“오늘은 이삿날 전 체크리스트 정리하는 날이에요.”“우리 아직 이사도 안 했는데요?”“그러니까 미리 해야죠. 당신, 이런 거 서툴잖아요.” 이현은 웃으며 커피를 건넸다.“그래서 내가 오늘 커피 담당이에요. 요리 말고, 카페 남자.”오전 햇살이 부엌 바닥에 길게 스며들었다.유리는 바닥에 앉아 노트를 펼쳤고, 그 위엔 가지런한 글씨로 목록이 적혀 있었다.공동 식탁 작은 조리대 하나 더 조명은 따뜻한 톤아침 빛 잘 드는 창가 이현은 그 목록을 보며 말했다.“이건 마치 ‘우리 식탁의 기초 설계도’ 같네요.”“맞아요. 그 식탁 위에 국 그릇만 놓는 게 아니라, 우리 하루도 올릴 거니까요.”이삿짐을 싸기 전, 두 사람은 각자의 공간을 천천히 정리하기 시작했다.유리는 조리도구를 하나씩 꺼내며 손때 묻은 냄비를 닦았고,이현은 책장 속 오래된 책들 사이에서 유리와 처음 나눈 쪽지를 발견했다.“이 국은, 오늘 당신을 위해 끓였어요.”그 짧은 문장은 여전히 오래된 감정을 조심히 담고 있었다.“이건… 가져가도 되죠?”이현이 묻자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당신의 첫 국이었으니까요. 우리 둘만의 시작.”오후엔 함께 사용할 새 냄비와 식탁보를 보러 나섰다.작은 상점 안, 유리는 흰 바탕에 은은한 자주색 줄이 그어진 식탁보를 들었다.“이거 어때요? 너무 화려하지 않고, 조금 부드럽고.”“당신 같아요.”이현의 대답에 유리는 잠시 식탁보를 내려놓았다.“나… 가끔 당신 말투 때문에 심장이 두근거려요.”“그럼 자주 말해야겠네요. 매일 아침 심장 데우는 걸로.”해질 무렵, 두 사람은 새 집 계약서를 받아들고 천천히 집을 둘러보았다.작은 거실, 하얀 벽, 그리고 남쪽으로 향한 주방 창.그 창 아래, 유리는 말했다.“여기 조리대 놓고, 이 옆엔 작은 식탁 놓을 수 있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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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사랑이 부드러워지는 시간

함께 사는 지 이틀째 아침.유리는 언제나처럼 일찍 눈을 떴다.주방 창을 열자 아직 이른 빛이 부엌 타일 위로 조용히 내려앉았다.그 빛 속에서 유리는 커피를 내리고, 조용히 작은 냄비에 물을 올렸다.그런데 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벌써 일어났어요?”이현은 부스스한 머리로, 아직 덜 깨어난 눈으로 말했다.유리는 커피잔을 내밀며 미소 지었다.“이 집에선… 내가 먼저 일어나게 되네요.”“이 집엔 당신 리듬이 먼저 차 있더라고요.”식탁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현은 습관처럼 신문 앱을 켜고 화면을 훑었고, 유리는 조용히 아침 국을 저었다.그 작은 움직임 속에서 아주 사소한 어긋남이 일었다.“이현 씨, 밥 먹을 땐 휴대폰 보지 마요.”이현은 순간 고개를 들었다.“아… 미안, 습관처럼 그만…”유리는 말없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침묵이 잠시 지나갔다.“나… 이상하게 아침 식사만큼은 좀… 조용히 같이 먹고 싶어요. 말 없어도, 그저 나란히 같이.”이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줄 몰랐어요. 말해줘서 고마워요.”점심 무렵, 이현은 식탁보를 세탁기에서 꺼내 널면서 살짝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이거…드라이 전용이었네요?”유리는 놀란 눈으로 달려왔다.식탁보 한 귀퉁이가 살짝 줄어들어 있었다.“괜찮아요. 어차피 삶아서 쓸 거였어요.”“근데 당신 이거 고르느라 되게 오래 걸렸잖아요.”“그렇죠. 근데, 같이 사는 사람 실수쯤은 미역 불리듯 잊혀져야죠.”그 말에 이현은 가만히 유리를 바라봤다.“당신 진짜 요리로만 말하는 사람 같아요.”“나는 그냥… 음식이랑 사랑하는 방식이 비슷한가 봐요. 끓일 땐 뜨겁고, 식으면 다시 데우고.”해질 무렵, 이현은 유리를 작은 동네 마트로 데리고 갔다.“오늘 저녁은 내가 요리할게요.”“불안하네요.”“그래서 반찬은 사올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밥 짓기와 국 데우기까지.”그 말에 유리는 웃음을 터뜨렸다.저녁. 작은 식탁 위엔 마트표 반찬 두세 가지,따끈한 쌀밥, 그리고 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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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 당신을 위해 준비한 하루

유리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눈을 떴다.햇살은 창틀 위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와 주방 바닥을 조용히 비추고 있었다.이현은 여전히 자고 있었고, 그의 숨소리는 잔잔한 물결처럼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유리는 조용히 발끝으로 걸음을 옮겼다.바스락 소리 하나 나지 않게. 오늘 하루는 그를 위한 날이었다.주방에 들어선 그녀는 냉장고 안을 천천히 훑었다.당근, 달걀, 두부, 말린 표고, 다시마.모두 전날 밤 미리 손질해 둔 재료들이었다.“오늘은 밖에서 먹을 거니까, 국은 식어도 괜찮은 맛으로.”유리는 자신에게 속삭이듯 말했다.작은 냄비에 다시마 육수를 우려내고, 달걀은 포슬포슬하게 삶았다.두부는 정갈히 썰어 조금만 간을 맞춰 볶았다.그리고 보온병에 넣을 맑은 표고 다시국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끓이기 시작했다.“당신이 내게 국을 끓여준 그날, 내 몸은 아팠지만 마음은 참 따뜻했어요.그래서 오늘, 그 감사를 닮은 하루를 주고 싶어요.”이현이 눈을 떴을 땐 식탁 위에 접힌 쪽지가 놓여 있었다.“오늘 하루, 당신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돼요.나는 오늘 당신을 위한 식사를 준비한 사람이니까요.”그 아래엔 작은 하트 대신 스푼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이현은 웃음을 지었다.“이건 사랑의 표시 중에서도 제일 맛있는 형태네요.”정오 무렵, 유리는 작은 도시락 가방을 들고 이현의 손을 이끌었다.도심에서 멀지 않은 공원, 벚나무가 바람에 잎을 흩날리는 작은 언덕. 그 아래 돗자리를 펴고 앉았다.하늘은 맑았고,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점처럼 내려왔다.유리는 도시락을 열었다.밥 위에 얹은 조그만 달걀장조림, 간장에 살짝 졸인 표고, 그리고 볶은 두부와 당근무침.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온병에 담긴 국을 조심스레 따라냈다.이현은 그걸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이게… 지금껏 받아본 도시락 중에 가장 조용한 감정이네요.”“조용한 감정?”“응. 이건 ‘사랑해요’보다 더 조용한 말이에요. ‘오늘도 같이 있어줘서 고마워요’ 같은 말.”유리는 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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