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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 국 한 그릇으로 살아졌습니다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8 14:17:27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촉촉한 빗방울이 천천히 유리창을 타고 흘렀고,

식당 안 조명은 그 흐림을 받아 조금 더 따뜻하게 번져나갔다.

유리는 된장국을 약하게 불에 올려두고, 오늘 남은 반찬을 천천히 정리하고 있었다.

조용한 날이었다.

그 조용함이 좋았고, 비가 식당 안을 조금 더 좁혀주는 기분이 들어 더욱 좋았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우산을 접은 젊은 여성이 살짝 젖은 바지를 털며 들어왔다.

주위를 둘러보는 그 시선엔 약간의 망설임과 조용한 기대가 섞여 있었다.

“혼밥 괜찮을까요?”

그녀가 물었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드시는 분이 더 많아요. 자연스럽게 앉으시면 됩니다.”

여성은 창가에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앉았다.

밖의 빗소리가 가장 잘 들리는 자리.

“오늘 국은 된장이에요. 표고랑 감자, 들깨 조금 넣었고요.”

“국 많이 주세요. 뜨겁게요.”

그녀는 주문을 하며 작게 웃었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주방 안으로 돌아왔다.

국을 데우며 문득 그 손님의 표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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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264. 134화.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날

    가을이 조금 더 깊어진 어느 평일 오후. 식당 안은 유난히 조용했다.창밖에선 키 작은 은행나무가 바람에 잎을 떨구고 있었고,유리는 된장국을 약한 불에 데우며 천천히 주걱을 돌리고 있었다.청년은 창가에 앉아 장부 정리를 하던 중, 조용히 식당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그 자리에 들어선 사람은 여든이 넘어 보이는 노인이었다.작고 얇은 몸, 보풀 일어난 베이지색 스웨터,걸음은 아주 느렸지만 동작은 또렷했다.청년은 얼른 일어나 자리를 안내했다.“여기 따뜻한 자리 앉으세요.”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냥 국 한 그릇만 주시오. 밥은 반만.”청년은 주방 쪽으로 돌아오며 그 노인의 뒷모습을 유심히 보았다.무언가… 말을 아끼는 사람. 하지만 마음 안에 오래된 이야기가 고인 사람.유리는 국을 조심스럽게 덜었다.묵은지 조금, 감자채 약간, 된장은 맑게 풀어 자극적이지 않게 끓였다.그 국이 나가고, 노인은 천천히 숟가락을 들었다.식당 안은 여전히 조용했고, 청년은 계산대 근처에서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노인은 국을 마신 후 물 한 모금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그러다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이런 국을 내 아내가 참 좋아했지…”그 목소리는 누구를 향한 것도,누가 듣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지만, 청년의 마음을 멈춰 세우기에 충분했다.노인은 조용히 계산을 마치고 식당을 나섰다.그가 완전히 골목 끝으로 사라지기 전까지, 청년은 문가에 서서 그 등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주방으로 돌아와 유리에게 말했다.“방금 다녀간 노인분, 아내 얘기하셨어요. 국이 좋아서, 아내가 좋아했다면서요.”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가끔 그런 분들이 오세요. 국물에 기억을 풀러 오는 분들.”청년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내일… 그분 오실 것 같아요. 그냥, 느낌이 그래요. 내가 국 한 그릇 미리 끓여도 될까요?”유리는 그 말을 듣고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오늘 그분 등을 보고 당신도 국물을 배웠나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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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아침, 식당 안엔 기온보다 조금 이른 가을빛이 내려앉았다.주방 창을 열자 바람이 가볍게 스며들었고, 들깨를 볶는 냄새가 바닥을 타고 퍼졌다.유리는 조리대 앞에 섰고, 청년은 냄비를 꺼내며 가볍게 인사했다.“오늘은… 어제 남은 묵은지로 국 끓이시는 거죠?”“응. 묵은 건 묵은 대로 써야 맛이 깊어요. 새 김치로는 안 나오는 국물.”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런데… 제가 한번 다르게 끓여봐도 괜찮을까요?”유리는 손을 멈췄다.“다르게?”“묵은지를 들기름에 볶지 않고, 그대로 육수에 넣어서요. 조금 더 맑게.”유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건 자신이 하지 않던 방식이었다.그녀는 국물을 걸러내듯늘 기름의 깊이부터 먼저 입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제안은 어딘가 조심스러우면서도 진심이었다.“…그래요. 오늘 저녁 국은 그 방식으로 해봐요.”점심시간이 시작되고, 손님들로 식당이 조금씩 차기 시작했다.유리는 평소대로 반찬을 내고, 청년은 물을 채우고 그릇을 닦았다.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온 중년 부부 손님이 메뉴를 고르지 않은 채 자리에 앉더니 무언가 기다리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청년은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다.“안녕하세요. 혹시 드시고 싶은 메뉴 있으신가요?”그들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우린 사장님이 권하는 걸로 먹을게요.”청년은 그 말을 듣고 바로 주방으로 돌아와 유리에게 말했다.“두 분 묵은지 국으로 나가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오늘처럼 조금은 맑게.”유리는 고개를 저었다.“저 손님들은 기억해요. 된장국 좋아하시는 분들이에요. 묵은지 국, 낯설 거예요.”청년은 당황한 듯 물었다.“근데… 권하신다기에.”“그건 내가 어떤 음식을 내올지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에요.”그 말은 조용하지만 단단했다.청년은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식사는 무리 없이 흘러갔고, 그 중년 부부는 된장국을 바닥까지 비웠다.계산을 마치며 그들은 말했다.“그 맛, 오늘도 그대로네요.”그 말이 청년의 귓가를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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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주는 하루쯤 식당 문 닫고 떠나요.”이현이 그 말을 꺼낸 건 비가 그친 다음 날 아침이었다.유리는 대답 대신 한참을 그를 바라보았다.“식당 문을 닫는 날도 밥은 지어야 하는데…”“오늘은, 밥 말고 걷는 하루요. 당신 국물 말고, 기차 타고 마시는 바람.”유리는 살짝 망설였지만 고개를 끄덕였다.그 고개 끄덕임 하나로 그날의 모든 풍경이 준비되었다.작은 간이역. 서울 외곽의 오래된 기차역은 기억보다도 더 조용했다.전광판이 없고, 표 자동 발권기도 없는 이 역에서 그들은 두 손에 커피 한 잔씩 들고 작은 나무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이런 데, 이제는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풍경이네요.”유리가 말했다.“그러니까 여길 데려오고 싶었어요. 당신이 만든 음식처럼, 빠르지 않은 곳.”기차가 들어오기까지 20분의 여유가 있었다.그 시간 동안 둘은 별다른 말 없이 잔을 들었다가 내려놓고, 햇빛을 올려다봤다.그 여백이 참 좋았다.기차는 느릿하게 움직였고, 차창 밖 풍경은 논과 강, 마을, 그리고 이따금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이었다.이현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당신과 처음 걸었던 그 파리 골목도, 이렇게 느렸죠.”“그땐, 내가 처음으로 누군가의 속도에 맞춰 걷는다는 걸 배웠어요.”“지금은 어때요?”“지금은… 서로의 속도를 기억해서 조금씩 서로를 기다릴 줄 아는 것 같아요.”작은 역에서 내려 그들은 근처 장터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이현은 손에 들고 있던 백팩에서 종이봉투 하나를 꺼냈다.“당신 가게 앞 그 화분, 요즘 시들하던데요. 새 화분 사줄래요?”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장터 한쪽, 화분을 파는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작은 로즈마리 화분 하나를 고르고, 그 옆의 라벤더도 하나 더 고른 뒤 유리는 조용히 말했다.“이거… 국에 넣진 않겠지만, 주방 옆에 놓고 싶어요. 식당 공기 속에 향기가 섞이게.”“당신은 항상 요리하는 것 같아요. 공기조차.”장터를 다 돌아본 후근처 작은 계곡으로 자리를 옮겼다.물이 흐르는 소리, 바람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261. 국 한 그릇으로 살아졌습니다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촉촉한 빗방울이 천천히 유리창을 타고 흘렀고,식당 안 조명은 그 흐림을 받아 조금 더 따뜻하게 번져나갔다.유리는 된장국을 약하게 불에 올려두고, 오늘 남은 반찬을 천천히 정리하고 있었다.조용한 날이었다.그 조용함이 좋았고, 비가 식당 안을 조금 더 좁혀주는 기분이 들어 더욱 좋았다.문이 조용히 열렸다.우산을 접은 젊은 여성이 살짝 젖은 바지를 털며 들어왔다.주위를 둘러보는 그 시선엔 약간의 망설임과 조용한 기대가 섞여 있었다.“혼밥 괜찮을까요?”그녀가 물었다.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혼자 드시는 분이 더 많아요. 자연스럽게 앉으시면 됩니다.”여성은 창가에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앉았다.밖의 빗소리가 가장 잘 들리는 자리.“오늘 국은 된장이에요. 표고랑 감자, 들깨 조금 넣었고요.”“국 많이 주세요. 뜨겁게요.”그녀는 주문을 하며 작게 웃었다.유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주방 안으로 돌아왔다.국을 데우며 문득 그 손님의 표정을 떠올렸다.짧은 말 속에 무엇이 묻혀 있었던 것 같은, 그런 표정.식사가 나가고 여성은 아무 말 없이 국부터 떠넣었다.한 입, 두 입.그 움직임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고, 딱 오늘처럼비와 함께였다.잠시 후,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숟가락을 잠깐 내려놓았다.그리고 작게, 숨을 내쉬었다.식당 안은 조용했고, 유리는 일부러 말을 걸지 않았다.그녀는 언제나 손님이 말을 먼저 꺼낼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이었다.그리고 오늘은 그 기다림이 오래 가지 않았다.“사실… 오늘 이 근처 장례식장에 다녀왔어요.”그녀가 갑자기 말했다.유리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마음이… 그냥 뭔가 따뜻한 국물 같은 게 필요했어요. 누군가 살아 있는 온도 같은.”그녀의 눈은 붉었지만 울지 않고 있었다.“이 국이, 지금 그 역할을 해줬어요.”유리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작게 물었다.“혹시… 국 더 드릴까요?”“아뇨, 괜찮아요. 배는 부른데, 마음이 차오르네요.”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물컵을 가볍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260. 당신 없이 익히는 하루

    새 식당의 첫날 아침.유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주방에 들어섰다.아직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은 조리대,새로 놓인 찬장, 약간 덜 익은 나무 냄새.모든 것이 조금은 낯설고, 그 낯섦 안에서 그녀는 천천히 손끝을 움직였다.오늘 끓일 국은, 조심스럽게 손님에게 건넬 하루의 인사였다.첫 손님은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찾아왔다.검은 코트를 입은 노부인. 문을 열고 들어와 자리도 묻지 않고 조용히 한 자리에 앉았다.유리는 앞치마를 매고 다가갔다.“안녕하세요. 오늘 첫 국물, 묵은지와 두부 넣고 끓인 국인데 괜찮으실까요?”노부인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밥은… 한 숟갈만 주세요. 국물은 조금 넉넉하게요.”그 요청은 묘하게 마음에 남았다.한 그릇의 국물, 그리고 한 숟갈의 밥.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사람의 마음.음식을 내놓고 유리는 주방 안쪽에서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봤다.노부인은 국을 입에 대기 전, 손을 가볍게 모으고 눈을 감았다.그리고 아주 천천히, 국을 한 숟갈 떠넣었다.그 한 동작이 유리의 심장 어딘가를 눌렀다.무언가가… 묵직하게 지나갔다.점심시간 무렵, 이현이 식당에 도착했다.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 그의 첫마디는 인사보다 짧았다.“국물 냄새가… 좋아요.”유리는 웃었다.“이 공간이, 내가 끓이는 국물 온도를 잘 받아주나 봐요.”“당신이 공간을 먼저 받아줬잖아요. 그러니까 그도 당신을 안아주는 거죠.”그날 오후,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 들어왔다.이전 식당을 기억하는 단골들,소문을 듣고 찾아온 조용한 손님들.누군가는 처음이었고, 누군가는 예전 자리를 떠올리며 앉았다.“예전엔 창가 자리에 앉았었는데, 여기선… 햇빛이 더 고요하게 들어오네요.”“이 벽에는 아무 것도 없어서, 생각이 오래 머물러요.”“국물 맛이… 변했는데요. 조금 더 부드러워졌어요.”그 말에 유리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저도… 조금 부드러워졌거든요.”장사가 끝난 밤. 유리는 주방을 정리하며 조용히 물었다.“이현 씨.”“응.”“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259. 지키고 싶은 자리

    그날 아침, 유리는 낯선 봉투 하나를 식당 문 틈에서 발견했다.하얀 종이봉투, 가늘게 접힌 가장자리, 그 위에 적힌 짧은 문구.‘건물 계약 만료 안내’그 문장은 생각보다 조용하게, 그러나 깊숙이 들어왔다.계약 종료까지 남은 시간은 세 달.건물주는 리모델링을 이유로 재계약 없이 정리를 원한다는 내용이었다.유리는 종이를 조용히 접었다.식당 안은 여전히 평온했고, 주방엔 된장국 냄새가 은근히 배어 있었다.그러나 그녀의 심장 아래, 무언가 아주 작게 울리고 있었다.점심 장사를 마친 후 이현이 식당으로 왔다.유리는 말없이 봉투를 내밀었다.이현은 종이를 다 읽은 뒤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말이라도 먼저 들었으면…”“그럴 틈도 없이 그냥 도착했어요. 예고도 없이.”“어떻게 할까요?”유리는 고개를 숙였다.“아직 모르겠어요. 이 자리가… 그냥 장사만 하는 공간이 아니라서요.”그녀의 말은 묵직했다.식탁 하나하나, 숟가락, 나무 의자, 벽에 걸린 작은 액자까지. 모든 것이 그녀의 손끝에서, 그리고 그녀의 ‘하루들’ 위에 만들어진 것들이었다.그날 저녁, 이현은 유리를 근처 조용한 찻집으로 데려갔다.그곳엔 손님이 거의 없었고, 잔잔한 피아노 연주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다른 자리, 생각해본 적 있어요?”“없어요. 내가 이 공간과 천천히 호흡을 맞췄거든요.”“만약, 그 호흡을 옮겨갈 수 있다면?”유리는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그건… 숨을 멈췄다가 다시 쉬는 거예요. 쉽지 않죠.”이현은 그녀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내가 같이 있어요. 호흡이 멎을 것 같으면, 내가 먼저 들이쉴게요.”그 말은 어떤 위로보다 깊게 가라앉았다.며칠 뒤, 유리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주변 건물 매물들을 보기 시작했고, 장부를 다시 정리했으며, 주방 설비를 하나하나 사진으로 남겼다.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옮겨가기 위한 준비였다.그걸 보고 이현은 말없이 도와주었다.사진을 찍고, 계약서를 대신 검토하고, 하나씩 박스를 정리했다.“처음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4. 뒤돌아선 발끝

    식당 안은 평소보다 훨씬 시끄러웠다.단골손님들은 슬쩍 눈치를 주고받으며 수군거렸고,어떤 아줌마는 “저기 사장님 남친이세요?”라며 장난을 쳤다.유리는 “아니라고요!!”라고 소리를 지르며 국자를 들었다가,아줌마들이 깔깔 웃는 소리에 입술을 꾹 다물고 물만 내렸다.“유리 씨 인기 많네. 장사 잘하겠다.”이현이 팔짱을 풀며 한마디를 툭 던졌다.유리는 국자로 찌개를 저으며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아 진짜… 저 인간은 왜 저러지…”저녁 무렵, 문득 식당 안에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문틈 사이로 들어선 한 여자의 실루엣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3. 선 긋는 건 너였는데

    아침 공기가 아직 서늘한데도 유리의 이마엔 땀방울이 맺혔다.주방에서 채소 써는 소리가 경쾌하게 퍼져나가지만, 그녀의 마음은 어쩐지 분주하고 어지러웠다.칼끝으로 리듬을 타는 손놀림은 점점 빨라졌고, 심장이 그것보다 먼저 뛰고 있다는 걸 그녀는 누구보다 잘 느끼고 있었다.‘설마 오늘은 안 오겠지. 아니, 저 진상님도 적당히 해야지… 설마 또?’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골목 바깥에서 웅성거림이 몰려들었다.평소보다 훨씬 큰 소음에 유리는 머리를 홱 돌려 주방 창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2. 설명 없는 떨림

    새벽 공기를 뚫고 부엌 창문 틈으로 겨우 스며드는 첫 햇살에, 유리는 눈을 찡그리며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손끝에 아직 따뜻함이 채 가시지 않은 빗자루의 감촉이 남아 있었고, 어젯밤 그 황당한 남자의 얼굴이 자꾸 머릿속을 떠올랐다.‘미친놈인가…’스스로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렸지만, 그때 느꼈던 묘한 울렁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단순히 분노에서였을까? 아니면, 낯선 사람의 강렬한 눈빛이, 생각보다 오래 가슴 한가운데 남아 있었던 걸까.유리는 스스로를 향해 얼굴을 찌푸리며 부엌으로 향했다.익숙한 동작으로 칼을 쥐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 미친놈인가?

    S그룹 본사 최상층 회장실, 그 문 앞 복도에는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셰프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흰 셰프복에 단정한 모자, 은빛이 번쩍이는 조리도구, 완벽히 플레이팅된 요리가 놓인 쟁반을 양손으로 받쳐 든 모습은 그 자체로 일종의 퍼레이드 같았다.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초조함이 엉켜 있었고, 뺨에는 굳은 미소가 어색하게 걸려 있었다.복도를 채운 공기는 마치 숨조차 삼키기 두려운 듯 묵직했고,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소리,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 위를 긁는 미묘한 소리와 낮고 단호한 남자의 목소리는 그 공기를 더욱 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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